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에서 엠마오를 느끼다(눅24: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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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4월 19일 수요일
제목 : 엠마오에서 엠마오를 느끼다
본문 : 누가복음 24장 29-35절 *신140
결단찬양 : 욥의 고백
[도입 : 핵심을 놓칠 때]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전교 1등을 하기 위해서는 교과서 위주로, 국영수 중심으로, 예습 복습 철저히 하면 된다.’
또 수능 만점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어떻게 공부하셔서 만점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을 때 많은 만점자들이 대답하기로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모습을 봅니다.
어찌보면 진짜같고, 어찌보면 거짓같은 이 대답에 지금 다시 되돌아보아도 정말 아리송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런 생각은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소재로 책이 나올 정도니 말입니다.
여하튼 책의 내용을 가볍게 살펴보니 교과서 위주도 맞고, 국영수 위주도 맞고 다 맞는데, 이는 이해하기 쉽게 답한 것이고 실질적으로 그 안에 담겨진 핵심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되 어떻게 공부하냐는 것이 중요하고, 국영수 위주로 공부하되 어떻게 예습하고 어떻게 복습하냐고 중요한 것인데, 정작 우리는 핵심은 놓치고 ‘교과서 위주로 하면 전교 1등할 수 있대! 국영수 위주로 하면 서울대 갈 수 있대!’라는 정리된 한 문장을 가지고 헛된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핵심을 놓친 그 헛된 희망은 차차 무너져 갑니다. 고1땐 ‘SKY 못가면 사람이냐?’, 고2가 되어서는 ‘인서울만 하면 되지 뭐’ 그리고 대망의 고3이 되어서는 ‘제발 대학 좀요..’ 간절함을 넘어 비굴해지는 모습이 자연스레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대화를 하면서 ‘핵심’을 발견하는 것 또한 너무나 중요합니다. 요즘 핫한 ‘목감기’를 소재로 ‘요즘 목감기에 걸려 말하는게 참 힘들어. 너도 목감기 조심해. 따뜻한 물 자주 마시고.’ 라 대화하는데, 정작 받아들이는 이가 ‘목감기에 걸렸으니 너는 에버랜드 사파리 구경 못가겠네. 어쩌면 좋니?’ 라고 대답한다면 결코 건강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할 겁니다.
이래저래 ‘핵심'을 발견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핵심을 놓칠 때 겉돌거나 헛된 길로 방향을 잡아 갈 때가 많기에 핵심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도입 : 핵심을 놓친 제자들]
오늘 본문도 보면 핵심을 놓친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본문 뿐 아니라 성경 이곳 저곳에서 핵심을 놓치는 연약한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오늘은 누가복음 24장 13절부터 기록된 엠마오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 왜 이들은 엠마오로 갔는가?]
누가복음 24장 13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제자 둘이 예루살렘에서 어디로 이동 중입니까? 엠마오라는 지역으로 이동 중에 있습니다. ‘그날’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 둘은 엠마오로 향했습니다.
엠마오는 어떤 곳입니까? 또 이들이 엠마오로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엠마오는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서쪽 약 11km 거리에 위치했는데, 이 엠마오의 뜻은 ‘따뜻한 샘’, ‘따뜻한 우물’ 또는 ‘온천’의 뜻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엠마오로 향한 진짜 이유는 아직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분하지만, 육신적으로 지쳐 있어 쉼을 위해 온천을 찾아 갔다는 주장도 있으며, 또는 이들의 거처가 엠마오에 있기에 빈무덤을 보고 허망함 가운데 집으로 돌아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왜 이들이 엠마오를 향해 걸어갔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날에 빈 무덤을 보고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영적 상태가 결코 충만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 왜 이들은 공허했는가?]
그럼 왜 이들은 공허한 상태 속에 있었을까요? 14절을 보니,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성경은 이야기라 해석되었지만, ‘충격에 의한 논쟁’ 중에 있다 보는 것이 맞습니다. 어떤 논쟁입니까? ‘빈 무덤’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물론 빈 무덤이 예수 부활의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도 사망 조작설, 시체 도적설, 도굴설 등 여러 논쟁이 있었기에 빈 무덤만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기엔 빈약했습니다. 그러나 논쟁 중에 있는 이들은 부활은 커녕,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공허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20절과 21절을 보니 이들이 슬픈 빛이 가득한 이유를 우리는 조금 더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그들이 슬픈 이유는, 그들이 공허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여겼던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명백한 사실이고 진리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이들은 그저 예수님의 죽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한거죠.
