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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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상호본문 창세기 42:6 50:19~21·신약 상호본문 히브리서 9:15~20-
6.3 주제 흐름 분석
누가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 불리고 있다. 전에 한 미국인이 ‘데니’라는 친구에게 좋은 그리스도전을 추천해 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하자 데니는 ”당신은 누가가 기록한 책을 보았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누가는 이방인이었고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닌 신약성경 기자라는 독특한 특성을 갖고있다. 그는 직업이 의사였고 바로 그러한 사실이 그렇게 넓은 이해를 그에게 주었을 것이다. 목사는 사람의 가장 선한 곳을 보고, 법관은 사람의 가장 나쁜 점을 보며, 의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 있다. 누가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였다.
또한 독특하게 복음서에는 표상이 있다.
마가복음의 표상은 사람이다.
마가복음은 복음서중 가장 단순하고 솔직하게 기록되어있다. 그 책의 특징은 사실주의라고 하며, 예수의 생애에 대한 보고서에 가장 가깝다.
마태복음의 표상은 사자이다.
마태는 유대인 전자로서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하였으며 예수 안에서 메시아를 보았는데, 메시아는 바로 모든 예언자가 예언했던 유다종족이 사자인 것이다.
요한복음의 표상은 독수리이다.
독수리는 어떤 다른 새들보다 높이 날수 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독 독수리만 태양을 직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신학적 복음서이고 그 고매한 사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복음서가 제시하는 주제는 철학자가 평생 고찰하고자 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누가복음의 표상은 송아지이다.
송아지는 희생제물로 드리는 동물이다. 누가는 예수에게서 온 세상을 구속하는 희생제물로 보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누가를 통해 모든 장벽은 무너지고 예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성인이나, 죄인 구별없이 모든 자를 위해 존재하신다. 그는 온 세상의 구세주이다. 그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고 누가복음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누가복음의 저작 연대는 주후 70년대 기록되었다면 예루살렘 멸망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갈등관계에 있다는 것 표현, 사도행전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신앙공동체를 전제함으로 이는 후대 연대가 아니라 초기의 연대를 암시한다. 사도행전이 기록되기 이전이며 주후 62년(바울이 로마에서 가택 연금된 마지막해)보다 늦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가 마가복음의 사본을 받아 사용했음을 감안해야 한다면 위에 언급한 62년보다는 1~2년 이상 일찍 기록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끝나는 시점으로 누가복음 60년대 초기나,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순교가 언급되지 않아서 60년대 초반, 또는 로마 정부와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60년대(네로) 후반으로 제시하므로 누가복음은 주후60년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누가의 서론1:1~4이 독자의 이름을 언급한 그리스-로마 풍의 다른 서문들과 매우 유사한 점을 고려할 때 데오빌로는 아마도 누가의 집필사역을 재정적으로 도운 부유한 헬라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데오빌로에게 썼다고 해서 누가가 오직 데오빌로만을 집필의 유일한 대상자로 여긴 것은 물론 아니다. 교회사 초기부터 추정되는 것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가 역시 데오빌로가 몸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느 성도 공동체에게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저작상황에 대해서 더욱 확신 있게 주장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가 부족하다.
누가는 그 나라가 완전히 알려질 때까지 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는 그 나라가 완전히 알려질 때까지 인내하도록 부탁한다. “이방인의 때‘ 와 같이 예수께서 영광중에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지만 기독교 공동체는 그들에게 시련을 줄 권위들 앞에서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께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이땅에 어려움이 늘어갈수록 가까워 오는 구원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과 윤리를 데오빌로를 위해서 기록했다. 그래서 데오빌로가 다음 사항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확신하게 하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제자로 부름을 받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는 예수를 어떤 존재로 이해해야 하는가,
제자는 예수를 전파하기 위해서 어떻게 공동체의 사역에 동참해야 하는가.
예수의 제자는 새로운 공동체가 예수에 대해서 메시지를 증거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에 적대감을 보이는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는 예수가 이 세상에서 가르치고 보여준 방식대로 살아가야 한다. 누가의 과제는 데오빌로에게 이전에 배운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어서 배운 것을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특별히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이방인들이 들어가게 된것과 관련된 논쟁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제공해 주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안에서 예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누가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인물을 소개하며, 또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인물에게 적대감을 보인다는 것을 언급하다. 구원은 오직 부활 및 승천한 주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것을 통해 주어진다. 공식적인 유대교와는 대조되는 것으로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났다. 새로운 공동체가 유대교에서 분리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예수와 교회는 유대인들에게 언제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의도하시는 소망에 대해서 선포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메시지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와 같은 적대감 때문에 예수는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날까지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지속적인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게 신실해야 한다.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새로운 운동에 함께 하시고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입증해준다.
누가는 그가 데오빌로를 포함한 이방인 독자들이 복음을 바로 이해 할수 있도록 온 정성을 기울이는 사실이 역력하다. 누가는 팔레스틴의 지리적,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잘 모르는 단어들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천국, 하늘에 계신 아버지 대신 그는 하나님 나라. 어버지를 사용하였다.(5:19,6:20,21,48,11:13)
누가는 헬라 문화권 내에 있는 혹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상류층 로마인 독자들에게 글을 쓰고 있다.
누가의 독자들은 유복하며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아마도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증, 혹은 그 믿음을 변호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논증을 필요로 한 것 같다. (1:3~4)
누가-사도행전은 두 권으로 저술된 가운데 첫 번째 누가의 책이다. 헬라-로마 역사에 더 가깝다. 마가 복음은 누가복음의 원전 중 하나이다. 누가복음에는 다양한 주제들의 특별히 나타난다. 그것은 버림받은자, 종교적 부적격자, 가난한자 및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역이다. 이러한 강조점은 제2권 사도행전에서 이방인 선교를 수월하게 다룰 수 있게 한다. 누가복음에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의 줄거리가 이용되며,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땅끝으로 이동한다.
누가의 신학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누가가 이 복음서를 기록한 상황이나 수신자들에 대해서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뚜렷한 관심은 사도행전에서 함께 물건을 통용한 공동체의 모델에서 더욱 강조되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누가복음의 수신자가 다소 부유한 성도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부유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된 궁핍한 성도들을 위해 풍성하게 물질을 나누도록 권면한 것이다.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예수의 긍휼은 다분히 유대적인 상황으로부터 점점 이방 세계로 확산되는 복음의 진전과 더불어 누가가 주로 이방 성도들을 위해 기록한 이방인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지지한다.
누가는 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을까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은 눅1:3~4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이 구절들은 누가의 저작 배후에 있는 역사적, 교리 문답적, 변증론적, 그리고 어쩌면 목회적인 동기까지도 보여준다.
누가복음의 전체의 핵심적인 관점은 구원 역사와 관련된 하나님의 역할과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가장 잘 반영한다. 오직 누가복음에만 고유한 자료에 대한 개관과 마찬가지로 또한 누가복음의 구조와 신학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이와 같은 핵심 관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의 신실한 자세,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예수가 다시 오는 것에 대한 견고한 소망에 대해 세부적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새로운 공동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있는 어떤 이방인을 연상시켜준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 이방인들이 새로운 공동체에 포함되는 것, 초대교회가 사람들에게서 거부를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을 넌지시 알려준다.
누가복음에 제시되는 많은 윤리적인 권면도 이와 같은 접근을 암시해준다. 아마도 데오빌로는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데오빌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회와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오빌로는 자신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많은 박해를 받고 있던 이 새로운 공동체에 진정으로 속해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소개해 준다.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주가는 하나님이 예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또한 예수가 소망에 대해서 어떻게 선포했는지를 알려준다. 비록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다는 것을 거부하지만 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변호하고자 한다. 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변호하고자 한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도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그래서 데오빌로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며, 헌신적인 신앙생활를 하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심지어 유대인들이 예수와 새로운 공동체를 거부하는 한 가운데서도 데오빌로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장차 예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게 하려는 것이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가는 오직 데오빌로 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은 긴장감을 느끼고 있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쓴 것이다. 원래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된 운동에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어떤 이방인은 누가가 제공하는 확실한 정보를 통해서 유익을 얻을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에 많은 유대인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나, 또는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경험하면서 고민하고 있던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 일을 인도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새로운 일에 동참하도록 이스라엘을 다양한 방법으로 초대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는 이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지고 널리 확장되어 갈 것이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렇게 될것이라고 전파했기 때문이다.
누가의 내러티브는 내러티브의 진전을 이끄는 계획, 존중을 받거나 반대에 직면하게 되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이 목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원이 누가의 중심 주제라면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내용으로 가장 이른 지점에 나타나는 것이 마리아가 하나님을 “하나님 내 구주”로 부르는 것임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관점은 내러티브에 직접 드러나기도 한다. 하나님이 세례를 받는 예수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배후에는 성령이 계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효력있게 만드는 힘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고, 성경을 읽지만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 사람들과 충돌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오랜 의제와 예수의 사역이 일관성을 보인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예수의 사명은 하나님의 목적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이사실은 무엇보다 예수의 일생이 성경의 방식에 따른 것으로 입증되고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를 신원하신 것으로 입증된다.
누가복음의 의제를 끌고가는 주체는 하나님이지만 누가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다. 누가의 내러티브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달리 누가의 청중이 복음서의 시작부터 예수의 정체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차지하는 예수의 역할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큰 복이다. 예수는 선지자로 묘사되지만 선지자보다 더 큰 인물이다. 예수는 오랫동안 기다린 다윗 계통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왕적 선지자의 운명을 성취한다. 선지자인 예수에게 죽음이 필요하지만 죽음이 마지막은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보다는 예수가 어떻게 그의 역할을 이룰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복음서의 초반부터 예수는 구주로 밝혀진다 (2:11). 예수는 구주의 역할을 다양한 방식으로 성취해 간다. 예수가 치유의 기적을 행하고, 식탁 교제를 확대하는 것은 가장 눈에 띄는 장면에 해당한다. 누가는 치유와 식탁 교제를 강조하는데, 두 행위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는 식사와 치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주로 사회의 주변부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임해 있음을 전한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진 복음”(4:18–19) 이다. 당연히 예수의 이런 행위는 그가 전한 말씀과 일치하며, 예수의 가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삶을 보여 주었으며, 사람들을 위해 (만일 그들이 듣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 그리고 하나님에게 옳게 반응한 태도를 가르쳤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로의 부르심은 근본적으로 예수와 함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 편에 함께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 위해서는 관심의 초점을 상속된 지위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였음을 행동을 통해 보여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참 “아브라함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 특히 궁핍한 사람들을 향해 손을 벌려 긍휼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이 행동하는 것처럼 살 것을 사람들에게 요청한다. 이런 삶은 로마 세계에서는 전형적이었던 명예와 신분을 중시하는 분위기에 나타난 전투적이고 경쟁적인 삶의 형태와 대조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김에서 비롯되는 행위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는 자들을 선하게 대하라. 호의에 보답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환대하라. 되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주라.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력히 경험함으로써 성품과 신념과 헌신이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이런 삶을 가로막는 핵심 경쟁자는 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돈은 돈 자체라기보다는 돈의 다스림을 말한다. 이 경쟁자는 사회의 칭송을 갈망하게 하고, 그래서 낮은 지위의, 가난한, 잃어버린, 소외된 사람들과 권력과 특권을 지닌 사람들을 차별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능력을 신실하게 구현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부족함을 보인다. 제자들과 달리 내러티브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는 이들은 충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예상과 달리 하나님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모범적인 태도로 예수의 메시지에 반응한다. 세 가지 예를 언급해 보면,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 (7:36–50), 부자 세리 (19:1–10), 십자가에 달린 강도다 (23:39–43). 이들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와 “함께”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를 배우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이 가져오고, 전하고, 예고하는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 따라 새로운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모두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 증인의 역할을 수행할 때 필요하다.
제자들이 예수가 제시하고 본을 보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살아간다. 예수에게 적대적인 이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평가하며, 예수의 사역을 자신들의 지도력을 위협하고 현재의 질서를 장악하고 있는 제도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간단히 말해, 이들은 예수를 하나님 (즉 이들이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막아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목적을 반대한다. 누가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귀신의 세력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포함해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목적을 섬기는 자들이다. 적개심의 강은 흘러넘치게 되고, 결국 강둑을 넘어 예수에게 고통을 가하고, 드디어 그를 버려 십자가에 처형해 버린다. 적개심의 모티프는 누가의 내러티브를 높은 긴장감으로 몰고 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러니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고 반대를 극복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누가의 내러티브는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구원은 누가복음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에 해당한다. 구원은 저 세상의 것만도 미래의 것만도 아니다. 구원은 오늘의 삶을 존중하고, 인생을 온전히 회복하며, 인간 공동체를 생동감 있게 만들고,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며,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공동체 가운데 실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장하게 한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사회적 구원과 영적 구원, 또는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적 구원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접근을 거부한다. 구원은 인생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구원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활동과 같이 삶 전체를 포괄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최고의 은인이다. 이 하나님의 구속 목적은 예수의 생애를 통해 나타나고, 하나님의 메시지는 최고의 은인이 베푸는 은덕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린다
.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계에 대 전환이 일어난다.
강한 자가 이기고 승리하던 세상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가 환영받은 세상이 새로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위계질서와 경제 질서의 전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구원질서의 확립을 나타낸다.
약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가 구원받은 대 전환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전개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지오르지오네의 『양치기들의 경배』
유월절
유월절로 번역된 히브리어 ‘페사흐’의 기본 의미는 ‘넘어가다. 통과하다’ 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전날 밤 죽음의 사자가 전하는 재앙을 면하고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가리킨다. 이날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일이기도 하다. 헬라어 파스카는 히브리어 페사흐를 음역한 것이다.
유월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12장에 소상하게 소개되고 있다. 출애굽 전날 밤 애굽에 내려진 마지막 재앙(10번째 재앙)은 애굽 왕(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을 돌리는 여종의 장자, 심지어 가축의 첫 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를 대비해 이스라엘 백성은 1년 된 수컷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그래서 이 피가 있는 집은 죽음의 천사가 그냥 넘어가(지나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넘어가다’는 뜻의 ‘유월절’이란 명칭이 생겼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을 해의 시작인 유대력 1월(아빕 월, 가나안 월력 니산 월, 태양력 3–4월경)로 정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유대력 1월 14일에 유월절을, 그 다음날부터 1주간 무교절을 지켰는데, 이는 유월절에 무교병(無酵餠, 누룩 없는 떡)을 먹은 데서 유래하였다.
유월절 절차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1월 10일에 유월절 양을 준비하고(출 12:3–4), 13일 저녁에 등불을 켜고 집안의 누룩을 제거하였다. 다음날 14일 저녁에는 준비한 양(또는 염소)을 잡고 우슬초에 양의 피를 적셔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를 했다. 이때는 잡은 고기와 머리, 다리, 내장을 모두 불에 구워 무교병, 쓴 나물과 함께 먹고 남는 것은 불에 태워야 했다. 또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은 채 날이 새면 급히 애굽을 떠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22:1의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은 엄밀하게 말하면 무교절 직후였다. 하지만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에 온 김에 두 명절을 다 쇠려했기 때문에 보통 둘은 하나님의 명절로 묘사된다.
유월절 준비 때나 유월절 식사때 모두 약속과 배신에 대한 예시가 섞여있다. 여기에 나오는 유월절 자체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구약 선지자들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자신의 백성을 다시한번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실 새로운 출애굽을 기다렸다. 하지만 당시 유대교는 새로은 어린양이 아니라 새로운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월절 식사는 밤에 해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사월이며 오후 6시경 해가 졌으므로 식사는 그때 시작해야 했다. 명절때는 친밀한 식탁교제를 나누었다. 보통 한 두 가족이 함께 식사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식사 때는 앉았지만 유월절과 같은 명절때는 ‘기대어서’먹었다. ‘앉으사’는 기대어서 앉는 것을 말한다. 유대 전통은 보통 하나님 나라의 때를 잔치로 묘사했다. 통상적인 식사 때와 유월절에는 포도주잔에 축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보통때는 집안의 가장이 식사 전에 떡과 포도주에 대해 통상적인 감사기도를 드렸으나, 유월절 식사때는 떡과 포도주에 특별한 축복의 말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고대 유대 독자들은 함께 식사를 나눈 사람의 배신을 특별히 수치로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손님 접대와 식탁교제를 친밀한 유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에 비해 언제자 힘이 없었으며, 사회적 지위도 없었다. 종은 주인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앉아서‘는 헬라인이 평소 식사 때 취하는 자세이며 팔레스틴 유대인이 명절 때 취하는 자세이다.
눅 22장의 구조 분석
눅 22장 24~30 본문 구조 분석
7. 예수의 고난과 죽음 (22:1–23:56)
7.1. 마지막 만찬 (22:1–38)
7.1.1. 음모 (22:1–6)
7.1.2. 유월절을 위한 준비 (22:7–13)
7.1.3. 유월절 식사에서 가르치는 예수
(22:14–38)
7.1.3.1. 유월절의 기념과 성취
(22:14–20)
7.1.3.2. 식탁의 배반자 (22:21–23)
7.1.3.3. 섬김과 왕적 권위 (22:24–30)
7.1.3.4. 다가오는 시련 (22:31–38)
7.2. 감람산의 예수 (22:39–46)
7.3. 예수가 체포하러 온 무리를 만나다 (22:47–53)
7.4. 대제사장의 관저에 있는 베드로와 예수
(22:54–65)
7.5. 예수의 재판 (22:66–23:25)
7.5.1.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 (22:66–71)
A 24,25 논쟁, 이방인 임금, 세상 왕국,은인
B 26,27 큰자 vs 섬기는자
B′28,29 너희 나와 함께, 내가 너희에게 맡겨
A′30 하나님 나라 왕국
구조분석
이방인의 집권자, 세상 권력자, 은인
① 권력자(權力者, ruler)
권력자는 ‘힘 있는자’를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백성의 지도자’를 가리킨다. “권력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솨리트”(שַׁלִּיט)는 ‘지배하다’, ‘통제하다’는 뜻의 동사 ‘솨라트’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주권자’(전 10:5), ‘총리’(창 42:6) 등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헬라어로는 ‘헤게몬’(ἡγεμών)이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는 ‘인도하다’, ‘길잡이가 되다’는 뜻의 동사 ‘헤게오마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고위 관리나 군사령관, 고을의 두령, 방백 등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마 2:6; 벧전 2:14). 참고로 성경에서 ‘권력’(power, might)이란 ① 왕의 권력(왕하 13:8), ② 군사력(삿 8:21), 또는 ③ 사람들이 힘으로 믿고 의지하고 섬기는 재물이나 보화(스 4:23) 등을 의미한다.
권세는 권력과 세력, 상대방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복종시킬 수 있는 힘과 세력을 말한다. 일명 ‘권위’, ‘권능’(權能). 이는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자신이 만드신 피조 세계에 대한 보편적이고 영원한 지배력(왕권)을 가리킨다(롬 9:21). 그에 비해 사람과 관련하여서는, 하나님이나 상급 권위자 혹은 권위 있는 기관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권위, 즉 ‘위임된 권세’를 가리킨다. 사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다(롬 13:1).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사탄’에 대해 한 차례 ‘권세자’라 묘사하고 있다(롬 8:38). 힘을 가지고 무리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권력자는 성경에서 천사장 미가엘애 대한 칭호에서 “큰 군주”로 번역된다. 이 말은 임금, 우두머리, 지도자, 주인 등을 뜻하는데, 그 역할에 따라서 방백, 군대장관, 지휘관, 우두머리, 고관, 군주, 지도자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위임된 권세를 보면, ① 백성에 대한 국가나 정부의 권세(눅 22:25; 롬 13:1–6), ②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세(고전 11:7–10; 딤전 2:12), ③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권세(행 26:10–12), ④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창 1:26–28), ⑤ 불신 세상에 대한 성도의 권세(단 12:7) 등이 있다. 이외에도 ‘권세’는 상징적 용례로도 자주 사용되는데, ‘혀의 권세’(잠 18:21), ‘칼의 권세’(욥 5:20), ‘악인의 권세’(시 125:3), ‘음부(스올)의 권세’(시 49:15), ‘흑암의 권세’(골 1:13), ‘짐승의 권세’(계 17:12–13), ‘사망의 권세’(계 6:8) 등이 있다.
권세자들의 권위는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권력과 위세 또는 개인적인 덕망이나 문벌등으로 생겨난 사회적 세력, 어떤 분야에서 탁월한 기술이나 지식들을 가리킨다.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와 인간의 권위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에 ‘하나님의 권위는 다른 존재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본래부터 지니고 계시며 영원히 스스로 유지하시는 권위이다.(신4:39~40, 사46:9~11) 만민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인간의 권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롬13:1) 즉 인간이 지닌 모든 권위는 위임된 권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권적인 권위에 의해 세워진 각종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한다.(벧전2:18)
유대인은 이방인의 권력모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대 근동에서 왕들은 오랫동안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했으며 폭군처럼 다스렸다. 헬라 통치자들도 동방 지중해의 많은 지역에서 같은 태도를 취했다. 지배자들 및 유리한 권력자의 위치에서 은혜를 나누어 주는 사람은 은인이라고 불렀다. 은혜를 베푸는 관습은 헬라사회에서 널리 칭찬을 받았다.
종은 주인에 비해 언제나 힘이 없었으며, 사회적 지위도 없었다. 종은 주인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앉아서‘는 헬라인이 평소 식사 때 취하는 자세이며 팔레스틴 유대인이 명절 때 취하는 자세이다.
② 은인(선정을 베푸는 사람, benefactor)
유대 고대사에 나타난 은인
요세푸스8:1 야곱은 애굽에서 17년간 산후 병이 들어 아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아들들이 번영을 눅리기를 위해 기도하고 rmelmf 각자가 가나안 ᄄᆞᆼ에서 어떻게 살게 될것인가를 예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후에 일어날 것이었다. 야곱은 또한 요셉이 형들의 악한 소행을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은인에게도 베풀기 어려운 혜택들을 베풀고 친절하게 대해 준 데 대한 칭찬을 길게 늘어 놓았다.
요세푸스11:1 그러나 사울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오랜 견딜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에게서나 백성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을 보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충실한 종들에게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고 그의 덕을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자기에게 내린 비밀지령과 사울의 의도에 대해 다윗에게 미리 귀뜸해 주었다. 요나단은 백성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고 사울 자신에게도 은인이 되는 그런 자를 죽이는 것은 옳지 않아 다윗은 요나단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사울 왕 앞에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기로 했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의도를 확인하고 도시 앞 평지로 무술 연습을 하는 척하고 나갔으나 실상을 약속대로 다윗에게 아버지의 의중을 전달하였다. 다윗은 요나단을 보고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요나단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이에 요나단은 다윗을 일으켜 세우고 둘이 서로 껴안고 울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맹세를 하고 헤어졌다.
아하수에로 왕이 모르드개에 관한 왕실의 기록을 읽고 그에게 보답, 영예를 주려고 할 때에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 이므로 우리가 그를 이렇게 높인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며 하만에게 모르드개를 높일 것을 명한다.
하스모니아 왕조, 맛다디아, 유다, 요나단, 시몬, 요한 힐카누스
시몬은 대제사장이 되고 유대인의 왕으로 즉위한 첫 해에 마제도니아이들의 속박에서 유대인들을 해방시켰으며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했다. 유대인들은 이같은 자유와 조공의 면제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은 앗수르 왕국 청건 후 170 년 즉 니카토르라고 불리는 셀류쿠스가 수리아를 장악한지 17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유대 백성들이 시몬을 얼마나 존경하고 좋아했는지는 개인 상호간의 계약 문서나 공공기록에서 조차도 “유대인의 은인이요 지배자인 시몬의 통치 원년에”(in the first year of Simon the benefactor, and ethnarch of the Jews)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유대인들은 시몬의 통치 밑에서 행복을 누렸으며 주변의 적들을 눌러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몬은 가사라와 욥바와 얌니아 시를 함락시키는 대전과를 올렸을 뿐아니라 예루살렘 성채를 무력으로 탈환하여 기초까지 철저히 파괴하였다. 시몬는 성채를 완전히 파괴한 후 성채가 세워진 산을 깎아내려 성전보다 낮게 만드는 것이 유대인의 안전을 위한 최선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제 이산을 성전보다 낮게 깎아내리도록 합시다. 유대인들은 시몬의 제의를 동의했다.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제안인데 어찌 싫다 하겠는가. 이에 그들은 모두 공사에 나서서 산을 깎아내려 도시내의 다른 지역과 같은 높이로 만드는데 쉬지 않고 꼬박 이틀 밤낮이 걸렸다. 성채가 서 있던 산을 평탄케 하니 결국은 성전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출물이 되었다. 이같은 일들이 모두 시몬의 지휘아래 달성된 업적이었다.
고대근동의 종주와 봉신관계
봉신
고대 근동에서의 다신론은 왕들, 나라들 및 국가적 혹은 개인적 관심으로 다양한 신들을 조작하려고 노력하는 개개인들과 더불어 신-영토-사람들의 종교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관한 성경 외적인 사례는 에살핫돈의 봉신 조약 서문이다. 이 서문은 아슈르의 도시들, 칼라, 아르벨라, 칼지, 하란, 앗시리아, 바빌론, 니푸르, 수메르 및 아카드의 신들에게 "모든 대지의 신들" 및 "하늘과 땅의 신들"과 더불어 들어가는 계약의 보증인으로서 행동해 달라고 호소한다
통치자들 혹은 왕들은 사람들과 신들 사이의 대표 혹은 중계자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신들에 대한 왕들의 관계는 궁정과 대표된 백성들 모두를 위한 중요한 파생적 효과를 가진 것으로 비춰졌다. 게다가, 왕들은 종종 신적인 특성을 소유한 것으로 여겨졌다. 공식적인 종교 체계에서, 사제적인 전문가들은 종종 종교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도록 채용되었다.
