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2 양청] 소요리문답 5-6문 삼위일체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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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문. 하나님 한 분 외에 더 많은 하나님들이 있습니까?
답.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게 한 분 뿐이십니다.
6문. 하나님의 신격에 몇 위가 계십니까?
답.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고, 본질에 있어 같고, 권능과 영광에 있어 동등하십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은 제외하고, 신이 있다는 입장도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는 다신론과, 오직 단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고 믿는 단일신론이다. 힌두교나 불교는 어디에 속할까? 다신론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은 어디에 속할까? 단일신론이다. 이슬람은 그들의 신 알라를 단일신으로 섬긴다. ‘알라’라는 단어는 아랍어로 여호와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결국 그들도 호칭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최근에 예일대 교수 ‘미로슬라브 볼프’라는 사람이 쓴 ‘알라' 라는 책이 대단히 이슈되고 있다. 이슬람의 ‘알라’는 유대교,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논지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그들이 믿는 유일신 ‘알라’는 히브리어 ‘여호와’의 아람어이다. 그들이 신으로 부르는 존재와 우리가 신으로 부르는 존재의 이름이 같다는 것이다. 그럼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하나, 유대교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그럼 유대교가 믿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같은 분이신가? 제가 예전에 전도하면서 만났던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부처도 믿고, 알라도 믿으며 조상신들도 믿는다" 그럼 그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인가?
제가 이슬람을 예로 들어서 말씀드렸지만, 이슬람은 단일신론이다.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이슬람에는 삼위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그냥 한 하나님 뿐이다. 유대교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의 증인 역시 비슷하다. 그들은 모두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피조된 존재일 뿐이다.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유일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단일신’은 조금 다르다. 단일신론은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이슬람이나 이런 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신론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믿겠으나 예수님은 안믿어진다? 이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예수는 믿으나 하나님은 못믿겠다? 이것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신앙은 기독교신앙이 아니다. 이는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 내가 믿고 싶어하는 신을 믿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 인물이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것 부인하지 않는다. 그분이 도덕적인 교사였고 성인이었단 것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믿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일까? 1번을 보라. 참되고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이라고 했다. 다른 종교의 신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신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적인 존재일 뿐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이슬람이 발생하게 된 것은, 모하메드라고 하는 사람이 굴 속에 들어가서 계시를 받음으로 탄생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하메드가 굴 속에서 계시를 받은 것을 사실로 여긴다.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하메드는 문맹자였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받은 계시의 내용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자, 제자들이 이를 꾸란(코란)으로 기록한다. 그가 받은 계시가 무엇인가? 자기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면 단 두 가지의 가능성 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계시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냐? 아니면 사탄이 준 것이냐? 만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주셨으나 모하메드가 이것을 왜곡해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만일 사탄이 준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는 하나님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니 두말할 것 없다.
이 얘기를 왜 하느냐,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씀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곡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나님 정말 선하신 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앞으로 3-4주 후에 타락에 대해 배울 것이지만, 인간이 타락하자 죄를 짓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깨졌다. 박살이 났다. 여러분, 깨진 거울을 생각해보라. 분명 거울이 박살이 나서 거울이 내 온전한 모습을 100%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조금씩, 부분적으로 반사하는 부분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하여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다. 박살이 났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반사하는 부분들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 수준으로 반사하여 나타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종교심’이다.
종교심이란, 누구에게나 그 마음에 신이 계셔야 할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라도 초월자이신 신을 찾고, 신에게 기도하며, 신의 뜻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종교심은 삼위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고, 그분이 주시는 복락들을 받아 누리며, 그분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죄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이 박살나면서 본래 우리 안에 있던 종교심도 함께 뒤틀어졌다.
범죄하기 이전에는 일반계시만으로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었다. 하지만 타락하고 난 이후에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향하던 그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초월자이신 신적인 존재를 찾고 그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종교심은 남아있지만,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바르게 향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우리 안에 박살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서, 소위 종교심은 남아있어서 신적인 존재를 갈구하고 찾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은 아니더라는 것이다. 누가 신의 존재를 가르치지 않았어도,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어느 지역에나 늘상 우상들은 존재해왔다. 인간의 역사는 곧 신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끊임없이 신들을 만들어 내었다.
