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2과. 생명과 죽음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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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Handout
고백 : 우리는 하늘에 앉은 사람이다.
헌금 :
예배를 위하여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크신 긍휼과 자비로 구원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 오직 하나님만 참되게 예배하게 하옵소서.
봉헌을 위하여
이 시간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진 물질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봉헌하여 드립니다. 이 물질을 받으시고 주의 역사에 크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의 예배의 시종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 그 사랑(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본문 : 엡 2:1-10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죽어 있었습니다.
콘센트가 뽑힌 노트북은, 잠깐 작동해도, 배터리가 다 되면 곧 꺼지죠.
그게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잠깐 작동해도, 배터리가 다 되면 곧 꺼지는 인생이죠.
성경은 이것을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합니다.
1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5절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죽었다는 것입니다.
잠깐 작동하고 있지만, 곧 배터리가 다 되서 꺼지는 인생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인 것입니다.
첫째, 개인적으로 죽었습니다.
둘째, 2절을 보니까,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면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유행을 따르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탄을 따른다는 면에서 죽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불순종하는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한 영을 따른다는 면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세상과, 사탄을 따른다는 면에서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왜 질병이 있을까요? 아픔이 있을까요?
황사 때문에
안 좋은 공기 때문에
방사성 물질 때문에
나쁜 식습관 때문에
유전적인 이유로
다 맞지만, 왜 그런데 질병이 있느냐고요?
질병이 생기게 되는 물리적 매커니즘은 알겠는데, 왜 질병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느냐고요?
그것은 ‘죽음의 증상’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죠.
나무가 뿌리가 뽑히면, 점점 말라가듯이,
하나님로부터 뿌리 뽑힌 인간은, 죄와 질병으로 점점 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질병이 있는 이유죠.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는 주인이 되어서,
이 죄 때문에 죽음이 온 것이죠.
내가 어떻게 다 해보려는 마음이 ‘죄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과,
사탄을 따르고,
주인이 되어서, 자기가 어떻게 해보려는 마음.
이 죄악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온갖 죽음의 증상들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죠.
*4월 11일자 기사입니다.
술 취해 경찰관 폭행한 예비 검사, “내가 누군지 알아” … 임용 무산
술에 취해 경찰관을 폭행한 이야기입니다.
예비 검사가요.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자신이 인생을 통제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사 내용을 보니까 이렇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여성이 법원 직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다급히 법원을 나섭니다.
지난 1월 30일 새벽입니다.
강남 식당가에서 술에 취해 행인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이 사람이 경찰관에게 항의하면서 “내가 누군지 아냐, 너는 누구 라인이냐?” 는 등의 폭언을 행하며 경찰관의 머리채를 잡고 두 차례 폭행한 혐의로 입건되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려고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검사가 될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왜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느냐?
경찰관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러한 위치에 맞게 대우해주지 않았으니까 화가 나서 폭언과 폭행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7절도 보세요.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누리고 나타내기 위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8절에서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 이것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나의 행위,
나의 지위,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구원받고 살아난 것입니다.
살아나니까 어떻습니까?
죄와 죽음의 증상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죠.
이제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령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왜요?
은혜로 살아났기 때문이죠.
이제 살아난 우리는,
죽었던 과거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고,
불순종의 자녀처럼, 마귀에게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자기 인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인식이 뭐냐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매일 심리학 공부라는 책을 보니까, 사람들이 앓는 마음의 병 대부분이 바로 이 세가지 질문에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기를 바랍니까?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해주기를 바랍니까?
착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위대한 사람?
혹은 대단한 사람입니까?
여기에 답을 하는 것이 자기 인식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이죠.
아까 읽은 뉴스 기사에서,
예비 검사가 폭언을 하면서 물었죠.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너는 어디 라인이냐?”
자신은 검사가 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검사가 될 사람인데,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대우해도 되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자기 인식이죠.
나는 예비 검사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나를 잘 알아보고 적절히 대처해라.
이게 그 사람의 자기 인식이죠.
검사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죠.
할 수 있으면 검사도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법조계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검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법조인이 되는 것이, 자기 인식,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올바른 동기가 아닙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나 이런 사람인데 너는 어디 라인이냐?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대우해야 되는지 아느냐?
