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5 양청] 소요리문답 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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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P.5
4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답. 하나님은 존재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과 공의와 선함과 진실에 있어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영이십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고 묻는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이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오늘 4문은 굉장히 압축된 한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매우 풍성하다. 4문 자체를 공부하기 전에 소요리문답 전체 구조 속에서 이 질문이 왜 필요한지를 봐야 한다. 지난 시간에 살폈는데, 성경의 주된 내용 2가지가 무엇이었나? (교재p.4)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야 할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 중 첫째로,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4문부터 38문까지 나오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에 대해서 4-6문까지 오늘과 다음 주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관하여 믿어야 할 내용에 대해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고, 그 중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가 오늘 주제이다.
가끔 보면 엉뚱한 질문들을 하는 경우들을 본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을 줄 알면서 왜 만드셨나요?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신건가요? 안 주신 건가요? 이런 내용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면 그냥 구원하시면 되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나요? 왜 이렇게 예수 믿는게 복잡하게 만드셔서 믿기 어렵게 하셨나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도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사람만인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이라 하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왜 이렇게 믿기 힘든 복잡한 복음의 내용의 내용들과 과정이 있냐는 것이다. 질문이 너무나도 많다. 이 자리의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질문을 마음 속에 품고계신 분들이 계실런지 모르겠다.
왜 이런 질문이 나올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성경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내 입맛에 맞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상상해왔던 것일 뿐. 내가 가진 이해의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재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바르게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신학이라는 것의 전제는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이다’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신학’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것' 라는 뜻이다. 알 수 없는 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도 비슷하다. 나랑 어릴적부터 수십년 봐왔던 친구라고 하더라도 때로는 그 속내를 모를 것 같은 때가 있다.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람 마음을 솔직히 알 수 없다. 하물며 사람조차도 이러하거늘, 우리가 하나님을 어찌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4문의 설명을 보라.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우리는 유한하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우리는 죽는다. 하나님은 불변하신다. 우리는 너무나도 변화무쌍하다. 어제 저녁 기분이 매우 날아갈 것 같다가도 오늘은 기분이 매우 나쁘다. 우리는 그렇다.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나.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 유한한 우리가 어찌 무한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과 이해 속에 담아낼 수 있겠는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든지, 혹은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성경의 교리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들에게 당신을 나타내셔야만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미약한 역량에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높이 계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무한히 낮추셔서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된다" 이걸 가르켜 신학적인 용어로 “적응 계시”라고 한다. 우리가 유치부 학생들에게 말할 때를 생각해보라. “우쭈쭈 그랬구나?” 아이들에게 쓰는 용어들을 우리는 일상의 대화에서 고스란히 사용하지는 않는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이처럼 말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께서 교통하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알아듣질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어를 주시고, 언어인지능력, 언어로 추상적인 것들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니까 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실 때 우리식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게 바로 성경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우리가 잘 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우리 수준으로 오셔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후회하신다, 돌이키셨다 이런 표현들이 우리처럼 이런 개념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지 않는 상태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지렁이는 뼈가 없다. 손톱이 있겠나, 발톱이 있겠나. 없다. 그런데 이런 지렁이가 메니큐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 메니큐어는 고사하고 지렁이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손톱도 뼈도 없는 지렁이가 메니큐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지렁이보다 낫다고 여긴다. 천만에. 눈에 보이는 1차원 적인 것들만 경험하며 살아가는 유한한 우리 본성상,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다. 말씀을 주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작정과 실행을 오해하지 않게 된다.
4문의 대답은, “하나님이 존재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과 공의와 선함과 진실에 있어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영”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의 가장 기초적이면서 단순한 뼈대는 “하나님은 영이시다" 이 문장이다. 이것이 4문을 가장 단순하게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성경은 아주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딤전1:17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러분들 이 말씀들을 읽을 때 어떤 경우에는 이 말씀 한 구절을 통해서 한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그러하심을 경험하고 누리며 변화되는 일들이 있더라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같은 경우가 이 말씀으로 이런 경험을 했다.
바울이 기록한 이 말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영원하고도 썩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으시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 앞에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이다. 완전히 굴복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낸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우리가 질문하는 게 있다. 성경에 보면 예를 들어 창3: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며 아담을 찾으신다. 영이신 그분이 거니셨다고 말한다. 또 창6장에서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심을 한탄하셨다고 말한다. 후회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이신데 어떻게 걸어다니시는가? 불변하시는 그분이 어떻게 후회라는 것을 하실 수 있는가? 이런 표현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를 신인동형론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셔야 하는데,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요, 깨닫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설명하려 하는데,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전혀 가보지 않은 나라에 대해 가본 사람이 그것을 설명하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유를 들어야 한다. 그 자체를 설명한다면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정도 차이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려 하는데 인간은 눈과 귀와 코와 입이 있고 팔다리가 있고 알아듣질 못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걸어가신다고 표현하는 것이고, 우리 식으로 표현해서 시공간의 한계 속에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시는 것이다. 그런 표현들을 신인동형론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영이신데 어떤 영이신가? 첫째 무한하심, 둘째 영원하심, 셋째 불변하심 이 3가지 속성이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가질 수 없는 속성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특성이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것. 무한, 영원, 불변하심이다.