[본문 : 주님이 곁에 계신데..]
그런데 놀랍게도 13절, 엠마오로 가는 중 그리고 14절 이야기를 나누더라 는 내용 이후로부터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합니다. 먼 발치서 지켜보시거나 미행하신 것도 아닙니다. 가까이에 오셔서 함께 대화를 하십니다. 하지만, 이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가 예수인지 못 알아 봅니다.
제가 판정을 받은건 아니지만, 안면인식장애가 조금은 있어 보입니다. 사실 좀 걱정했습니다. 아기들 다 비슷하게 생겼고, 크기고 비슷한데 어떻게 구분할까? 못알아보면 어떡하지? 심히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아엘이가 태어날 때, 못알아보면 어떡할까? 혹여나 병원의 실수로 내 딸과 다른 아기가 바뀌게 되면 어떻게 하지? 등 온갖 고민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전혀 눈꼽만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조광원이 조광원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장애가 있다한들 하루 이틀 보고 말 사이가 아니라, 생각보다 긴 시간을 함께 한다면 충분히 알아볼 법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예수를 가까이 하고도 못 알아 봅니다.
도대체 왜 못알아볼까? 마가복음 16장 12절을 보니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물론 이들이 먼 발치에서 보았기에 몰라본 것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있지만, 확실한건 그들 앞에 주님께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기에 알 수 없었음이 진실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본문 : 왜 하필 이 둘을 찾아오셨나?]
왜 하필 이들일까요? 부활하시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로마 군사들을 찾아갈 수도, 자신을 조롱하고 비난하던 자들을 찾아가 ‘너희가 조롱하고 비난하던 내가 다시 부활했다.’ 이 사실을 보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이들을 찾아 오셨을까요?
또 찾아오셔서 이들의 이야기에 참여하시고,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척 대화를 이어가시는데, ‘나다 애들아. 내가 부활했다.’ 라고 말씀해주시지도 않으실거면서 왜 굳이 이들을 찾아오셨는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을 보며, 왜 주님이 이들을 찾아오셨는지, 왜 이들의 이야기에 참여하셔서 동행하고 계신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주님은 이들을 향해 책망하십니다. 어떻게요?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라고 말입니다. 이들이 더디 믿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여전히 더디 믿는 자라는 책망을 받습니까? 그 이유를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만 보아도 충분합니다. 누가복음 9장 22절입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이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을 보아도 죽음으로 끝남이 아니라 부활로서 완성됨을 예수님은 누누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사실을, 이 핵심을 놓치고 있기에 주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이들이 알도록 이야기에 동참하셨고, 또 그들의 이야기에 책망하시기 까지 하십니다.
[본문 : 엠마오에서 영적 엠마오를 느끼다]
그렇게 이들의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찾아오셔 대화를 이어가시다 밤이 되어 이들의 초대로 함께 유하시며 이야기를 이어 나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은 이들을 향해 떡을 가지고 축사 하시며 그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들이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보게 됩니다. 지금껏 눈 앞이 가리워져 보지 못했던 주님은 이제야 보게 됩니다. 식탁의 손님이었던 주님이 이제는 식사의 주인이 되시는 순간입니다.
이제야 그들은 알았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셨음을 말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로써 십자가를 완성하셨음을 이제야 그들은 알았고 또 보았습니다.
왠지 모를 지쳐있는 육신을 가지고, 공허함을 가지고 뜨거운 샘, 엠마오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이들은 육신의 회복으로 뜨거워지는 것이 아닌, 주님을 만나 영적으로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마음 가운데 뜨거운 샘물을 만나고, 느끼자 이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32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시고
그들 안에 성령이 임재하니 알고 있던 내용이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바뀌어 그 말씀을 보니 마음이 뜨거워지는 겁니다.