조약
히타이트 봉신 조약과 우가리트로부터 발굴된 문헌들은 모세 언약 속에서 발견되는 축복과 저주를 포함하고 있다. 6). 신명기 8장 및 28절과 같은 본문들은 보호 (특정 개인 및 그의 가족, 그의 집, 그가 속한 나라), 번영, 그리고 그 왕국이 영원히 지속될 것 등과 같은 축복들을 언급하고 있다. 7). 히타이트 봉신 조약 속의 저주들은 또한 구약 성경의 다양한 언약들 속에서 발견되는 저주들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1). 축복과 저주는 대개 봉신 조약들의 끝 부분에 나타난다. 2). 저주는 항상 심판을 시행하도록 신들을 부른다. 펜샴은 "저주는 불성실함이나, 혹은 조약의 조항들에 관한 약속의 불이행이라는 전체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3). 앗시리아 왕 에살핫돈의 봉신 조약들은 반역과 불순종을 방지하도록 고안된 것들이었다.
맹세
히타이트 봉신 조약들과 같이 히타이트인들의 맹세는 또한 언약 당사자를 저주 아래 두었다. 히타이트의 문헌인 KUB 26.25는 저주를 받는 것을 나타내는 기름과 옷을 뒤집어쓰는 것을 포함하는 맹세 의식에 관해 언급한다. 조약에 대한 맹세에 불충실한 자들은 맹세의 저주로 고통을 받고는 그들의 피부 가죽에 해를 입을 것이다. 키츠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저주가 대중적으로 나타난 것의 한 요소로서, 저주가 몸의 옷에 나타나는 것은 전적으로 맹세를 어긴자가 신성하게 정죄 받은 상태임을 가리킨다". 아카드인들의 문헌도 이와 비슷하게 달의 신 신에게 하늘로부터 저주를 보내어 맹세를 위반한 자의 몸을 관통할 것을 호소하면서 의복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피부의 고통을 받고나서 언약 당사자인 개인은 부정하다고 간주되었으며, 도시로부터 쫓겨나서 방랑자로 살아가야만 했다.
고대 근동의 봉신 조약은 신명기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주전 2000년경의 고대 히타이트 조약은 히타이트 제국이 주변의 여러속국들과 맺은 종주권 조약으로서 속국인 봉신(vassal)이 종주(suzerain lord)인 히타이트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조약이다. 히타이트 국제 조약들은 신명기의 문학적 구조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신명기가 모세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칠십인역의 루키안(Lucianic)역본에 따르면 (왕하 13:22이후) 하사엘은 또한 블레셋 땅을 정복하고 동쪽의 유다를 향했다. 유다의 왕 요아스는 하사엘에게 많은 공물을 보냈는데 그것으로 아마 봉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후 하사엘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왕하12:17~18
종주가 봉신들과 맺은 조약에는 종주의 신실함과 자비함에 대한 응답으로 봉신의 충성과 사랑을 표기하고 양측이 각각 조약의 사본을 가져야 한다. 신명기에서도 종주로서의 하나님과 봉신인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적 관계를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언약의 전문에 해당하는 신명기 1:1~5에서는 종주이신 여호와께서 모든 언약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모세에게 자신의 명령을 주셨다는 것을 소개한다. 신명기의 역사적 서문인 1:6~3:39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광야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인도한 여정들을 소개한다. 여러 조항들이 소개된 신명기 4~26장에서는 십계명을 비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 하는 각종 율법들을 소개한다.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큰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율법들을 기록해야 했다. 그리고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면 그들에게 율법을 낭독하여 듣게 해야 했다. 신명기 28장에서 종주이신 하나님께서 봉신인 백성들이 언약에 더떻게 반응하는지에 ᄄᆞ라 축복과 저주를 선언한다. 신명기는 고대 근동의 히타이트 조약과 유사한 형식을 일부 공유하고 있다. 모세는 신명기를 기록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소통을 위해 고대 근동의 조약들과 문학적 형식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하였고 이는 신명기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후견인 관계와 호혜
이방 세계에서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라고 기록하고 있는 눅22:25은 고대 지중해 세계를 후원적 사회라 표현하는 것이 적당함을 입증해 주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의 호의를 주고 받는 것이 “인간 사회의 주요한 결속을 이루는 실천”이 된다. 이는 지중해에 있는 현대의 각종 사회들에게도 적용되는 표현으로 이런 실천이 얼마나 이들 문화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는가 하는 것은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스도-로마세계는 그물망과 같은 호의와 충성의 하부구조를 가진 후원의 사회였다. 이러한 결속은 서로 “친구”라 부르고 또 “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한다”라는 격언이 잘 어울리는 그런 사회적 동류 그룹들 사이에 존재하였다. 이런 관계에 있는 동반자들은 서로 호의를 교환하였고 또 필요로 했으며 어느 쪽도 열등하거나 혹은 의존적 관계에 있지 아니했다. 그러한 결속은 사회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분명히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의 후견인이 되었다. 이러한 관계에서도 열등한 쪽의 민감성을 고려하여 우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빌라도가 요19:12에서 “가이사의 충신”즉 가이사의 친구라 불림) 이 체계는 호의의 양을 세밀하게 측정하는 데까지 발전하지 않아기 때문에 상호 헌신은 대체로 오래 지속되었다. 말하자면 이 제도의 핵심은 대등한 교환이 아니라 지속적인 교환에 있다. 호의 수여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이루어지는 상호결속은 사회적 단결력을 유지시키는 데 중요한 접착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감사는 매우 중요한 덕이되고, 배은망덕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심각한 죄”가 된다.
부와 재산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저런 모양으로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세상에서 자신들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후원을 찾아야 했다. 후견인들은 돈, 곡물, 취업이나 땅 등과 같은 것들을 후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유대관계가 잘 매정져 잇는 사람들은 전문적 혹은 사회적 진출에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잇깅 때문에 그 만큼 더 많은 후원 요청을 받았다. 그러한 호의를 입은 사람은 그 후견인의 피후견인이 되어서 그의 명예에 기여할 수 있도록 받은 호의와 또 그에 대한 감사를 널리 알려야 하는 의무를 받아들였다. 그 피후견인은 또 후견인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받아 들여서 후견인의 군력에 기여하는 어떤 일을 부탁 받을수도 있었다. 선물을 받고 또 감사의 의무를 지는 것은 불가분 관계이다. 이 후원의 조직망에서 제 3자는 “중개인”, “중재자”라 불렸다. 이 중개인은 후견인으로 행동하지만 그가 피후견인에게 실제로 줄 수 있는 기본적인 선물은 더 적합하고 더 권력있는 후견인을 접촉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더 권력있는 후견인은 중개인의 “친구”, 중개인 가족 중의 한 사람, 혹은 중개인 자신의 후견인 이기도했다.
누가와 후견인 관계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라는 눅22:25의 진술이 아니더라도 누가는 이방인 세계의 후견인에 대해, 그리고 호혜 및 기대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고대사회의 후견인의 임무에 대해 아는 것이 어떻게 누가복음에 대한 민감하고 통찰력있는 독자가 되게 하는가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된다. 누가의 기사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하나님께서 돌보셨다.”라는 표현으로 가득하다.(눅1:25,28,30). 누가복음 전체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로 은혜와 유익을 구해야 하는 후견인으로 묘사되며 기도에 대한 응답이 보장된다.(눅1:13) 하나님은 엘리사벳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고 잉태치 못하는 그녀의 부끄러움을 없이 하신다. 하나님은 마리아가 구하지 않은 은혜를 보여주시고 그녀를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로 삼는다.
예수는 나중에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해 가르치신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9~13)
그들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은 분명하게 하나님은 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준비하셨다. 마태복음은 이 선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나(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는 그것이 성령이라고 말한다.
누가 기사의 찬양들은 주로 하나님의 후원에 대한 찬양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러낸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이와같이 사가랴도 받은 은혜에 대한 하나님을 찬양한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1:68~69)
또한 마리아의 노래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녀를 도와주셨느가에 대해 찬양한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눅1:50~54)
하나님의 후원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 주리고 비천한 자들을 향하시며 그들을 강하게 하신다. 이 노래는 특히 하나님을 약하고 가난한 잘를 도우시는 자로 찬양한다. 이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누가의 전반적인 관심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또한 하나님은 마리아와 사가랴의 노래에서 이스라엘의 신실하신 후견인으로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자기 백성들을 도와주셨다.
누가복음 2:1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대한 찬양 속에 인상적으로 개입한다. 누가는 여기서 세상의 후견인으로 자처하는 가이사 아구스도를 소개한다. 그는 곳곳에서 구원자와 돕는자로 환영을 받는 자로 그에 대한 신적 숭배는 제국이 하사하는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누가의 탄생기사는 여러 면에서 신적 구원의 도구로서 황제의 제국적 이상에 맞서는 반론이다. 예수야말로 구원을 가져오는 분이시며 그의 탄생은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왔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2:10~11,14
예수는 로마의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으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를 인류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누가복음7:2~10 은 후견인- 중개인- 피후견인의 관계와 역할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얻기 위해 은혜의 망릉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잘 보여준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만 만나고 백부장은 직접 만난적이 없다는 점에서 마태복음과 병행구와 많이 다르다. 형성되고 있는 후견인- 피후견인 관계의 얽힌 망은 누가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는가? 누가 누구에게 은혜를 구하고 있는가, 중개하는 자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백부장은 오직 신만이 베풀수 있는 은혜-정한 시간에 기적적인 치유를 필요로 한다. 예수의 치유행위에 관해 들은 그는 예수가 이러한 은혜를 자신에게도 베풀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 권력자인 백부장이 어떻게 갈릴리의 기적을 행하는 자에게 다가가 이 은혜를 받을 기회를 극대화 할 것인가. 그에게는 이전에 자신이 공동체의 회당을 지어줌으로써 은혜를 베풀어준 예수의 동료 유대인들이 있다. 이제 그들에게 은혜를 갚은 적절한 때 백부장의 편에 서서 예수의 은혜를 매개할 중개인의 역할을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는 예수가 가장 쉽게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장로들을 보내어 자신의 간구를 전하게 하였다. 그들은 백부장을 위해 이일을 하며 그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언을 덧붙인다. 백부장은 다른 메시지를 위해 자신의 벗들을 보냄으로써 예수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를 보여준다. 예수는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이 자신과 신적 은혜를 연결할 수 있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으시고 원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또한 누가는 중개인에 관한 도전적인 말씀도 가지고 있다. 1) 그는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아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수 있는자가 없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맏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눅10:22)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누9:48)고 말씀하신다. 개인적 후견인으로서 예수와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가장 높은 후견인이신 하나님께 갈수 있는 후원을 받게 된 것이다.
본문의 후견인과 피후견인 중개인
그러나 본문의 상황에서 청중은 중개인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뒤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6–48). 사람들은 보다 위대하고 능력 있는 후견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들의 영역에서 보다 위대하거나 능력 있는 자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중보자나 위대한 후견인의 중개인으로서 약한 자나 어린 자를 찾는 자는 없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린 아이나 약한 자를 영접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에게 다가가기 위한 중개인은 사실 별 볼일 없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 세상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세상적 생각과 얼마나 다른가?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중개인이라는 명예를 주신 이 비천하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아야 했다.
우리는 끝으로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함을 받은 사건(눅 17:11–19)이 피후견인에게 있어서 감사가 얼마나 필요한 반응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감사는 받은 은혜에 대해 영광과 감사를 돌릴 줄 아는 올바른 피후견인의 표시이다(눅 1:46–49, 2:20, 7:16, 18:43, 19:37).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이것은 이상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열 명–훌륭한 수혜자와 그렇지 못한 수혜자–모두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감사를 표한 한 명만이 예수의 칭찬을 받는다.
잠언의 은인
13장21절 이 잠언은 행위-결과의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일반적으로 행위자는 무엇인가를 행한다. 그러나 이 잠언에서 사물이나 재앙과 보응은 불행과 행운은 행위자로 인격화되며, 목적어는 “죄인”과 “의인”이라는 인격체다. 이 의인화에서 죄인이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악은 그들에게 되돌아가며, 의인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은 그들에게 되돌아간다. “재앙” (‘라아’, 또는 “악.” 1:16 참고) 은 사냥꾼으로 의인화된다. 피의 복수자가 살인자를 추적하듯이 (민 35:19; 시 140:11[12]) 다른 사람에게 행한 악은 죄인 (‘하타임’, 1:10 참고) 을 끝까지 추적하여 (‘테라데프’, 11:19 참고) 뒤쫓고 공격하며 파괴시킨다. 그들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추구한 악은 (11:19; 12:11) 이제 그들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헬라 문학은 이것을 보응이라는 의미를 각인시킨다. 반면에 선한 것, 토브 선한 보응, 문자적 의미는 “선한”은 “의인에게 보상하는 은인으로 의인화된다. 의인이 다른 사람에게 베푼 생명의 유인ㄱ은 이제 그들에게 같은 유익을 베푼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 작은 자중 하나에게 베푼 냉수 한 그릇조차 또는 주의 종에게 베푼 섬김은(마10:4)은 잊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히6:10
22절 의인에게 이른 선한 보응은 영구적이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승되며 죄인을 파괴하는 재앙은 그들이 비축한 재물을 의인에게 돌려준다. 토브는 물질적 선을 가리키지만 22절 첫 번째 단어에서는 선한 사람 (보누스)를 가리킨다. 창조 목적을 따라 사는 자는 그 산업을 ”자자손손“ 끼친다. 는 것은 가족의 유산을 후손에게 영구히 전수한다는 뜻이다. 산업은 재물을 가리키며 이곳에서는 힘이나 권력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모든 가치있는 재산을 가리키는 환유로 사용된다. 재물은 그것을 가진 자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호의적인 상황에 두지만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인다.“ 악인은 재물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쓰일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우주적 나라를 섬기는 자들을 위해 쌓은것이된다. 이 잠언은 악인이 거짓 재물을 잠시 쌓았으며, 그들에 대한 보응은 세상적 질서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 잠언은 ”선한“ 가정이 유업을 이어 갈 것을 보여준다. 대조적으로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인의 자녀는 그들의 유산을 물 쓰듯 낭비할 수 있다.
③ 섬기는 자, 섬기다(사역)-다른 사람의 바람이나 필요에 참여하다.
원격문맥(신약)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상호 본문성
행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행27: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롬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빌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히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히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구약
출28:1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호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왕상12:7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하10:19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아오게 하라 모든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계책을 씀이라
대상9:28 그 중에 어떤 자는 섬기는 데 쓰는 기구를 맡아서 그 수효대로 들여가고 수효대로 내오며
대상23: 28 그 직분은 아론의 자손을 도와 여호와의 성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또 모든 성물을 정결하게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과
대상24:3 다윗이 엘르아살의 자손 사독과 이다말의 자손 아히멜렉과 더불어 그들을 나누어 각각 그 섬기는 직무를 맡겼는데
대상26:12 이상은 다 문지기의 반장으로서 그 형제처럼 직임을 얻어 여호와의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라
대상 26:12 까지의 섬김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일이 전부 그것이 너희에게 옳지 않게 여기거든 너희의 섬길자를 택하라고 여호수아가 말함
대상 26:30에서 비로서 섬김의 의미가 왕을 섬기는 직임을 처음으로 나타낸다.
대상26:30 헤브론 자손 중에 하사뱌와 그의 동족 용사 천칠백 명은 요단 서쪽에서 이스라엘을 주관하여 여호와의 모든 일과 왕을 섬기는 직임을 맡았으며
대상28:1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고관들 곧 각 지파의 어른과 왕을 섬기는 반장들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및 왕과 왕자의 모든 소유와 가축의 감독과 내시와 장사와 모든 용사를 예루살렘으로 소집하고
대하 22:8 예후로 하여금 아합의 집을 심판하게 하실때에 유다 방백들과 아하시야의 형제들의 아들들 곧 아하시야를 섬기는 자들을 만나서 죽였고
느10: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렘33:22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라
단6:16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단6:20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단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말3:17,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상호 본문성, 신약 서신서
딤후1: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몬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벧전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διακονηθεῖσα ὑφʼ ἡμῶν,)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후8:19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고후8: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διακονουμένῃ ὑφʼ ἡμῶν)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8:19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섬기는)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22 자기를 돕는(섬기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④ 맡기다. 위임하다. 히브리어 등가 카라트
창9: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창15: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출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렘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행3: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히8: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갸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히10: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누가복음 거시구조
1.프롤로그(1:1~4)
2.예수의 탄생과 소년시절(1:5~2:52)
3.예수의 사역을 위한 준비(3:1~4:13)
4.예수의 갈릴리 사역(4:14~9:50)
5.예루살렘으로 가는길(9:51~19:48)
6.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가르침(20:1~21:38)
7.예수의 고난과 죽음(22:1~23:56)
8.예수의 부활, 승귀(24:1~53)
문맥
예루살렘으로 가는길(9:51~19:48)
예루살렘 여행 내러티브는 예수의 행위와 말씀을 통해 더 진전시켜 나간다. 누가의 중앙 섹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구원하는 예수의 사명을 기억하기 쉽게 요약한다. 예수를 배척하는 세력을 삼중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극도의 반대를 만나게 될것과 예수가 향하고 있는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을 전제로 한다. 갈릴리 섹션 마지막에 나타난 예수의 수난 모티브는 중안섹션에 이르러 예수의 수난 예고를 더욱 강조된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수난을 예고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여행 자체는 수난의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을 향하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제자도의 요구나 예수가 겪을 반대를 이해해야 한다. 예루살렘 여행에 나타나는 또 다른 내러티브는 제자들의 완고함을 통해 내러티브에서 얼마전에 드러난 것이다. 여행 내러티브에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교육적 내용과 더불어 누가의 여행 내러티브가 제자들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알린다. 예루살렘 여행 내러티브의 주된 목적은 예수가 떠난 이후의 시간을 준비하는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모습은 충격적이고 분명히 실망스러운 것이다. 갈릴리 섹션의 마지막에서 누가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9:45). 참담하게도 예루살렘 여행의 말미에도 이런 평가가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번에도 수난 예고에 이어서 제자들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18:34). 여기서 두 가지 사항이 중요하다. 첫째, 우리는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제자들의 계몽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24장).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 이후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자신의 저술 상황에서 그의 청중이 “깨닫게” 되기를, 즉 진정한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기대를 전달할 수 있다. 둘째, 누가가 묘사한 것처럼 제자도는 새로운 관계망 내에서 자신을 재구성할 것, 충성의 대상을 바꿀 것, 새로운 성품과 민감성을 체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회개”(예수의 사역에는 아직 나오지 않은 용어이지만, 10:13을 보라) 는 예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새 공동체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에 대한 누가복음 전체에서는 더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예수의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변모 장면에서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할 때 나온 용어다 누가는 예루살렘을 더 강조한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예수가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곳이기 때문이다 (9:31, 51, 53). 하나님의 목적이 나타나게 되고 성취되는 곳은 바로 유대 세계의 중심부, 성소와 성스러운 백성이 있는 예루살렘이다. 바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상을 위한 선교가 시작되어야 한다. 누가의 관심은 여행의 경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실현되는 것에 관심을 두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새 백성을 만드는 주제를 다룬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가르침(20:1~21:38)
예수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성전이 원래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성전은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된 계시의 중심이었다 (19:45–48). 47절에서 요약한 내용인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는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백성, 모든 장면이 일어나고 있는 배경인 성전을 포함한다. 20장 1절–21장 38절에서 ‘백성’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자((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들, 예수의 대적자들의 계획을 막는 완충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충돌의 모티프는 누가복음의 본 섹션에서 중심 주제다. 즉 “누가 적법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된 갈등이 중심 주제다. 결과적으로 적법성의 이슈는 두 개의 관련된 질문을 제기한다. “누가 하나님이 인정한 권위를 갖고 있는가?” “어떤 행위가 하나님이 승인하신 행위의 기준에 부합한가?” 누가복음의 본 단락에서 누가가 언급하는 그룹들,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사두개인들과 부자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들 가운데서도 많은 차이를 보일 수 있으나 전부 그들의 적법성을 성전과 자신들의 관계에서 찾는다. 누가가 이렇게 묘사하는 유대교에서 정치와 예배는 동일한 심장 박동, 즉 성전에서 출발한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비추어 성전에서 벌어지는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예수는 성전에 대한 자유방임적 태도를 그냥 지켜볼 수 없어 직접 개입해야 했다. 결국 예수의 메시지는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해야 하는 핵심적인 공간인 성전과 깊이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래서 성전은 예수의 가르침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공간으로 역할을 한다.
원래 성전은 세상의 질서를 세우고 사회생활의 기준을 잡아 주는 중심축을 제공하는 공간인데, 누가는 성전이 성스러운 공간으로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음을 전제로 본 내러티브 단락의 논지를 전개한다. (1) 첫째, 누가는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된 사람들과 예수 사이의 충돌하고 (20:1–40). 둘째, 누가는 (2a) 어떻게 예수가 다윗의 아들, 만유의 주의 절대적 권위를 성경을 근거로 설명한다 (20:41–44). 이어서 누가는 (2b)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는 사회의 약자들을 억압하고 압제하기 위해 성경과 성전을 권위의 근거로 삼는 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20:45–21:4). (3) 예수는 이어서 옛 세상의 질서가 새로운 세상의 질서로 넘어가면서 일어날 성전의 재앙과 파괴를 예고한다 (21:5–38).
예수의 고난과 죽음(22:1~23:56)
예수를 반대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음모 계획은 예수에 대한 대중의 지지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누가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어떻게 계획을 추진해 나가게 되는지 두 가지 방식으로 알림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기록한다. 첫째, 누가는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유다를 평행으로 설정하고 인간의 계략을 강조한다. 인간의 전략보다 더 큰 무엇이 작동하고 있다. 둘째, 누가는 사탄이 개입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이 충돌에 들어 있는 우주적 영향 곧 유월절은 기본적으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기념하는 반면, 무교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전날 밤에 무교병만 먹은 것을 기념한다 (출 12장; 23:15; 34:18).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있어서 유월절은 예수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전조한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백성으로부터 받고있는 지지 때문에 가로막힌 장벽을 뛰어넘을 방책을 찾아야 한다. 이런 방책을 사탄이 제공한다. 누가복음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아들의 목적을 반대하는 최고의 대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다. 사탄의 영향력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할 행운의 순간과 사탄의 계획이 실행되는 순간과 그대로 들어맞게 될 것이다. 누가는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쿰란 문헌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유다는 성전 지도자들과 결탁해 돈을 받고 예수를 배반하고자 계야한다. 유다는 사탄의 영향을 받을수 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통치와 반대로 작용되는 “맘몬의 법칙”에 넘어가고 말았다. 맘몬은 누가-행전에서 중요한 모티프다 (참고, 16:13–15). 누가는 독자들에게 유다가 열두 제자 공동체에 속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이 장면의 비극을 강조한다 (참고, 6:16).
근접문맥 22:7~13
누가는 ‘무교절이 다가오는 날 (1절)’에서 곧장 무교절이 이른 것으로 묘사한다 (7절). 1–7절에서 “유월절”의 표현과 준비의 단어가 각각 차례 등장하며 본 내러티브 단락의 초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한다. 헬라제국 통치기간 더 이상 급히 서둘러 간단한 식사를 가지는 것으로 유월절을 기념하지 않고 대신 만찬의 형식으로 기념했다. 식사는 침상이나 베개에 비스듬히 기댄 채 포도주를 마시는 등의 동작을 취했다. ‘준비’는 식사에 필요한 흠이 없는 양과 기타 식재료와 성전의 희생제물로 드릴 양을 구입하고 방을 마련하는 것을 포함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은 정확한 시간에 양을 드려야 한다. 정확히 말해 유월절 양은 (무교절 당일이 아니라) “무교절의 전날 밤”에 희생되었으나 누가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같이 설정하는 점에서 통상적인 관례를 따른다. 누가는 독자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이 전개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묘사한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은 관련해서 예수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시간표에 맞추어 주도적으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한다. 예수는 무력하게 피해를 입은 희생자가 아니라 사실상 연속되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직접 뛰어든다. 열두 제자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를 배반하는 점에서 사탄의 대리자가 되는 반면, 베드로와 요한은 모범적인 제자들로 표현된다. 베드로와 요한을 식사를 섬기는 종들로 묘사하는 것 (참고, 12:37; 17:7–10; 22:24–27) 은 그들이 사도행전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을 예고한다. 예수는 유월절 식사를 위해 그의 제자들과 모일 방을 요구하는 자신을 “선생”으로 설정하고 유월절이 가족 단위로 기념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출 12:3–4), 유월절 식사는 가족이나 가상의 가족 공동체가 나눈 식사였다. 예수는 이 식사의 특징을 기초를 놓은 언약을 세우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유월절 식사의 본질을 고려하면 예수가 자신의 정체와 운명을 제자들의 정체와 운명과 한데 묶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가 식탁의 종으로 권위를 사용하므로 제자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의 생애는 시련으로 점철된다. 이 사건들 배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흐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성경에 예정되고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21, 37절). 누가는 이 순간 유월절을 위한 예수와 사도들의 모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정교하게 설정함으로써 본 장면의 특별한 의미를 부각시킨다. 예수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해석한다. 본 장면에는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은 자들을 ‘사도들’로 지칭한다. ‘사도들’은 본문에서는 예수와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유월절 식사와 누가복음의 만찬 장면은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의 장면이 유월절의 의미에 기반을 두고 있고 유월절을 재해석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을 때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사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점점 더 무디어지며 (18:15–17, 34),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는 동안 (20–21장), 제자들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누가는 매우 드물게 “사도들”은 “보냄 받은”(참고, 9:1–10) 의 의미와 연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권위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대표자들을 지칭한다. 예수는 식사를 마치고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을 성취하기 전까지 다시는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이 말씀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새로운 식사가 미래에 펼쳐질 것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유월절 기념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비전을 갖고 있다. 이 식사는 종말론적 해방, 곧 두 번째 출애굽을 기대하게 했다. 유월절 식사의 이런 의미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식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목적이 미래에 완료될 것을 예고하면서 식사를 나누었고 다가오는 종말론적 연회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누가가 떡과 관련해서 묘사하는 순서인 잡고, 감사하고, 떼고, 주는 것은 예수가 오천 명을 먹인 사건에서 보여 준 행위를 떠올린다. 오천명을 먹인 사건도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메시아 고난을 중요하게 다루는 문맥에 배열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경은 잔의 이미지를 구원에 참여하는 것과 관련해서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서 사용한다. 피를 붓는 것은 잔인한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전의 유월절을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기억에 대한 이해를 위해 유월절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지속적으로 함께 식사를 나눌 것을 가르칠 뿐 아니라 예수의 생애와 죽음의 의미를 회고하는 식으로 식사를 나눌 것을 가르친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이런 회고는 외적인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하며, 이런 반응은 예수가 식사에서 직접 보여 준 행위에 근거해야 한다. 이를테면, 예수는 외부자를 환대했고, 종으로 섬겼고, 지위와 명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애가 보여 준 모본은 이런 회고를 통해 그를 주로 부르는 공동체 안에서 체현될 수 있다. “예수를 기억하는 식사란 공의를 행하고 아버지의 음식을 모두를 위해 섬긴 그의 삶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다.
