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들 속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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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M1 :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M1 :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보아스는 룻과의 결혼을 위해 공식적으로 고엘 제도 안에서의 결혼을 승낙받으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법정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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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의 장로들” (2절)
장로들은 “나이가 많은”이라는 자켄이라는 형용사 단어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장로들을 영어로 “elder”로 해석하는데 직역한 것이죠.
당시 법, 제도적인 이유로 승낙을 받고, 이를 공식적으로 인증받으려고 할 때 장로들이 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보아스는 열 명의 장로들을 소집하여 고엘 제도의 문제를 판결받고 공식적으로 인증받기 위해 장로들을 소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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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려는 아무개 (3~4절)
보아스는 현재 상황을 설명합니다.
3절을 보면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오미가 남편인 엘리멜렉의 소유지, 분배받은 땅을 팔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10년 전 모압 땅으로 갈 때 두고 간 소유지를 이제야 팔려고 하는 경우
엘리멜렉이 떠나기 전 이미 팔아버린 소유지를 되찾으려는 경우. 이 경우 나오미가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기업을 무를 자가 값을 치르고 그 소유지의 권한을 다시 찾는 것을 의미
지금 룻기의 흐름 상 두 번째 경우가 더 가능성이 높습니다.
엘리멜렉이 흉년이 들면서 이미 경제적 어려움이 있어서 땅을 판 것이죠.
그리고 모압으로 이주를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고엘이 다시 사서 땅을 되찾아오려는 것입니다.
고엘 제도의 목적은 어떤 사람의 기업이 대대로 이어져서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분배받은 땅은 영구적으로 매매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엘리멜렉처럼 경제적인 이유로 그것을 팔더라도 그것은 영구적으로 파는게 아니라 본인이 혹은 본인이 죽으면 그 아들들이나 가족이 다시 사려고 할 때 살 수 있죠.
만약 그렇게도 여건이 안돼서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찾지 못할 정도로 어려우면 희년이라고 하는 50년 째에 그 땅이 다시 원래 소유자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기업으로 분배받은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사적 재산권이 아닌거죠.
결국 지금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땅의 소유권이 모압에 가기 전에 팔렸었는데, 엘리멜렉은 죽고 나오미가 그 땅의 소유권을 다시 사오려고 하는거죠?
그러면 기업을 무를 자, 고엘이 그 땅을 사서 소유권을 되찾아와야합니다.
아무개는 어떤 선택을 하나요? 자신이 기업을 무른다고 대답합니다.
아무개에게 다시 기업을 무를 책임을 설명하는 보아스 (5-7절)
여러분. 지금 보아스는 자신이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고 룻과 결혼하기 위해서 장로들 앞에 섰습니다.
아무개가 기업을 무르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죠.
그러나 아무개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기업을 무른다는 겁니다.
룻과 나오미가 이 대화를 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룻과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개의 대답에 의해서 이제 아무개가 기업을 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한 가지 기업을 무를 자의 책임을 더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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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아무개가 기업을 무른다면 땅 뿐만 아니라 룻과 결혼을 통해서 엘리멜렉의 대를 잇도록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무개는 자신이 기업을 무르지 못할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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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아무개가 룻과 결혼하게 되면 자신의 기업에 손해를 입게 된다고 할까요?
만약 룻과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만 낳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아들은 엘리멜렉의 대를 잇는 자가 되고 엘리멜렉의 기업뿐만 아니라 아무개 자신의 기업까지 그 아들이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의 기업이 손해인거죠.
자신의 대는 끊기고, 아무 유익이 없고 손해만 보는겁니다.
이것이 두려워서 결혼하는 것을 포기하는 겁니다
아무개의 의도는 뭔가요?
아무개는 지금 엘리멜렉의 집안의 대를 잇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소유만을 사서 자신의 재산을 늘리려 했던 겁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서 굳이 자신의 기업까지 잃게 될 바에는 기업 무르는 것을 포기하는거죠.
아무개는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고엘 제도를 지키는 척하며, 기업을 무르려했던 겁니다. 이기적인 모습이죠.
M2 :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M2 :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본문에서 나타나는 아무개는 어떤 사람입니까?
겉으로는 기업을 무르는 좋은 일을 하려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들여다보면, 그는 사실 좋은 일을 하려는 척하지만 자신의 손해가 생기면 곧바로 그 일을 멈추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손해가 생길만한 가능성이 생기니까 바로 기업을 무를 권리를 포기하는 겁니다.
이기심이란 무엇인가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마음이죠.