예를 들어보면, 이슬람이나 힌두교나 불교나, 이런 고등종교들을 보면 거기에서 말하는 모든 가르침들이 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가끔씩 맞는 이야기들을 한다. 각자 믿는 신에게 순종해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세속적인 마음을 비워야 하고, 탐욕들을 내려놓아야 하며,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라는 등의 얼핏 들으면 고개를 끄떡일만한 좋은 이야기들을 한다. 요즘은 중들도 팟캐스트등을 통해 강연을 엄청 많이 한다. 일반계시 차원에서 그들도 때로 맞는 말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식이 아니며, 구원받을 만한 지식도 결코 아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식의 종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인간이 투사해서 만들어내는 신의 존재라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인간이 원하는 모습의 신일 뿐이다. 그 원하는 모습의 신은 고등종교일수록 인과율이라던지, 권선징악과 같은 체계를 가진다. 그래서 그들이 믿는 신은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은 죽어서 상을 내리고, 나쁜 사람은 죽어서 벌을 내리는 존재이다. 욥의 세 친구가 그랬다. 인과율과 권선징악.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등종교인 경우에나 그렇고, 샤머니즘과 같은 미신으로 내려갈수록 이런 도덕체계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신에게 많은 정성을 쏟으면 상을 받을 뿐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본성은 우상을 만들어내는 영원한 공장이다" 인간 본성이 얼마나 쉬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신을 투사하여 만들어내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은 그것들과 어떻게 구별이 되시는가?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종교는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가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신을 감동하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런 저런 뇌물로 살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속성들을 볼 때 하나님은 불변하신다.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다. 그러나 일반 그리스로마 신화나 다른 종교의 신들에는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다.
2번을 보라. 삼위일체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있다. 어쩌면 여러분들도 삼위일체를 이런 설명으로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서 “송진영"이라는 사람은, 부모님 댁에서는 착한 아들이고, 우리 집에서는 한 가정의 남편이며, 교회에서는 목사이다. 한 존재가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런 설명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양태론이라고 하는 이단이다. 양태론 이라는 말은 한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설명을 들어보라. “구약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났다가 신약에는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나시고, 이후에는 성령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래서 한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셨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이것이 양태론이다. 성부 성자 성령을 우리가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풍성하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은혜로운 삶에서 벗어나 왜곡된 진리로 치우치게 된다.
우리 말로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지만, “세 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삼위 라고 하는데, ‘위’라는 말이 한자로 ‘자리, 벼슬’이다. 한 하나님께서 왕과 좌의정과 우의정을 다 하신다. 이런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세 분’이라고 한글로 표현하지만 그럼에도 한 하나님이시다. ‘세 분’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삼신론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삼신론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신들이 셋이 있는데, 신들이 서로 갈등하고 싸우고 이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라고 부를 정도로 동일하시다. 그러나 구별된 인격을 가지신다.
세번째로 잘못된 것이 종속설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부는 권세와 영광과 힘이 가장 많으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보다 조금 못미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 종속된 권위와 권한을 가지신게 아니다. 동일한 하나님이다. 그러나 성자께서는 스스로 당신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높이시기를 기뻐하신다. 부부관계에서도 아내들이여 네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 라고 하면, 요즘 인권이 올라가면서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부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동일하시나 스스로 자신을 낮춰 섬기는 것,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부의 관계는 참 중요한 영적 원리를 지니고 있다.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성령께서 성자를 높이신다고 해서 삼위 하나님 중 3번째, 열등한 하나님이라는게 아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나 그렇게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3번을 보라.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고 몇 번 반복했다. 인간의 언어, 시간, 숫자의 개념과 형식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세 분인 하나님을 한분으로, 한분이신 하나님이 세 분으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의 숫자와 개념으로 표현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분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4번을 보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성부하나님은 성자하나님이 아니시고 성자하나님은 성령하나님이 아니시다. 만일 여러분이 어디서 성부하나님은 곧 성자이고 성자는 성령이다. 똑같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단이다. 삼위일체를 믿는 것이 아니다. 요 17:21-22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이는 성부와 성자가 엄연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또 한 구절 찾아보자. 이는 삼위일체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구절이라 할 수 있는데, 행2: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여기에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등장한다. 성부께서 성자를 높이셨다. 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까. 죽으신 이후에 부활이 일어나고 승천이 나타났다. 방금 읽은 구절을 보면 주님의 사역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을 성자께서 보내주셨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는 인격이시다.
