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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Followers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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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views1. 가버나움에 머무시다 2. 마태를 부르시다 3. 레위의 집 4. 돌아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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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에 머무시다
가버나움에 머무시다
지난 주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가득했기를 소망"해요. 지난 주 우리는 의심 많은 사람인줄 알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의리가 넘쳤던 도마에 대해 살펴보았죠.
오늘은 세리 마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해요. 도마도 그랬지만 마태에 대한 기록도 많이 없어서 준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자들에 대해 나누는 것보다, 기록은 많이 없지만 도마나 마태 그리고 앞으로 두주 더 살펴볼 제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에서 저의 모습이 그리고 여러분의 모습들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더 알고 싶고 그 분을 닮아가고 싶으나 여러 상황들 앞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모습.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기는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그 모습들이 우리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쉬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머무실 때의 일이에요.
갈릴리 사람의 기준으로 꽤나 큰 도시였어요. 꽤나 큰 도시는 그 곳에 상주하는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해요.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민족주의자였어요.
나라가 망해서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그 곳에서 사람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기도 했지만 때론 선동하면서 교활하게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배타주의 외교정책을 펼쳤어요.
이미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배타주의적 외교정책을 강경하게 고수하는 바리새인들이 참 이해가 되지 않아요.
로마의 문화가 들어올만큼 들어왔고, 자신들의 목숨줄을 로마가 들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든 문물을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했어요.
자신들을 점령하여 통치하는 로마인들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들을 멸시했어요.
“요즘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거야?”라는 질문 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던데. 근데 그거 왜 하는거에요?
무튼 바리새인들은 이방인들은 바퀴벌레보다도 못한 존재들로 여겼고, “지옥에나 떨어질 놈들!” 이라는 표현을 쓸만큼 멸시했어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목하에, 로마에게 달라 붙어서 권력을 유지하면서 배타적 외교주의를 펼치던 이상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외적으로는 이렇게 유대인 중심, 정치적 민족주의자, 배타주의 외교정책을 펼쳤어요. 뭔가 활발하게 많이 했단 말이죠. 그럼 일반 백성들에게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결과들이 있었어야 하는데,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웠어요.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성경에서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을 만들어서 지키라! 강요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열개의 계명 외에 613개를 추가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쉬고)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에요. 다른 생각 못하도록 사람들에게 강요하니 사람들은 그 것을 지키겠죠.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며 로마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바리새인과 다른 종교지도자들에게 권력을 어느 정도 줬더니 굉장히 잘 다스린다. 이들 참 유능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맡겨도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죠.
일반 백성들에게는 민족주의와 배타적 외교주의를 통해 자신들이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로마에게는 자신들의 탁월하게 일반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다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가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에요.
마태를 부르시다
마태를 부르시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굉장히 눈에 거슬리던 존재들이 있었어요. 바리새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던 일반 백성들도 굉장히 싫어하던 존재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바로 세리. 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당시 사람들은 세리관들을 향해 정말 굉장히 거친 표현들을 막 사용했어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욕들 이상의 강한 표현들을 막 퍼부을만큼 세리를 사람들은 증오하고 멸시했어요.
로마 입장에서 세금은 굉장히 중요한 수입원이었어요.
세금을 통해 나라를 운영하고 확장하고 있었기에 세금을 잘 걷고 관리하는 것이 세상 중요했어요.
세리는 똑똑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에요. 정말 중요한 자리였기 때문에 아무나 앉히지 않았어요.
로마 사람을 세리에 앉혀서 세금을 걷게 할 수도 있었지만, 로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방인을 증오하는 이스라엘 그리고 이방인의 일을 대신 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던 로마는, 유대인들 중 똑똑한 사람들을 세리의 자리에 앉혔어요.
유대인들이 단합하지 못하도록, 분열하도록 하기 위해서죠.
세리는 단순히 직업으로 시작을 했어요.
어찌되었던 가족들을 부양하고 먹여 살려야 하는데, 일자리가 주어졌으니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했겠죠. 그런데 문제가 생긴거에요.
세리가 되어 세금도 걷고 재정관리도 하면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의 자녀들이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해요.
아버지가 세리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의 구성원들이 어디가서도 환영받지 못해요.
지나가기만 하면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점점 자신들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해요. 유대인 식당에 가도 음식을 먹을 수 없어요. 공동체에 환영받지 못한 존재가 되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어요.
저는 처음부터 세리들이 그렇게 세금계산서를 부풀려서 과도한 부를 축적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해요.
물론 돈이 목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못된 목적을 갖고 세리를 시작한 사람들은 없었을거에요.
그런데 점점 여론과 모든 상황들이 세리가 어디에도 서지 못하도록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기 시작해요.
로마의 부역자. 민족을 배반한 자. 하나님의 유업을 거부한 자. 성전을 멸시 한 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외국에게 자신을 팔아넘긴 쓰레기!