식탁의 배반자 22:21~23
우리는 예수가 배반당할 것과 누가 배반자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가는 본 장면을 서술하면서 배반자의 이름을 밝히는 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식탁에 앉아 있는 제자들은 배반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누가 배반자인지 자기들끼리 논쟁한다. 본 장면은 예수를 선지자적 통찰력과 예지력을 갖고있는 존재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예이다. 예수의 핵심 그룹에 배반자가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다. 이들은 예수가 유월절 식사를 나누기 위해 선택한 가족 공동체인데 말이다. 그리고 “손”은 주로 “권력”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 죽이려고 혈안이 된 자들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 이는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 그의 가르침을 듣는 것, 이 모든 행위가 종말론적 구속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유다는 사탄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22절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중 원인의 개념, 즉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인정하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예수를 제거하려는 계략이 누가가 전개해 온 플롯의 필요한 측면이라고 해도, 이것은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성경이 하나님의 목적을 담고 있는 것처럼, 누가가 예수와 그의 죽음에 대해 서술한 내용은 하나님이 오래전에 세우신 구원의 계획을 드러낸다. 이제까지 묘사된 예수의 식탁교제 (15–18절) 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예수가 가장 최근에 전한 인자에 대한 어록 (21:27) 을 고려하면, 여기서 예수가 전하는 말씀은 십자가 처형 너머를 가리킨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히 실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요소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이어서 하나님의 신원하심과 예수의 왕적 통치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구조
A 22:23~27
B 22:28~30
부제 섬김과 왕적 권위
본 단락은 새로운 대화의 주제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예수와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식사 장면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 마지막 식사는 예수와 제자들이 하나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23절 제자들을 “그들 중에서 누가” 예수를 배반할 것인지 알고싶어 했다. 이제 “그들 중 누가” 가장 큰지 알고 싶어했다. 사실상 한 명이 예수를 배반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처럼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열두 제자 모두가 지위와 위치의 이슈에 온통 관심을 쏟은 채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베시지를 “배반”하는 것을 암시한다. 열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은 마음과 손이 이 식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에 동참하고 있지 않다. 유다는 예수에 대한 신앙을 거짓으로 고백하고 또한 예수와 단지 겉으로만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 대한 전형적인 모델이다. 누가는 예수를 배반하는 사람의 손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세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인자를 배반하는 사람에게 하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배반자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향하는 방향에서 이탈해 버리기 때문에 예수는 배반자에게 화를 선언한다. 예수는 자신이 배반당하는 것을 설명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실현되고 있다. 그리고 배반자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져야하며 그에게 반드시 하나님이 진노가 내릴 것이다. ‘화’ ‘우아이’는 ‘고통’, ‘화’, ‘진노’를 나타낸다. 인자를 배반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배신과 거부에 대해 답변해야 한다. 하워드 마샬은 손이라는 단어가 친절한 의도와 적대적인 의도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그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손은 어떤 사람의 행위를 나타내는 은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식탁에 모인자들 가운데 배반자가 포함되었다는 예수의 예언이 충격적이었듯이 예수를 중심으로 모인 제자들의 행위 역시 충격적이다. 다른 사도들도 그들의 내적인 태도가 변혁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음을 지위와 명예에 관심을 쏟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예수가 15~20에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으나 그의 메시지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같다.
그 문제(누가 배반하는가)는 곧바로 언급되는 위대함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유다의 배반이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나머지 제자들의 본질에서 벗어난 주제에 대한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제자들은 또 적절하지 않은 다른 관심사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이 식사에서 제기된 다른 문제는 열두 제자의 서열에 대한 것이다. 이 특별한 논쟁의 주제는 “열두 제자 중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가”였다. 막10:37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장차 영광을 받을 때 하나는 예수의 오른쪽, 하나는 예수의 왼쪽에 똑같이 간청한다. 마20:20~24는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똑같이 요청한다. 분명히 야고보와 요한 및 그들의 어머니는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있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이 사건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하기 전에 일어났다. 여기서 누가가 다른 배경에서 언급하는 것은 또 다른 사건이다. 누가복음 이야기와 마태, 마가복음의 이야기 사이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마23:10~12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난하는 예수의 말에도 비슷한 말이 언급된다. 누가는 본 장면을 설정하면서 그리스-로마 심포지엄(?)에 나타난 요소들을 사용한다.===누가는 그리스 로마 세계의 일반적인 사회 관습을 이용한다. (1~38,5:27~39) 심포지엄에서는 적합한 자리를 배열하는 것을 통해 참석자들의 지위를 비교하고 정하는 것에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누가는 바리새인들과 율법 전문가들이 그런 관습에 관심을 두고 잇는 경향을 이미 언급한 바 있는데(14:7,20:46) 누가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동 방식을 따라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내용을 기록한다. 마태복음에서 그 배경은 분명히 세배대의 두 아들들과 관련된 사건과 다른 것이다. 마태복음 안에서도 그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이 주제가 예수의 가르침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라는 것을 밝혀준다. 최후의 만찬에서 하나 됨의 중요성이 주요한 특성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누가는 여기서 그 점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위대함이라는 주제는 제자들을 괴롭혔으며 예수는 그 주제에 대해 여러 배경에서 말했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배경에서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 이유는 위대함에 대한 제자들의 관심과 생각이 어리석으며 예수가 떠나가고 없는 상황을 바로 앞에 두고 제자들이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진정한 위대함에 대한 강조는 예수의 사역에서 마태가 예수의 이 가르침을 두 번 소개한다는 것에서 강조된다. 예수는 27절에서 권위와 지위의 관계를 재정의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서로 대조되는 통치 방식을 언급한다. 예수는 통치와 어떤 인물의 중요성에 대한 제자들의 사고 방식을 바꾸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될 것이다. 예수는 먼저 긍휼을 베푸는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과 높아진 신분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나서야 미래에 사도들이 지도자들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지도하는 역할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기 원한다. 세상의 통치자들의 통치 방식과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서로 어떻게 대조되는가. 예수는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를 강제로 통치하는 이방인 통치자들과 자신들을 스스로 “은인들”이라고 부르는 권력자들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만 사도들 또한 은인으로 칭함 받기를 원한다. 존경과 권위가 나타나는 칭호로서 ‘에르게테스’는 흔히 AD 군주들이나 또는 다른 뛰어난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로마 황제는 사람들이 모든 지역의 부유한 지배계층에게 기대한 것, 즉 관대한 은택을 베풀수 있는 존재임을 선전했다. 심지어 독재자들도 자신을 ‘은인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20:25와 막10:42는 이방인 집권자들이 자기들의 백성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헬라어 본문에서 마태, 마가 모두는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이방인 집권자들의 통치 방식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가리켜준다. 서로 다른 배경을 제외하고 세 공관복음서의 이야기에서 이방인 집권자들의 통치 방식과 똑같이 기본적으로 대조된다. 당시의 부자들은 세금을 지불하기보다는 도시와 마을을 위해 시간과 돈을 기부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어야 하지만 이런 은택이 제대로 배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도시 재정의 악화는 부자들에게는 유익이었다. 부자들은 은택을 베풀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확보하고 있어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공적인 자리와 명성을 얻기에 최고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로 인정받았다.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부가 필요했기 때문에 오직 부자들만 지도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고 ‘관대하게’ 베푸는 사람들의 몫인 명예와 출세를 누릴수 있었다. 이런 방식이 세상에 퍼저 있었기 때문에 선물을 주는 것은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섬김과 명예를 되갚아야하는 짐을 지웠다. 따라서 본문은 어떻게 보면 지도력을 행사하는 시스템을 남용한다는 표현보다 시스템 자체의 속이라고 볼수 있다.
26절의 예수의 부정적 가르침인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는 이제 예수께서 사도들이 보여주어야 할 대조적인 자세에 대해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다스리고 은혜를 베푸는 태도가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처럼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베풀어야 한다. 심지어 악인들과 감사를 모르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6:35`36)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칭할 때 ‘은택(개역개정 착한일)’을 베풀었으며 예수의 사역은 “은택”(개역개정, 선한일)의 사역으로 요약된다. 예수는 “왕들”“집권자들”“지도자들”“앉아서 먹는자”를 “젊은자”“섬기는자”와 병치시킨다. 유대문화에서 “젊은자”는 하찮은 일들을 맡았으며 어른들을 받들었다. “젊은자”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를 가리킨다. 누가가 자주 설명하는 것처럼 “섬김”은 구체적으로 “식탁을 섬기는”행위를 말한다. 예수의 공동체에 적합한 지도자의 형태는 지위와 명예의 상승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며, 식탁을 섬기는 종들의 낮음, 사회적 권력과 특권에서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낮음, 젊은자들의 낮음을 반영한다. 예수의 말의 강조는 궁극적으로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마태와 마가는 “너희 중에서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가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는 ‘너희의 종’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위대함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이라고 정의된다. 위대함은 다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고 또한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누가는 큰자와 젊은자. 다스리는자와 섬기는자를 비교하며 동등한 의식, 마태와 마가는 종과 같은 자세로 섬기는 것을 강조한다.
NL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물론, 당연히 앉아서 먹는자이지) 세상의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의 앉아서 먹고 마시는 것은 그들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 그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당연한 것이지만 But not here!(여기는 아니야) NLT 번역은 여기는 아니다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의 제자(현재, 미래)의 사역에서도, 종말론적인 예수의 나라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을 NLT 번역에서는 But not here!를 사용하여 강조한다.
27절 예수는 비유로 교훈을 전한다. 식탁에서 앉아서 식사하는 사람과 시중드는 사람중 누가 높은가, 물론 앚아서 대접을 받으며 식사하는 사람이 시중드는 사람보다 일반적으로 더 높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보여준 섬김읠 삶을 언급한다. 요13장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사건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입증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섬기는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렇다고 예수는 다스리는 역할을 맡는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예수 자신도 누가의 내러티브에서 주와 왕으로 묘사된다. 예수가 강조하는 것은 주와 왕의 지위, 가장 큰자의 지위를 섬김의 삶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종말에 다시 와서 신자들을 대할 때도 이와 같은 동일한 성품을 보여줄 것이다.(12:35~38)예수의 섬김은 사도들의 삶에서도 나타나야 하는 특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몰입하는데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집중해야 한다.
28절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지를 실천하지 못하는데도 예수는 어떻게 왕적인 권위를 그들에게 수여할 수있는가. 28절이 강조하는 것처럼 사도들에 대한 예수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예수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을 때 보여준 과거의 삶이 현재의 행위와 모순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가 온갖 시련을 겪은 동안 지속적으로 예수의 곁에 머물렀다. 9:57~62에서 예수는 제자도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헌신의 깊이를 미리 설명했다. 제자들은 시련 가운데서도 예수와 함께하는 신실함을 보였다. “시험”은 4:13과 8:12~13에 마귀의 공격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누가-행전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사탄의 목적과 궁극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기억하면(4:1~13) 예수에 대한 모든 적대감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반대하는 우주적 저항이다. 시험 가운데 견디는 신실함은 8:12~15에서 예수가 비유를 사용해 가르친 내용에서 이미 나왔던 모티브다.
누가의 탄생 내러티브와 최근의 가르침에 묘사된 예수는 왕이다.(1:32~35,19:11~40) 그리고 예수는 비유로 가르치면서 신실한 자들에게 분깃을 줄 것을 왕의 권위로 예고했다.19:17,19 이제 예수는 사도들이 신실하게 인내한 것에 대해 다스리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상한다.
29절 이제 예수는 열한 제자들의 신실함에 더 큰 책임을 맡기는 상의 베푼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 영광과 상이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신실한 제자들에게 상을 베푼다.
가롯유다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열 한 제자를 받아들이시고 그들에게 책임을 부여하신다. 예수가 떠나간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행위는 거의 유산을 상속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행위를 위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는 이 세상을 떠나지만 예수는 계속해서 예수의 나라를 통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권위는 유일무이한 권위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자신만을 위해 간직하지 않고 자기의 제자들에게 공유한다. “내 아버지” 가 예수에게 나라를 맡긴 것 같이 예수도 제자들을 그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위임한다. 여기서 바실레이아는 특별히 하나님이 위임하신 대리자로서 예수의 통치와 권위를 가리킨다. 또한 이 절에서 헬라어 동사의 현재형이 사용된다. 이것은 제자들이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주어진 예수의 권위는 열한 제자들에게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예수의 대리자들로서 일할 것이다. 예수도 다스리며 제자들도 다스릴 것이다. 현재 예수와 제자들이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상태를 강조한다.
예수는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예수가 나라를 수여하지만 이 나라는 예수의 나라다. 예수가 말하는 종말론적 연회는 마지막 때의 연회이므로 종말 이전에 사도들이 권위를 행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본문은 예수의 약속이 마지막 때가 와야만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을 예고한다. 예수가 사도들에게 나라를 수여하는 것은 그들이 특별한 명예를 얻도록 선택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명예를 얻게 된다는 주장은 24~27절에서 가르친 것과 모순이다. 열한 제자들의 지도력은 예수의 사역을 확장시킬 것이다. 사도행전이 이 과정을 자세하게 알려줄 것이다. 이 권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기에 앞서 예수는 지도력의 형태는 섬김이라고 알려 주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지도력에는 ‘증인들’로서 증거하는 역할도 포함될 것이다.
눅22:29~30과 마 19:28 은 비슷하다. 마태에서 예수의 표현은 전적으로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마태는 새로운 탄생(팔링게네시아“새롭게 되어”)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인자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며, 이 제자들은 그와 함께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이 말은 종말론적인 정점에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를 기대한다. 누가는 이 권위가 제자들에게 이미 허락되었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제자들이 미래에 지니게 될 권위와 관련해서 마태복음이 묘사하는 것을 보완해 준다. 누가의 이 강조점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이스라엘에게도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 같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예수의 통치에 대한 열한 제자의 메시지에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30절 예수는 열한 제자에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예수와 함께 앉을 것을 말하며 종말에 이 제자들이 영접을 받고 예수와 친밀하게 교제한다는 것을 묘사한다. 제자들은 교회를 세우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동참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것은 열한 제자들의 권위와 하나님의 계획 안에 계속해서 지도자 직분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보좌’의 이미지는 시편 122:4~5,단7:9 연상시켜 준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의해 거부당하는 것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새로운 지배체제’ 안에서 지속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지배체제는 미래에 분명하게 밝혀지겠지만 그것은 곧바로 유효하기도 한 것이다. 비록 사람이 판단하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다.
이 절에서 예수의 말은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 음식을 먹을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말은 오직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말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 중에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혼인 잔치를 기대하게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들의 온전히 성취되고 예수가 하늘과 땅을 다스릴 때 혼인 잔치가 베풀어질 것이다. 오래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은 장차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관련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사실이라고 온전히 입증될 것이다.
재판관의 역할의 의미는 “왕적 권위”의 개념을 고려하고 이스라엘의 과거에 “재판관들”의 역할이 실제로 “통치하는 것”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사도들은 재판관이라기보다는 권위를 위임받는 지도자다. 누가가 식탁에 참여하는 제자들을 “사도”로 칭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제자들을 “사도”로 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것을 예고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을 다스리는 사명을 부여받는다.
마태복음29:28 “세상이 새롭게되는”시기에 사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 선언한다. 마태는 열두 보좌에 대해 말한다.
7. 정경적 정황
7.1 최고의 상급 권력, 군세자 하나님, 만물을 통치하시는 통치자 하나님
7.1.1 하나님의 영원성
세상은 존재하기 시작 시점이 있다 세상은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능력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이 있기전 존재하셨다. 존재를 주는 말씀이 존재를 받는 사물보다 먼저 존재해야한다. 이 존재는 영원 전부터 존재햤다. “영원부터”이존재는 영원까지 계속 존재할 것이다.“영원까지” 성경은 하나님이 시작한 시점도 끝나는 시점도 없이 영원토록 존재하신다는 것에 주목한다. “주는 영원부터계셨나이다.시93:1)”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시41:13)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함을 하나님의 능력과 결부시켜 제시한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1:20 우리가 피조물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한 뒤에야 비로서 추론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함을 인식하게 된다. 영원함은 시간과 대조적으로 영구하고 불변하는 상태, 생명의 완벽한 소유인 것이다. 영원함은 이 안에 모든 연수, 모든 시대, 모든 세대, 모든 기간을 포함한다. 영원함은 시간을 초월한다. 영원함은 시간이 지속한 모든 과정뒤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시간은 영원한 것 아니다.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연속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시간이 흘러가고 또 다른 시간이 뒤를 잇는다. 작년은 올해가 아니고 올해는 내년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함을 시간의 개념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간의 본질이 부분들의 연속성에 있듯이영원함의 본질은 무한하고 불변하는 지속성에 있기 때문이다. 영원함과 시간은 바다와 강이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르다. 바다는 결코 장소를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하나의 물로 존재한다. 그러나 강은 소리없이 흘러가 바다속에 삼켜진다. 그렇듯이 시간도 영원함 속에 흘러들어가 삼켜진다.
하나님이 어떻게 영원하신 분인가? 또는 어떤 점들에서 영원함이 하나님의 속성인가? 영원함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속성이다. 하나님이 시간의 길이와 한계를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장소의 한계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광대함이 하나님의 발산하는 본질이듯이 영원함은 하나님의 지속하는 본질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시작과 소멸의 모든 가능성, 모든 변화와 유동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어떤 장소에도 제한받을 수 없듯이 어떤 시간에도 제한받아서는 안 된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광대함이듯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함이다. 피조물들은 장소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 곳에 존재해야 한다.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현재와 과거 또는 미래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창조자는 장소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곳에 있고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존재한다.하나님의 지속성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한 것 만큼이나 끝이 없다. 하나님은 항상 존재했고 존재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시작한 시점이 없듯이 끝나는 시점도 없다. 이것은 최고의 존재에게만 속한 탁월함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모든 존재를 포함하고 있고 이것들을 초월하며 하나님의 광대함이 모든 장소위에 있듯이 하나님의 영원함은 모든 시간과 모든 지속성을 포함하고 이것들을 무한히 초월한다.531)
만일 하나님에게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이 존재를 다른 존재나 스스로에게서 받으셨어야 한다. 만일 다른 존재에게서 받으셨다면 하나님을 있게 한 존재가 하나님보다 더 탁월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존재가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높고 탁월하지 않은 존재는 결코 하나님이
대신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을 존재하게 한 원인이 없다고 부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이 창조되기 전을 수억만 년으로 상상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보다도 더 무한히 이전에 존재하신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단 7:9)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날과 시간보다 먼저 존재하신 분, 탁월하게 스스로 안에 모든 시간과 세대를 담고 계신 분으로서 말이다. 사실 하나님을 옛적부터 계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게 맞는 표현은 아니다 될 수 없다. 자신의 존재를 다른 존재의 능력에게서 받은 자는 최고로 탁월한 존재일 수가 없다.
하나님은 끝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항상 계셨고 지금도 항상 계시고 앞으로도 항상 변함없는 모습으로 계실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약 1:17). 하나님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셨듯이 앞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실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지만 설사 하나님에게 시작과 끝이 있고 우리가 아무리 수만 년을 되짚어 가고 앞서 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시작과 끝 모두에서 여전히 멀리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영원히 지속하시기”(시 9:7) 때문이다
7.1.2 그리스도의 영원성
하나님이 영원한 지속성을 지닌 분이라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영원함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올려 드릴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골 1:17). 즉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리고 피조물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또는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6절).
그리스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코 차이가 없으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똑같기 때문이다. “스스로 있는자”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같은 것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함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어제의 하나님과 오늘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다. 또한 오늘의 하나님이 내일의 하나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손도 출생도 죽음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시작한 날과 끝난 날도 기록되지 않은 멜기세덱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그릐스도의 존재를 예표한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다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염이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7:3” ”563 멜기세덱의 출생과 죽음을 비밀에 부침으로써 성령님은 영원함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제사장 직분에서 하나님이 맡으신 직분의 지속성을 예표하셨다. 멜기세덱의 족보를 비밀로 두신 것에서 영원함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참된 영원함을 볼 수 있다. 이 위대한 자의 시작과 끝을 비밀로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함을 어떻게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리스도 역시 친히 자신의 영원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암시하신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 16:28).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셨듯이 다시 아버지에게로 가신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아버지에게로 가신다. 그렇듯이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오셨다.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에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에 있는 것과 똑같은 지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명확히 그리스도는 존재하는 피조물이 없었던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요 17:5)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모든 것을 현재 일처럼 알고 계신다. 영원함 속에 계신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다. 연속성과 이어짐이 없다는 것이 영원함의 개념이기 때문이다.만일 영원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지점이고 앞과 뒤로 이어지는 지점들 속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영원함 속에서 알려지는 것 또는 영원함을 통해 알려지는 것은 어떤 연속성도 인식될 것이다. 지식이 알고 있는 존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시간의 흐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지식은 해와 날들의 모든 움직임을 초월한다. 또한 과거와 미래의 문한한 공간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함 속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단순한 지식 속에서 생각한다. 마치 이 도는 것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하시는 주의 말씀이라”565)(행 15:18).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지식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하다.
7.1.3 하나님의 영원함 적용
①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하나님의 언약 또한 영원하다. 하나님의 언약이 가진 영원함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이 이 언약을 확증하기 위해 하시는 맹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켜 또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맹세하신 것이다 (히 6:13).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위해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심과 연결시키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원히 사신다면 하나님의 언약도 결코 취소될 수 없다.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하는 것”(16, 17절)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만큼 선한 능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과거에 하신 말씀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이르지 못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뜻 진리는 항상 똑같고 영원토록 같다. 하나님에게는 생명이 풍성하고 우리를 도우실 영원한 사랑 또한 풍성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뢰의 바탕이되고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보증이 듯이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이 약속을 수행하실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보증이다 친구가 오늘 은 나와 함께 있지만 내일 저 세상에 갈수도 있다. 아무리 친구가 자기가 한말을 지키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어도 죽음이 이 친구의 삶을 산산조각 내버리면 결국 친구는 자기의 말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을수 없는 분이듯이 거짓말을 하실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원함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삼상15:29 영원함은 불멸함을 함축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오래 사시는 분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근거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시편기자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습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146,34 만일 야곱의 하나님이 귀인들이나 도울 힘이 없는 인생과 같다면 하나님을 우리의 도움으로 삼는것에서 우리가 무슨 행복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권리를 주자알 수 있는 영원한 입법자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가 순종해야 할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②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하나님은 언약 속에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영원한 선이고 우리의 소유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시 48:14).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 90:1). 우리는 잠시 동안 나그네로 세상을 산 다음 야곱이 요셉을 위해 간구한 복 즉, “영원한 산이 한없는 것같이 한없는 축복”(창 49:26)에 이르게 된다. 한 해에 천 파운드의 재산으로 한 사람의 짧은 일생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연수가 다함이 없고 영원토록 살아 계셔서 한없이 누릴 수 있으며 영원히 우리를 살게 해 주실 수 있는 창조자를 누리는 행복 속에서는 영혼이 얼마나 더 완전한 기쁨 속에 잠길 수 있겠는가! 진정 죽음은 하나님의 변경할 수 없는 명령 때문에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러나 불멸하시는 창조자는 우리가 베어 먹은 한 입을 토해 내게 할 것이고 영광스러운 불멸함 속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육체와 해체될 때 우리 영혼은 불멸할 것이고 부활할 때 우리 몸 또한 불멸하게 될 것이다. 그 뒤에 연합된 우리 영혼과 몸이 영원토록 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기쁨 속에서 무한한 영원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불멸의 하나님과 연합한 믿는 자가 멸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③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교회의 모든 절망에 위로를 주고 교회를 공격하는 적들의 모든 위협에 맞서는 강력한 근거가 바로 이것에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떠나신 교회에 다시 돌아오시기를 간구한 근거였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애 5:19, 20). 교회는 연약하다. 피조된 것들은 쉽게 소멸한다. 이 연약한 교회에 영원토록 사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버팀목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 비록 예루살렘이 보루를 잃고 성전이 무너지며 땅이 황폐해졌지만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영원한 보좌에 앉아 계시다. 그리고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감소되는 일은 결코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호소 속에서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선한 뜻을 품고 지으신 자기 백성을 잊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임을 암시한다. 가장 큰 혼란 가운데 처해 있을 때 교회의 눈은 하나님이 세상의 통치자로 좌정해 계신 영원한 보좌에 고정되어야 한다. 오직 교회 외에는 어떤 피조물도 이 완전함 속에서 위로를 얻을 수 없다. 다른 피조물들도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교회야말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불멸하심뿐만 아니라 영원하심을 상징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을 하나님이 처음으로 계시해 주신 것은 “애굽에서 압제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서였다 (출 3:14, 15). 이때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힘을 줄 유일한 위로로서 전능자의 은밀한 곳에서 선포되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처해 있거나 앞으로 처하게 될 비참한 상황들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미덕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한 계속해서 주어지는 위로다. 하나님은 여전히 “스스로 있는 자”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교회에도 똑같이 “스스로 있는 자”가 되신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보다 하나님의 영적인 이스라엘이 이 이름의 영광에 대해 더 큰 권리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것보다 더 큰 압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절망에 꼭 맞는 위로가 되었던 진리는 다른 모든 압제에 대해서도 똑같이 합당한 위로를 준다.