여러분이 공부를 하고, 학교를 다니고, 커리어를 쌓고, 직장을 다니는 모든 이유가,
자기 인식,
‘내가 이런 사람이야’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면, 아직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이미 최고 권력자리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우리의 위치는 겨우 세상이 아닙니다.
겨우 사탄의 자리 정도가 아니에요.
6절을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입니다.
가장 높은 곳입니다.
세상 그 어떤 자리보다 높고,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가 앉은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가 바로 하늘입니다.
이 자리에 누가 앉았습니까?
바로 우리가 앉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
더 좋은 자리에 앉고 싶어합니다.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죠.
너는 누구냐? 라고 물을 때,
나는 이런 자리에 앉은 사람이야. 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너는 누구냐? 너는 어디 라인이야?
그런데요.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자리일지라도, 하늘보다 높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 앉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아버린 최고의 존재인 것이죠.
이게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발버둥치지 않게 하는 믿음인 것이죠.
나, 하늘에 있다.
나, 하늘에 앉았다.
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다.
이 믿음이,
세상에 헛된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앉아있습니까?
지금 어디 앉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기 인식이라고 했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앉은 사람입니까?
이미 하늘에 앉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좀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죄는 억지로 이기는 게 아닙니다.
안지으려고 억지로 애쓰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에요.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에 있어요.
하늘에 앉은 사람이 나입니다.
이 믿음이, 세상의 헛된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이미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무슨 세상의 작은 자리에 집착하나요?
6절을 보십시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죄는 억지로 이기는 게 아닙니다.
안 지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믿어지는데,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
이미, 내 자리가 가장 높은 하늘 최고의 자리인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세상의 자리에 집착하겠습니까?
억지로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세상 최고의 자리가, 별볼일 없다는 믿음이,
죄를 멀리하게 하는 원동력이죠.
*박탈감과 공격성에 대한 논문이 있습니다.
박탈감은 없어졌다는 것이죠.
있던 게 없어졌다.
예를 들어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는데, 경제적 여유가 없어지면 뭡니까?
경제적 박탈감이죠.
또 다른 예로,
친구가 관계가 좋았는데, 이제는 친구 관계가 안 좋아졌다. 그러면 뭡니까?
사회적 박탈감이죠.
또 다른 예로,
몸이 건강하고, 신체가 튼튼했는데,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그러면 뭡니까?
신체적 박탈감이죠.
이런 박탈감은, 사람으로 하여금, 공격성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있던 게 없어졌다는 것이죠.
예비 검사 이야기에서,
예비 검사는 뭡니까?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앞으로 검사 될 사람이야.
그런데 당연하게 있어야 할 예우, 대우가 사라졌다는 것이죠.
이게 뭡니까?
사회적 박탈감이죠.
사회적 박탈감이 생기니까 뭐에요? 경찰 멱살을 붙잡고 폭언을 하고, 뒤통수를 때리는 공격성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거기 내 자리야.
거기 내가 앉아 있던 자리야.
그런데 그 자리를 갑작스럽게 잃어버리게 되니까, 박탈감이 들고, 박탈감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공격적인 행동을 하게 했다는 것이죠.
이게 박탈감과 공격성의 관계입니다.
세상의 자리에 집착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속아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 더 대단한 자리에 앉아보라는 마귀의 말에 속아서,
조금이라도 올라가려고 애를 쓰는 인생은,
언젠가, 박탈감이 찾아오고, 허무감이 찾아올 때, 솟아오르는 분노와 공격성 때문에, 자기 감정 통제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내가 검사 될 사람인데 말이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너 어디 라인이야?
*말씀을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늘 보좌에 앉은 사람입니다.
잘 나서,
대단해서,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믿음으로
거저 받은 놀라운 특권이 하늘 보좌인 것이죠.
더 대단한 것은,
이 자리를 절대 뺏기지 않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몸관리를 잘해도, 어느 순간 몸이 약해지고 아파오면서,
우리는 신체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관계를 잘 해도,
어느 순간 사람들은 떠나고,
가까운 관계도 멀어지고,
혼자 남을 때가 오는 것이죠.
