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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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과 은혜
후원과 은혜
제가 성경 스터디를 지중해 문화와 신약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6주간 진행했었는데요. 사실 지중해 문화라고 해서 조금 더 뭐랄까 음식이나 옷 같은 것들 생각하고 오셨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각 과의 제목을 보면 명예와 수치, 뭐 후원과 호혜, 정결과 부정 이런 식으로 굉장히 딱딱하죠. 명예는 무엇이고, 후원은 무엇이고 개념 설명을 열심히 해야하는 참 너무 딱딱하고 그런 스터디 였을텐데 일단 잘 따라와준 스터디원들에게 일단 감사하고 그렇습니다. 왜 지중해라고 했었냐하면 당시 신약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곳은 굉장히 광활해요. 구약성경처럼 배경이 팔레스타인 지역, 이집트 지역 정도에 그것이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권 내에서 로마제국 안의 나라들을 다 포합합니다. 이 포괄적인 문화를 다 묶으려고 하면
지중해라는 큰 바운더리 안에서 묶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문화권이라고 하면 아까 이스라엘이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 소아시아 지역, 유럽,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모두 묶을 수 있어요.
성경은 그냥 성경 저자가 그저 기계적으로 써나간 책이 아닙니다. 문체나 어떤 장르, 이게 뭐 어떤 내러티브 이야기인지 아니면 서신서 인지, 그리고 어휘, 역사적, 지리적 배경 안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모르고 읽는 다면 의미가 모호해지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또 그런 것을 알게 되면 성경의 내용들이 더 다가오면서 의미가 풍성해집니다. 지중해 스터디는 이제 그런 것들을 같이 알아보는 스터디였습니다. 앞서 이야기 드렸던 그 키워드들을 들으면 그렇게 큰 상관이 있겠냐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 키워드들은 사회적인 그러니까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의 그리고 한 사람과 어떤 공동체, 가족이 될 수도 있겠고 민족이 될 수도 있겠고 교회가 될 수도 있겠고 국가가 될수도있어요. 그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키워드라고 보시면 됩니다. 유대 사회도 그렇고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그리스문화, 즉 헬라문화권의 사회도 공동체를 중시하는 것이 강했던 문화였기 때문에 이런 사회적인 키워들들이 성경에 곳곳에 잘 녹아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스터디에서 다뤘던 키워드 중의 하나인 ‘후원'의 키워드를 통해서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인 빌레몬서를 살펴보고자 함에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들은 후원이라는것을 해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지금은 하지 않고 있는데 예전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동남아의 한 여자아이를 부모님의 권유로 같이 굿네이버스라는 단체를 통해서 부모님과 같이 제 이름으로 후원을 했어요. 후원을 매월같이 정기적으로 했고 몇년간 그 후원을 계속 지속했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 정도 지나고 나서 후원단체를 통해서 그 아이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후원으로 자신이 공부 잘하고 있고 잘 살고 있다고 감사하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 때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후원하고 있던 아이였는데 그렇게 편지받고 나니까 아 내가 뭔가 도움이 되고 있구나 생각이 들면서 감회가 새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후원이라고 하면 예전에는 그 티비에서 전화하면 1000원씩 후원하던 거 있었잖아요? 요즘엔 저도 그렇고 다들 티비를 안봐서 그런게 있는지를 잘 모르겠는데 어릴 때는 괜히 전화걸어가지고 1000원씩 후원하고 그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고 몸으로 느끼는 후원의 의미는 이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후원’이라는 것이 1세기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굉장히 삶의 기초, 기본이 되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후원이라는 것이 굉장히 삶의 전반적인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일상의 필요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후원을 받는 것이 당연했어요. 어떤 것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판매를 할 사람을 찾아야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재화를 획득하는 것 자체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토지나 부, 권력, 재화 같은 것들이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 있었어요. 지금같이 쿠팡에서 터치 몇번해가지고 얻을 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판매하는 자체도 후원이에요.
