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없는 빵집
Notes
Transcript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여러분, <룻기>를 많이 읽어보셨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저에게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소개해 달라고 하신다면 저는 <룻기>의 룻과 보아스 이야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단테 같은 유명한 예술가도 <룻기>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룻기>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만을 다룬 책이 아닙니다. <룻기>가 단지 사랑만을 다룬 이야기라면, <룻기>의 결론이 다윗의 족보를 언급하며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룻기>는 좀 더 넓고 깊은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여러분,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일까요? 대부분 룻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 아니라 나오미와 보아스입니다. 드라마로 따지자면, 나오미가 주연급이고 룻과 보아스는 공동주연쯤 됩니다. 특히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주목해봐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이 드라마는 1장에서 나오미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역시 4장에서도 나오미의 이야기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야말로 <룻기>는 시작도 끝도 나오미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면, <룻기>는 늙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라는 여인이 어떻게 모든 것을 잃고 스스로를 ‘마라(즉, 고통)’이라고 불렀는지 또 그녀가 어떻게 보아스를 통해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써 내려간 한 편의 드라마인 셈입니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말씀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시간적 배경인데요. 1장 1절에 시대 배경이 나와 있죠? 바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입니다. 이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라는 것은 다 아실 겁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도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옮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즉 사사 시대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마음에 좋을 대로 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끊임없이 우상 숭배가 일어났고, 이방 민족들이 침략해 오고, 도덕적인 수준이 땅에 떨어져 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룻기>는 바로 이 사사들이 다스리던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야기의 무대인 장소입니다. 바로 어디에서 벌어진 일인가 하는 것이죠. 역시 1절에 나와 있죠? 바로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과 4㎞ 떨어져 있는 작은 동네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이라는 말을 들으면 단번에 예수님의 고향이 생각나실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 시대에 들어와 주목받았기 때문이고, 구약 시대 특히 <룻기>의 활동 무대였던 사사 시대의 베들레헴은 그야말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이스라엘의 작은 동네였습니다. 그나마도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멕렉이 아내였던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요단강 건너편 모압이라는 이방 땅으로 이주를 한 것입니다.
1절 하반부에 “거류하였는데”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이민을 간 것은 아니고 잠깐 흉년을 피할 목적으로 이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잠깐 머무는 정도가 아닌 2절 후반부를 보니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라고 하죠? 관광 비자로 갔다가 영주권자가 되어 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모압 지방은 팔레스타인에서 유일하게 비가 많이 내리는 고원 지대로서 물이 넉넉했고 베들레헴과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지도 이미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모압 땅으로 이주한 것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이민을 간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는 겁니다.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 살던 이들이 이방 땅인 모압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이방신인 그모스 신 아래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오미의 남편이었던 ‘엘리멜렉’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나의 왕이시다’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던 사람이 이방신을 왕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아예 이민을 결심했는데 3절을 보니 남편 엘리멜렉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거기 살더니” 하자마자 3절에 남편이 죽은 것이죠. 하지만 나오미는 모압을 떠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아직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그곳에서 10년쯤 살다가 두 아들 모두 모압 여인들에게 장가를 보냈습니다. 남편은 없지만 두 아들이 있고, 이제 두 아들을 통해 또 손자들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괜찮았을 겁니다. 그런데 너무나 비참하게도 이민 10년 차가 되던 해에 결혼까지 한 두 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자, 이렇게 베들레헴에서 이주해 온 네 식구 가운데 나오미만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습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은 없을 겁니다. 자식마저 없는 나오미, 소망 없는 늙은 여인만 남은 것이죠. 바로 그 때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의 귀에 소문이 한 가지 들려 왔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죠.
