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역사 1-노블레스 오블리주

로마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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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문제

Notes
Transcript

서론

오노레 드 발자크_골짜기의 백합
펠릭스와 앙리에트 사이의 사랑 편지에 처음 나타난다.
앙리에트는 출세를 위해 파리로 떠난 펠릭스에게 “의무는 사회가 부여하는 이익에 따라 증가되어야 한다”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는 지위가 높으면 덕도 높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고귀한 특권을 8개나 받았습니다.
9-11장 전체 개관
로마서의 해석에 있어 많은 논쟁이 있는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 교리와 실천적 삶 사이에 있는 로마서의 삽입이나 부록으로 봅니다.
이런 견해는 9-11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의 핵심이나 절정으로 봅니다.
이런 견해는 9-11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양극단의 견해를 피해 로마서의 꼭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부분으로 봅니다.
바울의 논지 전개에 있어 1-8장의 결론을 이어 받으면서 구원 교리를 완성하고, 12-16장의 실천으로 연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넓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를 다루지만, 구체적으로는 다음 두 가지 문제를 다룹니다.
왜 대다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
유대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천년 동안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많은 특권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교회의 대다수는 이방인이며, 유대인은 극소수입니다.
서론은 9장1-5절, 본론은 9장 6절-11장 32절, 결론은 11장 33-36절입니다.
본론은 크게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9장 6절-29절, 9장 30-10장21절, 11장1-32절
9장 1-5절은 전체 서론으로서 대다수 이스라엘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고통을 말해 줍니다.
9장 6-29절은 이스라엘 대다수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관점으로 대답합니다.
대다수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는 민족적 이스라엘이라고 다 영적 이스라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 참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장 30-10장 21절은 이스라엘 대다수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문제에 대해 인간의 책임이라는 관점으로 대답합니다.
따라서 대다수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잘못된 방식으로 구원을 추구한 사람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11장 1-32절은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를 통해 볼 때,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종말에 유대인들의 다수가 다시 예수님을 믿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11장 33-36절은 전체의 결론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방법에 대한 놀라움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9-11장은 다음과 같이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서론: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바울의 슬픔(9장1-5절)
2.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불신앙(9장6-29절)
3.인간의 책임의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불신앙(9장30-10장21절)
4.종말에 이루어질 온 이스라엘의 구원(11장1-32절)
5.결론:하나님의 구원 방법의 놀라움에 대한 찬양(11장33-36절)
우리는 앞으로 9-11장을 세번에 걸쳐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번 장에서는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1.서론: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바울의 슬픔(9장1-5절)
동족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고통(1-3절)
바울에게는한가지 큰 근심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롬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바울이 근심하고 고통을 느낀 것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여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말합니다.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이 동족의 구원을 바라는 이러한 마음은 모세의 기도를 기억나게 합니다.
출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유대인의 특권(4-5절)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 다수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믿지 않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동족을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라고 말할 때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말할 때는 강조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대조되어 사용됨 /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 백성의 의미로서 사용됨
이어서 바울은 과거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 여덟 가지를 차례로 언급합니다.
롬9:4-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특1.양자됨, 바울은 지난 8장에서 양자됨의 특권을 설명했습니다.
바울이 이스라엘의 특권으로 말하는 이스라엘의 양자 됨은 8장에서 말한 기독교인의 양자 됨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특권을 양자 됨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에 연유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관계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기독교인의 양자 됨이 새 언약에 속한 모든 권리와 특권을 포함하듯이 이스라엘의 양자 됨은 옛 언약에 속한 모든 권리와 특권이 있음을 말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양자 됨’은 이스라엘 개개인이 모두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유대인 중에는 육체의 할례만 받은 표면적 유대인과 마음의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이 있습니다.
특2.영광,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 중 하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출애굽 때 도망치는 이스라엘 백성과 추격하는 애굽 사람을 분리시켜 주는 큰 구름 기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구름 기둥은 낮에는 뜨거운 햇볕을 막아 주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변하여 빛과 온기를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했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출24:16-17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또한 성막이 완공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에 충만했고, 솔로몬 성전이 완공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에 충만했습니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떠난 것을 보았고 후에 예루살렘성전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적 역할을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특권이란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자신의 임재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민족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이렇게 가시적으로 보여 주신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 밖에 없었습니다.