점점 표현들이 과해졌어요.
(쉬고)
이제 세리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에요. 복수.
장부를 조작해 세금을 많이 걷기 시작해요. 별의 별 항목에 세금을 붙여서 돈을 뜯어내요. 계속해서 돈을 뜯어갔어요.
공동체에서 버림 받은 마음을 돈과 물질로 채우며 그들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어요.
자신들이 먼저 공격해놓고, 당하자 유대인들은 또 다른 복수를 준비해요.
회당 앞에 “세리 출입금지"를 붙여둬요.
세리이지만 같은 유대인인.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부르신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사람들이 회당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요.
“회당 출입금지"는 단순히 출입을 막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거에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중요해요. 들어야 해요. 그래야 가정에 돌아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그 신앙을 물려 줄 수 있어요.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에요.
그런데 지금 세리들은 같은 민족에 의해 말씀을 들을 기회를 박탈 당했고, 회당 공동체에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버림을 받았어요.
(쉬고)
세리들
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알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었어요.
아무리 못되게 행동하면서 돈을 뜯어내고, 창고에 돈과 수많은 재물들을 가득 채워도 해결되지 않는 허무함이 있었어요.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읽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던 그들에게 어느 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어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는데, 회당이 아닌 해변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거든요.
그토록 기대하고 바라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에서, 실제 그 장소에서 들을 수 있게 된거에요.
(쉬고)
지난 2년 코로나 시대 때 집합 금지를 당해 교회에 올 수 없어 가정에서 온라인으로만 예배를 드릴 때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교회가 그립지 않았나요?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가 그립지 않았나요?
집합금지가 풀리고 교회에 다시 나올 수 있게 되었을 때 여러분 어떤 마음이었어요?
집합금지는 풀렸으나 지금처럼 마스크를 벗고 예배를 드릴 수 없었잖아요.
순 모임도 할 수 없었죠. 한칸 이상 떨어져 앉아있어야 했죠.
하지만 그럼에도 즐거웠을거에요.
현장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과 예배를 드린다는 그 사실이, 여전한 제한 속에 드리는 예배였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기쁨을 주었을거에요.
(쉬고)
지금 세리들이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은 저와 여러분이 다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터져오르는 감격 그 자체였을거에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세리. 마태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여러분이 마태였다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씀을 듣게 되었다면 어떤 감정이었을까요?
저는 마태가 말씀을 듣던 그 자리에서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해요. 기쁨, 행복 그리고 아픔과 상처로 인한 슬픔 등이 복합적으로 섞이는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을 보냈을거에요.
그동안 외면하면서 묻어왔던 마태의 상처. 사람들에게 수많은 욕과 무시와 멸시를 받아오면서 꾹꾹 눌러왔던 그 마음의 상처가 떠올랐어요.
“나도 하나님의 자녀였지. 나도 말씀을 듣고 싶어.”
“말씀을 더 듣고 싶어. 하나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어.”
“저 말씀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불가능하겠지. 나는 세리이니까. 나는 모두가 증오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니까.”
(쉬고)
예수님께 더 다가가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로 마태는 돌아갔어요. 여러 생각을 하며 세관에 마태가 앉아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가셨어요.
마태에게 다가가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백이면 백 이렇게 생각했을거에요. “마태는 혼나도 싸다! 저거 우리 배신하고 잘먹고 잘살더니 이제 혼나겠네 잘됐다!”
레위의 집
레위의 집
여러분이 마태였다면,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 것 같으세요?
저였으면 심장이 터졌을 것 같아요.
‘왜 예수님이 나에게 오시는거지?’
‘내가 뭐 잘못했나?’ ‘어 진짜 나야?’
‘왜 민족을 배반했느냐고 나를 책망하시면 어떻게 하지'
‘왜 그렇게 살고 있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찰나의 순간 정말 많은 생각이 오고 갔을거에요.
내 앞에 예수님이 딱 스셨어요.
“나는 죄인이에요.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미움 받는 사람이에요"
“존재 자체만으로도 죄가 되는 사람이라 불리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욕을 한바가지 하셔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죄인이에요.
예수님은 바라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과 또 떨고 있는 마태에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어요.
마태는 그 말을 듣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만사를 제쳐두고 예수님을 따라가요.
(쉬고)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졌죠. 여러분 마태는 왜 예수님을 따라나섰을까요?
너가 나를 따르면 이제부터 사람들이 너를 욕하지 않을거야
이제부터 손털고 제대로 살아보자
뭐 이런 말씀도 없으셨는데, 마태는 바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어요.
도대체 왜 무엇이 그로 하여금 다 포기하고 바로 예수님을 따라 가도록 했을까요?
(쉬고)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 예수님이 죄인인 자신을 찾아오셨거든요.