5번을 보라. 신학적인 명제인데, 함께 읽어보자. “A.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셨다. B.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셨다는 것은 태어나셨다는 것이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것은 완료형이 아니다. 이것은 신학에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어렵다. “영원히”라는 곳에 강조점이 있다. 제가 올해로 42살이다. 송진영이라는 사람은 43년전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간적인 개념을 동원하여서 여호와의 증인은 말한다. 성부는 성자를 낳으셨으니까 그 탄생 시점이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성자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라는 말을 놓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마치 인간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나셨다는 것은 시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원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말슴한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연장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은 시간이 길어짐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시점이 있고 종점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런게 없다. 시간을 창조하신 분께서는 시간을 초월해 계시니까. 영원하시니까.
6번을 보라. 다음에 ‘작정'에 대한 부분을 다루면서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은 무얼 하시는가? 성부하나님는 작정과 창조와 섭리를 주도하신다. 성자는 작정하신 구원에 실행과 그 구원을 획득하신다. 당신의 순종과 죽으심을 통해. 성령님은 그렇게 획득된 구원의 역사를 모든 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을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합동사역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느냐.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들이 천박하게 가르치는 것처럼 내가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는 수준에서 이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 그 믿음이 몇 년 지속되지 않는다. 전부 자기 주관이 기준이니까. 뭔가 모를 내 안의 뜨거운 감정,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 의지, 내 주관, 내 열정 등, 뭔가 나의 경험들로 신앙을 정의하니까.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다. 객관적인 일이다. 또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셨고, 오직 예정하신 백성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정하신 때에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고, 구원을 이루신 것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심으로서 그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삼위하나님의 연합사역이 바로 구원이다. 그렇기에 내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내 느낌, 내 의지, 내 뜨거움이 다소 변화할지라도 그것에 의해 내 신앙이 흔들린다고 보지 않는다. 왜? 우리의 구원은 삼위하나님께 뿌리를 둔 것이니까. 이를 헤르만 바빙크라는 사람은 이렇게 설명한다. “타락 후에 주어진 모든 은혜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주어진다" 성부, 성자, 성령을 떠난 은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이들이 성령 시대라고 말한다. 이 말 자체가 틀린 말이다. 성령 시대가 있다는 것은 성부 시대가 따로 있다는 것인가? 성령을 통해서 받는 은혜, 감정의 치유, 질병의 치유 등등 이런 것들을 은혜로 포장한다. 은혜는 성부, 성자,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결론이다.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적용해보자. 마6: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님은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우리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즉,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성부하나님이다. 물론 내가 “예수님!” 하고 기도해도 성부하나님은 너 기도 틀렸어! 라고 말씀하진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 기도의 대상은 늘 성부 하나님이셔야 한다.
또 찾아보자. 요14:13-14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 뜻이 무엇인가? 기도의 근거는 우리의 의로움이나 우리의 선함이나 우리 자신이 아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한 자들은 그분과 한 몸, 연합을 이룬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또한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씀하고, 주님을 신랑이라고 말씀한다. 신부가 신랑과 결혼한다는 것은, 신부가 신랑의 모든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기도를 강조하면서 이 서신을 마친다. 이렇게 권면을 한다. 엡6:18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기도를 강조하면서 항상 기도할 때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말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들을 구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주님이 싫어하실 내 마음대로 구하면서 마지막에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이것은 모순이다. 불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내 욕심 안에서 기도하라는게 아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욕심을 따라 기도하기 때문이다. 욕심을 따라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경우 있잖나. 성령님께서 우리가 무얼 구하여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때로 말문이 막히고 답답하고 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그냥 하나님 앞에서 눈물만 하염없이 흐를 때가 있다. 그럴 때에도 성령님께서 탄식하며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 말씀한다. 히7: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부활승천하신 주님은 하늘에서 쉬고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친히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요일2: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말한다.
기도라는 것 하나를 통해 우리가 누리는 유익이 뭔가?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께서 그 안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님 안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 기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 내가 기도할 때 성자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하늘 보좌 우편에서 도우신다.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간구하신다. 내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성부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삼위하나님과 우리가 깊게 연합하는 은혜로운 경험이고 특권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는 성부,성자,성령이 분리되서 독자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이 삼위하나님의 연합사역이듯, 신자의 일상적 삶에서 누리는 은혜 역시 삼위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이를 놓치지 말라.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런 기본적인 지식들을 쌓아가며 성경을 읽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은혜를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큰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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