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사람

산상수훈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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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내가 20대 때만 해도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가서 말렸다. 그러다가 한대 쥐어 맞은 적도 있다. 고등학생들이 공원에 모여서 담배를 피우면 가서 뭐라고 혼을 내기도 했다. 전도사때 청소년부 사역을 했던적이 있는데 일부러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전도한다고 그들이 자주 모이는 곳에가서 말을 걸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세상이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문제제기
지난주 부산의 한 길거리에서 싸움이 일어나자 시민들은 마치 격투기 경기를 보듯 웃어대며 "오 파이터"라고 박수를 치는 일이 있었다. 아무도 싸움을 말리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가 하면 에어비앤비를 통해 숙소를 예약한 한 중국인 부부는 환불이 거절되자 분풀이로 쓰지도 않는 수돗물과 전기 제품 등을 몇일 동안 틀어놓았다. 이 일로 숙소를 빌려줬던 주인은 84만원이라는 공과금을 내야 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나는가? 긍휼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기술은 발달하고 살기는 편해 졌는데 비상식적이지 않고 비인격적인 일들은 더 많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긍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본문설명
오늘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다.
팔복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네가지 복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누리는 복이다. 앞서 심령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완전한 “의” 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된 상태” 혹은 “완전히 만족하게 된 상태” 의 사람들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 네 가지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된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로 영혼이 만족하게 된 사람들은 이제 이웃들에게 긍훌을 베풀게 된다.
누가복음 10장에는 강도를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날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이 길은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우범 지역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산길을 지나다가 강도를 만나게 됐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 거의 죽게 된 상태는 죽음 직전의 상태를 말한다.
이 이야기에는 우리를 놀라게하는 세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이고 두번째는 그에게 긍휼을 베푼 사마라아인의 행동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가 긍휼을 베푼 뒤에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 대해서 나누고자 한다. 그렇다면 자기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누구인가?
1. 믿음으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이웃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긍휼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다. 긍휼의 대상이 우선시되지 않는 긍휼은 율법으로 하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희생제물의 피를 보며 하나님의 긍휼을 누구보다 깊이 마음에 새겨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죽게된 사람을 보고도 일부러 다른 길로 지나갔다.
누가복음 10:31–32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기서 보다라는 Eidon이라는 단어는 알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동포인 유대인이 죽어가는것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그 사람을 피해서 지나간 것이다. 이 두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우리로 치면 막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것이다.
이들은 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일부러 피해간 것일까? 긍휼의 대상이 아니라 율법이 우선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에서 옷이 벗겨진 시체는 부정한 것이었다. 유대사회에서는 살인과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사람에게 형벌을 대리기 전에 먼저 옷을 벗기고 돌로 쳐서 죽였다.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형을 집행할때 죄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가 죽기 직전에 옷을 벗겼다. 옷이 벗겨진채로 죽어가는 사람은 죽은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것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피해갔던 이유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강도만난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강도만난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대법은 부정한 사람을 가까이하거나 만지는 것을 금한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전날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달라고 한 이유도 그것이다.
그들에게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더 우선되었다. 어떤면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입장에서는 율법을 어긴것이 아니라 지킨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왜 잘못됐는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율법으로 행하는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것이 아니라 외적인 행위로 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긍휼의 대상이 우선되지 않으면 긍휼을 베풀 수 없다.
한때 많은 기독교 NGO 단체에서 긍휼사역으로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주는 프로젝트를 했었다. 우물 하나를 잘 파주면 마을 공동체 하나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물 하나를 파는데 보통 우리나라 돈으로 적게는 500만원에서 많게는 1500만원정도의 비용이 든다. 결코 적은 비용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몇몇 기독교 NGO 단체 중에 우물 프로젝트가 하나의 사업으로 변질된 경우다. 우물 프로젝트가 긍휼사역인지 아니면 긍휼을 포장한 자신들만을 위한 사업인지를 분간하는 방법은 우물을 파주고 난 그 다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20년동안 계셨던 SIM 선교사님께 들었던 말은 몇몇 NGO 단체들이 우물 프로젝트를 할 때, 마을 주민이 아니라 우물을 파는 것 자체가 우선시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런 경우 마을 사람들과는 교제도 하지 않고 우물을 파고나면 기념사진 한장 찍고 마을을 떠난다는 것이다. 애시당초에 이분들의 마음에는 마을 사람들의 삶보다 우물파기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복음이 아닌 율법이 우리의 선행을 주도하면 그것은 결국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때 첫번째로 기억하기 원하는 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는 것은 긍휼을 베푸는 행위자에 초점이 있는것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이다.
2. 두번째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은혜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풀때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해야하지만 동시에 은혜로 해야한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은혜를 고백하게 하는 것이 은혜로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베풀었던 긍휼은 은혜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보고 긍휼한 마음이 들었다. 그 즉시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에게 있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이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에게 유대인은 원수같은 존재지만 그는 그는 마음을 다해 긍휼을 베풀었다.