특3.언약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또한 모세를 중보자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후에 다윗과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큰 국가로 만들어 주실 것이며, 장차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나올 메시아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구원 받게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모세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야 할 삶의 지침을 주셨으며, 다윗 언약을 통해 다윗 왕조의 영원성,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런 언약들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큰 특권들입니다.
특4.율법을 세우신 것, 율법을 세우신 것이란, ‘율법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민족에게는 율법을 주지 않으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율법을 주셨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자체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방식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대표요, 요약인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으며, 직접 돌 판에 새겨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 하나님이 시내 산 꼭대기에 임재하셔서 시내 산 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귀로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율법을 주신 이런 방식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큰 특권이었습니다.
신4: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특5. 예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 큰 특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예배 방법을 직접 가르쳐 주신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인 성막과 성전을 어떤 모양으로,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만들어야 할지 직접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어떤 제물을 가지고, 어떤 제사의 방식으로 드려야 할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배를 드릴 때 예배를 주관하는 제사장은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하며, 제사장이 하는 일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이런 제사법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시며, 제물이시며, 제사장으로서 이 모든 제사법을 완성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특6. 약속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야에 대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또한 메시야가 오셔서 시작될 종말의 새 시대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런 약속들은 모세오경이나 시편과 예언서에 풍부하게 나옵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통해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사역들과 메시아 시대의 엄청난 복들을 미리 약속해 주셨습니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 이런 약속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까?
특7. 조상들,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조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곧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조상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모형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메시아 이야기가 담긴 것이지요.
오늘 나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이야기, 곧 복음을 들려 줄 수 있습니까?
특8. 메시아가 이스라엘에게서 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특권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에 실린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게로 이르는 예수님의 계보에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이 자기 나라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습니다.
이와 같이 메시아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더구나 메시아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기도 하신 분입니다.
5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하나님이신 메시아가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의 절정이자 요약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에 비추어 볼 때, 이스라엘 사람 대다수가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왜 이렇게 큰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소수만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다음 단락을 통해 이 문제에 답을 합니다.
2.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불신앙(9장6-29절)
왜 대다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거죠?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실패한 것 아닌가요?
유대인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참된 영적 백성은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계획과 목적과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6-13절은 하나님 백성에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하나님의 참된 영적 백성이요 또 하나는 육적 백성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14-23절은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교리에 대한 반론을 예상하며 답변하고 24-29절은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교리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1)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6-13절)
바울은 9장 4-5절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권들을 말합니다.
양자 됨/영광스러운 임재/ 언약/ 율법/ 바른 예배/ 메시아에 대한 약속/ 메시아에 대한 모형, 하나님 백성의 모형이 되는 조상들/ 메시아의 탄생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의문이 생기겠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 특권을 모두 취소하시고 주신 복들을 철회하시는 것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을 취소하신 것이라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과거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을 취소하실 수 있다면 현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도 취소하실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1-4장)은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5-8장)을 이야기한 바울의 말이 거짓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지키셨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하나님은 신실하게 자신의 구원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롬9: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을 지키신 분이라면 당연히 교회에 하신 구원의 약속(1-8장)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근거를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라고 할 때는 민족적 이스라엘을 말하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할 때는 참된 영적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이면 모두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민족적/육적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참된 영적 백성(영적 이스라엘)을 구별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백성 개념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하나님 백성 개념보다 더 좁기도 하고, 더 넓기도 합니다.
먼저,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참된 영적 백성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범위가 좁습니다.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일부만 하나님의 참된 영적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참된 하나님의 참된 영적 백성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범위가 더 넓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참된 영적 백성이기 때문이죠.
바울은 7-13절을 통해 ‘ 두 종류의 이스라엘 교리’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두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의 사례입니다.
롬9:7-9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육적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유대인은 당연히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유대인의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창세기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을 받은 자녀 가운데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녀 가운데 두 종류의 자녀가 있을 것을 말해줍니다.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녀를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로 대조하면서 ‘약속의 자녀’만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는 이스말엘이 아니라 사라가 낳은 ‘이삭’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종류의 자녀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이고 이삭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둘째, 이삭의 두 아들’에서’와 ‘야곱’의 사례입니다(10-13절).