먼저 무한함에 대해 생각해보자. 존재,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선함과 진실에 있어 한계가 없고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속성에서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권능에 있어 한계가 없다? 이를 전능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선함에 한계가 있다. “경희야! 난 더이상 너에게 착할 수 없어! 나 오늘 너에게 엄청 참았어!” 우리는 늘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 선함이 무한하시다. 우리의 머리로 거기까지만 설명해도 알아들을 길이 없을 정도로 초월하신다. 이를 공간적 개념으로 보면 이를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편재성, 이는 어디에나 계신 것이다.
영원함에 대해 생각해보자. 무한, 영원, 불변이라는 단어는 존재한다. 인간의 언어의 능력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있지만, 그 단어의 의미를 우리는 인생 가운데에서 경험하지 못한다. 경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한하지 않으니까. 영원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의 무한한 확장이 아니다. 시간이 많은게 영원이 아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이 없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은 창세 때 창조된 것이니까. 이를 영원성이라고 한다. 아까 공간적인 무한함을 광대함이나 편재성 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시간적인 무한함은 곧 영원함이다. 하나님의 작정이나 예정이나 섭리, 다 질문 많이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창세전에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고, 버릴 자를 결정하실 수 있는가? 우리는 전부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해 이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처럼 시간에 매인 존재로 생각해버린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천지창조전부터 나를 아시느냐고 묻는다. 초능력적 인간의 수준으로 하나님을 생각해버리니까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불변함에 대해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불변하신다고 할 때, 그분의 존재와 성품과 사역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불변성과 부동성을 구분해야 한다. 불변하신다는 것은 부동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부동성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인데, 근대 유럽사회가 넘어오면서 이신론(Deism)이라는 기독교에 들어온 심각한 암적 요소가 등장한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다. 소위 미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이 모두 이신론자들이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 십중팔구. 다 기독교적 언어를 쓰고 성경을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신론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는 이것이다.
시계공이 태엽을 감은 채로 내버려 두면 시계는 저절로 돌아간다. 세상이 이처럼 저절로 돌아간다. 양심에 새겨진 자연법이 있어서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고대 법전을 보면 십계명과 비슷하다. 자연 역시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자연법칙들을 창조하셔서 자체적으로 움직이게끔 내버려 두시고, 하나님은 뒷방 늙은이 마냥 뒤로 빠져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우리가 잘 하면 된다는 것이다. 천만에.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불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간섭하시고 우리 삶 속에 찾아오시고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 속에서 계속헤서 들어와서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뒷방 할아버지처럼 시간이 흘러서 아무 것도 못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왜 이런 생각이 생겼을까?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계몽주의 이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17-19세기의 인간들은 과거에 이런 적이 없었다. 옛날에는 다 미신이 하거나 잡신이 하거나 하나님이 하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는 것을 발견했다. 의학이 발달되고 과학이 발달되고 기술이 발달되면서 이 모든 것들을 증명하기 시작하니까 인간 스스로가 너무나도 위대한 것이다. 그런 시대에 이런 발상들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냥 뒤에 계십시요. 우리가 이제는 다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를 지배하던 세계관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들어오시는 하나님이시고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이제 공유적인 속성을 보라. “존재,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선함, 진실”, ‘존재부터 진실'까지를 공유적 속성이라고 한다. 인간도 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사실은 가지고 있다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인간이 가진 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것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제일 먼저 ‘존재'이다. 출애굽기 3장 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뭡니까? 라고 묻자 뭐라고 대답하시는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곧 나다. 나는 그냥 그냥 존재하는 자다. 무엇으로부터 존재하는 우리와는 다르시다. 우리는 아버님은 누구시고 어머님은 누구시며 어떤 가문과 혈통...등등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기원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자존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존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만일 인간 중 “나는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정말 교만한 자이다. 하나님은 자존하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통하여 존재할 뿐이다.
지혜’, 하나님은 본래적 지식과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지만 인간은 관찰과 경험과 학습을 통해 지혜와 지식을 습득한다. 어린 아이들을 한번 가만히 보라. 하는 일이나 생각이 얼마나 어린가? 반면 이 자리의 여러분들은 학교에서도 배우고 세상에서 경험으로 배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혜로워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지혜를 습득하신 분이 아니다. 영원 전부터 모든 지혜를 다 가지신 분이시다. 인간이 지혜를 가지고 있다 말하나 영원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진 지혜를 지혜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이다.