사회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박탈감
정년이 되고, 나이가 들면, 소득이 줄어들면서, 경제적인 박탈감.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열심히 일해서 돈 벌었는데,
이제 나는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쓸모가 없나보다.
경제적 박탈감..
이런 박탈감으로 공격성이 드러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비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부작용,
죄의 증상,
죽음의 고통을 피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앉은 자리가,
겨우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자리, 떠받드는 자리,
좀더 나아가서, 공중의 권세잡은 마귀의 자리 정도가 아니라,
하늘 권세
최고의 자리라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세상 자리 차지하려는 욕망에서 해방되고,
더 나아가 쓸데 없는 박탈감과 공격성 때문에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심리적 고통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 이 말씀을 믿고,
영적으로 가장 높아진, 우리의 위치를 다시 확인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허물어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 큰 은혜 덕분에,
되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장 높은 하늘에 앉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세상의 부귀와 욕망,
쓸데없는 박탈감에서 자유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시간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외모나 성품, 자격, 그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주님의 그 큰 은혜 덕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아버지 은혜 내가 노래해
그 사랑 변함없으신 거짓 없으신 , 우리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은혜를 찬양합시다.
기도합시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끊임없이 쓸데없는 박탈감에 시달리고, 또 세상 사람들처럼 더 높은 자리, 더 위대한 자리에 목숨걸고 얽매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에 앉아 있는 우리의 본래 위치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들은 말씀을 통해, 나의 위치가 하늘에 있음을 깨닫고, 가장 높은 곳에 앉히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며, 늘 되새기며, 세상과 마귀의 유혹에 속고 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또한 교회를 위해서, 앞서 세우신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의 사역과 그 삶 위에 크신 은혜가 임하게 해달라고. 우리 교회가 또한 새생명축제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우리 각 사람이 순종함으로 동참하게 해달라고. 청년부를 섬기는 저와 리더 순장들의 영육의 강건함과 은혜를 위해서. 교회 안에 병약한 지체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 또한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세상의 헛된 욕망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적으로 항상 승리하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개요
문제제기 - 진단 및 대책 - 결단
문제제기
정말 살아났음을 믿는가?
정말 그리스도를 의지하는가?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가?
왜 아직도 자신을 자랑하는가
예비 검사 이야기
왜 아직도 주눅들거나 우월감을 가지는가
왜 아직도 은혜롭지 않은가?
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가?
정말 사탄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는가?
불순종의 역사로부터 해방되어져가고 있는가?
왜 아직도 불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왜 아직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가
왜 아직도 사탄이 시키는대로 사는가
진단 및 대책
말씀을 근거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살아났다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의 능력이나 행위나, 감정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마귀의 자녀가 아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 마귀보다 높은 자리이다.
결단
나 자신을 의지하지 말자
나의 행위, 나의 감정, 나의 어떠함을 의지하지 말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
나를 은혜로 사랑하셨듯이, 나도 타인의 행위, 타인에 대한 나의 감정, 타인의 어떠함으로 타인을 사랑하지 말자.
선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 안에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 일을 행하며 사는 것이다.
선한 일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다.
나의 행위도, 나의 베풂도, 모두다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다.
나의 학업도, 나의 직업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다.
관찰
요약
1 그는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2 우리는 마귀를 따르며 살았던 자였다.
3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4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앉히셨다.
7 그 이유는 이 은혜를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함이다.
8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9 그 이유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10 우리는 그의 작품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지음 받은 작품이다.
2절
따르고 - 이 세상 풍조를
따랐으니 -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4절, 8절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은 ‘원인’ 2가지
8절, 9절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님.
2절, 9절, 10절
역사하는 영이라
마귀의 행위는 불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나, 선한 행위를 위하여 구원받은 것임
6절, 7절, 10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셨다.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사역
1 너희이다, 죽었던, 허물과 죄로
2 너희는 이 세상의 세대를 따라 걸었다. 공중(아에르)의 권위를 가진 아르콘(통치자)를 따랐다. 영이다, 지금 불순종(아페이데이아)의 아들들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엔에르게오).