자신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
이 아무개는 이기심으로 기업을 무르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익이 되지 않으면 과감하게 포기하는거죠.
M3 : 본문의 사건을 오늘날로 연관하라
M3 : 본문의 사건을 오늘날로 연관하라
그러나 여러분. 아무개라는 사람을 우리가 맘껏 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렇잖습니까?
우리도 사실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개와 다르지 않은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자신이 포기 못하는 그 부분에서 이기심이 생긴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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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아파트가 주차 공간이 상당히 협소합니다.
그래서 주차를 이중주차를 해놓습니다.
운전을 안하시는 분을 위해 설명드리자면 주차를 하는 칸이 있잖아요?
그 칸이 모자랄 때 주차한 차들 앞에 차를 횡방향으로, 주차가 세로로 되어있잖아요 그러면 가로로 이중으로 주차를 해놓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원래 주차되어있는 차가 나가려고할 때 어떻게 하느냐
이중주차를 하는 대신 차의 기어를 중립으로 해놓으면 이 차를 밀 수가 있어요.
그래서 앞에 있는 차를 밀고 차가 나갈 수 있는거에요.
그런데 이 차를 미는게 상당히 귀찮고, 무거워서 여성분들은 쉽게 밀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느날은 제가 수요기도회가 끝나고 밤 늦게 퇴근을 했습니다.
그 다음날 또 새벽기도회 인도여서 어차피 저는 차를 빨리 빼니까 이중주차를 했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아저씨분께서 음주를 하신 것 같았는데 저에게 뭐라고 자꾸 얘기를 하시는거에요.
자세히 들어보니까 이 무거운 차를 왜 이중주차를 해놓느냐고 말을 하는 겁니다.
사실 사람들이 이중주차 차를 밀기 귀찮으니까요 원래 주차를 하는 칸에 주차를 하지 않고 이중주차를 해놓는거에요.
그런 칸이 많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분은 이중주차된 차들을 밀고 그 칸에 넣으면 되는데 왜 이중주차를 하느냐는거에요.
사실 저는 상당히 억울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회 때문에 일찍 출근하는 날만 웬만하면 이중주차를 해놓는데 그 아저씨 분은 제가 차를 밀기 귀찮아서 이중 주차를 상습적으로 하는 사람인줄 알았던거죠.
그리고 그런 환경을 접한 피해자로서 저에게 화를 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그런 말을 들을 입장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중 주차를 하는 것 자체가 불법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아저씨 분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기심에 의한 피해를 받은 입장에서 저에게 화를 낸거죠.
사실 저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이중주차를 삼가는 편인데도 어쩌다 제가 잘못걸린겁니다.
처음에는 제가 잘 말씀 드리다가 그분이 전혀 얘기가 안통하는 겁니다. 술도 드셔서 얘기가 안들리시는거에요. 그래서 일단 경비 선생님을 불러서 중재를 부탁드리고 저는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경험을 하고 난 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분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지.
그분은 저에게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정말 새벽 일찍 나가야해서 이중주차를 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그 분은 상당히 화를 내시는거에요. 왜일까요? 정말로 이중주차를 이기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거죠.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주차칸이 멀쩡히 있어도 그곳을 빈칸으로 만들고 이중주차를 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요?
분명히 불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불편하고 손해보는 것을 싫어하는 이기심이 있는거죠.
정말 차를 미는게 어려운 여성분들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차를 밀기 충분한 상황이어도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사실.
M4 : 본문의 위기가 오늘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M4 : 본문의 위기가 오늘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불법은 아니지만 자신이 불편하고 손해보는 것이 싫어서 하는 행위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 중간 사이에서 분명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는데, 세상 기준에서 불법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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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여” (1절)
왜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가장 가까운 친족을 “아무개”라고 불렀을까요?
아무개라는 말은 어떤 사람을 구체적으로 이름으로 부르는 대신 부르는 호칭입니다.
룻기를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사실 말룐, 기룐과 같이 스토리에서 많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도 이름은 다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성경의 저자가 굳이 “아무개”라고 호칭을 부르고 있습니다.
룻기 끝까지 그의 이름은 전혀 알 수가 없죠.
그러니까 “아무개”라고 부른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나오미와 룻의 집안의 대를 잇는 것에 관심이 없이 땅에만 관심있는 자였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아무개”라고 호칭하면서 이 사람이 대를 이어서 이름을 끊이지 않게 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아무개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어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했다는 평가를 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인거죠.
우리도 세상 속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인가, 세상 속 그 누군가 , 아무개로 불릴 것인가 사이에 있습니다.