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 땅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짐을 싸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10년 만에 남편도, 두 아들도 모두 잃고 먹고 살길이 없어진 나오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사실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겪어 본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다만, 정말 비참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더라도 나오미 역은 고두심씨나 김혜자씨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잘 연기하는 명연기자가 해야 할 것 같이 그녀의 삶은 깊은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만일 제가 나오미라면 남편과 아들들을 잃은 모압 땅에서 여생을 보내기가 싫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삶의 마지막은 고향 땅인 베들레헴에서 마치고 싶었을 것 같아요. 게다가 다시 풍년이 들었다고 하니 당장 굶어 죽지는 않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이방 땅으로 가더니 저주를 받았구나’ 하면서 그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사람 중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을 거고, 오히려 흉흉한 소문들만 들을 것이 뻔해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고향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더 이 본문을 엘리멜렉과 나오미 입장에서 묵상해 보려고 했는데요. 물론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이 죄일 수도 있고, 그래서 자주 받아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집안이 풍비박산 날 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엘리멜렉이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었고 또 자식들마저 그렇게 되었다면, 저는 솔직하게 그런 하나님이 너무 냉혹하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그저 그들은 너무 배가 고팠고, 힘들었고, 지치고, 견디기가 못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인데 그런 엘리멜렉을 죽이시고 자식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이라면, 정말 “God is good!”(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쉽게 나올 수 있을까요?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좀 돌아가서요. ‘엘리멜렉이 약속의 땅을 떠난 게 비극을 일으킨 문제였다’는 해석에서 벗어나 본문 속 나오미의 비극에서 이유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엘리멜렉보다 그로 하여금 그 땅을 떠나게 만든 베들레헴이 문제였음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 신약 시대와 성령 시대를 이어갈 교회 공동체의 모형과도 같았습니다. 구약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 베들레헴은요. 사사들이 다스렸던 어두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이삭줍기라든지 사회 보장 제도로 율법이 여전히 살아있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룻기를 읽으며 많이 들은 ‘기업 무를 자’라는 제도가 어느 정도까지 시행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친족의 고통에 대해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과 법은 남아 있던 공동체였습니다. 그야말로 베들레헴은 사사 시대라는 영적 어둠의 시기에 그래도 아직 살아 있는 구약의 교회, 은혜가 있는 신앙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땅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땅이었지만, 베들레헴의 영적 수준은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전체 중에서 높았다고 합니다. 수많은 마을 가운데 하나가 아닌,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수많은 성읍 중에서 가장 믿음 좋은 성읍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베들레헴은 믿음이 좋은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모든 교회가 다 똑같은 영적인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가 다르고, 헌신의 수준이 다릅니다. 예배에 대해 사모함이나 기도의 뜨거움도 다릅니다. 어떤 한 가지 기준을 가지고 교회의 등급을 매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들마다 영적인 수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그런 많은 교회 중에서도 독보적인 교회였던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교회가 세속화되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은혜와 감격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져 가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세상의 교회들 속에서 특별한 교회가 하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의 베들레헴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룻기>의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그 땅(즉 베들레헴)에 흉년이 드니라(1:1)”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서 데려간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내려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의지해서 농사와 목축을 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런 땅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당시에 가나안 땅에는 제대로 된 강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먹고 살길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그런 천수답으로 이스라엘을 보내셨을까요? 바로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면 때를 따라 내리는 비를, 불순종하면 가뭄과 이방 민족의 압제를 통해 이스라엘을 훈련 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해, 적절한 시기에 내리는 비는 하나님께 순종한 백성을 위한 복이고,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백성을 위한 징계였다는 것입니다.
‘흉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아브’는 구약성경에서 ‘흉년’ 혹은 ‘기근’이라는 단어로 153회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고대 세계에서 기근과 흉년은 흔한 일이었으며 구약성경이 무려 134회나 기근을 언급하는 것은 성경 역사에서 기근은 하나님의 백성이 피할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베들레헴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마저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를 해서 그 결과로서 기근이 찾아왔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일하게 남아 있던 가장 충만했던 교회 공동체마저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이 ‘집’을 의미하는 ‘베이트’와 ‘빵’을 의미하는 ‘레헴’의 합성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그래서 쉽게 풀이하면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빵집’이 됩니다. 그렇다면 1절의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라는 말은 무슨 의미겠어요? 한 마디로 “빵 집에 빵이 없다”는 말입니다.
빵집에 빵이 없는데, 사람들이 빵을 사러 가겠습니까? 빵집이라고 불리던 베들레헴에 빵이 없다면 사람들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더 엄밀히 말해, 빵이 없는 빵집에서 떠나는 것을 사람들의 잘못이라 말 할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빵이 없는 빵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게 아닐까요?