아에르
후대의 유대 문헌에서는 천사의 피조물, 특히 악한 천사가 공중을 점령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쫓겨난 대천사는 "바닥이 없는 곳 위를 쉬지 않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2 En. 29.5; 참조. 사 7.9 등에서의 "궁창")
신약 이 용어는 신약에서 7번 등장하는데, 대개 지표면 위의 물리적 공간을 가리킵니다(예: 행 22:23).
현세에서 사탄은 "공중의 왕국"을 다스리는 악한 영으로,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합니다(엡 2:2; 참조,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고대 세계관에 따르면 공기는 땅과 하늘(에테르) 사이의 중간 영역을 형성한다.
공기가 악마의 거처라는 유대인 개념 (Billerbeck IV, 516)에 따르면 공기는 악마의 거처입니다.
아페이데이아
부정접두어(아) + 페이도 : '설득당하지 않는, 불순종하는'을 의미한다.
페이도는,
납득시키다, 확신시키다.
동사 페이도는 70인역본에서 약 18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바타흐 어군(믿다, 확신하다, 신뢰, 안전)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불순종의 아들들 안에서 활동하는 영 =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은 불순종하도록 역사한다.
순종이 중요하다.
불순종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말 하나님 때문에 불순종하는 것인가?
불순종을 고치면 복이 온다.
3 우리도 모두, 행하였다(수동태, 아나스트레포), 전에는 몸의 욕심에 따라, 몸과 생각(디아노이아)의 의지에 따라, 우리는 원래 노여움의 아이들이었다, 남아 있는 자들처럼(로이포스)
4 그러나(대조), 긍휼이 풍부하신 하나님이, 그의 많은 사랑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그러나. 대조이다.
우리는 이랬다.
그러나.
대조.
하나님의 사랑은 풍부했다. 하나님의 긍휼은 넘쳤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가 함께 살리셨다, 그리스도와, 너희는 은혜이다, 구원된 것이(소조, 완료 수동태)
우리는 은혜이다.
우리 존재 자체가 은혜이다.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우리는 자격없었다.
우리는 사탄이 그 안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6 그리고 그가 함께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함께 앉히셨다, 하늘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다.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함께 일으키셨다.
그리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바울은 우리를 살리신 것 외에 두 가지 행동을 더 추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신 일에 대해 계속 설명합니다.
함께 살리셨다는 것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골 2:12, 3:1). 이것은 매우 실현된 종말론이며, 이미 일어난 영적 부활로, 약속된 종말의 희망 중 일부가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기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재 상태의 변화와 앞으로 일어날 더 많은 변화를 강조합니다(롬 6; 고전 15:49; 갈 4:26; 빌 1: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앉히실 때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는 모든 세력 위에 있는 하늘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앉았다는 말은 바울이 1:19-21에서 예수님이 모든 권세 위에 영원토록 앉으셨다고 말한 매우 중요한 점을 다시 언급합니다.
7 이는 세대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오고 있는.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부함을, 우리에게 인자하심으로(크레스토테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이유는,
이렇게 하신 이유는,
나타내기 위함이다.
누구에게?
오고 있는 세대와 세대들에게
무엇을?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부함을
8 과연, 너희는 은혜이다, 구원된 것이. 믿음을 통하여, 이것은 너희로부터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5절을 반복한다.
과연 너희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이다.
이것은 너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9 행위로부터가 아니다. 어떤 사람도 뽐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카우카오마이)
카우카오마이
자랑, 자부심, 자랑하다, 기뻐하다, 승리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자랑하고, 기뻐하고, 승리감에 도취된 것은 불행이다.
자신의 도덕성,
자신의 인성,
자신의 소유..
자랑할 게 없는 게 은혜이다.
10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물(포이에마)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음을 받았다(크티조, 수동태). 선한 행실을 위하여,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셨다, 그것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행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목적을 소개하기 위해 for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이 구절의 시작 부분에서 그리스어 어순이 강조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사용된 용어인 포이에마는 종종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킵니다(시 64:9, 92:4, 롬 1:20).
이것은 우리가 거듭났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우리를 이렇게 만드신 목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 창조되었습니다.
