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_02:13-02:22_마음이 부드러운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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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intro
요한복음은 요한계시록과 함께 가장 늦게 쓴 성경입니다. 아마도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제자가 요한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도 죽고, 야고보도 죽고, 바울도, 빌립도 다들 예수님을 따라살다가 순교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신구약성경의 내용을 이미 많이 알고 있었던 성도들과 성도가 되어야할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핵심내용은 간단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조물주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조물주 신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왜냐하면 사람들의 시력이 아주 나빴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다시 조물주를 알아볼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창조자께서 본인께서 만드신 이 세상 속에 들어오시면서 세상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웠던 눈이 열려서 빛을 보게 된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태어나기 시작하면서 이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창조가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새로운 탄생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요한은 강조합니다. 삼위하나님께서 홀로 역사하시는 단독사역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 빛을 보는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생명을 받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요한복음에서는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거듭난 사람이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표현은 위로부터 났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다 엄마에게서 태어나는데, 이제부터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사람들이라는 생겼다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도 놀랐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너는 존경받는 랍비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고 의아해하셨습니다. 예수님 이후로 이 세상에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장님이었지만 주님의 은혜로 눈을 뜬 사람을 요한복음에 기록한 이유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장님으로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닿으면, 눈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조물주이신 것을 알아보게 된다는 샘플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고백하기를, 이전에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이제는 압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한 번도 일어서보지 못했던 앉은뱅이가 주님의 은혜로 일어나는 사건을 요한복음에 기록한 이유 또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단 한 번도 일어설 수 없는 운명지만, 주님의 손길이 닿으면 하나님을 향해 일어나 뛰고 찬송한다는 증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7가지 기적사건들은 다만 놀랍고 신기한 일이구나를 넘어서 예수님이 바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는 표적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조물주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창조주와 인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조물주라고 불리는 신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굉장한 복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이란 창조주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 보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나이 들어 죽어간다는 운명에 붙잡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기로 결정 하셨습니다. 그 인생결핍의 웅덩이 속에 찾아오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본인들의 인생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괴로웠던 시간들이 감사로 결실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상처는 아팠고, 그 사건은 힘겨웠지만, 그 때문에 내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기적이 물동이에 포도주를 채우시는 기적입니다.
성경은 유대인들의 문화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활문화는 지금 우리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생활에서 뗄 수 없는 4가지 문화가 있습니다. 결혼식문화, 성전중심문화, 랍비중심문화 그리고 우물문화입니다. 이 4가지 문화는 그들 평생에 인생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4가지 문화 속에 찾아들어오신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식에 찾아오신 하나님, 오늘 본문에 성전에 들어오신 하나님, 다음 본문에 니고데모라는 랍비를 만나시는 창조주 하나님. 마지막에는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우물가에 오신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의도는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 같이 죽음에 묶여 있는 한이 많은 인생이 기쁨이 담기는 영광의 물동이들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무너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이제는 사람에게 직접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 본문 이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직접 임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사람들이 모여 점점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why_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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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을 혼내셨습니다. 왜 성전안에서 상업활동을 하느냐고 화를 내시는 것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장사하는 것이 싫으셨다면 장사하는 사람들 다 내보내시고, 성전안에서는 경건하게 예배를 똑바로 잘 드리라고 가이드를 해주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을 넘어서 성전자체를 없애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당시 성전 안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원근각지에서 찾아온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면서 다들 놀랬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이런 일을 하는가, 사람들은 궁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 예배하러 온 유대인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분들을 사랑하셔서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자리잡은 완악한 마음입니다.
성전생활과 함께 딱딱하게 굳어버린 무표정한 마음입니다. 얼마나 굳어있는지, 그 성전에 모여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으면서도, 막상 그 하나님께서 성전 안으로 들어오셨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딱딱한 마음에 속이 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그렇게 멀리서성전으로 찾아와 제사를 드리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되돌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고있으니 가엽기도 하고, 화도 나시고, 불쌍하기도 하고, 속이 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는 안되겠다고 하시고,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겠다고 나서십니다.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복을 받는 성전. 예배를 하는 사람들마다 실제로 회복하는 성전.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받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성전을 세우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성전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message_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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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성전인 저와 여러분 마음 속에서 채찍을 휘두루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쏟으셔도, 받을 수 없는 딱딱한 마음을 깨뜨리십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채찍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치시고, 우리의 양심을 거리끼게 하고, 우리의 현실을 아프게 하실 때,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시오. 바리새인들처럼 완악하게 버티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전에 어떤 집사님과 대화를 하는데, 하나님이 너무 불편하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시냐고 했더니, 하나님은 안되는게 너무 많다고 하시는 거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야하는데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내용이 골자였습니다. 진지하게 예배를 하려고 하면, 꼭 그런 기분이 드신답니다. 너의 마음에서 그것 내려놓아라, 그것 포기해라, 그것 그만둬라 하는 그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서 예배를 해도 애써 그냥 적당한 선을 지키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참 그 분의 마음이 부드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그런 고민을 안하거든요. 그렇게 주님을 의식하고 예배를 드리는 분이라면 마음이 얼마나 부드러운 것입니까. 말씀을 봐도 한 구절도 감동이 안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찬송을 불러도 한 소절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배를 하면서도 주님을 의식하는 단 한 순간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배가 그냥 종교활동이지 무슨 특별한 것이 있나 하는 것입니다. 딱딱한 마음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것은 이 세상 천지가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분들이 여전히 예배하면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우면 세상천지 어디에든 충만한 하나님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딱딱하다면 예배가운데 집중하며 마음을 말씀으로 깨뜨리고 하나님을 응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1:1로 만나보자고 하시면서 옛 성전을 무너뜨리셨습니다.
opnion_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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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성경을 기록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 성경을 읽고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 세상 무엇과 비교해서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유대성전을 깨끗하게 무너뜨리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 마음의 성전을 새롭게 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매일 같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시는, 축복받은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nding
기도하겠습니다. 사람의 생사화복과 인생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고 진행해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 굳은 마음을 제거하여 주실 때, 참고 견뎌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위로와 살아계심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아 주어져 있는 형편위에서 강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