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5:22-42 (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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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수요일에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매일 성경의 순서에 따라 오늘 새벽의 본문 말씀입니다. 저는 설교할 기회가 있으면 성경의 본문을 따라 성도 여러분이 말씀을 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방향에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제사에 관련된 내용이지만 제사에 대한 소개보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왜 갑자기 이렇게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들께서 매일 성경으로 오늘의 말씀을 보시고 왜 이런 말씀이 이렇게 위치 되어 있는가를 살펴보고 또한 매일 성경으로 매주 오후 모임에 참여를 독려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민수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13-14장까지의 정탐꾼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코 앞에 두고 40년이라는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신명기에서 다시 회자되어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좋지 않은 꼬리표를 붙이게 됩니다. 그러나 민수기 큐티를 하시고 읽은 분들이라면 정탐꾼 사건 이전에 벌써 백성들은 원망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원망과 불신은 빠르게 커지는 특징과 전염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리암은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민수기에서는 모세를 향해 원망을 했습니다. 미리암의 처럼 불평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소한 문제로도 일어 납니다. 백성의 경우는 고기 때문에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불평이 결국은 정탐꾼 사건으로 더 커지게 되고 전염병처럼 온 백성 이스라엘 전체에서 퍼지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정탐꾼 사건의 결과는 무엇인가?
정탐꾼으로 보내졌던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한 정탐꾼은 죽음을 맞이하고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된다는 일종의 사형통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40일간의 정탐 기간에 상응하는 40년을 광야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고 운명적인 통지를 받게 되는 것이죠. 40년을 광야 생활을 하고도 출애굽한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통보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말 그대로 절망적인 상황이 됩니다. 이런 통보에 민14:39 “39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민14:40 “40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때늦은 후회를 하고 가나안 공격을 감행했다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심으로 인해 패배를 맛보게 되는 상황이 14장의 마무리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시작되는 15장의 제사에 대한 규정을 다시 한 번 축약적으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위로가 될까요?
정말로 죽는 구나,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 구나, 그런 상황에서 15장의 제사법은 이들의 마음에 어쩌면 ‘다 죽게 되었는데 제사법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것입니다. 또한 이글을 읽는 우리도 왜 제사법을 다시 설명하는가? 우리가 15장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죄로 인해 빠진 절망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면
15장 2절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입니다. 깊은 좌절감에 있는 백성에게 앞으로의 미래를 말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그럼에도 다 죽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소용 없는 미래인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좌절은 믿음이 없는 상태 곧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한 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종살이로 보냈습니다. 물론 초기에는 국무총리까지 지낸 요셉 덕분에 고센 땅에서 한 동안은 어느 정도의 지위를 받고 살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왕이 등장하고 백성들의 삶은 전혀 다른 상태 곧 이집트에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고 그들은 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의 종으로 사는 삶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꿈을 꾸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최고는 거기서 먹는 ‘고기 한 점’이 최고의 꿈입니다. 이집트에 매인 삶은 광야에 나와서도 ‘고기라도 먹으면 평안한 삶’이다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오랜 시간 종노릇 함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애굽에도 동화되지 못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에게 했던 말은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겠다는 요구였습니다. 곧 하나님과 연결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제외하곤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10가지 재앙으로 바로보다 크신 하나님, 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죠, 그 경험의 클라이막스는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으로 건넜고 그들을 따르던 애굽의 군대가 수장되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기적은 믿음을 유발합니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은 2:11절에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영광은 종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이 무엇인지? 종되었던 삶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만끽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은 아직도 애굽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마음으로 붙잡힌 것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세우시고 3년을 함께 동고동락 했지만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배신했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으며 어떤 제자는 부활 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해 만져봐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애굽 땅을 떠난지 3개월 즘 시내 광야에서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이어서 5절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백성과 놀라운 언약이 맺어지는 광경입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9절에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클라이막스는 홍해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의 언약식에 직접 당사자로 백성과 마주 대화는 이 장면이야 말로 클라이막스입니다.
그리고 언약 백성의 징표로 십계명을 받습니다. 이어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관련된 법을 받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길게 이어진 말씀이 끝나고 출24장 7절에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말하고 피를 뿌려 언약을 세우고 11절에 시내산에 대표로 오른 모세와 아론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장로 70인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렇게 언약을 세우시고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체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막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통해서 세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영주권을 받았기 때문에 백성 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범죄하기도 합니다. 요한일서1:9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아무리 아릅답게 보여도 광야의 삶은 현실입니다.
민수기는 바로 이런 이스라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마치 4복음서가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면 민수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거의 400회에 이르는 ‘여호와’의 등장과 이에 맞게 230회가 넘는 ‘이스라엘’. ‘모세’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멋지게 출발했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잠시라도 만족함이 없으면 우리 속에서 불평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내산을 떠나 바란 광야야 가데스에 도착했고 서두에 말씀드린 정탐꾼 사건이 벌어진 것이죠. 이렇게 불평의 사건은 광야의 불편과 불만을 애굽의 고기와 비교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그러나 불평은 사그러들지 않고 결국 가나안 정탐 사건으로 회중 전체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살펴야 할 것이 ‘불평’입니다. 도대체 불평이 무엇이기에 이런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불평하는 것이 좋지 못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불평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말은 ‘죄인의 상태’입니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아 죄의 영을 따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불평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신뢰하지 않는 불신의 상태에서 발현합니다.