이는 오직 주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주께서 여실 때 비로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의 힘으로 분석과 이해할 수 없는, 오직 주님께서 일하셔야 가능케 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임을 이제야 이들은 알았습니다.
[본문 : 성령이 임하시니 1. 말씀에 은혜를 입습니다]
이들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삶에 어떤 모습들이 일어납니까? 먼저, 말씀에 은혜를 입게 됩니다.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거진 준모태신앙으로써 긴 시간 신앙생활했기에 성경에 대해 생각보다 잘 알았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통독도 2-3차례를 했습니다. 나름 성실한 모습을 보였던 크리스천이었지만, 그냥 앎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고3 여름 수련회를 주님을 만나고나니 삶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범했던 악한 것들을 끊게 되고, 주님께서 싫어하실만한 모든 것들을 손에서 떼어내게 되었습니다. 그 날이 생생하지는 않지만, 그 날의 온도와 분위기와 밝기가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 이 가슴이 너무 뜨거웠습니다.
이들도 그랬습니다. 32절을 한 번 더 봅시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시고
성령이 이들 안에 임하자, 지금껏 자신들이 알던 성경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안에 들어오자 너무나 뜨거워진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핵심을 붙잡자, 죽음 넘어 부활의 승리와 기쁨을 맛보게 되었고, 그로인해 성령님이 임재하자 말씀에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본문 : 성령이 임하시니 2.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또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니,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즉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33절 상반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11km의 거리를 걸어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왔지만, 성령이 임하자 다시 그 십자가의 부활이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부활의 승리와 기쁨이 있던 곳으로, 말씀을 들었던 곳으로 이들은 돌아갑니다.
많은 간증자들의 고백을 듣다보면 여러 공통점들이 있지만, 반드시 등장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주님을 만나고 나니 삶이 바뀌었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이전에 내 삶이 지저분했던, 또는 윤리적으로 흠하나 없다 자부했던 중요치 않습니다. 그들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왜 바뀌었습니까? 말씀에 기준두어 보니 바뀔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들도 그랬습니다. 말씀도 알았고, 주를 알았고, 또 주님의 죽으심도 보았지만 성령이 임하여 뒤돌이켜 보니, 말씀이 거하던 곳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던 것이지요.
[본문 : 성령이 임하시니 3. 부활을 전합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인 이들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니, 세번째 변화는 부활을 전하게 됩니다.
35절입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죽음에 머물러 있던 이들이 이제는 부활을 보게 되었고, 부활을 보니 공허함이 기쁨으로 채워졌고, 무력함이 뜨거워짐으로 새롭게 채워지니, 부활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도 바울도 그랬고,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많은 제자들이 삶을 돌이켜 주를 위해 살았고, 또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 기쁨을 누리니, 가족 구원이 갈급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니 내 주변의 믿지 않는 지인들이 불쌍해 보이는 것 아닙니까?
중보기도팀 홍보하려고 이 자리에 있음은 아니지만, 중보기도 모임마다 권정자 전도사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간증 하나 하나가 성령님이 하시지 않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영적인 힘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최근 들었던 간증 중에도 교회다니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악한 성격의 이웃이 계셨는데, 전도사님께서 그 분을 향해 먼저 손 내미심에 이웃의 마음이 녹아내렸고 반찬도 나눠주며 변화된 모습을 사례로 나눠주셨습니다. 더 많은 간증과 또 말씀의 은혜를 누리길 원하시는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든 권정자 전도사님께 연락주세요.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이들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 본문 속 두 사람에게도 나타났을 뿐더러, 그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갑니다.
[결론]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죽음보다 부활을 보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절망보다 희망을 품어가는 우리되길 소망합니다.
십자가의 고난보다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시는, 나의 뜻과 지식보다 성령님의 임재 역사하심에 나오는 삶과 간증이 우리 모두를 통해 선포되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욥의 고백
[기도제목]
1) 십자가의 죽음보다 부활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고 희망을 품어 나아가는 우리 되게 하소서
2) 성령의 임재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바로 보게 하소서
3) 우리의 뜻을 앞세우기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걸음마 때는 이어진교회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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