7.1.4 하나님의 불변성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에서 불변하시다. 하나님의 존재는 변함없이 한결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 가운데 단 한 부분도 잃어버릴 수도, 더해질 수도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백 육십 구세까지 산 므두셀라만큼 오래 산다고 해도 이 사람의 실체에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지내는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도 없다. 전체적인 실체에서는 변화가 없다고 해도 음식을 통해 계속해서 이 사람에게 더해지는 것이 있고 노동을 통해 감해지는 것이 있다. 이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획득하거나 잃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자신의 실체를 더 위대하게 또는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더하거나 자신의 실체를 더 작게 또는 더 나쁘게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감하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다른 것에게서 존재를 받지 않은 자는 항상 자신의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최초의 존재이고 독립적인 존재다. 하나님은 스스로나 다른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분이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항상 존재하신 분이었다. 따라서 자신이나 다른 존재에 의해 하나님의 본질이 달라질 수가 없다. 모든 존재를 갖고 있고 모든 존재가 되시는 분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육체적 본질들에서 발견되는 변화들로부터 자유롭다. 하나님이 구성 요소라는 어떤 부분도 갖고 있지 않은 순수한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창조된 영들이 가질 수 있는 변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지식 면에서 불변하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아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셨다.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숨겨진 것이 없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아셨던 것보다 지금 더 많은 것을 아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지금 알고 계신 것을 항상 알고 계신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을 통해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기질, 자질, 체질을 통해 아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통해 알기 때문에 때로는 실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르게 알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자신의 본질과 구별된 명철을 소유하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순전하고 단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철은 곧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에서 하나님의 명철도 무한하다고 결론짓듯이 하나님의 불변하는 본질에서 하나님의 지식도 불변한다고 합당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직관적인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을 아신다영원하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게는 미래의 모든 것이 한 번의 시선을 보내는 것만으로 현재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미 존재하고 알려진 사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달라져도 이것들의 존재와 본질에 대해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지식은 불변하고 변경할 수가 없다. 눈에서 발하는 빛을 통해 한 번의 시선만으로 하늘 전체를 볼 수 있는 피조물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 피조물은 눈을 돌리지 않고도 동쪽과 서쪽을 보며 전체 우주를 균등히 볼 것이다. 전체 우주의 모든 부분과 모든 움직임을 한꺼번에 보기 때문이다. 비록 우주의 거대한 몸체가 변화하고 회전하며 지속적인 움직임 가운데 있어도 이 피조물의 눈은 변함없이 고정된 채로 있을 것이다. 어떤 변화도 허용하지 않은 채 한 번에, 한 번의 시선만으로 이 모든 움직임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모든 것을 아신다. 따라서 이것들을 영원히 아신다. 하나님의ㅣ 지식이 무한해서 모든 진리를 한번에 담으실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지식은 그 안에 모든 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하나나님의 지식은 불변하다. 하나의 순전하고 단일한 지식을 통해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의 무한한 공간을 이해한다. 587)
7.1.5 그리스도의 불변성
하나님의 본질이 변할 수 없고 불변함이 하나님의 속성이라면 그리스도는 신성을 갖고 계신 것이다. 히브리서 (히 1:11)는 시편 102편의 구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구절을 시편 45편 6, 7절과 결합시킨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8~10). 첫 구절은 필연적으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는 자로서 하나님과는 구별된 자로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구절 역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가 세상의 창조와 소멸, 영원함과 불변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한 분이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두 증언은 연결 접속사인 ‘또’로 연결되어 있다. “또 주여”라는 표현은 두 증언이 같은 분,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하는 것임을 선포한다. 히브리서 1장의 의도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피조물에게도 아니, 천사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자에게도 속할 수 없는 내용들을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름이 부어져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되신 분과 태초에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이 손으로 지으신 바라고 칭함 받는 분이 같은 분인 것이다. 이 말은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라는 뜻이다. 하늘과 땅의 창조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똑같다는 특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7.1.6 하나님의 불변성적용
①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예배를 드릴 근거와 격려가 있다. 무신론자는 이것을 다르게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시다면 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선을 뜻하신다면 선한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악이 우리에게 임하게 정하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탄원하고 간청해도 우리는 이 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지식은 불변하고 선을 행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다. 그리고 이런 탁월함이 바로 하나님에게 경배와 경외함을 드려야 할 합당한 근거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존귀를 받으셔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높이 존귀를 받으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카멜레온처럼 매일, 매순간 색을 바꾸신다면 이런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에 무슨 위로가 있겠는가? 오늘은 이 마음을 내일은 다른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을 향해 우리의 눈을 높이 드는 것이 무슨 격려를 줄 수 있겠는가? 어느 날은 간구한 것을 들어주고 다른 날에는 이것을 거부할 정도로 수시로 행동이 바뀌고 변할 수 있는 이 땅의 왕에게 누가 간구를 하겠는가? 그러나 왕이 이런저런 조건 위에서 무언가를 약속하고 왕의 약속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어느 누가 이것을 근거로 호소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고 하자. “왕의 약속이 불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구하지도 이 조건을 실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 조건을 실행한다면 약속대로 열매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추론을 어리석고 우스꽝스럽다고 여기지 않겠는가?우리가 하나님을 구할 때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신 복이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이 불의한 본질을 갖고 계시거나 마음이 변하시는 분이라면 이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고 결국 우리의 소망을 좌절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탁월한 본질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들을 구하게 하는 가장 높은 격려가 되지 않겠는가?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 간구하는 우리의 열정에 불을 붙여 주지 않겠는가?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지 않겠다고 선포하신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을 갈망한다면 여러분이 하는 기도는 자체로 어리석은 행동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무례한 행위가 될 것이다. 이 경우 하나님의 불변하심이 하나님을 반하려는 우리의 갈망을 억제시켜 줄 것이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악을 결심하거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무로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진정 슬픈 소식이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바꾸실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에 어긋나는 일을 하시고 자신의 말씀과 반대로 행하실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죄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스스로의 영광을 가리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말이 아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계속해서 허무한 욕망 가운데 있게, 죄인들이 악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을 바꾸심으로써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신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한결같으시다.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람직한 것이고 죄는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이다. 한결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의인에게는 한결같이 친구가 되어 주시지만 사악한 자들에게는 한결같이 적이 되신다. 하나님은 지식에서도 한결같으시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행위들을 결코 잊으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의지에서도 한결같으시다. 하나님은 불의한 관습과 행위들을 결코 승인하실 수 없다. 선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고 악은 항상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대상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는 항상 변함이 없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항상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변함이 없을 것이다. 불변함이라는 완전함이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속해 있는 것처럼 죄에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에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행위의 언약이 이 언약을 어기는 인간의 죄 때문에 변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는 것에서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율법은 하라는 명령, 즉 교훈적인 부분과 하지 말라는 명령 즉 위협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간이 계명을 준수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의로운 본질은 하지 말라는 명령이 가진 위협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하나님은 불변함이라는 완전함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의로운 말씀을 어길 수가 없었다. 또한 불의한 죄악을 허용하거나 장려할 수도 없었다. 비록 아담과 하와만이 이성을 지닌 피조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친히 위협으로 말씀하신 죽음을 맞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 때문에 배반한 피조물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받으실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첫 번째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만큼이나 불변하다. 다만 회개가 두 번째 언약의 조건으로 정해져 있을 뿐이다. 이것은 첫 번째 언약에서는 충족되지 않은 조건이었다. 회개가 없다면 죄인은 반드시 멸망당해야만 한다. 이것은 결코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을 바꾸셔야만 한다.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인간 안에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하나님 안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활시위는 이들을 향해 당겨져 있다. 하나님의 화살이 활시위를 빠져나갈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시 7:11)
이후의 더한 하나님이 불변성의 위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1.2 청교도 대작 시리즈』 1권 627쪽 이하
이후의 더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1.2 청교도 대작 시리즈』 참고
7.2 구약 비교 본문 연구
7.2.1 권력자 ἐξουσιάζοντες(권력을 가진 자) 통치자, 지배자,
히브리어 등가 שַׁלִּיט샤리트
창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BHS 창세기 42:6, 창50:19~21
NKRV 창세기 42:6, 창50: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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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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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42:6 50:19~21
6절 이 단락은 우리에게 요셉이 두 분야의 지위를 가진 것을 상기시키며 시작한다. 요셉의 정치적 지위는 “이 땅의 총리”(샬리트) 다. 요셉의 경제적 지위는 “양식을 배분하는 자 ”(‘하마슈비르’, 개역개정: “곡식을 팔더니”) 다. 형들이 정치적인 권위에 존경을 표하면서, 요셉에게 “엎드려 절”한다. 요셉을 ‘하샬리트’와 ‘하마슈비르’라고 이중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요셉의 이전 두 가지 꿈을 떠올리게 한다. 곧 하나는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고 (요셉의 권위의 지위), 다른 하나는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단 앞에 절하는 꿈이었다 (배분하는 요셉의 지위).37)
7절 약 20년이 흘렀지만 요셉은 즉각적으로 형들을 알아보지만 형들을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다.
8절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많다. 형들은 요셉이 죽었다고 여긴다. 아마도 요셉이 깨끗하게 수염을 깎았을 것이다. 요셉은 통역자를 통해 애굽의 언어로 말한다 (23절). 그는 애굽의 관복을 입고 있다. 그는 애굽의 이름을 사용한다 (41:45). 육체적 수준에서 사실인 것은 또한 영적인 수준에서 사실이다. 형들이 여기서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37장에서 준비시킨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형들은 인식 (42장), 통찰력 (37장) 이 없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다” 7절에서 알아본다는 핵심은 요셉이 심지어 형들이 말하기도 전에 알아봤다는 것이다 (7b절). 8절에서 알아본다는 진술의 핵심은, 형들이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요셉이 분별한다는 것을 대조시키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외견상 정치적 심문을 통해 그들이 함께 했던 과거와 그들 형제간의 유대관계의 본질에 대한 세 개의 점층적 대화를 한다.
창50:19~21
19절 요셉은 어디에서도 형제들이 요청한 대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답변하지 않는다. 요셉은 이미 형제들을 용서했다. 요셉에게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요셉이 한 일은 “두려워하지 마소서”라고 형제들의 두려움을 완화하는 것이다. 요셉은 화해를 구했다고 형제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구하지 말라”가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 말라”고 한다. 이 표현은 창세기에서 보통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표현이다 (15:1, 21:17, 26:24, 46:3) 요셉의 청지기가 훨씬 이전에 똑같은 말로 형제들을 안심시켰다 (43:23).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타하트 엘로힘 아니) 이 질문은 여기서 창세기에 두 번째로 나온다. 50장 19절과 정확하게 50장 19절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는 방식에서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50장 19절의 헬라어 번역은 “나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투 가르 데우 에이미 에고) 라고 읽는다. 다시 말해서 70인역은 요셉이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사태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지녔으며, 따라서 보복을 넘어섰기 때문이다.”“내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보복하겠는가? 보복은 여호와의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가 갚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 (참고, 신 32:35; 롬 11:19).
‘타하트 엘로힘’이라는 구절은 본문에 명백하지 않지만, 뱀이 하와에게 하는 질문에 암묵적으로 있다. 본질적으로 뱀이 하와에게 “네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은가?” “너는 네 자신의 하나님이 되고 싶은가?”라고 괴롭힌다. 아담과 하와와 요셉은 상당히 대조된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최초의 부부에 대해 말함으로써 시작하고,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에 대해 말함으로써 마친다. 아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구분하는 선을 지우려고 시도했다. 요셉은 그 선을 넘기를 거부한다. 요셉은 오직 하나님의 도구가 될 것이며, 켤코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을 것이다. 67))20절 요셉은 자기 형제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라고 진술한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품은 악한 의도와 상상은 노아시대 사람들 가운데 악한 내면과 생각과 비슷하다. 69)
하나님은 악한 음모를 꾸민 형제들과는 대조적으로, 요셉에게 “선”을 베푸셨다. 선은 무엇인가? 20절의 마지막 부분,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가 이 질문에 답한다. 우리는 “많은 백성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야곱의 가족을 포함한다. 야곱 가족이 요셉에게 끼친 고통과 모욕은 야곱 가족의 구원의 수단이 된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삶에 섭리해 악한 사건을 하나님이 사용한 사건으로 바꿨기 때문에 선택 받은 자들이 생존한다. 요셉을 통해 애굽 사람들이 기근에서 구원받음과 같이 선택 받지 않은 자도 구원을 받는다.71)72)
아마도 창세기 50장 20절과 가장 비슷한 내용은, 신약에서 가룟 유다의 예일 것이다. 가룟 유다는 악하면서도 중요하다 (선하고 중요한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동료들에게 자기 뒤꿈치를 들 때 유다는 전형적인 반역자로 낙인찍힌다. 또한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악하지만 중요한 인물이다. 유다와 예수의 관계는 요셉의 형제들과 요셉의 관계와 같다.
21절 요셉은 형제들에게 명령문으로 된 요청을 한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요셉은 계속 자기 가족과 자녀들을 “기르리이다”(‘쿨’의 필펠) 라고 약속한다. 요셉은 45장 11절에서 “봉양하다, 돌보다”(‘쿨’의 필펠) 를 사용했었다. 아마도 기근이 끝났겠지만, 요셉은 기근이 끝나고 오랜 후에도 계속 자기 가족을 “지키는 자”다. 가족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기근이 끝난 것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
7.3 신약 비교 본문 연구
na28 히브리서 9:15~20
nkrv 히브리서 9:15~20
15Καὶ διὰ τοῦτο διαθήκης καινῆς μεσίτης ἐστίν,* ὅπως θανάτου γενομένου εἰς ἀπολύτρωσιν τῶν ἐπὶ τῇ πρώτῃ διαθήκῃ παραβάσεων τὴν ἐπαγγελίαν λάβωσιν οἱ κεκλημένοι τῆς αἰωνίου κληρονομίας.*
16Ὅπου γὰρ διαθήκη,* θάνατον ἀνάγκη φέρεσθαι τοῦ διαθεμένου ·
17διαθήκη γὰρ ἐπὶ νεκροῖς βεβαία, ἐπεὶ ⸀μήποτε ἰσχύει ὅτε ζῇ ὁ διαθέμενος.*
18ὅθεν οὐδὲ ἡ πρώτη χωρὶς αἵματος ἐγκεκαίνισται ·*
19λαληθείσης γὰρ πάσης ⸆ ἐντολῆς κατὰ ᄚτὸν νόμον ὑπὸ Μωϋσέως παντὶ τῷ λαῷ,* λαβὼν τὸ αἷμα τῶν ⸂μόσχων [καὶ τῶν τράγων]⸃ μετὰ ὕδατος καὶ ἐρίου κοκκίνου καὶ ὑσσώπου αὐτό τε τὸ βιβλίον καὶ πάντα τὸν λαὸν ἐρράντισεν*
20λέγων ·
τοῦτο τὸ αἷμα τῆς διαθήκης ἧς ἐνετείλατο πρὸς ὑμᾶς ὁ θεός.*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히브리서 9:15~20
헬라어 διατίθημι 맡기다. 위임하다. 다스리게 하다. 미래 능동태. διαθήσει; 부정과거 능동태. διέθηκά; 완료 능동태. διατέθηκεν; 부정과거 수동태. διετέθην; 완료 중간태. διατέθειται. 히브리어 등가: 📷
히브리어 등가 카라트:언약을 체결하는 것과 관련하여 제물을 쪼개는 것으로 생각하여, 언약을 체결하거나 그 관계에 들어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을 부르신것과 그에게 약속하신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하나님은 한 백성을 창조하셨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행위 때문에 한 백성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새 이름인 이스라엘은 하나니므이 백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세계의 열방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이 되도록 선택하셨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성경에서 믿음의 공동체는 부름 받은 백성이다.”(hanson 1986:467) 신학적 의미에서 이 말은 특정 집단의 선택을 믿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택함 받은 백성이 아니다. 스스러 어떤 업적을 이뤄서 선택된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았다. 선택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족장들에게 약속을 주신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택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도권에,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있다. 선택은 책임을 요구하고 선택은 더 낮은 것이 아니라 더 높은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 받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언약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하신 사건에는 구원의 역사 뿐 아니라 심판의 역사도 포함된다. 선지자들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때 심판을 내리시는 기본 전제는 선택과 언약이다. 선택은 이스라엘에 대한 요구를 강조하며, 요구에 상응하는 더 심한 형벌로 귀결된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서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아모스3:2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특별한 관계로 함께 연결돼 있다.언약 관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애굽에서 노예에서 그의 백성을 해방시킨 것으로 시작한다.(출애굽)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결론은 토라, 구약 전체의 핵심이다. 내러티브의 틀은 언약이 체결된 사건의 배경을 제공하고 사건의 의미를 강조할 의도로 짜져 있다. 언약 체결은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사건에 대한 이야기와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이야기에서 이어서 나온다. 두이야기는 19:4.20:2 에서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나는 너르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언약은 쌍방의 동의이기 때문에 백성의 동의를 포함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백성의 동의를 요구하시고 백성은 동의한다. 하나님편에서의 의무는 출애굽의 해방을 통해서 이미 실행됐다. 물론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 할 것을 약속하신다. 백성의의무는 십계명에, 언약의 책(출20:22~23:33), 신명기의 끝 부분까지 걸쳐있는 나머지 토라에 표현된다. 따라서 언약을 통해서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이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행위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히브리 단어 ‘헤세드’가 의미하는 특별한 종류의 사랑으로 자신과 백성을 결속시킨다.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은....... 신실한 사랑, 변치않고, 흔들림 없이 언약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Good 1962b:167) 언약적 사랑은 “서로 결속돼 있는 대상을 위해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강력한 신뢰관계, 열망, 결의와 관련이 있다.”(Brueggemann 1997:217)
이상적인 모습은 당연히 언약적 사랑을 쌍방이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반복해서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는 다양한 이미지와 은유들을 사용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수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 이스라엘은 그의 자녀라고 말할수 있다. 하나님은 아내와 신부인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불릴수 있다. 이스라엘이 결혼관계에서 신실하지 못한 행위는 출애굽기 34:16.레20:5,사사기2:17 렘3:6~10,겔16장과 두 음녀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충격적인 비유에서 비판을 받는다. 결국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북왕국의 이탈과 패배로 찢어졌으나 원래의 통일된 모습을 회복할 것이다. 위로의 책 예레미야30장~31장은 북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언하며 북쪽 지파들이 회복될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을 대상은 연합된 유다와 이스라엘이다. “새 언약의 체결은 두 왕국의 분리 이후 오랫동아 깨어져 있던 관계의 치유를 의미한다. 새 언약은 한때 그랬던 것처럼 하나로 통일된 하나님의 백성만 존재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확신을 설명해 주고 있다.(덤브렐)
성경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에 끊임없이 관심을 둔다. 이 관계는 신약에도 계속되는데 기독교 교회의 기원과 초기의 성장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표현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성취시킨다.(눅1:54~55, 마리아의 노래)신약은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며 구약과 비교해서 ‘하나님의백성’이라는 실제 표현은 덜 사용하고 있다. 롬9:25~26에서 바울은 ‘내백성’을 회복할 것이라는 호세아의 예언이 교회를 통해서 성취된 것을 이해 한다. 베드로전서 2:10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용어가 기독교 공동체에 사용된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과 새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것은 신약의 중심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새 이스라엘에 포함시킴으로써 역사의 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목표를 성취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새 인류에 포함시킴으로써 창조의 질서에있는 하나님의 목표를 성취한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은 새 공동체 새 기독교 교회를 탄생시켰다. 신약에서 이 공동체는 새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들을 성취한 존재로 뵤사된다. 이는 성령의 세례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다. 새 공동체는 구약의 하나님 백성과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며 종말의 공동체, 막 시작된 새 시대의 공동체 새 인류의 핵이기 때문에 새 공동체이다. 인자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포괄적으로대표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죽고 새 삶으로 다시 살아난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마름 뼈들은 생명을 얻는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신약의 교회는 택함 받은 백성인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람들이다. 벧후1:10은 두용어를 결합하여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 고 독자들에게 권면했다. 신자들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는 ‘성도들(하기오이)’ 곧 거룩한자들,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된 백성이다. 교회는 성도들을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채택함ㅇ로써 ‘하나님의 소유인 성스러운 배성, 세상의 삶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 백성으로 스스로 이해했다’(로히핑크)하나님의 백성을 미래에 구속할 것이라는 약속들은 성취됐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은혜로 구속하신 것처럼, 새 이스라엘을 그리스도 사건으로 특별히 그릐스도의 죽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그라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하심이라(딛2:14,참고시130:8) 교회는 하나님의 새 백성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행위로 존재하게 됐기 때문이다. 교회는 새 언약의 공동체다. 이스라엘이 가졌던 특권들은 이제 교회의 특권들이다. 새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되는 방법은 더 이상 혈통에 근거하지 않고 믿음에 근거한다.
언약(디아데케)이라는 단어는 구약에 거의 300회 정도 등장하는 반면 신약에서는 단 33회만 등장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언약은 사용 빈도가 보여주는 것 보다는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언약은 핵심적인 여러 본문에서 사용된다. 주의 만찬을 제정하면서 사용된 단어들을 통해서 예수는 예레미야가 약속한 새 언약을 시작하는 희생제사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이해한다. 마26:28, 막14:24 의 본존된 형태에서 예수는 잔을 들고서 “이것은...언약의 피니라”고 하신 말씀은 출애굽기 24:8에 기록된 시내산 언약을 시작하게 만든 희생제물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고전11:25,눅22:20,에 기록된 형태는 ‘내 피로 세운 내 언약’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을 암시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 그리스도의 사건은 약속된 새 언약,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새 관계를 시작한다.
새 언약의 신햑은 히브리서에서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ㄷ. 히브리서는 예수를 ‘더 좋은 어약의 보증(7:22)로 이해하며,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낫고 옛 언약을 필요없게 만든 것을 보여주는 논의를 위해 렘31:31~34 전부를 인용한다. 주의 만찬의 전통에서처럼 새언약은 새 언약의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과 연결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점을 헬라어 단어 ’디아데케‘에 있는 이중적인 의를 활용해서 강조한다. 이 단어는 언약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리트‘의 번역 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뜻과 유언”이라는 측면에서 ’유언‘을 뜻한다. 이처럼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효력을 발휘하는 것처럼(히9:17)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효력을 발휘한다.(부르스1969:56~57)
히9:15~20
15절 그리스도의 치는 렘31:31~34를 통해 약속된 것을 이루고 예수가 “새언약의 중보”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이 강조는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수여된 혜택에서 새 언약이 승인을 이루기 위해 요구되었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전환된다. 예수가 하나님을 순종하여 자의로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그는 새 언약의 제사장적 중보자가 되었다. 천상의 성소를 들어감은 그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과 그가 중보했던 언약의 비준을 확인해준다. 중보자의 직무가 그의 구속적 죽음의 효력으로 선언된다. 이가 이룬 종말론적 구속은(12절)은 자기 백성들과 새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으로서 이제 묘사된다. 11절~14절의 천샹의 구속 사역의 주제는 15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새 언약의 축복을 포함하는 약속된 종말론적 기업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영원한 구원의 향유와 관련된다. 예수의 죽음은“첫 언약 때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라는 부사구는 11~14절을 반영한다. 옛 언약은 그것이 호력을 발휘하고 있는 동안에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서 죽음을 요구했다.(10:28)언약을 승인했던 사람들은 저주의 방식으로 언약의 규정에 대한 순종을 맹세했다. 그것의 위반은 그들이 맹세를 지키지 못한다는 증거가 되었고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위험에 처하게 했다. 지극한 순종의 행위로 예수는 저주 받은 자로서 대표적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 위임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한 언약의 복을 받을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16~17절 뒤에 이어지는 확장된 단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연성을 설명하게 위해 삽입구적으로 도입되었다. 15절에 “언약”과“죽음”의 두드러진 상관성이 16,17절에 반복되고 그것은 언약을 단일하게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디고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주제가 언약의 승인이라는 인식은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제사장적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왜 죽어야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16,17을 도입했음을 암시한다. 15절B ‘죽으사’를 강조하는 것이지 15B의 목적절(‘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휴히스가 관찰한 것처럼 “그 초점은 새 언약의 제사장적 중보자로 안내하는 죽음에 있는 것이지 기업을 인도하는 죽으에 있지 않다. 바울은 주로 기독론에 관심이 잇지 기업의 구원론적 축복에 있지 않다. ”유언한 자가 주어야 되나니“ 는 죽음의 필연성은 언약적 절차에 근거하고 있다. 승인하는 당사자는 언약을 따르겠다는 헌신을 맹세할 때 저주를 자기 자신에게 두었다. 거래엣 승인하는 당사자는 희생을 위해 지정된 동물에 대해 대표되었다. 그가 그 맹세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대표되는 동물의 잔인한 절단은 승인하는 당사자의 폭력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언약의 승인을 위해서는 승인자의 죽음이 상징적으로 대표되는 것이 필요했다.