이 후원을 해주는 사람을 후견인이라고 하는데, 후견인은 뭐 여러가지 해줄 수 있었습니다. 돈을 준다던지, 뒷배가 되어준다던지 하는. 그 중에서 이 후견인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후원은 사람을 소개해주는 중개였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중개 맞긴한데, 이 시대의 중개는 훨씬 의미가 넓었어요. 원하는 것들을 판매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것도 중개였구요.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를 소개시켜주는 것도 중개였구요. 제일 중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후원하는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무슨 자리에 앉고 싶은데 나를 거기에 써달라던가 아니면 내가 이런 것을 하고 싶은데 나에게 이권을 달라던가, 어디에 합격해야하는데 힘을 써서 합격시켜주세요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하는 것이 중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상황을 본다면 굉장히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하는 거죠.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했었고 지금도 일어나면 비난을 받을 일들이죠. 학교에서 일어나면 부정입학인거고, 회사에서 일어나면 낙하산, 인사청탁인 것들입니다. 근데 그 당시에는 이 일들이 너무나도 당연했어요. 소개를 받아서 한 자리 하는게 당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황제나 권력자에게 편지로 후원하는 사람을 잘 봐달라고 하는 글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개인적인 후원들도 있었지만 공적인 후원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자선이라고 합니다. 그 지역의 권력자, 이름 높은 사람들, 부자들이 그 도시와 나라에 공적으로 후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공시설을 만들어 주는 것도 그러한 자선이 될 수도 있겠구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어주는 것도 있겠고, 어떤 재난 상황이 있을때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다 이런 공적인 후원들이이었습니다. 당시는 명예를 매우 중시했던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후원들은 그렇게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나 이런 사람이다 하고 알리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역사에서 이러한 후원의 가장 유명한 예는 헤롯 대왕이, 복음서에 보면 헤롯이라는 이름이 나오죠? 헤롯 왕가의 왕들을 다 헤롯 왕이라고 합니다. 이 헤롯 대왕이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나서 3번째 성전인 헤롯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확실하게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주 화려하게 지었었습니다. 그러한 공적인 자선이 그 사람의 명예와 명성을 높여주는 일을 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여러 기업들이 자선 행사를 하잖아요. 그런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후원자들, 후원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후원을 했고, 후원을 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했냐면, 어떠한 형태로든 보답을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것이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사항은 아니었어요. 몇조 몇항 도움을 받은 사람은 보답을 해야한다. 이런 식으로 되어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었어요. 어떤 식으로 보답을 했냐면, 후원을 받은 사람이 명예롭게 되어서 후원을 해준 사람의 명예를 높여준다던가, 아니면 후원을 해준 사람에게 또 다른 후원자를 소개시켜준다던가 하는 것으로 보답을 했고, 공적인 자선을 받은 도시는 종교 축제나 잔치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공표하고, 아니면 동상 같은 것을 세워서 그것을 기리는 등의 보답을 했습니다. 황제나 왕이 외적으로부터 지켜주는 것도 일종의 후원이었는데, 이런 황제의 후원에 대해 보답하는 것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왕 숭배 사상,황제 숭배사상이었습니다. 신으로서 추앙하고 섬기는 거에요. 그들을 직접 지켜주는 보이는 신으로 섬겼던 것이죠.
오늘 읽은 빌레몬서는 이러한 후원의 컨텍스트를 생각하고 읽는 다면, 더욱 깊게 읽을 수 있고, 더욱 은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빌레몬서 전체가 그러한 후원의 편지,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는 한 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성경입니다. 1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편지이고, 우리가 자주 읽거나 하지 않아서 생소한 본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담겨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똑같이 언제나 크죠. 이 빌레몬서가 쓰여진 배경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자면, 주후 60년경에 가택에 구금되어 있던 바울은 교회에 편지들을 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빌레몬서 인데요. 우리가 잘 아는 골로새서와 같이 쓰여서 같이 보내진 편지입니다. 골로새서가 골로새교회에 쓴 편지라면 빌레몬서는 빌레몬 개인과 골로새 교회에 보내진 편지입니다.