행위는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산물로서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행 9:36; 골 1:10; 딤전 2:10; 5:10; 6:18; 딛 2:7, 14; 히 10:24; 벧전 2:12). 사실 이것은 구원의 주요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위해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방식대로 살 수 있습니다(갈 5:22-23). 이것이 에베소서 4-6장의 요점이 될 것이며, 1장 4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찬양한 내용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통해 그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연구
에베소서 2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4~7절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일, 8~9절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일, 10절은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일, 11~22절은 우리 가운데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원래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느니라"라고 읽어야 합니다.
죽음은 세 가지 방식으로 분리되는데, 첫 번째는 영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의학계에서는 실제로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끝없이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성경은 영이 떠나는 순간 죽음이 발생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둘째,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말하는 영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아이티와 카리브해의 다른 섬에서 좀비에 관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스페셜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좀비는 부두교, 악마, 약물에 취해 거의 시체와 같은 혼수상태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좀비처럼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주님을 향한 민감성이 없기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셋째,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에 언급된 영원한 죽음은 생명을 주는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고 바깥 어둠 속으로 던져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2절의 "걸었다"로 번역된 단어는 구불구불하거나 방향이나 목표 없이 걷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풍조대로"로 번역된 헬라어 구절은 바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바람이 부는 방향이 무엇이든 우리가 가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불고 있었나요?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 아직 죄로 죽어 있을 때 여러분과 저를 사로잡았던 스타일, 트렌드, 관심사를 지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육체적 성향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우리는 육체를 만족시키려는 헛된 시도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죄로 인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죄에 중독되어 죄로 인해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진노의 자녀로서 죄로 인해 운명이 정해졌습니다. 왜 우리는 진노의 자녀였을까요? 구원의 은사를 받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6).
우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교회에 가거나 성경을 읽거나 영적이 되려고 노력할 때만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악취가 날 때에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에도 사랑하셨습니다.
4-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히시기 위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보았습니다. 여기 8, 9절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봅니다.
바울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믿음조차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죽은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을 찾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롬 3:11).
10절에서 우리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그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건강한 몸과 활기찬 마음, 매력적인 성격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전혀 응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멸망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매우 진노하셨습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스러운 욕망이 왜곡되고 과장되어 배고픔이 탐욕이 되고 성적 매력이 정욕이 되었습니다.
인정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하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자기 자신이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원인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미 인정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인정하셨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부패하고 포로가 된 무력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시고 영광의 자리에 앉히셨으며,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의 본보기입니다!
세상은 두 시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사탄과 고통과 죄가 지배하는 '현 시대'와 하나님이 통치하고 만물이 회복될 '다가올 시대'가 그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다가올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주어졌고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시대"가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은"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공중 왕국의 통치자. 공중은 영들이 사는 가장 낮은 하늘로 간주되었습니다(1:20-21 참조).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서 지금 일하고 있는 영입니다. 유대인들은 사탄을 악령의 지배자로 인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특히 자신들이 아닌 다른 민족들 사이에 악마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더욱 충만한 방식으로 계시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아낌없는 사랑은 이미 구약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예: 신 7:6-9).
우리를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많은 유대 사상가들은 의인들이 다가오는 세상에서 통치할 것을 인식했습니다(다 7:22, 27; 계 3:21; 5:10). 그러나 여기서 신자들은 이미 이 승리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영적 권세 위에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았기 때문에(1:20-23) 더 이상 죄를 짓도록 강요하는 악에 얽매이지 않습니다(1-3절).
많은 사람들이 별을 통한 운명의 힘뿐만 아니라 영들을 두려워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높임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미 하나님은 의롭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신 9:5-6). 그분은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기 전에 그들을 구속하셨고(출 20:2), 진실한 의는 변화된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신 5:29; 30:6, 14).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은 이보다 더 크지만, 태초부터 자기 백성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때 변화되기 시작한다.
성경의 도덕성은, 인간의 가능성을 0%로 보고 있다.
중독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헤로인이나 크랙 또는 알코올을 처음 접했을 때 스릴과 흥분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더 이상 재미가 없습니다. 그때부터 중독자는 고통을 죽이는 것뿐입니다. 죄도 이와 같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무엇이든(정욕, 탐욕, 거짓말) 스릴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폭군이 되고, 무자비한 노예가 됩니다. 당신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신을 이용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어떤 영역에서 여전히 죄와 죄의 주인에게 속박되어 있나요? 그것들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고백하세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그분의 공급에 대해 감사하세요. 당신을 노예로 삼고 소유했던 죄들을 그 자리에서 내려놓으세요.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과 빛과 은혜의 능력으로 당신을 그들의 폭정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간구하세요.