18~21절 저자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비준을 언급하다. ‘첫 언약’은 ‘이전언약’을 생략적으로 사용한다. 이 언약의 비준은 법적 원리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죽음의 원리가 이전 언약의 시작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이 본문의 중심적 의미는 언약과 희생의 피간의 밀접한 관계에 있다. 피의 모티브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는 결론으로 동사 엥카이네제인 은 ”새러은 것을 경건하게 하다“를 나타내고 그것은 야웨와 그의 백성들을 결속하는 경건한 법적 관계의 비준을 묘사하는데 적합하다. 희생의 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매개였다. 그것은 또한 ”피의 적용이 없이는“ 옛 언약이나 새 언약에서 결정적인 정결을 이룰수 없다는 법적인 금언을 예기한다.22b
시내산에서 시작된 언약은 피로 비준되었고 죽음에 의해 법적으로 보증되었다. 피의 중요성이 이 구절
에서 반복으로 강조되는 언약이 단지 새로운 언약처럼 희생적인 피에 의해 재가 되었음을 보이는 것을 전자는 강조한다. 20절의 ”이것은 언약의 피니라“는 그 인용이 아마도 그리스도의 성만찬 말씀과 일치하여 제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옛 언약이 죽인 동물에서 획득한 희생적 피를 통해 재갸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0절의 주의 만찬에서 그 인용은 언약의 비준에서 희생의 피의 사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7.4 정경 흐름 분석(주제흐름 분석6.3+7.1,7.2,7.3)
누가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 불리고 있다. 전에 한 미국인이 ‘데니’라는 친구에게 좋은 그리스도전을 추천해 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하자 데니는 ”당신은 누가가 기록한 책을 보았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누가는 이방인이었고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닌 신약성경 기자라는 독특한 특성을 갖고있다. 그는 직업이 의사였고 바로 그러한 사실이 그렇게 넓은 이해를 그에게 주었을 것이다. 목사는 사람의 가장 선한 곳을 보고, 법관은 사람의 가장 나쁜 점을 보며, 의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 있다. 누가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였다.
또한 독특하게 복음서에는 표상이 있다.
마가복음의 표상은 사람이다.
마가복음은 복음서중 가장 단순하고 솔직하게 기록되어있다. 그 책의 특징은 사실주의라고 하며, 예수의 생애에 대한 보고서에 가장 가깝다.
마태복음의 표상은 사자이다.
마태는 유대인 전자로서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하였으며 예수 안에서 메시아를 보았는데, 메시아는 바로 모든 예언자가 예언했던 유다종족이 사자인 것이다.
요한복음의 표상은 독수리이다.
독수리는 어떤 다른 새들보다 높이 날수 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독 독수리만 태양을 직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신학적 복음서이고 그 고매한 사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복음서가 제시하는 주제는 철학자가 평생 고찰하고자 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누가복음의 표상은 송아지이다.
송아지는 희생제물로 드리는 동물이다. 누가는 예수에게서 온 세상을 구속하는 희생제물로 보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누가를 통해 모든 장벽은 무너지고 예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성인이나, 죄인 구별없이 모든 자를 위해 존재하신다. 그는 온 세상의 구세주이다. 그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고 누가복음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누가복음의 저작 연대는 주후 70년대 기록되었다면 예루살렘 멸망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갈등관계에 있다는 것 표현, 사도행전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신앙공동체를 전제함으로 이는 후대 연대가 아니라 초기의 연대를 암시한다. 사도행전이 기록되기 이전이며 주후 62년(바울이 로마에서 가택 연금된 마지막해)보다 늦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가 마가복음의 사본을 받아 사용했음을 감안해야 한다면 위에 언급한 62년보다는 1~2년 이상 일찍 기록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끝나는 시점으로 누가복음 60년대 초기나,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순교가 언급되지 않아서 60년대 초반, 또는 로마 정부와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60년대(네로) 후반으로 제시하므로 누가복음은 주후60년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누가의 서론1:1~4이 독자의 이름을 언급한 그리스-로마 풍의 다른 서문들과 매우 유사한 점을 고려할 때 데오빌로는 아마도 누가의 집필사역을 재정적으로 도운 부유한 헬라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데오빌로에게 썼다고 해서 누가가 오직 데오빌로만을 집필의 유일한 대상자로 여긴 것은 물론 아니다. 교회사 초기부터 추정되는 것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가 역시 데오빌로가 몸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느 성도 공동체에게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저작상황에 대해서 더욱 확신 있게 주장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가 부족하다.
누가는 그 나라가 완전히 알려질 때까지 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는 그 나라가 완전히 알려질 때까지 인내하도록 부탁한다. “이방인의 때‘ 와 같이 예수께서 영광중에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지만 기독교 공동체는 그들에게 시련을 줄 권위들 앞에서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께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이땅에 어려움이 늘어갈수록 가까워 오는 구원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과 윤리를 데오빌로를 위해서 기록했다. 그래서 데오빌로가 다음 사항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확신하게 하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제자로 부름을 받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는 예수를 어떤 존재로 이해해야 하는가,
제자는 예수를 전파하기 위해서 어떻게 공동체의 사역에 동참해야 하는가.
예수의 제자는 새로운 공동체가 예수에 대해서 메시지를 증거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에 적대감을 보이는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는 예수가 이 세상에서 가르치고 보여준 방식대로 살아가야 한다. 누가의 과제는 데오빌로에게 이전에 배운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어서 배운 것을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특별히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이방인들이 들어가게 된것과 관련된 논쟁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제공해 주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안에서 예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누가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인물을 소개하며, 또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인물에게 적대감을 보인다는 것을 언급하다. 구원은 오직 부활 및 승천한 주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것을 통해 주어진다. 공식적인 유대교와는 대조되는 것으로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났다. 새로운 공동체가 유대교에서 분리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예수와 교회는 유대인들에게 언제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의도하시는 소망에 대해서 선포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메시지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와 같은 적대감 때문에 예수는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날까지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지속적인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게 신실해야 한다.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새로운 운동에 함께 하시고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입증해준다.
누가는 그가 데오빌로를 포함한 이방인 독자들이 복음을 바로 이해 할수 있도록 온 정성을 기울이는 사실이 역력하다. 누가는 팔레스틴의 지리적,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잘 모르는 단어들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천국, 하늘에 계신 아버지 대신 그는 하나님 나라. 어버지를 사용하였다.(5:19,6:20,21,48,11:13)
누가는 헬라 문화권 내에 있는 혹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상류층 로마인 독자들에게 글을 쓰고 있다.
누가의 독자들은 유복하며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아마도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증, 혹은 그 믿음을 변호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논증을 필요로 한 것 같다. (1:3~4)
누가-사도행전은 두 권으로 저술된 가운데 첫 번째 누가의 책이다. 헬라-로마 역사에 더 가깝다. 마가 복음은 누가복음의 원전 중 하나이다. 누가복음에는 다양한 주제들의 특별히 나타난다. 그것은 버림받은자, 종교적 부적격자, 가난한자 및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역이다. 이러한 강조점은 제2권 사도행전에서 이방인 선교를 수월하게 다룰 수 있게 한다. 누가복음에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의 줄거리가 이용되며,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땅끝으로 이동한다.
누가의 신학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누가가 이 복음서를 기록한 상황이나 수신자들에 대해서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뚜렷한 관심은 사도행전에서 함께 물건을 통용한 공동체의 모델에서 더욱 강조되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누가복음의 수신자가 다소 부유한 성도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부유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된 궁핍한 성도들을 위해 풍성하게 물질을 나누도록 권면한 것이다.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예수의 긍휼은 다분히 유대적인 상황으로부터 점점 이방 세계로 확산되는 복음의 진전과 더불어 누가가 주로 이방 성도들을 위해 기록한 이방인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지지한다.
누가는 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을까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은 눅1:3~4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이 구절들은 누가의 저작 배후에 있는 역사적, 교리 문답적, 변증론적, 그리고 어쩌면 목회적인 동기까지도 보여준다.
누가복음의 전체의 핵심적인 관점은 구원 역사와 관련된 하나님의 역할과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가장 잘 반영한다. 오직 누가복음에만 고유한 자료에 대한 개관과 마찬가지로 또한 누가복음의 구조와 신학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이와 같은 핵심 관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의 신실한 자세,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예수가 다시 오는 것에 대한 견고한 소망에 대해 세부적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새로운 공동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있는 어떤 이방인을 연상시켜준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 이방인들이 새로운 공동체에 포함되는 것, 초대교회가 사람들에게서 거부를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을 넌지시 알려준다.
누가복음에 제시되는 많은 윤리적인 권면도 이와 같은 접근을 암시해준다. 아마도 데오빌로는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데오빌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회와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오빌로는 자신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많은 박해를 받고 있던 이 새로운 공동체에 진정으로 속해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소개해 준다.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주가는 하나님이 예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또한 예수가 소망에 대해서 어떻게 선포했는지를 알려준다. 비록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다는 것을 거부하지만 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변호하고자 한다. 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변호하고자 한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도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그래서 데오빌로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며, 헌신적인 신앙생활를 하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심지어 유대인들이 예수와 새로운 공동체를 거부하는 한 가운데서도 데오빌로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장차 예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게 하려는 것이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가는 오직 데오빌로 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은 긴장감을 느끼고 있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쓴 것이다. 원래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된 운동에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어떤 이방인은 누가가 제공하는 확실한 정보를 통해서 유익을 얻을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에 많은 유대인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나, 또는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경험하면서 고민하고 있던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 일을 인도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새로운 일에 동참하도록 이스라엘을 다양한 방법으로 초대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는 이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지고 널리 확장되어 갈 것이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렇게 될것이라고 전파했기 때문이다.
누가의 내러티브는 내러티브의 진전을 이끄는 계획, 존중을 받거나 반대에 직면하게 되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이 목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원이 누가의 중심 주제라면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내용으로 가장 이른 지점에 나타나는 것이 마리아가 하나님을 “하나님 내 구주”로 부르는 것임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관점은 내러티브에 직접 드러나기도 한다. 하나님이 세례를 받는 예수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배후에는 성령이 계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효력있게 만드는 힘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고, 성경을 읽지만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 사람들과 충돌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오랜 의제와 예수의 사역이 일관성을 보인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예수의 사명은 하나님의 목적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이사실은 무엇보다 예수의 일생이 성경의 방식에 따른 것으로 입증되고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를 신원하신 것으로 입증된다.
누가복음의 의제를 끌고가는 주체는 하나님이지만 누가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다. 누가의 내러티브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달리 누가의 청중이 복음서의 시작부터 예수의 정체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차지하는 예수의 역할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큰 복이다. 예수는 선지자로 묘사되지만 선지자보다 더 큰 인물이다. 예수는 오랫동안 기다린 다윗 계통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왕적 선지자의 운명을 성취한다. 선지자인 예수에게 죽음이 필요하지만 죽음이 마지막은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보다는 예수가 어떻게 그의 역할을 이룰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복음서의 초반부터 예수는 구주로 밝혀진다 (2:11). 예수는 구주의 역할을 다양한 방식으로 성취해 간다. 예수가 치유의 기적을 행하고, 식탁 교제를 확대하는 것은 가장 눈에 띄는 장면에 해당한다. 누가는 치유와 식탁 교제를 강조하는데, 두 행위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는 식사와 치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주로 사회의 주변부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임해 있음을 전한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진 복음”(4:18–19) 이다. 당연히 예수의 이런 행위는 그가 전한 말씀과 일치하며, 예수의 가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삶을 보여 주었으며, 사람들을 위해 (만일 그들이 듣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 그리고 하나님에게 옳게 반응한 태도를 가르쳤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로의 부르심은 근본적으로 예수와 함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 편에 함께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 위해서는 관심의 초점을 상속된 지위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였음을 행동을 통해 보여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참 “아브라함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 특히 궁핍한 사람들을 향해 손을 벌려 긍휼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이 행동하는 것처럼 살 것을 사람들에게 요청한다. 이런 삶은 로마 세계에서는 전형적이었던 명예와 신분을 중시하는 분위기에 나타난 전투적이고 경쟁적인 삶의 형태와 대조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김에서 비롯되는 행위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는 자들을 선하게 대하라. 호의에 보답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환대하라. 되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주라.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력히 경험함으로써 성품과 신념과 헌신이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이런 삶을 가로막는 핵심 경쟁자는 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돈은 돈 자체라기보다는 돈의 다스림을 말한다. 이 경쟁자는 사회의 칭송을 갈망하게 하고, 그래서 낮은 지위의, 가난한, 잃어버린, 소외된 사람들과 권력과 특권을 지닌 사람들을 차별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능력을 신실하게 구현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부족함을 보인다. 제자들과 달리 내러티브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는 이들은 충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예상과 달리 하나님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모범적인 태도로 예수의 메시지에 반응한다. 세 가지 예를 언급해 보면,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 (7:36–50), 부자 세리 (19:1–10), 십자가에 달린 강도다 (23:39–43). 이들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와 “함께”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를 배우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이 가져오고, 전하고, 예고하는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 따라 새로운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모두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 증인의 역할을 수행할 때 필요하다.
제자들이 예수가 제시하고 본을 보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살아간다. 예수에게 적대적인 이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평가하며, 예수의 사역을 자신들의 지도력을 위협하고 현재의 질서를 장악하고 있는 제도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간단히 말해, 이들은 예수를 하나님 (즉 이들이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막아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목적을 반대한다. 누가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귀신의 세력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포함해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목적을 섬기는 자들이다. 적개심의 강은 흘러넘치게 되고, 결국 강둑을 넘어 예수에게 고통을 가하고, 드디어 그를 버려 십자가에 처형해 버린다. 적개심의 모티프는 누가의 내러티브를 높은 긴장감으로 몰고 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러니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고 반대를 극복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누가의 내러티브는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구원은 누가복음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에 해당한다. 구원은 저 세상의 것만도 미래의 것만도 아니다. 구원은 오늘의 삶을 존중하고, 인생을 온전히 회복하며, 인간 공동체를 생동감 있게 만들고,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며,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공동체 가운데 실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장하게 한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사회적 구원과 영적 구원, 또는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적 구원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접근을 거부한다. 구원은 인생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구원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활동과 같이 삶 전체를 포괄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최고의 은인이다. 이 하나님의 구속 목적은 예수의 생애를 통해 나타나고, 하나님의 메시지는 최고의 은인이 베푸는 은덕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린다
.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계에 대 전환이 일어난다.
강한 자가 이기고 승리하던 세상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가 환영받은 세상이 새로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위계질서와 경제 질서의 전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구원질서의 확립을 나타낸다.
약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가 구원받은 대 전환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전개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지오르지오네의 『양치기들의 경배』
유월절
유월절로 번역된 히브리어 ‘페사흐’의 기본 의미는 ‘넘어가다. 통과하다’ 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전날 밤 죽음의 사자가 전하는 재앙을 면하고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가리킨다. 이날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일이기도 하다. 헬라어 파스카는 히브리어 페사흐를 음역한 것이다.
유월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12장에 소상하게 소개되고 있다. 출애굽 전날 밤 애굽에 내려진 마지막 재앙(10번째 재앙)은 애굽 왕(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을 돌리는 여종의 장자, 심지어 가축의 첫 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를 대비해 이스라엘 백성은 1년 된 수컷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그래서 이 피가 있는 집은 죽음의 천사가 그냥 넘어가(지나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넘어가다’는 뜻의 ‘유월절’이란 명칭이 생겼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을 해의 시작인 유대력 1월(아빕 월, 가나안 월력 니산 월, 태양력 3–4월경)로 정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유대력 1월 14일에 유월절을, 그 다음날부터 1주간 무교절을 지켰는데, 이는 유월절에 무교병(無酵餠, 누룩 없는 떡)을 먹은 데서 유래하였다.
유월절 절차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1월 10일에 유월절 양을 준비하고(출 12:3–4), 13일 저녁에 등불을 켜고 집안의 누룩을 제거하였다. 다음날 14일 저녁에는 준비한 양(또는 염소)을 잡고 우슬초에 양의 피를 적셔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를 했다. 이때는 잡은 고기와 머리, 다리, 내장을 모두 불에 구워 무교병, 쓴 나물과 함께 먹고 남는 것은 불에 태워야 했다. 또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은 채 날이 새면 급히 애굽을 떠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22:1의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은 엄밀하게 말하면 무교절 직후였다. 하지만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에 온 김에 두 명절을 다 쇠려했기 때문에 보통 둘은 하나님의 명절로 묘사된다.
유월절 준비 때나 유월절 식사때 모두 약속과 배신에 대한 예시가 섞여있다. 여기에 나오는 유월절 자체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구약 선지자들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자신의 백성을 다시한번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실 새로운 출애굽을 기다렸다. 하지만 당시 유대교는 새로은 어린양이 아니라 새로운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월절 식사는 밤에 해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사월이며 오후 6시경 해가 졌으므로 식사는 그때 시작해야 했다. 명절때는 친밀한 식탁교제를 나누었다. 보통 한 두 가족이 함께 식사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식사 때는 앉았지만 유월절과 같은 명절때는 ‘기대어서’먹었다. ‘앉으사’는 기대어서 앉는 것을 말한다. 유대 전통은 보통 하나님 나라의 때를 잔치로 묘사했다. 통상적인 식사 때와 유월절에는 포도주잔에 축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보통때는 집안의 가장이 식사 전에 떡과 포도주에 대해 통상적인 감사기도를 드렸으나, 유월절 식사때는 떡과 포도주에 특별한 축복의 말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고대 유대 독자들은 함께 식사를 나눈 사람의 배신을 특별히 수치로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손님 접대와 식탁교제를 친밀한 유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에 비해 언제자 힘이 없었으며, 사회적 지위도 없었다. 종은 주인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앉아서‘는 헬라인이 평소 식사 때 취하는 자세이며 팔레스틴 유대인이 명절 때 취하는 자세이다.
눅 22장의 구조 분석
눅 22장 24~30 본문 구조 분석
7. 예수의 고난과 죽음 (22:1–23:56)
7.1. 마지막 만찬 (22:1–38)
7.1.1. 음모 (22:1–6)
7.1.2. 유월절을 위한 준비 (22:7–13)
7.1.3. 유월절 식사에서 가르치는 예수
(22:14–38)
7.1.3.1. 유월절의 기념과 성취
(22:14–20)
7.1.3.2. 식탁의 배반자 (22:21–23)
7.1.3.3. 섬김과 왕적 권위 (22:24–30)
7.1.3.4. 다가오는 시련 (22:31–38)
7.2. 감람산의 예수 (22:39–46)
7.3. 예수가 체포하러 온 무리를 만나다 (22:47–53)
7.4. 대제사장의 관저에 있는 베드로와 예수
(22:54–65)
7.5. 예수의 재판 (22:66–23:25)
7.5.1.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 (22:66–71)
A 24,25 논쟁, 이방인 임금, 세상 왕국,은인
B 26,27 큰자 vs 섬기는자
B′28,29 너희 나와 함께, 내가 너희에게 맡겨
A′30 하나님 나라 왕국
구조분석
이방인의 집권자, 세상 권력자, 은인
① 권력자(權力者, ruler)
권력자는 ‘힘 있는자’를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백성의 지도자’를 가리킨다. “권력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솨리트”(שַׁלִּיט)는 ‘지배하다’, ‘통제하다’는 뜻의 동사 ‘솨라트’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주권자’(전 10:5), ‘총리’(창 42:6) 등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헬라어로는 ‘헤게몬’(ἡγεμών)이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는 ‘인도하다’, ‘길잡이가 되다’는 뜻의 동사 ‘헤게오마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고위 관리나 군사령관, 고을의 두령, 방백 등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마 2:6; 벧전 2:14). 참고로 성경에서 ‘권력’(power, might)이란 ① 왕의 권력(왕하 13:8), ② 군사력(삿 8:21), 또는 ③ 사람들이 힘으로 믿고 의지하고 섬기는 재물이나 보화(스 4:23) 등을 의미한다.
권세는 권력과 세력, 상대방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복종시킬 수 있는 힘과 세력을 말한다. 일명 ‘권위’, ‘권능’(權能). 이는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자신이 만드신 피조 세계에 대한 보편적이고 영원한 지배력(왕권)을 가리킨다(롬 9:21). 그에 비해 사람과 관련하여서는, 하나님이나 상급 권위자 혹은 권위 있는 기관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권위, 즉 ‘위임된 권세’를 가리킨다. 사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다(롬 13:1).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사탄’에 대해 한 차례 ‘권세자’라 묘사하고 있다(롬 8:38). 힘을 가지고 무리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권력자는 성경에서 천사장 미가엘애 대한 칭호에서 “큰 군주”로 번역된다. 이 말은 임금, 우두머리, 지도자, 주인 등을 뜻하는데, 그 역할에 따라서 방백, 군대장관, 지휘관, 우두머리, 고관, 군주, 지도자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위임된 권세를 보면, ① 백성에 대한 국가나 정부의 권세(눅 22:25; 롬 13:1–6), ②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세(고전 11:7–10; 딤전 2:12), ③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권세(행 26:10–12), ④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창 1:26–28), ⑤ 불신 세상에 대한 성도의 권세(단 12:7) 등이 있다. 이외에도 ‘권세’는 상징적 용례로도 자주 사용되는데, ‘혀의 권세’(잠 18:21), ‘칼의 권세’(욥 5:20), ‘악인의 권세’(시 125:3), ‘음부(스올)의 권세’(시 49:15), ‘흑암의 권세’(골 1:13), ‘짐승의 권세’(계 17:12–13), ‘사망의 권세’(계 6:8) 등이 있다.
권세자들의 권위는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권력과 위세 또는 개인적인 덕망이나 문벌등으로 생겨난 사회적 세력, 어떤 분야에서 탁월한 기술이나 지식들을 가리킨다.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와 인간의 권위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에 ‘하나님의 권위는 다른 존재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본래부터 지니고 계시며 영원히 스스로 유지하시는 권위이다.(신4:39~40, 사46:9~11) 만민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인간의 권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롬13:1) 즉 인간이 지닌 모든 권위는 위임된 권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권적인 권위에 의해 세워진 각종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한다.(벧전2:18)
유대인은 이방인의 권력모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대 근동에서 왕들은 오랫동안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했으며 폭군처럼 다스렸다. 헬라 통치자들도 동방 지중해의 많은 지역에서 같은 태도를 취했다. 지배자들 및 유리한 권력자의 위치에서 은혜를 나누어 주는 사람은 은인이라고 불렀다. 은혜를 베푸는 관습은 헬라사회에서 널리 칭찬을 받았다.
종은 주인에 비해 언제나 힘이 없었으며, 사회적 지위도 없었다. 종은 주인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앉아서‘는 헬라인이 평소 식사 때 취하는 자세이며 팔레스틴 유대인이 명절 때 취하는 자세이다.
② 은인(선정을 베푸는 사람, benefactor)
유대 고대사에 나타난 은인
요세푸스8:1 야곱은 애굽에서 17년간 산후 병이 들어 아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아들들이 번영을 눅리기를 위해 기도하고 rmelmf 각자가 가나안 ᄄᆞᆼ에서 어떻게 살게 될것인가를 예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후에 일어날 것이었다. 야곱은 또한 요셉이 형들의 악한 소행을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은인에게도 베풀기 어려운 혜택들을 베풀고 친절하게 대해 준 데 대한 칭찬을 길게 늘어 놓았다.
요세푸스11:1 그러나 사울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오랜 견딜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에게서나 백성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을 보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충실한 종들에게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고 그의 덕을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자기에게 내린 비밀지령과 사울의 의도에 대해 다윗에게 미리 귀뜸해 주었다. 요나단은 백성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고 사울 자신에게도 은인이 되는 그런 자를 죽이는 것은 옳지 않아 다윗은 요나단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사울 왕 앞에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기로 했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의도를 확인하고 도시 앞 평지로 무술 연습을 하는 척하고 나갔으나 실상을 약속대로 다윗에게 아버지의 의중을 전달하였다. 다윗은 요나단을 보고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요나단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이에 요나단은 다윗을 일으켜 세우고 둘이 서로 껴안고 울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맹세를 하고 헤어졌다.
아하수에로 왕이 모르드개에 관한 왕실의 기록을 읽고 그에게 보답, 영예를 주려고 할 때에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 이므로 우리가 그를 이렇게 높인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며 하만에게 모르드개를 높일 것을 명한다.
하스모니아 왕조, 맛다디아, 유다, 요나단, 시몬, 요한 힐카누스
시몬은 대제사장이 되고 유대인의 왕으로 즉위한 첫 해에 마제도니아이들의 속박에서 유대인들을 해방시켰으며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했다. 유대인들은 이같은 자유와 조공의 면제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은 앗수르 왕국 청건 후 170 년 즉 니카토르라고 불리는 셀류쿠스가 수리아를 장악한지 17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유대 백성들이 시몬을 얼마나 존경하고 좋아했는지는 개인 상호간의 계약 문서나 공공기록에서 조차도 “유대인의 은인이요 지배자인 시몬의 통치 원년에”(in the first year of Simon the benefactor, and ethnarch of the Jews)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유대인들은 시몬의 통치 밑에서 행복을 누렸으며 주변의 적들을 눌러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몬은 가사라와 욥바와 얌니아 시를 함락시키는 대전과를 올렸을 뿐아니라 예루살렘 성채를 무력으로 탈환하여 기초까지 철저히 파괴하였다. 시몬는 성채를 완전히 파괴한 후 성채가 세워진 산을 깎아내려 성전보다 낮게 만드는 것이 유대인의 안전을 위한 최선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제 이산을 성전보다 낮게 깎아내리도록 합시다. 유대인들은 시몬의 제의를 동의했다.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제안인데 어찌 싫다 하겠는가. 이에 그들은 모두 공사에 나서서 산을 깎아내려 도시내의 다른 지역과 같은 높이로 만드는데 쉬지 않고 꼬박 이틀 밤낮이 걸렸다. 성채가 서 있던 산을 평탄케 하니 결국은 성전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출물이 되었다. 이같은 일들이 모두 시몬의 지휘아래 달성된 업적이었다.