빌레몬은 그럼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오늘 본문의 앞 부분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1-2절 그리고 7절입니다.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1-2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의 동역자였다. 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또 그는 굉장히 그 도시에서 유력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2절에 보면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한다 라고 나와요. 골로새 교회가 그의 집에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특정 교회 건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집의 다락방에서 모여서 교회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럴려면 집이 커야했고, 집이 큰 것은 그 지역의 유력한 사람, 부자, 권력자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집을 내어주어 바울과 같이 교회를 세운 동역자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자신의 동역자에게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너로 인해서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었고, 네가 베푼 사랑의 행동으로 성도들이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라고 감사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빌레몬은 아까 얘기했던 공적인 후원자에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시간을 들여 섬기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얻었으니까요. 또한 그의 성품도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러한 빌레몬을 특정해서 쓴 이유는 그의 노예 때문이었습니다. 1장 10-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그렇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을 가진 빌레몬의 노예를 위하여 바울이 빌레몬에게 청하고 있습니다. 1세기 지중해 문화권에는 노예 제도가 자연스러운 제도였습니다. 이탈리아 주민의 85-90퍼센트가 노예였다고 합니다. 정말 엄청난 숫자죠. 한 50퍼센트만 되었어도 많은 숫자인데 인구의 9할이 노예인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유민이기만 해도 숫자로 따지면 엄청난 상류층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면 노예를 부리는 것이 당연했어요. 노예를 대하는 방식은 그 주인의 성격과 노예가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닌 재산이었기 때문에 잔혹한 형벌을 내려도, 몽둥이로 매질을 해도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도둑이랑 똑같이 도망친 노예는 이마에 낙인을 찍었고, 심할 경우에는 감옥에 갇혔어요. 왜냐하면 노예는 재산이기 때문에 노예가 도망친 것은 주인의 재산에 해를 가한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명령없이 노예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긴 했지만, 사람 취급을 못받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울과 오네시모의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를 뜻해요. 양자를 삼는 것은 당시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양자까지 삼진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0절의 본문을 헬라어 원문으로 읽으면,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가장 마지막에 나와요. 이런 식이 되는 거죠. 내가 한 사람을 받아 줄 것을 요청한다. 내가 갇혀 있을 때 그리스도인이 되어 아들처럼 생각한 사람이야. 근데 그게 누구냐면 너의 종 오네시모야. 라고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는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느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오네시모의 이름이 헬라어로 ‘유익한'이라는 뜻입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어요. 같거나 비슷한 이름들이 고대 비문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알 수 있죠. 이름이 없는 노예는 주인에게 유익이 되라는 의미로 그 이름을 주인으로부터 받았을 겁니다. 한국으로 치면 마당쇠, 돌쇠 같은 이름이 되겠네요. 바울은 원래는 그가 그의 이름대로 살지 못했으나,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 너에게나 나에게나 유익하고 그의 이름대로 신실하게 살 것이다 라고 말을 하는 거에요. 그 뿐만 아니라 이미 그렇게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4:9
에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소개를 합니다. 예전에 그 무익하던 종에서 그리스도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오네시모는 이제 우리 모두와 교회 공동체에게 유익한 신실한 사람이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일단 돌려보냅니다. 돌려 보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내 심복이다. 심복이라 하면은 잘 안 와닿을 수 있어요. 새 번역 성경을 보면 심복을 ‘바로 내 마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 마음이다. 내 자신의 일부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내가 너에게 돌려보내려고한다. 12절에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한다라는 것을 보면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는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한 그를 보내는 것은 자신의 일부분을 보내는 것이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사람이지만 보낸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오네시모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빌레몬에게 바울이 요청하는 것은 복음을 위하여서 갇힌 나를 네 대신 섬기게 하라라는 것이 바울의 요청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곁에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바울을 도와줄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러지 못하니 신뢰할 수 있는 오네시모를 내게 보내서 나의 사역을 돕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바울은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일단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는 것이 정당하고 그의 허락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선한 일은 바울 자신에게 오네시모를 보내는 것도 의미하지만,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혹독한 벌이 아닌 형제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자비로 대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들을 하는 것이 내가 너와의 관계로 강제로 되기 보다는 너의 자원함으로 되는 것이 더 좋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는 앞서 말했듯이 동역자였지만, 후원자와 후원을 받는 사람의 관계로도 볼 수 있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다. 라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야기를 하죠.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해준 복음의 후원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복음은 그 무엇보다 좋은 것입니다. 아멘 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을 전해준 후원자였습니다. 앞서서 말했듯이 후원을 받은 사람의 태도는 당연히 그 후원에 대해서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관계로 억지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자원함으로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어떠한 빚진 것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이 스스로 이 일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자원함이 기쁨입니다.