같은 어원으로 사용되는 곳이 누가복음 15장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데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근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이 못마땅한 상황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근거려’라는 표현입니다. 새 번역에서는 ‘투덜거렸다’ 공동번역은 ‘못마땅해 하였다’입니다. 이렇게 수근거리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3개의 비유를 연달아 말씀하십니다, 잃어 버린 한 마리양을 찾는 기쁨, 잃어 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를 차례로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정탐꾼의 보고는 사실에 기반합니다. 먼저는 과실이 매우 좋았다는 것이고 그들이 우리보다 장성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싸움은 현실적으로 이기기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불평은 ‘악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다고 하신 것에 대한 반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평은 삐딱하게 꼬아보는 우리의 시선에서 나오는 악하고 더러운 냄새입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것이 분명하게 현실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현실을 올바로 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올바로 보는 눈이 없다면 그 눈으로 인해 우리는 멸망 당하게 됩니다.
15장의 평범한 듯 보이는 제사에 대한 말씀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으로 세우신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은 항상 지금보다 더 한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내산에서 세우신 언약과 그에 따른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15장의 말씀을 통해 다시 상기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15장 2절에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라고 미래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미래에 이런 일이 있다. 이것은 이미 내가 나의 삶을 두고 언약한 것이다. 비록 너희가 지금 언약을 깬 자가 되어 정탐꾼의 죽음과 40년 광야 생활과 그리고 첫 세대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죽는다고 하여도 전혀 변함이 없다.
15장은 레위기에서 이미 말씀하신 제사법을 간략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제, 번제, 서원제와 낙헌제, 절기에 드리는 절기제, 마음에 자원해서 드리는 헌물에 대해서 말입니다. 15절에 이런 제사가 ‘너희의 대대로 영원한 율례라’ 말 그대로 내가 인도하여 갈 가나안 땅에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이 백성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제사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은 죄를 지었을 경우에 대해 드려지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고의로 지은 죄가 아닌 부지중에, 그릇행하여 지은 죄에 대한 회중, 또는 개인이 드릴 제사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22-29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 그릇행하여 범한 죄, 곧 지금의 말로 실수로 저지른 죄에 대한 제사법을 통해 죄사함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고의로 지은 죄는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났는 마침 안식일에 나무를 한 자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가두어 둔 후 어찌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이미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법이 오전하게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34절에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시행 되엇습니다. 이는 법 시행의 결과를 보여준다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의미를 살펴보면 과연 나무를 한 자가 ‘고의성’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죠.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이라’고 하신 명령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알고도 죄를 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죄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에게는 죄책을 떠 넘겨 불평하게 만들어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하게 만들고, 회중 곧 공동체에게 오염 시키는 부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는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 임재의 장소를 지성소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소를 포함한 회막/ 이어서 백성이 사방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진이라고 합니다, 부정한 것은 진밖에서 시행이 됩니다.
여러분 코로나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병원이었습니다. 병원에는 코로나 환자가 있었지만 병원은 철처하게 관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병원의 기능인 사람을 살리는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성막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잘못된 불을 드렸던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을 삼켜 죽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에게 빼았겼던 언약궤를 실은 마차가 돌아오는 길에 덜컹거리며 떨어지려 할 때 손을 대었던 웃사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거룩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으면 갈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거룩의 상태보다 조금은 못하나 부정의 상태는 아닌 ‘정함’의 영역을 두어 살아가게 하십니다. 바로 죄는 이 정함의 상태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로마서를 통해서 인간의 부정한 상태를 이미 배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잊은 채 불신과 불평하는 백성에게 내려진 호된 결말 곧 40년 광야와 죽음은 그 자체로는 더 이상 우리가 할 것이 없는 상태로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15장의 본문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죽게 되었는데 굳이 하나님께서는 했던 말을 또하고 계시네. / 그런다고 살 것도 아닌데 이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성도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저와 여러분 각자의 약속 관계가 깨어지는 정도로 끝나는 사람의 약속과 같은 정도입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도 어쩌면 약속의 땅을 믿는 쪽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심하고 불평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십시오.
이것을 이기는 것은
38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에 술에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러한 장식을 보면서 39절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억하고 준행하면 40절에 “너희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성도 여러분
거룩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보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거룩한 백성이라고 믿지만 왜 거룩한지,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교리적으로 되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얻은 의로 말미암아 받게 된 그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행하면’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지난 시간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역사의 장면을 보았고 경험했으며 매일 같이 주시는 만나와 때론 바람을 불어 주시는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반석을 열어 음료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불평하는 삶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이스라엘은 의식만 남아서 결국 할례와 안식일 규정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묶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 땅에 말씀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목이 곧은 백성처럼 원망, 불평, 중얼거리며 예수님의 대적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41절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죄로 인한 심판의 절망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다시 소망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여전히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너희의 자녀들은 가나안 땅에서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대로 나와 관계를 갖고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너희처럼 나를 배반하고 또 나를 떠날 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나의 종을 보내고 선지자들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 곧 내 아들을 보내어 이 언약을 완전히 성취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들을 믿게 될 것이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생명을 곧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라고 증언하셨습니다. 바울은 롬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불평을 제하는 길은 ‘주야로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길'외에는 없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 성경에 써 있다고 찬송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며 복된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타깝게도 내일부터 민수기는 다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성도 여러분 이런 경우에도 물러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다. 비록 우리는 범죄하나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이 더 크시기에 넘어진 우리에게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서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정하여준 계명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끝까지 고난 가운데 감내하며 나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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