세번째인 ‘권능'을 보라.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다. 죄를 지으실 수 없다. 또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신다. 또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이시니까. 민23:19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품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실 수 없다. 그럼에도 그분을 전능하시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며 완성하시는데에 필요한 모든 권세와 권능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반면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능력이 있을 뿐이다. 이 차이를 인식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이 이신론과 같은 것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네번째인 ‘거룩'. 거룩의 의미는 구별이다. 분리이다.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하나님은 도덕적 악과 죄로부터 분리되어 무한한 위엄과 영광 가운데 거하신다.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룩을 명하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데, 그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도 내가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라고 명하신다. 이는 근본적으로 말의 뜻 자체가 분리되는 것, 구별되는 것이다. 우리는 늘 이러한 위협이 있다. 세상과 같아지려는 위협. 세상을 따라가려는 위협. 따라서 우리가 제아무리 거룩해지려고 발버둥쳐도 거룩 그 자체이신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
다섯번째, ‘공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유지하고 실행하시는 속성과 행위로 심판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그 거룩한 행동을 하시게 되는 공의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어 공의를 따라 벌과 심판을 내리시고, 공의를 따라 복과 생명을 주신다. 인간이 아무리 공의롭게 판결하려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오차와 오류는 늘 있을 수 있으며, 공의의 기준 역시 시대마다 달랐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공의의 수준을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따라갈 수도 없다.
여섯번째, ‘선하심', 시119:68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권능과 지혜를 사용하여 자기 자녀에게 선을 베푸기를 그치지 않으신다.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서 왜 이러시는가? 여러분, 생각해보라. 어떤 착한 사람이 있다. 그가 성품이 너무 착해서 주변에 불쌍한 이웃을 돕고 싶은 선한 마음을 품었다. 선한 마음을 활용하기 위해선 그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돈과 같은 능력이다. 그럼 그 사람에게 선한 마음도 있고 돈, 능력도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돈과 마음만 있으면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 어떤 부분이 필요할지, 어떻게 돕는게 효율적인지 알려면 지혜와 지식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무한히 선하신데, 그 선하심을 활용하려면 그에 맞는 무한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무한한 능력만 있음 뭐하나? 무한한 지혜와 지식이 있어야지.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녀들을 위하여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과 영원하신 지혜로 무한하신 선하심을 베푸시려고 할 때, 이것이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 이해가 가능할까?
부모가 내 새끼 잘되라고 훈육했는데, 아이가 생각하기를 “우리 아빠가 나를 덜 사랑하는갑다” 생각할 수 있지 않나. 이처럼 자식은 부모를 이해 못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는 걸 하나님이 해주시길 바래서 내가 예수를 믿는데, 내가 원하는 걸 하나님이 안 주신다? 그럼 난 예수 안 믿을 거라고 한다. 이게 진정 예수 믿는거라고 할 수 있나?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니의 램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무한하심과, 나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죽어도 깨달을 수 없는, 천국에 가서야 비로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될 그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 인생에 한번도 유보하거나 거두시는 적이 없이 그 선하심을 베푸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선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보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은 영원하다.
마지막으로 ‘진실함', 진실이라는 것은 성실 이나 진리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진실하신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이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함이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기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취된다. 사람은 그 존재자체가 유한하기 때문에 그가 가진 성실함과 신실함 역시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믿을 수 있는 분이다. 그분만이 영원토록 미쁘시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4문을 통해 아주 짧은 한 문장으로 배웠다. 그럼 적용을 생각해보자.
첫째,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판단할 수 없으니 겸손해야 한다. 겸손해야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겸손해야 한다. 그 겸손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부터 비롯된다. 오늘 우리 시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실종된 상태이다. 너무 천박한 상태 아닌가? 경외함이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데 겸손이 나타날 수 있는가? 성경을 읽을 때나, 큐티를 할 때나, 말씀을 배울 때나, 말씀이 선포될 때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두번째,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삶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이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분은 영광과 존귀와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임을 알게 된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바로 평안이다. 믿음의 열매로 주어지는 평안.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분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자들은 필히 그분을 예배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겸손히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평안을 주신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모든 과정들을 다 건너 뛰고 바로 평안을 얻고싶어 한다. 마음이 좀 평안했음 좋겠다고. 하지만 기억하라. 이 과정들이 없이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때, 왜 평안이 찾아오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무한한 선하심을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으로 나에게 베푸시는 것을 내가 아니까. 지금은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에게 최상의 것을 주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 믿음의 비밀에 이르게 되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다는 것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이것이 머리로 아는 것, 되게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삶 속에서 내 가슴으로 내려오고, 내 모든 것들을 통해 그분을 경험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도저히 평안을 누릴 수 없는 삶 속에서 주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이제 다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배울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나님의 작정과 그 작정을 이루시는 것을 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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