고대근동의 종주와 봉신관계
봉신
고대 근동에서의 다신론은 왕들, 나라들 및 국가적 혹은 개인적 관심으로 다양한 신들을 조작하려고 노력하는 개개인들과 더불어 신-영토-사람들의 종교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관한 성경 외적인 사례는 에살핫돈의 봉신 조약 서문이다. 이 서문은 아슈르의 도시들, 칼라, 아르벨라, 칼지, 하란, 앗시리아, 바빌론, 니푸르, 수메르 및 아카드의 신들에게 "모든 대지의 신들" 및 "하늘과 땅의 신들"과 더불어 들어가는 계약의 보증인으로서 행동해 달라고 호소한다
통치자들 혹은 왕들은 사람들과 신들 사이의 대표 혹은 중계자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신들에 대한 왕들의 관계는 궁정과 대표된 백성들 모두를 위한 중요한 파생적 효과를 가진 것으로 비춰졌다. 게다가, 왕들은 종종 신적인 특성을 소유한 것으로 여겨졌다. 공식적인 종교 체계에서, 사제적인 전문가들은 종종 종교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도록 채용되었다.
조약
히타이트 봉신 조약과 우가리트로부터 발굴된 문헌들은 모세 언약 속에서 발견되는 축복과 저주를 포함하고 있다. 6). 신명기 8장 및 28절과 같은 본문들은 보호 (특정 개인 및 그의 가족, 그의 집, 그가 속한 나라), 번영, 그리고 그 왕국이 영원히 지속될 것 등과 같은 축복들을 언급하고 있다. 7). 히타이트 봉신 조약 속의 저주들은 또한 구약 성경의 다양한 언약들 속에서 발견되는 저주들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1). 축복과 저주는 대개 봉신 조약들의 끝 부분에 나타난다. 2). 저주는 항상 심판을 시행하도록 신들을 부른다. 펜샴은 "저주는 불성실함이나, 혹은 조약의 조항들에 관한 약속의 불이행이라는 전체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3). 앗시리아 왕 에살핫돈의 봉신 조약들은 반역과 불순종을 방지하도록 고안된 것들이었다.
맹세
히타이트 봉신 조약들과 같이 히타이트인들의 맹세는 또한 언약 당사자를 저주 아래 두었다. 히타이트의 문헌인 KUB 26.25는 저주를 받는 것을 나타내는 기름과 옷을 뒤집어쓰는 것을 포함하는 맹세 의식에 관해 언급한다. 조약에 대한 맹세에 불충실한 자들은 맹세의 저주로 고통을 받고는 그들의 피부 가죽에 해를 입을 것이다. 키츠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저주가 대중적으로 나타난 것의 한 요소로서, 저주가 몸의 옷에 나타나는 것은 전적으로 맹세를 어긴자가 신성하게 정죄 받은 상태임을 가리킨다". 아카드인들의 문헌도 이와 비슷하게 달의 신 신에게 하늘로부터 저주를 보내어 맹세를 위반한 자의 몸을 관통할 것을 호소하면서 의복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피부의 고통을 받고나서 언약 당사자인 개인은 부정하다고 간주되었으며, 도시로부터 쫓겨나서 방랑자로 살아가야만 했다.
고대 근동의 봉신 조약은 신명기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주전 2000년경의 고대 히타이트 조약은 히타이트 제국이 주변의 여러속국들과 맺은 종주권 조약으로서 속국인 봉신(vassal)이 종주(suzerain lord)인 히타이트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조약이다. 히타이트 국제 조약들은 신명기의 문학적 구조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신명기가 모세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칠십인역의 루키안(Lucianic)역본에 따르면 (왕하 13:22이후) 하사엘은 또한 블레셋 땅을 정복하고 동쪽의 유다를 향했다. 유다의 왕 요아스는 하사엘에게 많은 공물을 보냈는데 그것으로 아마 봉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후 하사엘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왕하12:17~18
종주가 봉신들과 맺은 조약에는 종주의 신실함과 자비함에 대한 응답으로 봉신의 충성과 사랑을 표기하고 양측이 각각 조약의 사본을 가져야 한다. 신명기에서도 종주로서의 하나님과 봉신인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적 관계를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언약의 전문에 해당하는 신명기 1:1~5에서는 종주이신 여호와께서 모든 언약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모세에게 자신의 명령을 주셨다는 것을 소개한다. 신명기의 역사적 서문인 1:6~3:39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광야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인도한 여정들을 소개한다. 여러 조항들이 소개된 신명기 4~26장에서는 십계명을 비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 하는 각종 율법들을 소개한다.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큰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율법들을 기록해야 했다. 그리고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면 그들에게 율법을 낭독하여 듣게 해야 했다. 신명기 28장에서 종주이신 하나님께서 봉신인 백성들이 언약에 더떻게 반응하는지에 ᄄᆞ라 축복과 저주를 선언한다. 신명기는 고대 근동의 히타이트 조약과 유사한 형식을 일부 공유하고 있다. 모세는 신명기를 기록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소통을 위해 고대 근동의 조약들과 문학적 형식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하였고 이는 신명기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후견인 관계와 호혜
이방 세계에서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라고 기록하고 있는 눅22:25은 고대 지중해 세계를 후원적 사회라 표현하는 것이 적당함을 입증해 주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의 호의를 주고 받는 것이 “인간 사회의 주요한 결속을 이루는 실천”이 된다. 이는 지중해에 있는 현대의 각종 사회들에게도 적용되는 표현으로 이런 실천이 얼마나 이들 문화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는가 하는 것은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스도-로마세계는 그물망과 같은 호의와 충성의 하부구조를 가진 후원의 사회였다. 이러한 결속은 서로 “친구”라 부르고 또 “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한다”라는 격언이 잘 어울리는 그런 사회적 동류 그룹들 사이에 존재하였다. 이런 관계에 있는 동반자들은 서로 호의를 교환하였고 또 필요로 했으며 어느 쪽도 열등하거나 혹은 의존적 관계에 있지 아니했다. 그러한 결속은 사회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분명히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의 후견인이 되었다. 이러한 관계에서도 열등한 쪽의 민감성을 고려하여 우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빌라도가 요19:12에서 “가이사의 충신”즉 가이사의 친구라 불림) 이 체계는 호의의 양을 세밀하게 측정하는 데까지 발전하지 않아기 때문에 상호 헌신은 대체로 오래 지속되었다. 말하자면 이 제도의 핵심은 대등한 교환이 아니라 지속적인 교환에 있다. 호의 수여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이루어지는 상호결속은 사회적 단결력을 유지시키는 데 중요한 접착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감사는 매우 중요한 덕이되고, 배은망덕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심각한 죄”가 된다.
부와 재산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저런 모양으로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세상에서 자신들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후원을 찾아야 했다. 후견인들은 돈, 곡물, 취업이나 땅 등과 같은 것들을 후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유대관계가 잘 매정져 잇는 사람들은 전문적 혹은 사회적 진출에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잇깅 때문에 그 만큼 더 많은 후원 요청을 받았다. 그러한 호의를 입은 사람은 그 후견인의 피후견인이 되어서 그의 명예에 기여할 수 있도록 받은 호의와 또 그에 대한 감사를 널리 알려야 하는 의무를 받아들였다. 그 피후견인은 또 후견인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받아 들여서 후견인의 군력에 기여하는 어떤 일을 부탁 받을수도 있었다. 선물을 받고 또 감사의 의무를 지는 것은 불가분 관계이다. 이 후원의 조직망에서 제 3자는 “중개인”, “중재자”라 불렸다. 이 중개인은 후견인으로 행동하지만 그가 피후견인에게 실제로 줄 수 있는 기본적인 선물은 더 적합하고 더 권력있는 후견인을 접촉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더 권력있는 후견인은 중개인의 “친구”, 중개인 가족 중의 한 사람, 혹은 중개인 자신의 후견인 이기도했다.
누가와 후견인 관계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라는 눅22:25의 진술이 아니더라도 누가는 이방인 세계의 후견인에 대해, 그리고 호혜 및 기대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고대사회의 후견인의 임무에 대해 아는 것이 어떻게 누가복음에 대한 민감하고 통찰력있는 독자가 되게 하는가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된다. 누가의 기사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하나님께서 돌보셨다.”라는 표현으로 가득하다.(눅1:25,28,30). 누가복음 전체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로 은혜와 유익을 구해야 하는 후견인으로 묘사되며 기도에 대한 응답이 보장된다.(눅1:13) 하나님은 엘리사벳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고 잉태치 못하는 그녀의 부끄러움을 없이 하신다. 하나님은 마리아가 구하지 않은 은혜를 보여주시고 그녀를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로 삼는다.
예수는 나중에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해 가르치신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9~13)
그들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은 분명하게 하나님은 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준비하셨다. 마태복음은 이 선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나(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는 그것이 성령이라고 말한다.
누가 기사의 찬양들은 주로 하나님의 후원에 대한 찬양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러낸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이와같이 사가랴도 받은 은혜에 대한 하나님을 찬양한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1:68~69)
또한 마리아의 노래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녀를 도와주셨느가에 대해 찬양한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눅1:50~54)
하나님의 후원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 주리고 비천한 자들을 향하시며 그들을 강하게 하신다. 이 노래는 특히 하나님을 약하고 가난한 잘를 도우시는 자로 찬양한다. 이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누가의 전반적인 관심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또한 하나님은 마리아와 사가랴의 노래에서 이스라엘의 신실하신 후견인으로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자기 백성들을 도와주셨다.
누가복음 2:1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대한 찬양 속에 인상적으로 개입한다. 누가는 여기서 세상의 후견인으로 자처하는 가이사 아구스도를 소개한다. 그는 곳곳에서 구원자와 돕는자로 환영을 받는 자로 그에 대한 신적 숭배는 제국이 하사하는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누가의 탄생기사는 여러 면에서 신적 구원의 도구로서 황제의 제국적 이상에 맞서는 반론이다. 예수야말로 구원을 가져오는 분이시며 그의 탄생은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왔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2:10~11,14
예수는 로마의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으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를 인류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누가복음7:2~10 은 후견인- 중개인- 피후견인의 관계와 역할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얻기 위해 은혜의 망릉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잘 보여준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만 만나고 백부장은 직접 만난적이 없다는 점에서 마태복음과 병행구와 많이 다르다. 형성되고 있는 후견인- 피후견인 관계의 얽힌 망은 누가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는가? 누가 누구에게 은혜를 구하고 있는가, 중개하는 자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백부장은 오직 신만이 베풀수 있는 은혜-정한 시간에 기적적인 치유를 필요로 한다. 예수의 치유행위에 관해 들은 그는 예수가 이러한 은혜를 자신에게도 베풀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 권력자인 백부장이 어떻게 갈릴리의 기적을 행하는 자에게 다가가 이 은혜를 받을 기회를 극대화 할 것인가. 그에게는 이전에 자신이 공동체의 회당을 지어줌으로써 은혜를 베풀어준 예수의 동료 유대인들이 있다. 이제 그들에게 은혜를 갚은 적절한 때 백부장의 편에 서서 예수의 은혜를 매개할 중개인의 역할을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는 예수가 가장 쉽게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장로들을 보내어 자신의 간구를 전하게 하였다. 그들은 백부장을 위해 이일을 하며 그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언을 덧붙인다. 백부장은 다른 메시지를 위해 자신의 벗들을 보냄으로써 예수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를 보여준다. 예수는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이 자신과 신적 은혜를 연결할 수 있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으시고 원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또한 누가는 중개인에 관한 도전적인 말씀도 가지고 있다. 1) 그는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아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수 있는자가 없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맏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눅10:22)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누9:48)고 말씀하신다. 개인적 후견인으로서 예수와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가장 높은 후견인이신 하나님께 갈수 있는 후원을 받게 된 것이다.
본문의 후견인과 피후견인 중개인
그러나 본문의 상황에서 청중은 중개인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뒤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6–48). 사람들은 보다 위대하고 능력 있는 후견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들의 영역에서 보다 위대하거나 능력 있는 자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중보자나 위대한 후견인의 중개인으로서 약한 자나 어린 자를 찾는 자는 없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린 아이나 약한 자를 영접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에게 다가가기 위한 중개인은 사실 별 볼일 없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 세상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세상적 생각과 얼마나 다른가?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중개인이라는 명예를 주신 이 비천하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아야 했다.
우리는 끝으로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함을 받은 사건(눅 17:11–19)이 피후견인에게 있어서 감사가 얼마나 필요한 반응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감사는 받은 은혜에 대해 영광과 감사를 돌릴 줄 아는 올바른 피후견인의 표시이다(눅 1:46–49, 2:20, 7:16, 18:43, 19:37).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이것은 이상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열 명–훌륭한 수혜자와 그렇지 못한 수혜자–모두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감사를 표한 한 명만이 예수의 칭찬을 받는다.
잠언의 은인
13장21절 이 잠언은 행위-결과의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일반적으로 행위자는 무엇인가를 행한다. 그러나 이 잠언에서 사물이나 재앙과 보응은 불행과 행운은 행위자로 인격화되며, 목적어는 “죄인”과 “의인”이라는 인격체다. 이 의인화에서 죄인이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악은 그들에게 되돌아가며, 의인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은 그들에게 되돌아간다. “재앙” (‘라아’, 또는 “악.” 1:16 참고) 은 사냥꾼으로 의인화된다. 피의 복수자가 살인자를 추적하듯이 (민 35:19; 시 140:11[12]) 다른 사람에게 행한 악은 죄인 (‘하타임’, 1:10 참고) 을 끝까지 추적하여 (‘테라데프’, 11:19 참고) 뒤쫓고 공격하며 파괴시킨다. 그들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추구한 악은 (11:19; 12:11) 이제 그들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헬라 문학은 이것을 보응이라는 의미를 각인시킨다. 반면에 선한 것, 토브 선한 보응, 문자적 의미는 “선한”은 “의인에게 보상하는 은인으로 의인화된다. 의인이 다른 사람에게 베푼 생명의 유인ㄱ은 이제 그들에게 같은 유익을 베푼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 작은 자중 하나에게 베푼 냉수 한 그릇조차 또는 주의 종에게 베푼 섬김은(마10:4)은 잊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히6:10
22절 의인에게 이른 선한 보응은 영구적이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승되며 죄인을 파괴하는 재앙은 그들이 비축한 재물을 의인에게 돌려준다. 토브는 물질적 선을 가리키지만 22절 첫 번째 단어에서는 선한 사람 (보누스)를 가리킨다. 창조 목적을 따라 사는 자는 그 산업을 ”자자손손“ 끼친다. 는 것은 가족의 유산을 후손에게 영구히 전수한다는 뜻이다. 산업은 재물을 가리키며 이곳에서는 힘이나 권력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모든 가치있는 재산을 가리키는 환유로 사용된다. 재물은 그것을 가진 자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호의적인 상황에 두지만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인다.“ 악인은 재물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쓰일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우주적 나라를 섬기는 자들을 위해 쌓은것이된다. 이 잠언은 악인이 거짓 재물을 잠시 쌓았으며, 그들에 대한 보응은 세상적 질서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 잠언은 ”선한“ 가정이 유업을 이어 갈 것을 보여준다. 대조적으로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인의 자녀는 그들의 유산을 물 쓰듯 낭비할 수 있다.
③ 섬기는 자, 섬기다(사역)-다른 사람의 바람이나 필요에 참여하다.
원격문맥(신약)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상호 본문성
행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행27: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롬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빌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히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히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구약
출28:1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호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왕상12:7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하10:19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아오게 하라 모든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계책을 씀이라
대상9:28 그 중에 어떤 자는 섬기는 데 쓰는 기구를 맡아서 그 수효대로 들여가고 수효대로 내오며
대상23: 28 그 직분은 아론의 자손을 도와 여호와의 성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또 모든 성물을 정결하게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과
대상24:3 다윗이 엘르아살의 자손 사독과 이다말의 자손 아히멜렉과 더불어 그들을 나누어 각각 그 섬기는 직무를 맡겼는데
대상26:12 이상은 다 문지기의 반장으로서 그 형제처럼 직임을 얻어 여호와의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라
대상 26:12 까지의 섬김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일이 전부 그것이 너희에게 옳지 않게 여기거든 너희의 섬길자를 택하라고 여호수아가 말함
대상 26:30에서 비로서 섬김의 의미가 왕을 섬기는 직임을 처음으로 나타낸다.
대상26:30 헤브론 자손 중에 하사뱌와 그의 동족 용사 천칠백 명은 요단 서쪽에서 이스라엘을 주관하여 여호와의 모든 일과 왕을 섬기는 직임을 맡았으며
대상28:1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고관들 곧 각 지파의 어른과 왕을 섬기는 반장들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및 왕과 왕자의 모든 소유와 가축의 감독과 내시와 장사와 모든 용사를 예루살렘으로 소집하고
대하 22:8 예후로 하여금 아합의 집을 심판하게 하실때에 유다 방백들과 아하시야의 형제들의 아들들 곧 아하시야를 섬기는 자들을 만나서 죽였고
느10: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렘33:22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라
단6:16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단6:20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단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말3:17,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상호 본문성, 신약 서신서
딤후1: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몬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벧전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διακονηθεῖσα ὑφʼ ἡμῶν,)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후8:19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고후8: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διακονουμένῃ ὑφʼ ἡμῶν)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8:19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섬기는)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22 자기를 돕는(섬기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④ 맡기다. 위임하다. 히브리어 등가 카라트
창9: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창15: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출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렘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행3: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히8: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갸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히10: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누가복음 거시구조
1.프롤로그(1:1~4)
2.예수의 탄생과 소년시절(1:5~2:52)
3.예수의 사역을 위한 준비(3:1~4:13)
4.예수의 갈릴리 사역(4:14~9:50)
5.예루살렘으로 가는길(9:51~19:48)
6.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가르침(20:1~21:38)
7.예수의 고난과 죽음(22:1~23:56)
8.예수의 부활, 승귀(24:1~53)
문맥
예루살렘으로 가는길(9:51~19:48)
예루살렘 여행 내러티브는 예수의 행위와 말씀을 통해 더 진전시켜 나간다. 누가의 중앙 섹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구원하는 예수의 사명을 기억하기 쉽게 요약한다. 예수를 배척하는 세력을 삼중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극도의 반대를 만나게 될것과 예수가 향하고 있는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을 전제로 한다. 갈릴리 섹션 마지막에 나타난 예수의 수난 모티브는 중안섹션에 이르러 예수의 수난 예고를 더욱 강조된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수난을 예고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여행 자체는 수난의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을 향하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제자도의 요구나 예수가 겪을 반대를 이해해야 한다. 예루살렘 여행에 나타나는 또 다른 내러티브는 제자들의 완고함을 통해 내러티브에서 얼마전에 드러난 것이다. 여행 내러티브에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교육적 내용과 더불어 누가의 여행 내러티브가 제자들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알린다. 예루살렘 여행 내러티브의 주된 목적은 예수가 떠난 이후의 시간을 준비하는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모습은 충격적이고 분명히 실망스러운 것이다. 갈릴리 섹션의 마지막에서 누가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9:45). 참담하게도 예루살렘 여행의 말미에도 이런 평가가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번에도 수난 예고에 이어서 제자들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18:34). 여기서 두 가지 사항이 중요하다. 첫째, 우리는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제자들의 계몽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24장).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 이후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자신의 저술 상황에서 그의 청중이 “깨닫게” 되기를, 즉 진정한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기대를 전달할 수 있다. 둘째, 누가가 묘사한 것처럼 제자도는 새로운 관계망 내에서 자신을 재구성할 것, 충성의 대상을 바꿀 것, 새로운 성품과 민감성을 체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회개”(예수의 사역에는 아직 나오지 않은 용어이지만, 10:13을 보라) 는 예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새 공동체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에 대한 누가복음 전체에서는 더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예수의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변모 장면에서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할 때 나온 용어다 누가는 예루살렘을 더 강조한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예수가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곳이기 때문이다 (9:31, 51, 53). 하나님의 목적이 나타나게 되고 성취되는 곳은 바로 유대 세계의 중심부, 성소와 성스러운 백성이 있는 예루살렘이다. 바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상을 위한 선교가 시작되어야 한다. 누가의 관심은 여행의 경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실현되는 것에 관심을 두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새 백성을 만드는 주제를 다룬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가르침(20:1~21:38)
예수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성전이 원래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성전은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된 계시의 중심이었다 (19:45–48). 47절에서 요약한 내용인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는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백성, 모든 장면이 일어나고 있는 배경인 성전을 포함한다. 20장 1절–21장 38절에서 ‘백성’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자((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들, 예수의 대적자들의 계획을 막는 완충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충돌의 모티프는 누가복음의 본 섹션에서 중심 주제다. 즉 “누가 적법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된 갈등이 중심 주제다. 결과적으로 적법성의 이슈는 두 개의 관련된 질문을 제기한다. “누가 하나님이 인정한 권위를 갖고 있는가?” “어떤 행위가 하나님이 승인하신 행위의 기준에 부합한가?” 누가복음의 본 단락에서 누가가 언급하는 그룹들,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사두개인들과 부자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들 가운데서도 많은 차이를 보일 수 있으나 전부 그들의 적법성을 성전과 자신들의 관계에서 찾는다. 누가가 이렇게 묘사하는 유대교에서 정치와 예배는 동일한 심장 박동, 즉 성전에서 출발한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비추어 성전에서 벌어지는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예수는 성전에 대한 자유방임적 태도를 그냥 지켜볼 수 없어 직접 개입해야 했다. 결국 예수의 메시지는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해야 하는 핵심적인 공간인 성전과 깊이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래서 성전은 예수의 가르침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공간으로 역할을 한다.
원래 성전은 세상의 질서를 세우고 사회생활의 기준을 잡아 주는 중심축을 제공하는 공간인데, 누가는 성전이 성스러운 공간으로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음을 전제로 본 내러티브 단락의 논지를 전개한다. (1) 첫째, 누가는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된 사람들과 예수 사이의 충돌하고 (20:1–40). 둘째, 누가는 (2a) 어떻게 예수가 다윗의 아들, 만유의 주의 절대적 권위를 성경을 근거로 설명한다 (20:41–44). 이어서 누가는 (2b)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는 사회의 약자들을 억압하고 압제하기 위해 성경과 성전을 권위의 근거로 삼는 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20:45–21:4). (3) 예수는 이어서 옛 세상의 질서가 새로운 세상의 질서로 넘어가면서 일어날 성전의 재앙과 파괴를 예고한다 (21:5–38).
예수의 고난과 죽음(22:1~23:56)
예수를 반대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음모 계획은 예수에 대한 대중의 지지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누가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어떻게 계획을 추진해 나가게 되는지 두 가지 방식으로 알림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기록한다. 첫째, 누가는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유다를 평행으로 설정하고 인간의 계략을 강조한다. 인간의 전략보다 더 큰 무엇이 작동하고 있다. 둘째, 누가는 사탄이 개입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이 충돌에 들어 있는 우주적 영향 곧 유월절은 기본적으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기념하는 반면, 무교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전날 밤에 무교병만 먹은 것을 기념한다 (출 12장; 23:15; 34:18).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있어서 유월절은 예수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전조한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백성으로부터 받고있는 지지 때문에 가로막힌 장벽을 뛰어넘을 방책을 찾아야 한다. 이런 방책을 사탄이 제공한다. 누가복음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아들의 목적을 반대하는 최고의 대적으로 이미 알려져 있다. 사탄의 영향력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할 행운의 순간과 사탄의 계획이 실행되는 순간과 그대로 들어맞게 될 것이다. 누가는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쿰란 문헌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유다는 성전 지도자들과 결탁해 돈을 받고 예수를 배반하고자 계야한다. 유다는 사탄의 영향을 받을수 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통치와 반대로 작용되는 “맘몬의 법칙”에 넘어가고 말았다. 맘몬은 누가-행전에서 중요한 모티프다 (참고, 16:13–15). 누가는 독자들에게 유다가 열두 제자 공동체에 속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이 장면의 비극을 강조한다 (참고, 6:16).
근접문맥 22:7~13
누가는 ‘무교절이 다가오는 날 (1절)’에서 곧장 무교절이 이른 것으로 묘사한다 (7절). 1–7절에서 “유월절”의 표현과 준비의 단어가 각각 차례 등장하며 본 내러티브 단락의 초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한다. 헬라제국 통치기간 더 이상 급히 서둘러 간단한 식사를 가지는 것으로 유월절을 기념하지 않고 대신 만찬의 형식으로 기념했다. 식사는 침상이나 베개에 비스듬히 기댄 채 포도주를 마시는 등의 동작을 취했다. ‘준비’는 식사에 필요한 흠이 없는 양과 기타 식재료와 성전의 희생제물로 드릴 양을 구입하고 방을 마련하는 것을 포함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은 정확한 시간에 양을 드려야 한다. 정확히 말해 유월절 양은 (무교절 당일이 아니라) “무교절의 전날 밤”에 희생되었으나 누가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같이 설정하는 점에서 통상적인 관례를 따른다. 누가는 독자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이 전개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묘사한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은 관련해서 예수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시간표에 맞추어 주도적으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한다. 예수는 무력하게 피해를 입은 희생자가 아니라 사실상 연속되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직접 뛰어든다. 열두 제자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를 배반하는 점에서 사탄의 대리자가 되는 반면, 베드로와 요한은 모범적인 제자들로 표현된다. 베드로와 요한을 식사를 섬기는 종들로 묘사하는 것 (참고, 12:37; 17:7–10; 22:24–27) 은 그들이 사도행전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을 예고한다. 예수는 유월절 식사를 위해 그의 제자들과 모일 방을 요구하는 자신을 “선생”으로 설정하고 유월절이 가족 단위로 기념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출 12:3–4), 유월절 식사는 가족이나 가상의 가족 공동체가 나눈 식사였다. 예수는 이 식사의 특징을 기초를 놓은 언약을 세우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유월절 식사의 본질을 고려하면 예수가 자신의 정체와 운명을 제자들의 정체와 운명과 한데 묶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가 식탁의 종으로 권위를 사용하므로 제자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의 생애는 시련으로 점철된다. 이 사건들 배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흐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성경에 예정되고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21, 37절). 누가는 이 순간 유월절을 위한 예수와 사도들의 모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정교하게 설정함으로써 본 장면의 특별한 의미를 부각시킨다. 예수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해석한다. 본 장면에는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은 자들을 ‘사도들’로 지칭한다. ‘사도들’은 본문에서는 예수와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유월절 식사와 누가복음의 만찬 장면은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의 장면이 유월절의 의미에 기반을 두고 있고 유월절을 재해석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을 때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사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점점 더 무디어지며 (18:15–17, 34),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는 동안 (20–21장), 제자들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누가는 매우 드물게 “사도들”은 “보냄 받은”(참고, 9:1–10) 의 의미와 연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권위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대표자들을 지칭한다. 예수는 식사를 마치고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을 성취하기 전까지 다시는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이 말씀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새로운 식사가 미래에 펼쳐질 것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유월절 기념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비전을 갖고 있다. 이 식사는 종말론적 해방, 곧 두 번째 출애굽을 기대하게 했다. 유월절 식사의 이런 의미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식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목적이 미래에 완료될 것을 예고하면서 식사를 나누었고 다가오는 종말론적 연회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누가가 떡과 관련해서 묘사하는 순서인 잡고, 감사하고, 떼고, 주는 것은 예수가 오천 명을 먹인 사건에서 보여 준 행위를 떠올린다. 오천명을 먹인 사건도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메시아 고난을 중요하게 다루는 문맥에 배열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경은 잔의 이미지를 구원에 참여하는 것과 관련해서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서 사용한다. 피를 붓는 것은 잔인한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전의 유월절을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기억에 대한 이해를 위해 유월절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지속적으로 함께 식사를 나눌 것을 가르칠 뿐 아니라 예수의 생애와 죽음의 의미를 회고하는 식으로 식사를 나눌 것을 가르친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이런 회고는 외적인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하며, 이런 반응은 예수가 식사에서 직접 보여 준 행위에 근거해야 한다. 이를테면, 예수는 외부자를 환대했고, 종으로 섬겼고, 지위와 명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애가 보여 준 모본은 이런 회고를 통해 그를 주로 부르는 공동체 안에서 체현될 수 있다. “예수를 기억하는 식사란 공의를 행하고 아버지의 음식을 모두를 위해 섬긴 그의 삶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다.