여러분, 성경 어디에도요. 엘리멕렉과 그의 두 아들이 특정한 죄를 지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베들레헴에 그들이 먹어야 할 빵이 없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빵 없는 빵집에서 인간이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나오미라는 여인이 맞이한 진짜 비극의 원인은, 빵집에 빵이 없었다는 것, 즉 하나님이 계셔야 할 거룩한 땅 베들레헴에 하나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지금 우리에게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아프고 슬픈 현실일 수도 있지만, 빵이 없는 빵집 베들레헴 이야기가 어쩌면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최근 한국 교회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더욱 절감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어느 청소년 전문 사역자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요즘 교회들마다 다음 세대들이 줄어든다고 다들 걱정하지 않습니까? 예장 통합 측은 두 교회 중 한 교회가 아예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들도 있다고 하죠? 그 전문가가 얘기하길요. “왜 청소년들이 교회를 안 가려고 하는지 아느냐고 물었는데요.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그분이 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학교나 학원에서도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교회에서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저는 그 말에 참 공감을 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말씀의 제목 ”빵 없는 빵집“은 제가 지은 제목은 아니고요. 토미 테니라는 분을 비롯해서 여러 목사님들이 설교 제목으로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중에서 토미 테니 목사님의 말을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선순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빵을 파는 빵집은 맞는데 진열대에 빵이 거의 없는 것과 같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빵집 주인들이 빵을 팔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식어버린 오븐과 텅 비어있는 진열대 주위에서 서로 담소를 나누는 것을 즐길 뿐이다. 그저 빗자루로 바닥 청소하는 일, 텅 빈 진열대와 유리를 닦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의 임재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들 말한다. 예전에는 빵이 참 잘 팔렸는데....“
여러분, 지금 이분이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다들 아시겠죠? 빵이 많고 맛있다고 해서 차를 타고 막 찾아갔는데, 소문과 달리 진열대가 텅 빈 거예요. ‘아 오늘만 그런 건가?’ 그런데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그 빵집을 찾아갈까요?
베들레헴, 빵집 간판을 달고 있지만, 막상 빵을 먹으러 온 사람들에게 진짜 빵을 내주지 못하고 냄새만 풍겼던 빵이 없는 빵집이 되어버린 것이 안타까운 것 아닙니까?
저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 하름교회를 두고 애끓는 마음은 딴 게 아닙니다. ‘제발 빵 없는 빵집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제가 유리창이나 닦고 있고 텅 빈 진열대 보면서 옛날에는 장사가 잘되었는데….’ 제가 그런 푸념이나 늘어놓는 목사가 되면 안 되잖아요? 우리 성도님들이 그 텅 빈 진열대를 보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담소 나누고 성도 간에 교제하고 봉사도 하고 그러고만 돌아가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교회에 오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고 예배만 드리러 오면 그렇게 눈물이 나고 말씀으로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 성도들 간에도 진실한 사랑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눈물로 기도해주고 말씀으로 서로를 세워주고 이웃에게도 흘려보낼 수 있는 엄청나게 맛있는 빵이 넘쳐나는 그런 교회. 여러분들 그런 교회가 되고 싶지 않으세요?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빵집에 있어야 했던 빵은 무엇일까요? 신‧구약 성경에서 각각 한 본문씩 살피면서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 하름교회에 꼭 있어야 할 첫 번째 빵은 하나님 임재의 빵입니다. 구약 민수기 4:7
7 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이 본문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막 안의 모습을 묘사하는데요. 그 성막 안에 있는 떡을 “진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얼굴의 빵’이고, 의역을 하면 ‘앞에 있는 빵’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 떡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은혜의 부스러기가 아닌, 상 위에 올라와 있는 진설병은 하나님 얼굴 앞에서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 ‘진설병이 없는 성막’을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베들레헴에 빵이 없다는 것은, 성막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없다는 말이고,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숨 막힐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를 드리신 적이 언제이신가요?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앞에 두려워 떨며 회개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저 또한 그랬던 적이 언제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우리 중에 시간이 남아 예배드리러 오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이들에게 교회가 빵을 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적인 기근으로 배가 고파서 교회에 왔고 교회에 무언가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막상 와 보니 그들의 굶주림을 해결할 빵이 없다면 다시 교회 밖으로 나가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런 것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하름교회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가? ‘혹시 우리가 어느 청소년 사역자의 고백처럼 교회밖에서도 못 만나는 하나님을 교회 안에서도 못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 믿음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고, 믿음의 증인들이 일어나고 있고 이전에 알던 모습이 아닌, 변화된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혹시 우리도 기근 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하름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믿음의 현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두 번째 빵 바로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빵이십니다. 신약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떡(빵)은 바로 다 아시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생명의 떡(즉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1년에 몇 차례 행하는 성찬식이 있지 않습니까? 성찬이 일 년에 몇 번 하는지, 세부적 절차 방법이 무엇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찬을 통해, 생명의 빵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찢기신 살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성찬식을 할 때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막상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도 생명의 빵이신 굶주린 주의 백성들에게 이 땅의 교회는 과연 먹을 것을 온전히 전하고 있을까요? 배고프고 굶주린 이들에게 빵 냄새만 맡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새롭게 한 주를 살아 낼 힘과 은혜를 얻고 싶어 하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가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에 무언가 채울 것이 있다고 왔는데 막상 와보니 그곳에는 영적인 굶주림을 해결할 빵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교회에서 예수님을 경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제 남편과 두 아들마저 잃어버린 고목나무처럼 텅 빈 가슴으로 겨우겨우 하루를 버텨 가던 나오미에게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6절 중간쯤을 보시죠.