죄는 처음에는 “기쁨”을 주지만, 나중에는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중독되게 한다.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에 무엇이 있는가?
“구원”은 우리의 “기쁨의 방향”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는 죄가 더 괴로워진다.
죄의 기쁨이 감소한다.
말씀과 기도의 기쁨이 더 증가하게 된다.
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셨을까요? 에베소서 2장 10절은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분의 은혜와 자비를 살아 숨 쉬는 그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분의 예술성을 보여주는 진열장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신자는 그분의 솜씨, 그분의 걸작입니다.
하나님의 걸작을 죄악된 태도나 말, 행동으로 스스로 낮추거나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분의 다른 예술 작품인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걸작으로 대하세요.
생명과 죽음의 차이
자기 평가
여자를 쫓아 다니며 시간을 낭비하던 학생이, 자신의 정체성이 ‘운동선수’라는 것을 깨닫자,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주일 경기일정이 있었다.
그는 선수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주일 경기를 포기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유업인 영적 성숙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잘못된 자기 인식”
하나님이 그들을 보듯이 자신을 보지 못하며.... 자기의 모습을 초라하게 생각할수록 고통을 당하고 있다.
에덴 동산 밖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로 그 순간부터 에덴동산의 아담과는 아주 다른 생명을 갖게 된다.
당신은 지금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된 것이다.
당신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이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에베소서 한 권에만 해도 여섯 장 안에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당신 안에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다는 언급이 40번이나 나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거듭나는 순간 당신의 영은, 아담이 타락 전에 하나님과 연합하였던 것같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지금 살았다.
구원은 미래에 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현재적인 변화이다.
구원의 핵심은 “당신이 곧 누구냐” 하는 것이다.
당신의 행동이 어떠하냐에 따라 당신의 신분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곧 당신의 신분이 누구이냐에 따라 당신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평가하는 습관과 싸워 이겨야 한다.
당신이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 국민이 누리는 권리와 자유를 누린다.
한국 시민으로서 권리나 자유는,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헌법에 의하여 쉽게 보장을 받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요1:12)
나는 참 포도나무의 가지요, 그리스도의 생명의 통로이다(요15:1,5)
나는 그리스도의 친구이다(요15:15)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롬8:14)
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3:16)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나는 성도이다(엡1:1)
나는 하나님의 권속이다(엡2:19)
나는 의롭고 거룩하다(엡4:24)
나는 하늘의 시민이요, 하늘에 앉히운 자이다(빌3:20; 엡2:6)
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그의 긍휼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골3:12; 살전1:4)
나는 빛의 아들이요, 어둠의 자식이 아니다(살전5:5)
나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2:9-10)
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 마귀가 나를 만지지 못한다(요일 5:18)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
사단이 당신은 무가치한 실패자라고 속삭일 때마다 그것을 읽으라.
저는 여러 면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중요한 존재”이고,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으며”, 하나님 안에서 “제가 안전하다”는 것은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자료들을 깊이 생각해 보면서 저는 지금까지 제가 오랫동안 갈등해 왔던 문제들, 즉 ‘실패에 대한 공포’, ‘스스로 가치도 없고 자격도 없다는 생각’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셨다.
당신은 더 이상 영적 고아가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맏아들인 에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성품과 부요함을 받았다.
당신은 특별하다! 물론 당신이 특별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당신이 한 일이란 하나님의 초청에 응한 것뿐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적용 / 예화
자기 전 30분 동안 '이것' 해주면 자존감 높은 아이 된다. (감정유산, 이남옥)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5482584&memberNo=30910003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욕심
술 취해 경찰관 폭행한 예비 검사 "내가 누군지 알아"...임용 무산
2023년 04월 11일 18시 36분
[앵커]
이달 말 검사 임용을 앞둔 30대 여성이 술 취해 경찰관을 폭행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여성은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벌금형 선고를 유예받았는데, 검사 임용은 무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
고개를 푹 숙인 여성이 법원 직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다급히 법원을 나섭니다.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30대 여성 A 씨입니다.
