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이 남과 다르고
Notes
Transcript
[서론]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럼 믿는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에 있어 굉장히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를 신뢰한다는 것인가요?
물론 우리에게는 둘다를 포함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백성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첫째,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언제까지 이 백성이 나를 멸시할 것이라더냐? 내가 이 백성 가운데서 보인 온갖 표적들이 있는데,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겠다더냐?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앞에 나온 사건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앞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별로 뽑은 12명의 지도자들이 40일동안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후 그들은 모세와 아론,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합니다.
문제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모두 부정적으로 보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맞지만, 거기 민족들은 거인처럼 크고 강해서 그들에게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새도 너무 견고해서 그들과 붙으면 우리가 다 죽고 말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모세를 죽이고 다른 지도자를 세워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 일촉즉발의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내용이 바로 11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멸시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했나요?
아니면 하나님께 욕을 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땅을 살펴보고 너무 위험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싸워서 이길 확률보다 질 확률이 더 높으니 가지 않겠다는 매우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정탐꾼이었다면 우리는 갈렙과 여호수아였을까요? 아니면 10명의 정탐꾼이었을까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을 멸시한 것인가요?
그 이유가 11절 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멸시받으시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없음, 즉 불신앙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은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많은 기적들이 가리키는 바는 하나님이 그들을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홍해가 갈리지게 하시고, 먹을 물도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도 먹도록 하늘에서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꾸준히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주겠다고 하셨는데도 그들은 그 땅의 사는 민족들의 겉모습만 보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나님보다 그 가나안 민족들이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때문에 지도자 모세를 죽이고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그들이 하도 고통스러워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구원해주신게 아닌가요?
그런데 이제 와서 죽을까봐 두려워 다시 돌아가 이집트 왕 바로의 노예를 하겠다니….
하나님의 구원을 원점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니 그것만큼 하나님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12절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전염병으로 쳐서 한방에 몰살시키고 모세만 살려서 모세의 자손가지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전쟁을 잘하는 강한 민족이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전쟁에서 이길수 없는 가장 연약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속에 하나님의 강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면 존재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몇번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갖 표적들을 보여주셨는데도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2절에 보시면 10번이나 불순종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10번이란 완전수로서 정말 지속적으로 계속 그랬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마느냐를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말로 신뢰한다고 고백해봤자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행동을 통해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앞전에 봤던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순종의 열매를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악세서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반드시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천이 천국을 향해 가는 도중 두 사람을 만납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겁쟁이고, 그 옆에 있는 친구의 이름은 불신입니다.
흥미롭게도 겁쟁이 친구가 불신이란 것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들도 크리스천처럼 시온성, 즉 천국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만난 사자 두마리가 두려워 다시 돌아가던 길에 크리스천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도 크리스천은 자신이 가던 길을 계속갑니다.
가다보니 크리스천도 겁쟁이와 불신이 만난 사자 두마리를 맞닥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사자 두 마리는 사슬에 매여있어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겁쟁이와 불신은 지레 겁먹고 도망간 셈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입니까 아닙니까?
그냥 한두번을 불순종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하는 습관적 나태함과 마음의 고집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일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려 애를 쓰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 첫번째 구호인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교회라는 것을 실천하고 계십니까?
계속 핑계만대고, 영적 나태함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내가 단지 연약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마귀에게 속아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하나님을 멸시하는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우리는 지금 이순간 돌이켜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신뢰한다는 것일까요?
둘째, 믿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갈 능력이 없어서, 그들을 광야에서 죽였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대로,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분명 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없애고, 모세를 통해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자자손손 자신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모세는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바꿔버립니다.
도대체 모세가 어떻게 기도했길래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돌이키셨을까요?
모세는 믿음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지 말라고 간절히 구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 근거로 삼은 것은 이스라엘의 처지나 자신의 처지가 아닙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입장에서 기도합니다.
그가 근거로 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부분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온 세상이 다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다 죽이시면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며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할 능력이 없어서 광야에서 죽였다고 소문이 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성품을 언급합니다.