식탁의 배반자 22:21~23
우리는 예수가 배반당할 것과 누가 배반자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가는 본 장면을 서술하면서 배반자의 이름을 밝히는 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식탁에 앉아 있는 제자들은 배반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누가 배반자인지 자기들끼리 논쟁한다. 본 장면은 예수를 선지자적 통찰력과 예지력을 갖고있는 존재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예이다. 예수의 핵심 그룹에 배반자가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다. 이들은 예수가 유월절 식사를 나누기 위해 선택한 가족 공동체인데 말이다. 그리고 “손”은 주로 “권력”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 죽이려고 혈안이 된 자들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 이는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 그의 가르침을 듣는 것, 이 모든 행위가 종말론적 구속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유다는 사탄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22절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중 원인의 개념, 즉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인정하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예수를 제거하려는 계략이 누가가 전개해 온 플롯의 필요한 측면이라고 해도, 이것은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성경이 하나님의 목적을 담고 있는 것처럼, 누가가 예수와 그의 죽음에 대해 서술한 내용은 하나님이 오래전에 세우신 구원의 계획을 드러낸다. 이제까지 묘사된 예수의 식탁교제 (15–18절) 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예수가 가장 최근에 전한 인자에 대한 어록 (21:27) 을 고려하면, 여기서 예수가 전하는 말씀은 십자가 처형 너머를 가리킨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히 실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요소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이어서 하나님의 신원하심과 예수의 왕적 통치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구조
A 22:23~27
B 22:28~30
부제 섬김과 왕적 권위
본 단락은 새로운 대화의 주제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예수와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식사 장면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 마지막 식사는 예수와 제자들이 하나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23절 제자들을 “그들 중에서 누가” 예수를 배반할 것인지 알고싶어 했다. 이제 “그들 중 누가” 가장 큰지 알고 싶어했다. 사실상 한 명이 예수를 배반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처럼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열두 제자 모두가 지위와 위치의 이슈에 온통 관심을 쏟은 채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베시지를 “배반”하는 것을 암시한다. 열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은 마음과 손이 이 식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에 동참하고 있지 않다. 유다는 예수에 대한 신앙을 거짓으로 고백하고 또한 예수와 단지 겉으로만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 대한 전형적인 모델이다. 누가는 예수를 배반하는 사람의 손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세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인자를 배반하는 사람에게 하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배반자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향하는 방향에서 이탈해 버리기 때문에 예수는 배반자에게 화를 선언한다. 예수는 자신이 배반당하는 것을 설명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실현되고 있다. 그리고 배반자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져야하며 그에게 반드시 하나님이 진노가 내릴 것이다. ‘화’ ‘우아이’는 ‘고통’, ‘화’, ‘진노’를 나타낸다. 인자를 배반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배신과 거부에 대해 답변해야 한다. 하워드 마샬은 손이라는 단어가 친절한 의도와 적대적인 의도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그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손은 어떤 사람의 행위를 나타내는 은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식탁에 모인자들 가운데 배반자가 포함되었다는 예수의 예언이 충격적이었듯이 예수를 중심으로 모인 제자들의 행위 역시 충격적이다. 다른 사도들도 그들의 내적인 태도가 변혁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음을 지위와 명예에 관심을 쏟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예수가 15~20에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으나 그의 메시지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같다.
그 문제(누가 배반하는가)는 곧바로 언급되는 위대함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유다의 배반이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나머지 제자들의 본질에서 벗어난 주제에 대한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제자들은 또 적절하지 않은 다른 관심사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이 식사에서 제기된 다른 문제는 열두 제자의 서열에 대한 것이다. 이 특별한 논쟁의 주제는 “열두 제자 중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가”였다. 막10:37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장차 영광을 받을 때 하나는 예수의 오른쪽, 하나는 예수의 왼쪽에 똑같이 간청한다. 마20:20~24는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똑같이 요청한다. 분명히 야고보와 요한 및 그들의 어머니는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있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이 사건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하기 전에 일어났다. 여기서 누가가 다른 배경에서 언급하는 것은 또 다른 사건이다. 누가복음 이야기와 마태, 마가복음의 이야기 사이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마23:10~12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난하는 예수의 말에도 비슷한 말이 언급된다. 누가는 본 장면을 설정하면서 그리스-로마 심포지엄(?)에 나타난 요소들을 사용한다.===누가는 그리스 로마 세계의 일반적인 사회 관습을 이용한다. (1~38,5:27~39) 심포지엄에서는 적합한 자리를 배열하는 것을 통해 참석자들의 지위를 비교하고 정하는 것에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누가는 바리새인들과 율법 전문가들이 그런 관습에 관심을 두고 잇는 경향을 이미 언급한 바 있는데(14:7,20:46) 누가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동 방식을 따라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내용을 기록한다. 마태복음에서 그 배경은 분명히 세배대의 두 아들들과 관련된 사건과 다른 것이다. 마태복음 안에서도 그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이 주제가 예수의 가르침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라는 것을 밝혀준다. 최후의 만찬에서 하나 됨의 중요성이 주요한 특성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누가는 여기서 그 점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위대함이라는 주제는 제자들을 괴롭혔으며 예수는 그 주제에 대해 여러 배경에서 말했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배경에서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 이유는 위대함에 대한 제자들의 관심과 생각이 어리석으며 예수가 떠나가고 없는 상황을 바로 앞에 두고 제자들이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진정한 위대함에 대한 강조는 예수의 사역에서 마태가 예수의 이 가르침을 두 번 소개한다는 것에서 강조된다. 예수는 27절에서 권위와 지위의 관계를 재정의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서로 대조되는 통치 방식을 언급한다. 예수는 통치와 어떤 인물의 중요성에 대한 제자들의 사고 방식을 바꾸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될 것이다. 예수는 먼저 긍휼을 베푸는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과 높아진 신분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나서야 미래에 사도들이 지도자들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지도하는 역할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기 원한다. 세상의 통치자들의 통치 방식과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서로 어떻게 대조되는가. 예수는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를 강제로 통치하는 이방인 통치자들과 자신들을 스스로 “은인들”이라고 부르는 권력자들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만 사도들 또한 은인으로 칭함 받기를 원한다. 존경과 권위가 나타나는 칭호로서 ‘에르게테스’는 흔히 AD 군주들이나 또는 다른 뛰어난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로마 황제는 사람들이 모든 지역의 부유한 지배계층에게 기대한 것, 즉 관대한 은택을 베풀수 있는 존재임을 선전했다. 심지어 독재자들도 자신을 ‘은인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20:25와 막10:42는 이방인 집권자들이 자기들의 백성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헬라어 본문에서 마태, 마가 모두는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이방인 집권자들의 통치 방식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가리켜준다. 서로 다른 배경을 제외하고 세 공관복음서의 이야기에서 이방인 집권자들의 통치 방식과 똑같이 기본적으로 대조된다. 당시의 부자들은 세금을 지불하기보다는 도시와 마을을 위해 시간과 돈을 기부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어야 하지만 이런 은택이 제대로 배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도시 재정의 악화는 부자들에게는 유익이었다. 부자들은 은택을 베풀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확보하고 있어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공적인 자리와 명성을 얻기에 최고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로 인정받았다.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부가 필요했기 때문에 오직 부자들만 지도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고 ‘관대하게’ 베푸는 사람들의 몫인 명예와 출세를 누릴수 있었다. 이런 방식이 세상에 퍼저 있었기 때문에 선물을 주는 것은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섬김과 명예를 되갚아야하는 짐을 지웠다. 따라서 본문은 어떻게 보면 지도력을 행사하는 시스템을 남용한다는 표현보다 시스템 자체의 속이라고 볼수 있다.
26절의 예수의 부정적 가르침인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는 이제 예수께서 사도들이 보여주어야 할 대조적인 자세에 대해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다스리고 은혜를 베푸는 태도가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처럼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베풀어야 한다. 심지어 악인들과 감사를 모르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6:35`36)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칭할 때 ‘은택(개역개정 착한일)’을 베풀었으며 예수의 사역은 “은택”(개역개정, 선한일)의 사역으로 요약된다. 예수는 “왕들”“집권자들”“지도자들”“앉아서 먹는자”를 “젊은자”“섬기는자”와 병치시킨다. 유대문화에서 “젊은자”는 하찮은 일들을 맡았으며 어른들을 받들었다. “젊은자”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를 가리킨다. 누가가 자주 설명하는 것처럼 “섬김”은 구체적으로 “식탁을 섬기는”행위를 말한다. 예수의 공동체에 적합한 지도자의 형태는 지위와 명예의 상승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며, 식탁을 섬기는 종들의 낮음, 사회적 권력과 특권에서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낮음, 젊은자들의 낮음을 반영한다. 예수의 말의 강조는 궁극적으로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마태와 마가는 “너희 중에서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가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는 ‘너희의 종’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위대함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이라고 정의된다. 위대함은 다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고 또한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누가는 큰자와 젊은자. 다스리는자와 섬기는자를 비교하며 동등한 의식, 마태와 마가는 종과 같은 자세로 섬기는 것을 강조한다.
NL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물론, 당연히 앉아서 먹는자이지) 세상의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의 앉아서 먹고 마시는 것은 그들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 그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당연한 것이지만 But not here!(여기는 아니야) NLT 번역은 여기는 아니다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의 제자(현재, 미래)의 사역에서도, 종말론적인 예수의 나라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을 NLT 번역에서는 But not here!를 사용하여 강조한다.
27절 예수는 비유로 교훈을 전한다. 식탁에서 앉아서 식사하는 사람과 시중드는 사람중 누가 높은가, 물론 앚아서 대접을 받으며 식사하는 사람이 시중드는 사람보다 일반적으로 더 높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보여준 섬김읠 삶을 언급한다. 요13장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사건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입증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섬기는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렇다고 예수는 다스리는 역할을 맡는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예수 자신도 누가의 내러티브에서 주와 왕으로 묘사된다. 예수가 강조하는 것은 주와 왕의 지위, 가장 큰자의 지위를 섬김의 삶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종말에 다시 와서 신자들을 대할 때도 이와 같은 동일한 성품을 보여줄 것이다.(12:35~38)예수의 섬김은 사도들의 삶에서도 나타나야 하는 특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몰입하는데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집중해야 한다.
28절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지를 실천하지 못하는데도 예수는 어떻게 왕적인 권위를 그들에게 수여할 수있는가. 28절이 강조하는 것처럼 사도들에 대한 예수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예수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을 때 보여준 과거의 삶이 현재의 행위와 모순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가 온갖 시련을 겪은 동안 지속적으로 예수의 곁에 머물렀다. 9:57~62에서 예수는 제자도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헌신의 깊이를 미리 설명했다. 제자들은 시련 가운데서도 예수와 함께하는 신실함을 보였다. “시험”은 4:13과 8:12~13에 마귀의 공격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누가-행전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사탄의 목적과 궁극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기억하면(4:1~13) 예수에 대한 모든 적대감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반대하는 우주적 저항이다. 시험 가운데 견디는 신실함은 8:12~15에서 예수가 비유를 사용해 가르친 내용에서 이미 나왔던 모티브다.
누가의 탄생 내러티브와 최근의 가르침에 묘사된 예수는 왕이다.(1:32~35,19:11~40) 그리고 예수는 비유로 가르치면서 신실한 자들에게 분깃을 줄 것을 왕의 권위로 예고했다.19:17,19 이제 예수는 사도들이 신실하게 인내한 것에 대해 다스리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상한다.
29절 이제 예수는 열한 제자들의 신실함에 더 큰 책임을 맡기는 상의 베푼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 영광과 상이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신실한 제자들에게 상을 베푼다.
가롯유다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열 한 제자를 받아들이시고 그들에게 책임을 부여하신다. 예수가 떠나간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행위는 거의 유산을 상속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행위를 위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는 이 세상을 떠나지만 예수는 계속해서 예수의 나라를 통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권위는 유일무이한 권위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자신만을 위해 간직하지 않고 자기의 제자들에게 공유한다. “내 아버지” 가 예수에게 나라를 맡긴 것 같이 예수도 제자들을 그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위임한다. 여기서 바실레이아는 특별히 하나님이 위임하신 대리자로서 예수의 통치와 권위를 가리킨다. 또한 이 절에서 헬라어 동사의 현재형이 사용된다. 이것은 제자들이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주어진 예수의 권위는 열한 제자들에게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예수의 대리자들로서 일할 것이다. 예수도 다스리며 제자들도 다스릴 것이다. 현재 예수와 제자들이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상태를 강조한다.
예수는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예수가 나라를 수여하지만 이 나라는 예수의 나라다. 예수가 말하는 종말론적 연회는 마지막 때의 연회이므로 종말 이전에 사도들이 권위를 행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본문은 예수의 약속이 마지막 때가 와야만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을 예고한다. 예수가 사도들에게 나라를 수여하는 것은 그들이 특별한 명예를 얻도록 선택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명예를 얻게 된다는 주장은 24~27절에서 가르친 것과 모순이다. 열한 제자들의 지도력은 예수의 사역을 확장시킬 것이다. 사도행전이 이 과정을 자세하게 알려줄 것이다. 이 권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기에 앞서 예수는 지도력의 형태는 섬김이라고 알려 주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지도력에는 ‘증인들’로서 증거하는 역할도 포함될 것이다.
눅22:29~30과 마 19:28 은 비슷하다. 마태에서 예수의 표현은 전적으로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마태는 새로운 탄생(팔링게네시아“새롭게 되어”)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인자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며, 이 제자들은 그와 함께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이 말은 종말론적인 정점에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를 기대한다. 누가는 이 권위가 제자들에게 이미 허락되었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제자들이 미래에 지니게 될 권위와 관련해서 마태복음이 묘사하는 것을 보완해 준다. 누가의 이 강조점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이스라엘에게도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 같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예수의 통치에 대한 열한 제자의 메시지에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30절 예수는 열한 제자에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예수와 함께 앉을 것을 말하며 종말에 이 제자들이 영접을 받고 예수와 친밀하게 교제한다는 것을 묘사한다. 제자들은 교회를 세우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동참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것은 열한 제자들의 권위와 하나님의 계획 안에 계속해서 지도자 직분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보좌’의 이미지는 시편 122:4~5,단7:9 연상시켜 준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의해 거부당하는 것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새로운 지배체제’ 안에서 지속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지배체제는 미래에 분명하게 밝혀지겠지만 그것은 곧바로 유효하기도 한 것이다. 비록 사람이 판단하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다.
이 절에서 예수의 말은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 음식을 먹을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말은 오직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말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 중에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혼인 잔치를 기대하게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들의 온전히 성취되고 예수가 하늘과 땅을 다스릴 때 혼인 잔치가 베풀어질 것이다. 오래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은 장차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관련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사실이라고 온전히 입증될 것이다.
재판관의 역할의 의미는 “왕적 권위”의 개념을 고려하고 이스라엘의 과거에 “재판관들”의 역할이 실제로 “통치하는 것”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사도들은 재판관이라기보다는 권위를 위임받는 지도자다. 누가가 식탁에 참여하는 제자들을 “사도”로 칭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제자들을 “사도”로 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것을 예고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을 다스리는 사명을 부여받는다.
마태복음29:28 “세상이 새롭게되는”시기에 사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 선언한다. 마태는 열두 보좌에 대해 말한다.
11.1 최고의 상급 권력, 군세자 하나님, 만물을 통치하시는 통치자 하나님
11.1.1 하나님의 영원성
세상은 존재하기 시작 시점이 있다 세상은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능력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이 있기전 존재하셨다. 존재를 주는 말씀이 존재를 받는 사물보다 먼저 존재해야한다. 이 존재는 영원 전부터 존재햤다. “영원부터”이존재는 영원까지 계속 존재할 것이다.“영원까지” 성경은 하나님이 시작한 시점도 끝나는 시점도 없이 영원토록 존재하신다는 것에 주목한다. “주는 영원부터계셨나이다.시93:1)”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시41:13)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함을 하나님의 능력과 결부시켜 제시한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1:20 우리가 피조물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한 뒤에야 비로서 추론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함을 인식하게 된다. 영원함은 시간과 대조적으로 영구하고 불변하는 상태, 생명의 완벽한 소유인 것이다. 영원함은 이 안에 모든 연수, 모든 시대, 모든 세대, 모든 기간을 포함한다. 영원함은 시간을 초월한다. 영원함은 시간이 지속한 모든 과정뒤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시간은 영원한 것 아니다.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연속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시간이 흘러가고 또 다른 시간이 뒤를 잇는다. 작년은 올해가 아니고 올해는 내년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함을 시간의 개념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간의 본질이 부분들의 연속성에 있듯이영원함의 본질은 무한하고 불변하는 지속성에 있기 때문이다. 영원함과 시간은 바다와 강이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르다. 바다는 결코 장소를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하나의 물로 존재한다. 그러나 강은 소리없이 흘러가 바다속에 삼켜진다. 그렇듯이 시간도 영원함 속에 흘러들어가 삼켜진다.
하나님이 어떻게 영원하신 분인가? 또는 어떤 점들에서 영원함이 하나님의 속성인가? 영원함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속성이다. 하나님이 시간의 길이와 한계를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장소의 한계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광대함이 하나님의 발산하는 본질이듯이 영원함은 하나님의 지속하는 본질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시작과 소멸의 모든 가능성, 모든 변화와 유동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어떤 장소에도 제한받을 수 없듯이 어떤 시간에도 제한받아서는 안 된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광대함이듯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함이다. 피조물들은 장소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 곳에 존재해야 한다.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현재와 과거 또는 미래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창조자는 장소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곳에 있고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존재한다.하나님의 지속성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한 것 만큼이나 끝이 없다. 하나님은 항상 존재했고 존재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시작한 시점이 없듯이 끝나는 시점도 없다. 이것은 최고의 존재에게만 속한 탁월함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모든 존재를 포함하고 있고 이것들을 초월하며 하나님의 광대함이 모든 장소위에 있듯이 하나님의 영원함은 모든 시간과 모든 지속성을 포함하고 이것들을 무한히 초월한다.531)
만일 하나님에게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이 존재를 다른 존재나 스스로에게서 받으셨어야 한다. 만일 다른 존재에게서 받으셨다면 하나님을 있게 한 존재가 하나님보다 더 탁월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존재가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높고 탁월하지 않은 존재는 결코 하나님이
대신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을 존재하게 한 원인이 없다고 부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이 창조되기 전을 수억만 년으로 상상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보다도 더 무한히 이전에 존재하신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단 7:9)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날과 시간보다 먼저 존재하신 분, 탁월하게 스스로 안에 모든 시간과 세대를 담고 계신 분으로서 말이다. 사실 하나님을 옛적부터 계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게 맞는 표현은 아니다 될 수 없다. 자신의 존재를 다른 존재의 능력에게서 받은 자는 최고로 탁월한 존재일 수가 없다.
하나님은 끝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항상 계셨고 지금도 항상 계시고 앞으로도 항상 변함없는 모습으로 계실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약 1:17). 하나님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셨듯이 앞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실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지만 설사 하나님에게 시작과 끝이 있고 우리가 아무리 수만 년을 되짚어 가고 앞서 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시작과 끝 모두에서 여전히 멀리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영원히 지속하시기”(시 9:7) 때문이다
11.1.1.1
그리스도의 영원성
하나님이 영원한 지속성을 지닌 분이라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영원함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올려 드릴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골 1:17). 즉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리고 피조물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또는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6절).
그리스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코 차이가 없으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똑같기 때문이다. “스스로 있는자”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같은 것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함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어제의 하나님과 오늘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다. 또한 오늘의 하나님이 내일의 하나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손도 출생도 죽음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시작한 날과 끝난 날도 기록되지 않은 멜기세덱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그릐스도의 존재를 예표한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다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염이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7:3” ”563 멜기세덱의 출생과 죽음을 비밀에 부침으로써 성령님은 영원함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제사장 직분에서 하나님이 맡으신 직분의 지속성을 예표하셨다. 멜기세덱의 족보를 비밀로 두신 것에서 영원함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참된 영원함을 볼 수 있다. 이 위대한 자의 시작과 끝을 비밀로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함을 어떻게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리스도 역시 친히 자신의 영원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암시하신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 16:28).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셨듯이 다시 아버지에게로 가신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아버지에게로 가신다. 그렇듯이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오셨다.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에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에 있는 것과 똑같은 지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명확히 그리스도는 존재하는 피조물이 없었던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요 17:5)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모든 것을 현재 일처럼 알고 계신다. 영원함 속에 계신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다. 연속성과 이어짐이 없다는 것이 영원함의 개념이기 때문이다.만일 영원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지점이고 앞과 뒤로 이어지는 지점들 속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영원함 속에서 알려지는 것 또는 영원함을 통해 알려지는 것은 어떤 연속성도 인식될 것이다. 지식이 알고 있는 존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시간의 흐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지식은 해와 날들의 모든 움직임을 초월한다. 또한 과거와 미래의 문한한 공간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함 속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단순한 지식 속에서 생각한다. 마치 이 도는 것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하시는 주의 말씀이라”565)(행 15:18).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지식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하다.
11.1.1.1
하나님의 영원함 적용
①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하나님의 언약 또한 영원하다. 하나님의 언약이 가진 영원함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이 이 언약을 확증하기 위해 하시는 맹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켜 또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맹세하신 것이다 (히 6:13).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위해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심과 연결시키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원히 사신다면 하나님의 언약도 결코 취소될 수 없다.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하는 것”(16, 17절)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만큼 선한 능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과거에 하신 말씀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이르지 못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뜻 진리는 항상 똑같고 영원토록 같다. 하나님에게는 생명이 풍성하고 우리를 도우실 영원한 사랑 또한 풍성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뢰의 바탕이되고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보증이 듯이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이 약속을 수행하실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보증이다 친구가 오늘 은 나와 함께 있지만 내일 저 세상에 갈수도 있다. 아무리 친구가 자기가 한말을 지키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어도 죽음이 이 친구의 삶을 산산조각 내버리면 결국 친구는 자기의 말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을수 없는 분이듯이 거짓말을 하실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원함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삼상15:29 영원함은 불멸함을 함축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오래 사시는 분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근거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시편기자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습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146,34 만일 야곱의 하나님이 귀인들이나 도울 힘이 없는 인생과 같다면 하나님을 우리의 도움으로 삼는것에서 우리가 무슨 행복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권리를 주자알 수 있는 영원한 입법자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가 순종해야 할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②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하나님은 언약 속에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영원한 선이고 우리의 소유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시 48:14).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 90:1). 우리는 잠시 동안 나그네로 세상을 산 다음 야곱이 요셉을 위해 간구한 복 즉, “영원한 산이 한없는 것같이 한없는 축복”(창 49:26)에 이르게 된다. 한 해에 천 파운드의 재산으로 한 사람의 짧은 일생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연수가 다함이 없고 영원토록 살아 계셔서 한없이 누릴 수 있으며 영원히 우리를 살게 해 주실 수 있는 창조자를 누리는 행복 속에서는 영혼이 얼마나 더 완전한 기쁨 속에 잠길 수 있겠는가! 진정 죽음은 하나님의 변경할 수 없는 명령 때문에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러나 불멸하시는 창조자는 우리가 베어 먹은 한 입을 토해 내게 할 것이고 영광스러운 불멸함 속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육체와 해체될 때 우리 영혼은 불멸할 것이고 부활할 때 우리 몸 또한 불멸하게 될 것이다. 그 뒤에 연합된 우리 영혼과 몸이 영원토록 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기쁨 속에서 무한한 영원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불멸의 하나님과 연합한 믿는 자가 멸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③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교회의 모든 절망에 위로를 주고 교회를 공격하는 적들의 모든 위협에 맞서는 강력한 근거가 바로 이것에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떠나신 교회에 다시 돌아오시기를 간구한 근거였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애 5:19, 20). 교회는 연약하다. 피조된 것들은 쉽게 소멸한다. 이 연약한 교회에 영원토록 사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버팀목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 비록 예루살렘이 보루를 잃고 성전이 무너지며 땅이 황폐해졌지만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영원한 보좌에 앉아 계시다. 그리고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감소되는 일은 결코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호소 속에서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선한 뜻을 품고 지으신 자기 백성을 잊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임을 암시한다. 가장 큰 혼란 가운데 처해 있을 때 교회의 눈은 하나님이 세상의 통치자로 좌정해 계신 영원한 보좌에 고정되어야 한다. 오직 교회 외에는 어떤 피조물도 이 완전함 속에서 위로를 얻을 수 없다. 다른 피조물들도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교회야말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불멸하심뿐만 아니라 영원하심을 상징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을 하나님이 처음으로 계시해 주신 것은 “애굽에서 압제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서였다 (출 3:14, 15). 이때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힘을 줄 유일한 위로로서 전능자의 은밀한 곳에서 선포되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처해 있거나 앞으로 처하게 될 비참한 상황들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미덕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한 계속해서 주어지는 위로다. 하나님은 여전히 “스스로 있는 자”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교회에도 똑같이 “스스로 있는 자”가 되신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보다 하나님의 영적인 이스라엘이 이 이름의 영광에 대해 더 큰 권리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것보다 더 큰 압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절망에 꼭 맞는 위로가 되었던 진리는 다른 모든 압제에 대해서도 똑같이 합당한 위로를 준다.
