20230409_주일예배_막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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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이야기

본문: 마가복음 16: 1-13
Mark 16:1–13 NKRV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을 보면, 이름 없는 여인들의 극적인 부활체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라고 했으니, 분명히 이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통념상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이들의 이름은 쉽게 기억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아마도 그 이름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여자들의 이름인 '순이'니 '막내'니 하는 정도의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여인들은 마르다의 자매 마리아와, 요한복음이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에 앞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해석하여 전하고 있는 것을 빼면,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실제 역할이 별 볼 일 없었다거나, 미미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르다의 자매 마리아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 주변의 여인들의 역할은 사실 처음부터 밥이나 해주고 '시중'이나 드는 부차적인 역할로 한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반의 통념상 남성에게나 어울리는 일을 여인이 맡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예수님 주변에서는 성적 분업과 불평등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서에서는 한결같이 여인들의 역할이 표면상 두드러지게 나타나질 않습니다. 사실상 제자들/사도들과 다를 바 없는 역할을 감당한 여인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사도의 반열로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그 행적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을 부타적 존재로 대우했다기보다는, 나중의 교회의 전승이 일반의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인들을 부차적 존재로 간주한 사정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늘 예수님의 주변에 머물며 중요한 일을 감당한 것으로 보인 제자들과 비교할 때 부차적인 역할을 감당한 이들처럼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 마가복음서를 비롯해 복음서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실은 우리를 새삼스럽게 놀라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하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현장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여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을 때 그 잘 났던 제자들은 모두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을 통해 볼 것 같으면, 아마도 예수님께서 게쎄마네 동산에서 저녁내 피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동안 꾸버꾸벅 졸기만 하다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도망쳐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서워 어떤 집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요한 20:19). 그러나 이 여인들은 예수께서 십자에 처형당하신 그 장면을 지켜보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마가복음서는 이 여인들 말고도 그 곳에는 다른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전합니다.(15:41)바로 이 여인들이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기록자는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 사실을 극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셨던 안식일이 지나자 아침 일찍 무덤을 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몸에 발라드릴 향료를 준비해서 가면서 걱정을 했습니다. 그 무거운 바윗돌을 어떻게 치울 것인가, 걱정했습니다. 아마도 여인들이었기에 그 걱정은 더욱 컸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무덤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뜻밖의 현장을 목격합니다. 무덤문이 열리고 마땅히 누워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천사가 나타나 말을 전합니다: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여라."라고 말하였고 이 여인들은 무서워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이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고 오늘 말씀은 전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어째서 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가야 했을까?,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국사범으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무덤을 찾아갔을까?, 또 향료는 뭣하러 가지고 갔을까?' 하는 것이 우선 의문입니다. 한마디로 겁없는 행동이요,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비칩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간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놀랄 까닭이 없지요. 우리의 의문은 계속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일까?' 또 다른 의문을 우리는 제기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의 의문을 자제하고,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사실만을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죽임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셨다는 사실입니다. 열려진 무덤문, 사라진 시신은 어떠한 죽음의 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부활한 예수가 허깨비와 같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갈릴리의 이름없는 민중들과 더불어 살았던 바로 그 예수라는 것을 말함과 아울러 부활한 예수는 또다시 그 힘없는 갈릴리 민중들과 더불어 함께 하시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평소 살아 행동하시던 바로 그곳이 부활의 현장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지금 너희도 / 오늘 우리도 그 행동의 현장에서 비로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이름없는 여인들이 이 엄청난 사건의 첫 목격자요 증언자가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까닭은 한 마디로 겂없고 무모한 행동에 있습니다. 모두가 비켜서려고 했고 도망치려 했던 그 현장을 끝끝내 지켜보고 서 있었던 겂없음이요 무모함입니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무덤에까지 찾아가 평소에 사랑을 베푸시던 예수님의 그 모습 그대로를 지켜보려고 했던 열정에서 비롯된 무모함, 어리석음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들이 향료를 가지고 간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드물게 왕의 매장에 향료를 쓴 경우(역하 16:14)를 제외하고는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경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알렉산더 왕의 몸에 기름을 발랐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여인들이 향료를 가지고 간 것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보존하고픈 심정에서였을 것입니다. 미리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발랐던 그 정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들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은, 계산하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우리 인간들 / 아니 항상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딴 생각을 품고 높은 자리에나 앉을 궁리와 계산을 하였던 제자들의 생각에서 볼 때 ' 무모함'이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한순간 한순간,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말없이 지켜보며 안타까워했던 여인들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현장까지 좇아가 예수님을 사모하고 섬기는 헌신과 열정의 표현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바치는 전인격적인 결단과 헌신을 말합니다. 바로 그 헌신과 결단이 부활을 그 누구보다 앞서서 가장 극적으로 체험하고 증언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한 까닭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성경말씀은 어떤 것으로 보나 여인들의 모습을 귀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자기를 내어 주는 헌신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결국 문제는, 우리가 진실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할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부활을 체험하고, 그래서 이 세상 곳곳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증언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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