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3_주일예배_롬13:8-10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5 views
Notes
Transcript

사랑에 빚진 삶

Romans 13:8–10 NKRV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우리는 한 순간도 남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위치에 오르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웬만큼 발휘하게 되면 언뜻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실상 하나 하나를 돌이켜 보면 자기 혼자 독단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태어나 생명을 누리는 것부터 부모님의 덕에서 비롯되었고, 하루하루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자신의 손으로 된 것보다 남의 손으로 된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의식주가 그렇고, 우리의 걸음걸음을 옮겨 주는 모든 것, 신발이며 자동차며 도로며 하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도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정성과 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길이 가 닿았다 할지언정 우리의 손길로만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의 손길을 거친 것을 지금 우리가 불편함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신 뜻 가운데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 현실을 '사랑에 빚진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8절을 봅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새번역 성서>의 말씀입니다. 다른 번역을 대조해 보면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인 메시지의 초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새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아주 풀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빚을 지지 말아라!' 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우리들 다 큰 걱정거리를 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공동번역 성서가 풀어 번역했듯이 우리가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갚아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빚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우선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를 따르면,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신세진 모든 이들에게 그 신세진 것을 성실히 다 갚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법적인 차원의 의무일 수도 있고 도의적 차원의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개역 성경이나 새번역 성서 말대로 '빚'입니다. 그 빚을 지고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을 빌려간 사람이 돈을 갚지 않으면 법적으로 민사상의 문제가 생깁니다. 또 애경사가 있을 때 경조비를 서로 주고받음으로 돕고 사는 것이 우리의 한 생활방법인데, 어쩌다 사정이 생겨 꼭 해야 할 경우에 못하게 되면 도의상 문제가 됩니다. '빚을 지지 말라!' 하는 이야기는 이런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진정한 초점은 우리 인간들의, 어찌 보면 운명적 삶의 한계, 범위를 밝혀 주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 '아무리 갚으려 해도 갚을 수 없는 빚', 바로 '사랑의 빚'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법적이거나 도의적인 의무 내지는 빚은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갚을 기회를 잃었다 하더라도 살다 보면 또 다 갚을 수 있습니다. 아닌 말로, 빌린 돈을 갚지 못할 지경이 되면 몸으로 때우는 방법도 있고, 한 차례의 경조금을 못 냈다 하더라도 다른 기회나 다른 방법으로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아무리 갚으려 해도 갚을 수 없습니다. 대체 '사랑의 빚'이 무엇이길래 갚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추상적인 감정이나 소위 애정의 차원만이 아닙니다. 내가 '나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말합니다. 그것은 나 아닌 타인의 덕에 의해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인간이 더불어, 서로 얽혀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필요한 삶의 모든 관계에서 덕을 입은 것을 일대일로 하나하나 다 갚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갚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쓰는 물건이야 돈으로 값을 치를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받은 생명 그리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누리는 안정감, 든든함, 이런 것들은 과연 무엇으로 값을 치를 수 있을까요?  흔히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은 효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갚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도 진정으로 다 갚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돈으로 값을 치렀다고 생각하는 물건값 역시 어떤 의미에서 다 치른 것은 아닙니다. 물건값을 치를 때 우리는 단지 그 물건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비용만을 치릅니다. 어떤 노동자가 물건을 만들기 위해 쏟은 심혈과 정성에 대해 전적으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물건을 만들기 위해 원료를 캐내어 온 자연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습니다. 사회적 평균치만을 치른 채 값을 다 치렀다고 안위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의무 / 빚은 일대일의 차원에서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슈퍼맨'이라면 가능할까요? 아니, 하나님의 자리에 있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내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웃에게 빚진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은 운명적인 한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오늘 말씀은, 오늘 우리를 절망에 빠트리거나 좌절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 /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부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아예 포기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일단 미뤄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웃을, 남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내가 남에게 빚지고 있는 만큼 누구든 이웃을 사랑하며, 또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성서의 황금률로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저 무한히 삶이 다하는 한 사랑하는 도리 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본래 율법의 정신은 한마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경계가 없습니다. 끼리끼리의 사랑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특별히 이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느 스님의 기독교인에 대한 뼈아픈 기억 두 가지를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절에 소풍을 나온 어린 아이들이 하도 예뻐서 한 아이를 안아주려는데, '앗! 사탄이다!'하고 뿌리쳤다고 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사탄이 득실대는 곳으로 소풍은 왜 갑니까? 또 하나는... 길을 가다가 음식점에 들렀는데 주인장이 '우리 집에서는 스님은 안 받습니다!' 하더랍니다. 역시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그래서 벽을 둘러 봤더니 성화가 걸려 있더랍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끼리의 관계만으로 결코 충족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 가운데, 어떤 것은 무신론자의 손을 거친 것도 어떤 것은 불교도나 이슬람교도의 손을 거친 것도 있으며, 지체장애자의 손길을 거친 것이나 정신질환자의 손을 거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갚는 길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끼리 친교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일이, 우리끼리의 사랑으로 그치지 않고 더 넓은 세상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