15절에서는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다라고 합니다. 빌레몬은 그를 영원히 다시 데리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원하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와 오네시모가 진정한 화해를 하기 원한 것이었어요. 빌레몬은 자신의 재산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굉장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중한 재산을 잃어버린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오네시모가 나갈 때 다른 재산도 같이 가지고 나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오네시모가 직접 빌레몬에게 돌아가 기꺼이 섬기는 일에 복귀해야 하고,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기꺼이 다시 받아들이고 용서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죠.
그러고 나서 바울은 16절에
빌레몬서 16 (NKRV)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라고 합니다. 이후로는 노예로 대하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빌레몬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고 도망간 노예인 오네시모를 안 그래도 화가 나는데, 형제로 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는 내 사랑하는 형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다, 그런데 육신의 관계뿐 아니라 주 안에서 관계를 맺은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빌레몬과 바울과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하나된 형제, 동등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회의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공동체됨과 진정한 화해를 부탁합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 관념으로 볼때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런 어려운일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맺어진 공동체 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만들어진 공동체 안에는 모두가 형제요 자매입니다. 물론 지금 시대에는 신분제라는 것이 없어졌고,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없지만 여전히 눈으로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합니다. 교회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은연중에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얕보거나 깔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가정의 일원이 된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동등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정 안에 속한 형제자매들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헌신을 반영합니다. 옆에 계신 사람들을 한번 바라봐주세요. 사랑스럽습니까?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납니까? 이참에 한번 인사할까요?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또한 같은 공동체 안에 화해할 수 없거나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 불편한 사람들이 있나요? 예수님의 사랑의 공동체는 그런 것을 초월 합니다. 아무리 용서하기 힘들더라도 가까이 하기 힘들더라도 그런 불가능 할 것 같은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바울은 그 다음에 빌레몬에게 나에게 하듯 오네시모를 대하고 오네시모가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신의 앞으로 계산하라고 합니다. 바울과 빌레몬은 복음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동역자였어요. 그런 바울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달라 그리고 오네시모는 엄청난 빚이 있었을 거에요. 도망친 노예가 도망치는 돈을 마련할 방법은 주인의 것을 가져다 파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져나간 것들의 비용, 도망친 동안 일을하지 않아 생긴 금전적 손해, 그것들은 오네시모가 절대 갚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들을 오네시모에게 탕감해주고 자신의 앞으로 달아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가정의 일원이 되고 화해를 하는 것에 대해서 바울이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교회 안에서 은혜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하는 이 은혜는 지금은 교회 아니면 쓰는 곳이 없습니다. 저는 다른 곳에서는 딱히 이 은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2000년전 지중해에서는 이 은혜라는 말이 일상적인 용어였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후원관계를 이야기할 때 말하는 용어였어요. 은혜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공동체에게 혜택을 베풀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을 언급할 때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후원이고, 후원을 하는 사람의 선물 그 자체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표현을 해야했습니다. 은혜는 은혜를 낳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 빌레몬은 그 교회에 후원을 하는 후원자였고, 이 편지의 저자이자 그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은 은인이고 후원자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사랑했고 빌레몬에게 용서를 부탁했고, 오늘 본문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빌레몬도 필히 그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이땅 가운데서 이끄시고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것들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가 우리에게 최고의 후원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크고 놀라운 후원인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그것을 마땅히 흘려보내야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울을 만나기 전 도망친 오네시모와 같았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대하고 그를 공동체로 받아들이고 그의 죗값을 대신 치룬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행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교회안의 공동체 안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학교와 일터에서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사람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베푸는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끝인사를 같이 읽고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용서하기 힘든 일이 있었거나, 심하게 다퉜던 경험이 있는가? 있었다면 어떻게 대처했는가?
최고의 후원을 받은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인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찬양
오직 예수 뿐이네
기도
우리가 이시간 같이 기도하기 원합니다. 오네시모는 아무런 보잘 것 없는 그저 도망친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복음이 들어가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바울과 빌레몬과 동등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로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 은혜를 흘려보내야만 합니다. 주님, 내가 있는 곳에서 은혜를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형제로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