그는 아끼는 포도주로 상처를 씻어내고 연고와 같은 작용을 하는 기름을 그 위에 부었다. 그리고 비참하게 된 사람을 자기의 나귀에 태우고 본인은 걸어서 주막으로 갔다. 당시에 주막은 여행객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이쯤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숙박비로 두 데나리온을 지불했다. 이것은 당시 물가로 치면 며칠간 머물수 있는 충분한 액수였다. 그는 힘을 다해서 긍휼을 베풀었다.
그는 또한 목숨을 다해서 긍휼을 베풀었다. 사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는 유대인을 구한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완전히 죽어서 시체가되고 썩어가는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말은 강도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보고 반대 방향으로 그 길을 피해서 간 이유도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위험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의 긍휼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주막 주인에게 강도만난 사람을 돌봐달라고 부탁을 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누가복음 10:35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사마리아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 살린것은 잘 한 일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관에서 머문 숙박비용까지 그가 지불해야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그는 그마저도 자신이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내 할일 다했으니까 끝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도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상대가 요구하지도 않았고 들어줘야할 이유도 없지만 베푸는 긍휼, 그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는 긍휼이고 다른말로 하면 은혜로 베푸는 긍휼이다.
마태복음 5:7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만 우리가 긍휼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말 성경은 “복되도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그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의 어순에 가장 가까운 번역이다. 이것은 자비로운 사람이 복을 얻는것이 아니라 복을 얻은 사람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고 그는 또한 이미 얻은 자비에서 더 큰 자비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은 은혜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4:16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긍휼을 말하면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것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긍휼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품으로써 베푸는 자는 물론 받은자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은혜가 고백되지 않는 긍휼은 자선이나 구제로 끝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사랑으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다.
사마리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도 율법에 얽메어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같은 길을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누가복음 10:33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실 사마리아인에게 유대인은 원수와 같은 존재다.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대적하던 사람들은 그를 사마라아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을 만큼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곤경당한 그 사람을 보자마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에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창자가 끊어질 만큼 애타는 마음이 들었다는 의미다. 그에게 있어서 강도만난자가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상대가 누구이든지 긍휼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다.
긍휼이 여기는 것은 자선과는 다른 것이다. 자선은 조금더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많이 가졌다고 베풀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게 가졌다고 베풀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나 적게 가진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 긍휼이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동정과도 다르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엽게 여긴다는 측면에서는 긍휼과 같지만 동정은 원수에게까지 긍휼을 베풀지 못한다. 동정은 긍휼히 여길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게 갈린다.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도 긍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긍휼히 여기는 것은 영혼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한 영혼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그의 인생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나 중심의 인생에서 상대를 우선하는 인생이 되어가고 원수도 사랑하며 목숨도 아끼지 않을만큼 내어주는것, 그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의 맏딸 손동희 여사의 신앙고백록에는 두 오빠의 순교 장면이 나온다. 원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큰 오빠는 손을 묶어서 데려가고, 작은 오빠는 두 손을 들라 해서 사형장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큰 오빠에게 “야! 이놈들아 이래도 예수 사상 못 뽑아버리겠느냐? 지금이라도 예수 사상 뽑아 버리고 우리와 같이 협력하겠다면 용서하마. 어쩔 테냐?”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큰 오빠는 “내 목을 뽑을망정 내 신앙은 뽑을 수 없다. 너희들도 이런 악한 짓 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고 당차게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가 “할 수 없다. 쏘아라”고 했다. 그때 작은 오빠가 달려들어 “여러분, 우리 형은 장자입니다. 부모님을 모셔야 합니다. 형님 대신 날 쏘고 형님은 살려 주십시오”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큰 오빠가 “동신아, 너 왜 이러니? 널 죽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니 넌 얼른 가서 내 대신 부모님 잘 모셔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죽음을 놓고 두 형제가 눈물겹게 실랑이를 벌이는데 작은 오빠를 강제로 떼어내고 큰 오빠 눈을 수건으로 가렸다. 최후가 가까운 줄 안 오빠는 “너희들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 난 지금 천당에 간다. 너희들 그 죗값을 어찌하려고 그러느냐?”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오빠에게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큰 오빠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저들의 죄를…”까지 말을 잇고는 그만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작은 오빠는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 피 흘리고 쓰러진 큰 오빠를 껴안고 울면서 “형님! 형님! 형님은 이제 천당으로 갔습니다. 나도 형님 뒤를 따르렵니다.”라며 울부짖었다. 무리 중 한 명이 “저 놈도 죽어야 하겠다”고 하자 작은 오빠는 “나도 형님이 간 천당에 가겠다. 내 신앙도 형님 신앙과 똑같다”며 두 팔을 벌리고는 “나도 우리 주님처럼 십자가로 팔을 벌렸으니 자! 쏘아라!”하고 외쳤다. “저 놈은 형보다 더 지독한 놈이구나. 쏴라.”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첫 마지막 죽는 순간에 첫째 아들이 하던 말을 있을수가 없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저들의 죄를” 그는 일제의 총에 죽어가는 순간에 긍휼을 호소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호소했으며 더 나아가 그에게 총을 쏘는 원수를 바라보며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한 것이다.
사랑이 없는 긍휼은 자선에 불과하다.
긍휼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긍휼은 은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긍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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