18절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넘치셔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이 고백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여 죄를 지었을 때에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설득했습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하여 백성들을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알고 있었기에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깊은 사귐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덧붙인 말이 있습니다.
18절 후반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벌하지 않은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너무나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그렇다고 죄를 그냥 넘어가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아에 백성들의 죄를 모른채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형벌을 감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이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얻어내는 공식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성품을 놓고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뤄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저 이 회사면접에서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저 떨어지면 저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기도하면 무조건 회사면접에 합격시켜주시는 것일까요?
과연 모세의 기도는 이런 요술램프의 주문일까요?
여기서 모세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기도한 게 아닙니다.
모세는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신명기 9장 25절에 보십시오.
거기보면 하나님의 응답이 40일후에 주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만큼 오랫동안 끈질기게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신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만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볼수 있는 영적인 시야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믿고 보이는 대로 판단하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일리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도 제대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매번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니까 이번에도 하나님을 쉽게 안 것입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호구인줄 안다는 말과 같습니다.
수없이 용서해주시니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지만 징계를 완전히 거두지는 않으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지는 않으시지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지 않으신 것인가요?
분명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열매는 자신이 책임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죄를 저지르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그 죄의 열매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을 받지 못한 것이 바로 죄의 열매입니다.
죄가 아니었다면 받았을텐데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죄때문에 놓치게 된 축복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러나 갈렙을 보십시오.
24절입니다.
그러나 나의 종 갈렙은 그 마음이 남과 다르고, 또 전적으로 나를 따랐으므로 나는 그가 다녀온 그 땅으로 그를 데리고 가겠고, 그의 자손은 그 땅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다.
갈렙은 모세와 같이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문제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등장하지 않고 갈렙만 등장합니다.
갈렙이 제일 처음 앞장서서 믿음의 보고를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원래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함께 나온 잡족에 속한 에돔족속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유다지파에 동화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조건이나 배경을 보시지 않고 믿음을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눈 앞에 있는 것밖에 못보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현실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과 소망이 의심의 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곳 주인 이름은 절망 거인입니다.
그 절망거인 아내의 이름은 자포자기입니다.
그들은 크리스천과 소망을 감옥에 가둬놓고선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들이 자포자기해서 자살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크리스천은 자기 품에 어떤 열쇠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열쇠 이름이 바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라는 키로 절망거인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보는 눈이 10명의 정탐꾼의 눈입니까? 아니면 갈렙과 여호수아의 눈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삶이 퍽퍽하고, 어려워도 그 너머의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결론]
한 예화를 소개하며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려 합니다.
2009년 US에어웨이즈 1549편이 155명의 승객을 태우고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떠나 노스케롤라이나 샬롯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이륙한지 2분만에 갑자기 날아든 새들과 부딪혀 엔진 2개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엔진 1개만 남아있어도 어느정도는 비행을 할수 있는데 2개다 문제가 생기면 추락할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비행기는 바람으로 움직이는 글라이더처럼 되어버렸고, 곧 추락하는 것말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비행기 기장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08초, 겨우 4분이 채 안되는 시간입니다.
잘못하여 시내에 떨어지면 수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출발한 공항으로 돌아갈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40여년 비행경력을 믿고 근처 허드슨강에 착륙할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 결과 비행기는 허드슨강에 착륙하게 되었고, 놀랍게도 155명 모두 살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역시 인생이라는 이름의 비행기를 탄 사람들과 같습니다.
비행기가 흔들릴때 우리가 할수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좌석벨트를 꽉 메고, 산소호흡기를 준비하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비행기를 조정하는 기장입니다.
때론 우리를 둘러싼 삶의 환경과 조건이 너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삶도 흔들리고, 삶의 동력을 잃어버리고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계획했던 일도 틀어지고, 미래가 막막해보일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비행기가 아무리 심하게 흔들려도 결국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면 됩니다.
그 비행기를 조정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을 바라봅시다.
그 분을 믿고 의지합시다.
요한일서 5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갈렙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곳을 유산으로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