에서와 야곱의 사례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사례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진리에 대한 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첫째, 에서와 야곱은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롬9: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에는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브라함의 참 자녀로 선택된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은 같은 부모에게서 쌍뚱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조건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나님의 참된 영적 백성으로 선택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야곱이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것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이었습니다.
롬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야곱이 선택을 받고, 에서가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은 이 쌍둥이가 태어난 이후의 행동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악한 행동을 하고, 야곱은 선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에서는 선택하지 않고 야곱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에서와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 전,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셋째, 쌍둥이 에서와 야곱 중에서 형 에서가 선택받지 못하고, 동생 야곱이 선택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었음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롬9:12-1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삭은 쌍둥이 형인 에서를 자신의 상속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이 아니라 동생을 선택하심으로, 선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이삭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바울은 두 종류의 이스라엘 교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약속을 폐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즉 바울 당대에 ‘대다수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과거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이 취소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영원히 신실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육적 이스라엘이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통해 계속 이루어져 갑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민족적 이스라엘로 참 하나님의 백성과 거짓 하나님의 백성이 섞여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배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절대로 배교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는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말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에 대한 말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는 말은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불신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의 교회를 ‘눈에 보이는 교회’라 부르고, 후자의 교회를 ‘눈에 보이는 교회’라 부릅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반드시 영화롭게 된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거짓 신자가 아니라 참 신자에 해당됩니다.
중생하고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결코 타락하여 배교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의 신자로서 중생하지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도 못한, 명목상의 신자들이 타락하여 배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영원한 구원의 확신 또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2)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14-23절)
우리의 행동 이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이 버림을 받는다는 예정 교리 정말 납득이 안돼요.
바울은 선택 교리(6-13절)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할 것을 예상하고 가상의 질문자를 상대로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변호합니다.
이런 반론들은 바울이 선교 사역을 할 때 빈번하게 들었던 비판들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선택 교리에 대해 제기하는 물음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인간의 조건이나 행동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버린다면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14절).
바울은 이런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바로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니라고 답변합니다(15-18절).
둘째, 만일 인간의 행위와는 아무 관계 없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버린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책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19절).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창조의 관점에서 창조주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강조하는 수사적인 질문을 통해 답변합니다(20-23절).
예정론 반대에 대한 답변 1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이 말한 선택 교리를 듣고서 하나님의 불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롬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고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야곱을 선택하고 에서를 버리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15,17절).
첫째,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 교리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통해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 부분에 대해 설명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권적 선택을 통해 어떤 사람을 구원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성품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합니다.
출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롬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과 성품을 모세에게 계시하시는 내용에서 하나님의성품이 은혜와 긍휼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계시해 주신 내용을 이렇게 적용합니다.
롬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즉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해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아 마땅한데, 죄인 가운데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이 생기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자비)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죄인들에게 죗값을 물리지 않는 것,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와 저주를 내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죄인들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것은 사람들의 원함(소원)이나, 사람들의 달음박질(자신의 소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즉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 등 사람들이 가진 조건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즉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때문입니다.
둘째,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 교리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통해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는 부분에 대해 설명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권적 선택을 통해 어떤 사람을 완악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합니다.
출9:1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롬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출애굽기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열 재앙 중에서 일곱 번째 재앙 심판 전에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라고 요구하시는 내용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신 목적은 바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열 재앙에서 바로는 하나님의 뜻에 저항함으로써, 바로가 저항하지 않을 때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는 하나님의 명령에 계속 저항함으로써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과 백성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열 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이름이 당시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바로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게 된 것은 바로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입니다. ‘완악’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둔감하게 되어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반항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열 재앙에서 바로의 완악함을 두 가지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
즉 바로가 스스로 완악하게 했다는 말과 하나님이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어떻게 이 둘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성경의 난해 구절을 해석할 때는 항상 비슷한 다른 성경 구절과 비교해야 하는데 다음 구절들을 보면 바로의 완악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창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미워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누군가 나를 괜히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시105: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요12:37-41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행2:22-23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하나님은 죄를 짓지도 않으시고,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하지도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반역하는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완악하게 하신다고 할 때는 완악한 사람을 완악한 대로 내버려 두신다는 말입니다.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본성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들은 그들의 불경건하고 불의한 본성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사람을, 한 사람은 선하게 만들어 구원하고 한 사람은 악하게 만들어 구원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는 인간을 선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지어 죄인이 된 후,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어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후손인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은 하나님께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죄인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타락하여 죄인 된 자들 중 어떤 사람은 긍휼을 베풀어 구원을 해 주시든지, 어떤 사람은 긍휼을 베풀지 않고 그냥 완악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어 구원을 주지 않으시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크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모두 타락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한 상태에 있는 자들 중에서 일부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일부에게는 완악한 상태로 두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입니다.