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긍휼이 많으신지요? 그분은 어떻게든 우리 인간의 삶의 배후에서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가시는 분이세요. “양식을 주셨다”고 하시죠? 이 양식이 바로 히브리어로 ‘레헴’입니다. 1장 1절의 “흉년이 드니라”는 6절의 “양식을 주셨다”와 상반된 표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어디선가 들려온 ‘양식’에 대한 소식이 절망의 시간을 보내던 나오미를 일으켜 세워줬습니다. 6절 후반부
6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나오미가 들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빵집에 빵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 아닙니까? 이에 나오미가 즉각 반응을 하고 “함께 일어나 우리 빵집으로 돌아가자!” 했던 것입니다.
김준태 시인의 시 중에 “고향에서는 자빠져도 흙과 풀이 받아준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는 나오미의 마음이 그러지 않았을까요? 모압 땅이 아무리 풍요롭고 기름지더라도 고향이 아니었기에 자빠지면 흙과 풀이 받아주는 곳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마저도 영적인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져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면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나오미처럼 다시 빵집에 빵이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예배에 빵을 구하러 온 사람들을 충분히 먹일 만한 빵이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고향에서는 자빠져도 흙과 풀이 받아준다면, 교회가 그런 영적 고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생의 흉년을 겪고 계시는 분들이 혹시 이 자리에 계신다면 여러분 정말 잘 오셨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우리 하름교회가 누군가 자빠져도 흙과 풀이 되어줄 영적 고향이길 소망합니다. 마음의 상처로 교회를 떠나거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신앙을 잃은 분들을 혹시 알고 계신다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는 오늘 이 말씀이 그분에게도 다가가서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상 아래의 ‘은혜의 부스러기’가 아니라, 상 위의 빵인 진설병과 영적인 배고픔을 채울 ‘생명의 빵’에 대한 거룩한 도전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반드시 생명의 빵으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렇게 함께 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말미암아 지금도 좋은 우리 하름교회가 소망 가운데 다시 일어서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누리고 또 전할 수 있는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 찬양 :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합심 기도
오늘 우리 하름교회를 정말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길 원하는데요. 주님, 저는 영적으로 굶주려 있습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양이 멈췄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필요하고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은혜의 부스러기가 아닌 진설병 위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목소리로 합심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마침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아버지 하나님!
한국 교회 안에 생명의 빵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모습에 너도나도 안타까워들 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부흥하고 성장하던 교세는 꺾어질 대로 꺾어지고, 세속에 물들고, 병들어 신음하는 소식들이 심심찮게 들려 오는 이 혼탁한 시대에 하나님, 우리가 없는 것에 대해 원망하고 낙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아래 아름다운 교회인 우리 하름교회가 진설병과 생명의 빵으로 이 노원구 하계동 땅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곳에 영적 배고픔을 해결할 빵이 넘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우들이 은혜의 부스러기에 만족해하지 않길 원합니다. 은혜의 상 위에 놓인 더한 은혜를,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교회다운 교회로서 이 시대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빵이 넉넉한 우리 하름교회가 되어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