M5 : 본문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과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M5 : 본문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과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보아스는 상당히 이 아무개와는 대조적입니다.
룻기 전체에서 보아스의 행동을 보면 어떤가요?
보아스는 자신의 기업을 잃거나, 어떤 손해를 생각하지 않고 룻을 대합니다.
룻을 만난 순간부터 이삭 줍기를 돕고, 자신의 밭에서 일하라고 허락합니다.
안전을 보호하고요.
이런 행동들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전혀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룻을 자신의 밭에서 일하게끔 도와주는 일이 자신에게 오는 유익이 없어요.
룻이 일을 한 만큼 어떤 세금같은 것을 내야하는 것도 아니고요.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을 돕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했을 때는 어떤가요?
자신의 기업이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개가 룻과 결혼했을 때 아들이 하나만 생긴다면 혹은 둘이 생겨도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되잖아요.
그런 상황은 보아스가 똑같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아무개가 기업을 무르지 않는다면 자신이 책임지고 룻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무를 넘어서는 사랑을 우리는 ‘헤세드’라고 표현했습니다.
보아스는 변함없는 룻을 향한 헤세드를 베풀고 있습니다.
아무개는 범법 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헤세드’를 베풀지 못했습니다.
보아스는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가요?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며, 그 안에서 계속해서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인데 계속해서 더욱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런 성품을 닮고 그 사랑을 행하는 자가 바로 보아스였던 겁니다.
우리는 룻기의 이야기를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보아선 안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들이 어떤 사랑을 서로 베푸는가를 보아야합니다.
M6 :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라
M6 :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들이 누구인가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의 기본은 이기심입니다.
왜 기본이냐면 죄성의 기본적인 특징이 이기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보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행위입니다.
본능같은거죠. 인간의 본능.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고 사는 것.
그러나 그 이기심이 본능적이고 당연하다고 해서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야하는 것이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개들과 같은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말 그렇죠. 우리나라 법에서 불법을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즉 아무개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자신의 이익이 없거나 혹은 심지어 손해를 보더라도 베푸는 사랑을 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의무를 넘어서서 뭔가를 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로서 그 사랑을 베풀려고 하시나요?
아니면 여러분들이 끝까지 포기 못하는 무언가를 포기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아무개의 모습으로 살아가시나요.
비록 여러분 지금 그러한 사랑을 베풀기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헤세드의 그 사랑을 닮아가는 자들로서 우리의 의무를 넘어선 사랑은 계속되어가야 합니다.
제가 교회를 다니면서 만났던 정말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리고 전도사가 되기 전에는 몰랐던 그분들의 헤세드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나 어떤 주변 친구들이 힘들 때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연락 주시고 따로 심방해주시고 신경써 주시는 것들
고등부때 어떤 전도사님은 항상 교회에 있는 친구들을 위해서 밥도 사주시고, 먹을 것도 주시고 함께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교육전도사를 하면서 그것들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거든요.
그리고 나중에 더 커서 그 전도사님의 집안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도 않았던 것을 알고나서 그것이 더 쉽지 않았던 것을 알거든요.
그분에게 흠잡을 것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면모도 많았고요.
제가 만났던 많은 목사님, 전도사님들은 다 인간적인 면모, 부족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헤세드의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들 중에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 사랑을 닮아가기 위한 열정을 많이 봐왔습니다.
목사님, 전도사님들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저를 양육했던 많은 선생님들, 리더들을 통해서도 그렇게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베풀었던 사랑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저는 그것으로 컸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의 어떤 지체가 자라나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면서 동시에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사랑을 공급하시는 겁니다.
이제 제가 리더의 자리에서 그런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공급받기도 하고요.
우리의 삶이 평생 교회 안에서 사랑을 베풀면서 동시에 사랑을 공급받습니다.
저는 지금 리더로서 사랑을 공급받지 않아도 되는 자가 아닙니다.
지금 계속해서 교회를 통해서 공급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을 누리고 있고, 받고 있는 것을 느끼고 경험하기 때문에 제가 사랑을 할 수 있는 거죠.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범법 행위만 아니면 그 안에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가는 아무개들과는 다른 자들입니다.
의무를 넘어서는 베품을, 인애를, 사랑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에게 아무런 공급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무한히 공급하시고,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무한히 공급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거죠.
보아스와 룻도 그랬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급받는 사랑 그들이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동시에 서로 베푸는 사랑.
그 사랑이 우리 청년부 공동체에도 함께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