11.1.2 하나님의 불변성
11.1.2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에서 불변하시다. 하나님의 존재는 변함없이 한결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 가운데 단 한 부분도 잃어버릴 수도, 더해질 수도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백 육십 구세까지 산 므두셀라만큼 오래 산다고 해도 이 사람의 실체에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지내는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도 없다. 전체적인 실체에서는 변화가 없다고 해도 음식을 통해 계속해서 이 사람에게 더해지는 것이 있고 노동을 통해 감해지는 것이 있다. 이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획득하거나 잃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자신의 실체를 더 위대하게 또는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더하거나 자신의 실체를 더 작게 또는 더 나쁘게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감하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다른 것에게서 존재를 받지 않은 자는 항상 자신의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최초의 존재이고 독립적인 존재다. 하나님은 스스로나 다른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분이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항상 존재하신 분이었다. 따라서 자신이나 다른 존재에 의해 하나님의 본질이 달라질 수가 없다. 모든 존재를 갖고 있고 모든 존재가 되시는 분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육체적 본질들에서 발견되는 변화들로부터 자유롭다. 하나님이 구성 요소라는 어떤 부분도 갖고 있지 않은 순수한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창조된 영들이 가질 수 있는 변화가 전혀 없다.
11.1.2 하나님은 지식 면에서 불변하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아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셨다.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숨겨진 것이 없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아셨던 것보다 지금 더 많은 것을 아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지금 알고 계신 것을 항상 알고 계신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을 통해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기질, 자질, 체질을 통해 아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통해 알기 때문에 때로는 실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르게 알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자신의 본질과 구별된 명철을 소유하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순전하고 단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철은 곧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에서 하나님의 명철도 무한하다고 결론짓듯이 하나님의 불변하는 본질에서 하나님의 지식도 불변한다고 합당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직관적인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을 아신다영원하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게는 미래의 모든 것이 한 번의 시선을 보내는 것만으로 현재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미 존재하고 알려진 사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달라져도 이것들의 존재와 본질에 대해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지식은 불변하고 변경할 수가 없다. 눈에서 발하는 빛을 통해 한 번의 시선만으로 하늘 전체를 볼 수 있는 피조물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 피조물은 눈을 돌리지 않고도 동쪽과 서쪽을 보며 전체 우주를 균등히 볼 것이다. 전체 우주의 모든 부분과 모든 움직임을 한꺼번에 보기 때문이다. 비록 우주의 거대한 몸체가 변화하고 회전하며 지속적인 움직임 가운데 있어도 이 피조물의 눈은 변함없이 고정된 채로 있을 것이다. 어떤 변화도 허용하지 않은 채 한 번에, 한 번의 시선만으로 이 모든 움직임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모든 것을 아신다. 따라서 이것들을 영원히 아신다. 하나님의ㅣ 지식이 무한해서 모든 진리를 한번에 담으실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지식은 그 안에 모든 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하나나님의 지식은 불변하다. 하나의 순전하고 단일한 지식을 통해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의 무한한 공간을 이해한다. 587)
11.1.2 그리스도의 불변성
하나님의 본질이 변할 수 없고 불변함이 하나님의 속성이라면 그리스도는 신성을 갖고 계신 것이다. 히브리서 (히 1:11)는 시편 102편의 구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구절을 시편 45편 6, 7절과 결합시킨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8~10). 첫 구절은 필연적으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는 자로서 하나님과는 구별된 자로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구절 역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가 세상의 창조와 소멸, 영원함과 불변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한 분이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두 증언은 연결 접속사인 ‘또’로 연결되어 있다. “또 주여”라는 표현은 두 증언이 같은 분,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하는 것임을 선포한다. 히브리서 1장의 의도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피조물에게도 아니, 천사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자에게도 속할 수 없는 내용들을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름이 부어져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되신 분과 태초에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이 손으로 지으신 바라고 칭함 받는 분이 같은 분인 것이다. 이 말은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라는 뜻이다. 하늘과 땅의 창조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똑같다는 특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11.1.2 적용
①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예배를 드릴 근거와 격려가 있다. 무신론자는 이것을 다르게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시다면 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선을 뜻하신다면 선한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악이 우리에게 임하게 정하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탄원하고 간청해도 우리는 이 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지식은 불변하고 선을 행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다. 그리고 이런 탁월함이 바로 하나님에게 경배와 경외함을 드려야 할 합당한 근거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존귀를 받으셔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높이 존귀를 받으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카멜레온처럼 매일, 매순간 색을 바꾸신다면 이런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에 무슨 위로가 있겠는가? 오늘은 이 마음을 내일은 다른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을 향해 우리의 눈을 높이 드는 것이 무슨 격려를 줄 수 있겠는가? 어느 날은 간구한 것을 들어주고 다른 날에는 이것을 거부할 정도로 수시로 행동이 바뀌고 변할 수 있는 이 땅의 왕에게 누가 간구를 하겠는가? 그러나 왕이 이런저런 조건 위에서 무언가를 약속하고 왕의 약속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어느 누가 이것을 근거로 호소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고 하자. “왕의 약속이 불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구하지도 이 조건을 실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 조건을 실행한다면 약속대로 열매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추론을 어리석고 우스꽝스럽다고 여기지 않겠는가?우리가 하나님을 구할 때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신 복이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이 불의한 본질을 갖고 계시거나 마음이 변하시는 분이라면 이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고 결국 우리의 소망을 좌절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탁월한 본질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들을 구하게 하는 가장 높은 격려가 되지 않겠는가?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 간구하는 우리의 열정에 불을 붙여 주지 않겠는가?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지 않겠다고 선포하신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을 갈망한다면 여러분이 하는 기도는 자체로 어리석은 행동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무례한 행위가 될 것이다. 이 경우 하나님의 불변하심이 하나님을 반하려는 우리의 갈망을 억제시켜 줄 것이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악을 결심하거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무로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진정 슬픈 소식이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바꾸실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에 어긋나는 일을 하시고 자신의 말씀과 반대로 행하실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죄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스스로의 영광을 가리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말이 아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계속해서 허무한 욕망 가운데 있게, 죄인들이 악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을 바꾸심으로써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신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한결같으시다.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람직한 것이고 죄는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이다. 한결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의인에게는 한결같이 친구가 되어 주시지만 사악한 자들에게는 한결같이 적이 되신다. 하나님은 지식에서도 한결같으시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행위들을 결코 잊으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의지에서도 한결같으시다. 하나님은 불의한 관습과 행위들을 결코 승인하실 수 없다. 선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고 악은 항상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대상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는 항상 변함이 없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항상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변함이 없을 것이다. 불변함이라는 완전함이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속해 있는 것처럼 죄에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에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행위의 언약이 이 언약을 어기는 인간의 죄 때문에 변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는 것에서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율법은 하라는 명령, 즉 교훈적인 부분과 하지 말라는 명령 즉 위협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간이 계명을 준수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의로운 본질은 하지 말라는 명령이 가진 위협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하나님은 불변함이라는 완전함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의로운 말씀을 어길 수가 없었다. 또한 불의한 죄악을 허용하거나 장려할 수도 없었다. 비록 아담과 하와만이 이성을 지닌 피조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친히 위협으로 말씀하신 죽음을 맞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 때문에 배반한 피조물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받으실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첫 번째 언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만큼이나 불변하다. 다만 회개가 두 번째 언약의 조건으로 정해져 있을 뿐이다. 이것은 첫 번째 언약에서는 충족되지 않은 조건이었다. 회개가 없다면 죄인은 반드시 멸망당해야만 한다. 이것은 결코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을 바꾸셔야만 한다.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인간 안에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하나님 안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활시위는 이들을 향해 당겨져 있다. 하나님의 화살이 활시위를 빠져나갈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시 7:11)
이후의 더한 하나님이 불변성의 위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1.2 청교도 대작 시리즈』 1권 627쪽 이하
이후의 더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1.2 청교도 대작 시리즈』 참고
-구약 비교 본문 연구(창 42:6 50:19~21)
권력자 ἐξουσιάζοντες(권력을 가진 자) 통치자, 지배자,
히브리어 등가 שַׁלִּיט샤리트
창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6절 이 단락은 우리에게 요셉이 두 분야의 지위를 가진 것을 상기시키며 시작한다. 요셉의 정치적 지위는 “이 땅의 총리”(샬리트) 다. 요셉의 경제적 지위는 “양식을 배분하는 자 ”(‘하마슈비르’, 개역개정: “곡식을 팔더니”) 다. 형들이 정치적인 권위에 존경을 표하면서, 요셉에게 “엎드려 절”한다. 요셉을 ‘하샬리트’와 ‘하마슈비르’라고 이중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요셉의 이전 두 가지 꿈을 떠올리게 한다. 곧 하나는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고 (요셉의 권위의 지위), 다른 하나는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단 앞에 절하는 꿈이었다 (배분하는 요셉의 지위).37)
7절 약 20년이 흘렀지만 요셉은 즉각적으로 형들을 알아보지만 형들을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다.
8절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많다. 형들은 요셉이 죽었다고 여긴다. 아마도 요셉이 깨끗하게 수염을 깎았을 것이다. 요셉은 통역자를 통해 애굽의 언어로 말한다 (23절). 그는 애굽의 관복을 입고 있다. 그는 애굽의 이름을 사용한다 (41:45). 육체적 수준에서 사실인 것은 또한 영적인 수준에서 사실이다. 형들이 여기서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37장에서 준비시킨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형들은 인식 (42장), 통찰력 (37장) 이 없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다” 7절에서 알아본다는 핵심은 요셉이 심지어 형들이 말하기도 전에 알아봤다는 것이다 (7b절). 8절에서 알아본다는 진술의 핵심은, 형들이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요셉이 분별한다는 것을 대조시키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외견상 정치적 심문을 통해 그들이 함께 했던 과거와 그들 형제간의 유대관계의 본질에 대한 세 개의 점층적 대화를 한다.
창50:19~21
19절 요셉은 어디에서도 형제들이 요청한 대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답변하지 않는다. 요셉은 이미 형제들을 용서했다. 요셉에게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요셉이 한 일은 “두려워하지 마소서”라고 형제들의 두려움을 완화하는 것이다. 요셉은 화해를 구했다고 형제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구하지 말라”가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 말라”고 한다. 이 표현은 창세기에서 보통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표현이다 (15:1, 21:17, 26:24, 46:3) 요셉의 청지기가 훨씬 이전에 똑같은 말로 형제들을 안심시켰다 (43:23).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타하트 엘로힘 아니) 이 질문은 여기서 창세기에 두 번째로 나온다. 50장 19절과 정확하게 50장 19절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는 방식에서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50장 19절의 헬라어 번역은 “나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투 가르 데우 에이미 에고) 라고 읽는다. 다시 말해서 70인역은 요셉이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사태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지녔으며, 따라서 보복을 넘어섰기 때문이다.”“내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보복하겠는가? 보복은 여호와의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가 갚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 (참고, 신 32:35; 롬 11:19).
‘타하트 엘로힘’이라는 구절은 본문에 명백하지 않지만, 뱀이 하와에게 하는 질문에 암묵적으로 있다. 본질적으로 뱀이 하와에게 “네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은가?” “너는 네 자신의 하나님이 되고 싶은가?”라고 괴롭힌다. 아담과 하와와 요셉은 상당히 대조된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최초의 부부에 대해 말함으로써 시작하고,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에 대해 말함으로써 마친다. 아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구분하는 선을 지우려고 시도했다. 요셉은 그 선을 넘기를 거부한다. 요셉은 오직 하나님의 도구가 될 것이며, 켤코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을 것이다. 67))20절 요셉은 자기 형제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라고 진술한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품은 악한 의도와 상상은 노아시대 사람들 가운데 악한 내면과 생각과 비슷하다. 69)
하나님은 악한 음모를 꾸민 형제들과는 대조적으로, 요셉에게 “선”을 베푸셨다. 선은 무엇인가? 20절의 마지막 부분,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가 이 질문에 답한다. 우리는 “많은 백성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야곱의 가족을 포함한다. 야곱 가족이 요셉에게 끼친 고통과 모욕은 야곱 가족의 구원의 수단이 된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삶에 섭리해 악한 사건을 하나님이 사용한 사건으로 바꿨기 때문에 선택 받은 자들이 생존한다. 요셉을 통해 애굽 사람들이 기근에서 구원받음과 같이 선택 받지 않은 자도 구원을 받는다.71)72)
아마도 창세기 50장 20절과 가장 비슷한 내용은, 신약에서 가룟 유다의 예일 것이다. 가룟 유다는 악하면서도 중요하다 (선하고 중요한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동료들에게 자기 뒤꿈치를 들 때 유다는 전형적인 반역자로 낙인찍힌다. 또한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악하지만 중요한 인물이다. 유다와 예수의 관계는 요셉의 형제들과 요셉의 관계와 같다.
21절 요셉은 형제들에게 명령문으로 된 요청을 한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요셉은 계속 자기 가족과 자녀들을 “기르리이다”(‘쿨’의 필펠) 라고 약속한다. 요셉은 45장 11절에서 “봉양하다, 돌보다”(‘쿨’의 필펠) 를 사용했었다. 아마도 기근이 끝났겠지만, 요셉은 기근이 끝나고 오랜 후에도 계속 자기 가족을 “지키는 자”다. 가족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기근이 끝난 것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
-신약 비교 본문 연구(히브리서 9:15~20)
헬라어 διατίθημι 맡기다. 위임하다. 다스리게 하다. 미래 능동태. διαθήσει; 부정과거 능동태. διέθηκά; 완료 능동태. διατέθηκεν; 부정과거 수동태. διετέθην; 완료 중간태. διατέθειται. 히브리어 등가: 📷
히브리어 등가 카라트:언약을 체결하는 것과 관련하여 제물을 쪼개는 것으로 생각하여, 언약을 체결하거나 그 관계에 들어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을 부르신것과 그에게 약속하신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하나님은 한 백성을 창조하셨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행위 때문에 한 백성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새 이름인 이스라엘은 하나니므이 백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세계의 열방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이 되도록 선택하셨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성경에서 믿음의 공동체는 부름 받은 백성이다.”(hanson 1986:467) 신학적 의미에서 이 말은 특정 집단의 선택을 믿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택함 받은 백성이 아니다. 스스러 어떤 업적을 이뤄서 선택된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았다. 선택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족장들에게 약속을 주신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택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도권에, 하나님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있다. 선택은 책임을 요구하고 선택은 더 낮은 것이 아니라 더 높은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 받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언약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하신 사건에는 구원의 역사 뿐 아니라 심판의 역사도 포함된다. 선지자들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때 심판을 내리시는 기본 전제는 선택과 언약이다. 선택은 이스라엘에 대한 요구를 강조하며, 요구에 상응하는 더 심한 형벌로 귀결된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서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아모스3:2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특별한 관계로 함께 연결돼 있다.언약 관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애굽에서 노예에서 그의 백성을 해방시킨 것으로 시작한다.(출애굽)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결론은 토라, 구약 전체의 핵심이다. 내러티브의 틀은 언약이 체결된 사건의 배경을 제공하고 사건의 의미를 강조할 의도로 짜져 있다. 언약 체결은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사건에 대한 이야기와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이야기에서 이어서 나온다. 두이야기는 19:4.20:2 에서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나는 너르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언약은 쌍방의 동의이기 때문에 백성의 동의를 포함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백성의 동의를 요구하시고 백성은 동의한다. 하나님편에서의 의무는 출애굽의 해방을 통해서 이미 실행됐다. 물론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 할 것을 약속하신다. 백성의의무는 십계명에, 언약의 책(출20:22~23:33), 신명기의 끝 부분까지 걸쳐있는 나머지 토라에 표현된다. 따라서 언약을 통해서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이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행위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히브리 단어 ‘헤세드’가 의미하는 특별한 종류의 사랑으로 자신과 백성을 결속시킨다.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은....... 신실한 사랑, 변치않고, 흔들림 없이 언약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Good 1962b:167) 언약적 사랑은 “서로 결속돼 있는 대상을 위해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강력한 신뢰관계, 열망, 결의와 관련이 있다.”(Brueggemann 1997:217)
이상적인 모습은 당연히 언약적 사랑을 쌍방이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반복해서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는 다양한 이미지와 은유들을 사용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수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 이스라엘은 그의 자녀라고 말할수 있다. 하나님은 아내와 신부인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불릴수 있다. 이스라엘이 결혼관계에서 신실하지 못한 행위는 출애굽기 34:16.레20:5,사사기2:17 렘3:6~10,겔16장과 두 음녀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충격적인 비유에서 비판을 받는다. 결국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북왕국의 이탈과 패배로 찢어졌으나 원래의 통일된 모습을 회복할 것이다. 위로의 책 예레미야30장~31장은 북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언하며 북쪽 지파들이 회복될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을 대상은 연합된 유다와 이스라엘이다. “새 언약의 체결은 두 왕국의 분리 이후 오랫동아 깨어져 있던 관계의 치유를 의미한다. 새 언약은 한때 그랬던 것처럼 하나로 통일된 하나님의 백성만 존재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확신을 설명해 주고 있다.(덤브렐)
성경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에 끊임없이 관심을 둔다. 이 관계는 신약에도 계속되는데 기독교 교회의 기원과 초기의 성장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표현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성취시킨다.(눅1:54~55, 마리아의 노래)신약은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며 구약과 비교해서 ‘하나님의백성’이라는 실제 표현은 덜 사용하고 있다. 롬9:25~26에서 바울은 ‘내백성’을 회복할 것이라는 호세아의 예언이 교회를 통해서 성취된 것을 이해 한다. 베드로전서 2:10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용어가 기독교 공동체에 사용된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과 새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것은 신약의 중심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새 이스라엘에 포함시킴으로써 역사의 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목표를 성취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새 인류에 포함시킴으로써 창조의 질서에있는 하나님의 목표를 성취한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은 새 공동체 새 기독교 교회를 탄생시켰다. 신약에서 이 공동체는 새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들을 성취한 존재로 뵤사된다. 이는 성령의 세례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다. 새 공동체는 구약의 하나님 백성과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며 종말의 공동체, 막 시작된 새 시대의 공동체 새 인류의 핵이기 때문에 새 공동체이다. 인자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포괄적으로대표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죽고 새 삶으로 다시 살아난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마름 뼈들은 생명을 얻는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신약의 교회는 택함 받은 백성인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람들이다. 벧후1:10은 두용어를 결합하여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 고 독자들에게 권면했다. 신자들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는 ‘성도들(하기오이)’ 곧 거룩한자들,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된 백성이다. 교회는 성도들을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채택함ㅇ로써 ‘하나님의 소유인 성스러운 배성, 세상의 삶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 백성으로 스스로 이해했다’(로히핑크)하나님의 백성을 미래에 구속할 것이라는 약속들은 성취됐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은혜로 구속하신 것처럼, 새 이스라엘을 그리스도 사건으로 특별히 그릐스도의 죽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그라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하심이라(딛2:14,참고시130:8) 교회는 하나님의 새 백성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행위로 존재하게 됐기 때문이다. 교회는 새 언약의 공동체다. 이스라엘이 가졌던 특권들은 이제 교회의 특권들이다. 새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되는 방법은 더 이상 혈통에 근거하지 않고 믿음에 근거한다.
언약(디아데케)이라는 단어는 구약에 거의 300회 정도 등장하는 반면 신약에서는 단 33회만 등장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언약은 사용 빈도가 보여주는 것 보다는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언약은 핵심적인 여러 본문에서 사용된다. 주의 만찬을 제정하면서 사용된 단어들을 통해서 예수는 예레미야가 약속한 새 언약을 시작하는 희생제사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이해한다. 마26:28, 막14:24 의 본존된 형태에서 예수는 잔을 들고서 “이것은...언약의 피니라”고 하신 말씀은 출애굽기 24:8에 기록된 시내산 언약을 시작하게 만든 희생제물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고전11:25,눅22:20,에 기록된 형태는 ‘내 피로 세운 내 언약’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을 암시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 그리스도의 사건은 약속된 새 언약,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새 관계를 시작한다.
새 언약의 신햑은 히브리서에서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ㄷ. 히브리서는 예수를 ‘더 좋은 어약의 보증(7:22)로 이해하며,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낫고 옛 언약을 필요없게 만든 것을 보여주는 논의를 위해 렘31:31~34 전부를 인용한다. 주의 만찬의 전통에서처럼 새언약은 새 언약의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과 연결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점을 헬라어 단어 ’디아데케‘에 있는 이중적인 의를 활용해서 강조한다. 이 단어는 언약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리트‘의 번역 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뜻과 유언”이라는 측면에서 ’유언‘을 뜻한다. 이처럼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효력을 발휘하는 것처럼(히9:17)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효력을 발휘한다.(부르스1969:56~57)
히9:15~20
15절 그리스도의 치는 렘31:31~34를 통해 약속된 것을 이루고 예수가 “새언약의 중보”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이 강조는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수여된 혜택에서 새 언약이 승인을 이루기 위해 요구되었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전환된다. 예수가 하나님을 순종하여 자의로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그는 새 언약의 제사장적 중보자가 되었다. 천상의 성소를 들어감은 그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과 그가 중보했던 언약의 비준을 확인해준다. 중보자의 직무가 그의 구속적 죽음의 효력으로 선언된다. 이가 이룬 종말론적 구속은(12절)은 자기 백성들과 새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으로서 이제 묘사된다. 11절~14절의 천샹의 구속 사역의 주제는 15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새 언약의 축복을 포함하는 약속된 종말론적 기업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영원한 구원의 향유와 관련된다. 예수의 죽음은“첫 언약 때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라는 부사구는 11~14절을 반영한다. 옛 언약은 그것이 호력을 발휘하고 있는 동안에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서 죽음을 요구했다.(10:28)언약을 승인했던 사람들은 저주의 방식으로 언약의 규정에 대한 순종을 맹세했다. 그것의 위반은 그들이 맹세를 지키지 못한다는 증거가 되었고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위험에 처하게 했다. 지극한 순종의 행위로 예수는 저주 받은 자로서 대표적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 위임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한 언약의 복을 받을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16~17절 뒤에 이어지는 확장된 단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연성을 설명하게 위해 삽입구적으로 도입되었다. 15절에 “언약”과“죽음”의 두드러진 상관성이 16,17절에 반복되고 그것은 언약을 단일하게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디고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주제가 언약의 승인이라는 인식은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제사장적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왜 죽어야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16,17을 도입했음을 암시한다. 15절B ‘죽으사’를 강조하는 것이지 15B의 목적절(‘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휴히스가 관찰한 것처럼 “그 초점은 새 언약의 제사장적 중보자로 안내하는 죽음에 있는 것이지 기업을 인도하는 죽으에 있지 않다. 바울은 주로 기독론에 관심이 잇지 기업의 구원론적 축복에 있지 않다. ”유언한 자가 주어야 되나니“ 는 죽음의 필연성은 언약적 절차에 근거하고 있다. 승인하는 당사자는 언약을 따르겠다는 헌신을 맹세할 때 저주를 자기 자신에게 두었다. 거래엣 승인하는 당사자는 희생을 위해 지정된 동물에 대해 대표되었다. 그가 그 맹세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대표되는 동물의 잔인한 절단은 승인하는 당사자의 폭력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언약의 승인을 위해서는 승인자의 죽음이 상징적으로 대표되는 것이 필요했다.
18~21절 저자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비준을 언급하다. ‘첫 언약’은 ‘이전언약’을 생략적으로 사용한다. 이 언약의 비준은 법적 원리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죽음의 원리가 이전 언약의 시작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이 본문의 중심적 의미는 언약과 희생의 피간의 밀접한 관계에 있다. 피의 모티브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는 결론으로 동사 엥카이네제인 은 ”새러은 것을 경건하게 하다“를 나타내고 그것은 야웨와 그의 백성들을 결속하는 경건한 법적 관계의 비준을 묘사하는데 적합하다. 희생의 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매개였다. 그것은 또한 ”피의 적용이 없이는“ 옛 언약이나 새 언약에서 결정적인 정결을 이룰수 없다는 법적인 금언을 예기한다.22b
시내산에서 시작된 언약은 피로 비준되었고 죽음에 의해 법적으로 보증되었다. 피의 중요성이 이 구절
에서 반복으로 강조되는 언약이 단지 새로운 언약처럼 희생적인 피에 의해 재가 되었음을 보이는 것을 전자는 강조한다. 20절의 ”이것은 언약의 피니라“는 그 인용이 아마도 그리스도의 성만찬 말씀과 일치하여 제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옛 언약이 죽인 동물에서 획득한 희생적 피를 통해 재갸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0절의 주의 만찬에서 그 인용은 언약의 비준에서 희생의 피의 사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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