신규 검사 선발 전형에 합격해 이달 말 임용을 앞둔 '예비 검사'지만,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겁니다.
[예비검사 A 씨 : (금고형 아닌 형에 대해서 만족하십니까. 오늘 선고 결과?) ….]
사건이 벌어진 건 지난 1월 30일 새벽입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식당가에서 술에 취해 행인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A 씨는 당시 '모르는 여자가 때렸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 항의하며 머리채를 잡고 두 차례 폭행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상대방의 편만 든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조사 과정에서도 경찰관에게 내가 누군지 아냐, 너는 누구 라인이냐는 등의 폭언을 쏟아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 씨는 1심에서 벌금 3백만 원의 선고를 유예받았습니다.
재판부는 유죄가 인정되긴 하지만, A 씨가 초범인 데다가 자백하고 반성하는 점, 피해 경찰관이 선처를 구하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실형은 피했지만, A 씨의 검사 임용은 무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법무부는 검찰 공무원이 되지 못할 심각한 문제 사유라며, A 씨를 임용예정자 사전교육이 이뤄지는 법무연수원 교육절차에서 배제했습니다.
[예비검사 A 씨 : (검사 임용 안 되면 소송하실 건가요?)…. (시험 합격도 안 했는데 특권 의식 벌써 생기신 건가요?) ….]
A 씨의 만행은 언론 보도로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법무부는 보도 전 이미 인사위원회를 소집하는 등 필요한 절차를 진행해왔다며, 1심 결과와 관계없이 절차에 따라 A 씨는 임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박탈감과 공격성
관계적 공격성(relational aggression)이란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 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어느 집단에서 특정한 대상을 고의로 배제시키거나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경제적 박탈(socioeconomic deprivation)이란 물질 및 사회자원의 결핍으로 인하여 다양한 영역에서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며(김주희 외, 2015), 기존의 소득 및 경제중심 접근법의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을 보다 적절히 알아차리는데 유용한 개념이다(탁장한, 박정민, 2017). 전통적인 빈곤에 대한 접근에서 탈피하고자한 박탈 개념은 Townsend(1979)에 의해 보편화된 개념으로, 그는 박탈이란 “사람들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가지는 영양, 의복, 취로, 환경, 주택, 주거시설,지리적인 조건에 관한 물리적 표준에 부족하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되어 있는 교육,고용, 직업, 가족활동, 사회활동, 여가생활이나 사회관계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태”로정의하였다. 또한 빈곤을 영양, 의복, 주거설비, 주택, 지리적 조건, 환경, 노동 등의결핍에서 오는 물리적 박탈(material deprivation), 그리고 교육, 고용의 권리, 사회참여, 사회제도에의 참여, 가족생활, 여가활동 등의 결핍에서 오는 사회적 박탈(social deprivation)로 분류하였다(허종호 외, 2010).
사회경제적 박탈은 부정적인 정서를 유발하고, 직접적인 공격성은 물론 간접적인공격성을 야기하는 주요한 위험요소이다(Bushman, Bonacci, Pedersen, Vasquez, & Miller, 2005). 내현적 자기애 성향자는 수용 또는 인정받으려 하는 개인의 욕구가 사회경제적 박탈로 인하여 좌절될 경우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경험하기 쉬우나(Bushman & Baumeister, 1998; Rhdewalt & Morf, 1998), 평가나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므로 분노조차도 억제하게 된다(권석만, 한수정, 2000
사회경제적박탈을 경험한 청소년들은 우울, 분노, 공격성, 적개심 등의 정신건강 문제를 지니고있으며(노혁, 2009), 특히 사회경제적 박탈의 경험이 누적될수록 정신건강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것이다(이상록, 이순아, 2010)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좌절되었을 때 분노가 폭발적으로 표출되는데, 이러한 분노정서는 또래관계 또는 학교장면에서 학급 임원 및 학업성취 등 지위경쟁에서 욕구충족에 실패했을 경우 청소년들이 많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구좌절에 관한 낮은 인내심 및 충동성이 분노를 느끼게 하며 분노가관계적인 공격성을 유발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