롬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예정론 반대에 대한 답변 2
만일 예정론 교리, 즉 선택 교리가 옳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실 수 있는거죠?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을 때는 사람의 잘못을 심판하는 것이 공의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책임이 없을 때 그 사람에게 심판하는 것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만일 불신자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른 것이라면, 하나님이 불신자에게 내리는 심판이 어떻게 공의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롬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바울은 예정론에 대한 둘째 반대 질문에 대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사29:16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롬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바울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관점에서 예정론에 정당성에 대한 반론에 답합니다.
하나님의 선택 교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인간의 피조물 됨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토기장이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창조주의 주권을 설명합니다.
토기장이는 진흙덩이를 가지고 용도에 따라 천한 그릇이나 귀한 그릇을 자유롭게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창조주 하나님은 구속사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 중에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진노의 그릇과 구원을 받는 자비의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 에서, 바로,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진노의 그릇으로 삼으시고, 이삭, 야곱, 모세, 믿은 유대인과 이방인은 자비의 그릇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이런 주권적 자유의 행사에 있어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피조물 된 죄인이 창조주이신 구원자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할 수 없습니다.
왜 저 사람은 구원해 주고,, 나는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하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롬9:22-23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에 해당됩니까?
우리는 누가 어떤 그릇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전도가 필요합니다.
(3) 하나님의 주권과 예언의 성취(24-29절)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자비의 그릇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롬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민족적 유대인과 하나님 백성을 동일시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유대인이라고 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된다고 함으로써 바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하나님 백성의 범위보다 더 넓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십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민족적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인 중에서 부름받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중에서 부름받은 이방인 신자의 연합으로 구성됩니다.
바울 당시의 교회는 새롭게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인 가운데 소수와 다수의 이방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왜 대다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고, 소수의 유대인과 다수의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까요?
바울은 소수의 유대인과 다수의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구성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셨던 것을 성취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호세아의 두 구절을 인용하며, 유대인 가운데 소수만 하나님 백성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사야의 두 구절을 인용합니다.
첫째, 바울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호세아서를 인용합니다.
호2: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호1: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롬9:25-26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래 호세아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즉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었다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방인과 이방인 선교지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회복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북쪽 열 지파가 앗시리아의 포로가 되어 다시 회복될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회복될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에 대한 예언으로 보고 북 이스라엘 왕국을 이방인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방인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은 예언서에 처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은 이방인을 말합니다.따라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이미 분명하게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유대인 중의 다수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소수만이 예수님을 믿게 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사10:22-23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사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롬9:27-29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을 보여 주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이 민족적 이스라엘 가운데 일부만을 참된 영적 이스라엘로 택하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남은 자 교리에는 심판과 소망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1.남은 자 교리의 심판적 측면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잘 담겨 있습니다.
2.남은 자 교리의 소망적 측면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진멸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진멸하지 않고 남은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남은 자를 두시는 것은 하나님 백성이 아무리 불성실하더라도 하나님은 계속 하나님의 백성에게 신실하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9장을 통해 바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문제(1-5절), 즉 큰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소수만 예수님은 믿는 일이 생겨난 이유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예정론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9-29절).
한 마디로 ‘이스라엘에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닌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때문입니다.
민족적 육적 이스라엘에 속하기는 했으나 영적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민족적 이스라엘에 속하면서도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정론 교리는 바울 당시의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사를 통해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예정론 교리는 구원받은 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나의 행동이나, 심지어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행위조차도 내가 구원을 받는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선택,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입니다.
이 예정론 교리는 앞으로 나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하다는 구원의 확신도 가질 수 있게 해 줍니다.
내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면, 구원받은 이후 나의 행위 때문에 나를 버리실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정론 교리는 신자를 가장 겸손하게 만들어 주며, 하나님께 가장 감사하게 만들어 주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정론 교리는 불신자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타락한 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고 내버려두신다는 예정론 교리는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에 속한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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