돈으로도 해결되지 않던 마음의 공허함.
아무리 많은 물질들을 모아도 해결되지 않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
사람들을 미워하고 복수하기 시작하면서 망가져버린 그의 마음과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박탈 당하고, 유대인들에게 버림받은 비참함 등
그의 마음은 늘 상처투성이였거든요.
예수님이 그를 책망하셔도 그는 할 말이 없었어요.
이미 상처난 마음이에요. 그 마음에 상처가 하나 더 난다고 해서 크게 아프지도 않아요.
정말 오랜만에 들은 말씀으로 인해 마음이 뜨거워졌고,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지만 여전히 그는 세리이고 죄인이었거든요.
예수님의 책망을 다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떤 책망도 불평도 하지 않으셨어요.
“나를 따르라.”
정말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죄인을 자신을 용서하는 것을 넘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그토록 갈망하고 원했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어요.
인간에 의해 박탈당했던 말씀의 기회가,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을 통해 돌려 받았어요.
둘째, 17절에 그 이유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들은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다 여겨지는 사람들이었고, 모두가 상종조차 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유대교의 종교법을 지키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들도 분명 어떤 실수와 죄를 저질렀을거에요.
그 실수와 죄 때문에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에게서 회당에 들어갈, 말씀을 들을 기회들을 박탈 당해버렸던 사람들이에요.
회당에 가지 못하니 죄 용서를 위한 제사도 드릴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어버린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런 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셨어요.
당시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이제부터 우리는 어색하지 않고 친밀한 관계입니다.라고 인증하는 것이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어요.
밥을 함께 먹는 것은 일종의 유대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인데,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들 존재 자체를 받아드려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소문난 죄인들, 모두에게 버림받고 손가락질 받는 존재들을 품고 계시는 것이죠.
가버나움의 성직자들은 굉장히 초조하면서도 화나는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 죄인들을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그들이 지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죄 용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기분 나빠해요. 반가워하지 않아요.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며 정죄하고 있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기분 나쁜 티를 내면서 “왜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가!”라고 물어요.
우리 17절을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무슨 뜻이에요?
“너희가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린 사람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박탈시켜 버린 사람들"
“너희가 버린 이 사람들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왔다.” 라는 것이죠.
돌아오고 싶었다
돌아오고 싶었다
마태는 돌아오고 싶었어요.
하나님의 품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그가 그토록 기다렸던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기회가 생겼어요. 그가 그 기회를 잡지 않을리 없었겠죠.
사랑하는 가온누리 청년부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찾아오셨고,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그리고 “나를 따르라" “너 내 동료가 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려분은 그 부르심 앞에 어떤 반응을 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면, 부르심 앞에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쉬고)
기회가 너무 많이 주어져서, 그것이 기회인지 조차 모르기 때문은 아닌가요?
아니 너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며 살아가느라, 그 분의 부르심이 전혀 들리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요?
(쉬고)
우리 이 시간 스스로에게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왜 나는 죄인인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었을까?
왜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여러 이유들을 대면서 반응하지 못하고 있을까?
(쉬고)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정리하는데 노래가 하나 떠올랐어요. 좀 오래 전 노래인데, 가시나무라는 노래에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쉬고)
저와 여러분이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들은 굉장히 다양할 거에요. 하지만 이 것만은 똑같을거에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요. 생각과 고민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이 들어갈 빈틈이 없어요.
여러분 왜 예배에 나오고, 왜 예수님을 믿으세요? 한주간 우리 많은 실패를 경험했을거에요. 그럼에도 왜 자꾸 이 자리에 나오세요?
여러분도 마태처럼 예수님 품에 안기고 싶어서, 그 분께 돌아오고 싶어서 다시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있기 때문 아닌가요?
(쉬고)
사랑하는 여러분.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용기를 냈어요.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다 이해하고 용납하며 용서하시는 예수님 앞에 용기를 내고 바로 섰어요.
그 용기가 이제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해요.
예수님을 정말로 믿고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분이 나를 부르고 계심을 믿고 확신한다면 우리도 용기를 내어 일어나 반응해야 해요.
나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하여 주시는 예수님께 반응 해 일어나, 다시 그 앞으로 돌아오는 결단과 은혜가 있는 오늘 그리고 이번 한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요.
그 결단과 은혜를 이어가기 위해, 오늘 순 모임 시간에 각자의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거에요.
순장님들은 기도제목들을 잘 정리해서 저에게 주시고, 이번 한주 동안 정리한 기도제목들을 하나씩 공유하면서
내가 용기내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처럼,
여러분의 기도가 사랑하는 내 동역자가 다시 돌아오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해줄거에요.
기도제목을 나누시고,
순장님들은 그것을 매일 공유하시면서 함께 기도함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반응하는 매일의 결단을 보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