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의 부활(고전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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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views부활의 역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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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의 부활(고전15:12-20)
예수라는 사람이 실존했었고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란 기록. 신빙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본적 없다. 과학적 증명안됨. 고린도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사도바울이 부활은 사실이라 증언. 이처럼 믿기 쉽지 않음.
기록이 많으면 신빙성도 있겠는데 기록도 거의 없다. 석가모니나 공자와 달리 예수라는 사람은 짧은 공생애를 삼, 제자들이 많이 없었음. 로마 역시 지배국에서 일어난 사건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을 것. 믿지 않는 사람이 쓴 기록이 있으므로 예수라는 사람이 실존했었다는 것은 대부분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는가? 이게 중요한 사실. 그러나 조작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기록이 너무 허술하다.
여인들이 무덤 찾아간 시간과 인물 불일치, 천사의 위치와 숫자, 여성이 증인, 왜 틀린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역사적 사실을 육하원칙으로 기록하지 않았음. 역사를 사실로 기록한 것은 16세기, 동양에는 중국 고증학의 영향으로 사실을 바탕으로 문서를 기록하기 시작. 그전까지는 의미 중심의 기록. 벚꽃을 보고 “봄에도 눈이 온다. 춥다.” 와 “이상고온 벚꽃 만개”가 같은 의미. 미래 사람이 보기에는 봄도 안 오고 벚꽃도 안핀 것.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예수라는 사람은 부활했다. 오늘날도 <기절설>, <도적설> 바위를 굴려서 군병 피해 도망갔을 리가 없고, 조작된 사실을 위해 제자들이 모두 순교하는 일은 더 믿기 어려운 일. 또한 목격한 수많은 증인이 기록될 당시까지 살아있었음.
기독교의 믿음은 무엇인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었음을 믿는다는 것과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나도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 십자가를 강조하지만 사실 십자가만 인정한다면 예수는 불쌍하게 죽임을 당한 한 정치혁명가일 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로마로부터 사형당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믿기 어려운 문제. 15~19절 사도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우리도 거짓말쟁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 뿐이면 우리가 불쌍한 자들.
예수는 누구였나? 예수라는 이름은 고유명사.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기록은 로마에 대항하여 정치적 위험 인물이었다는 것. 십자가는 정치범에게 일벌백계의 목적으로 언도. 로마인에게는 안 당하는 잔인한 형벌. 죄 패도 “유대인의 왕” 좌우에 달린 강도들도 민란에 가담하여 잡힌 정치범. 고발도 황제에게 세금 거부, 백성선동죄. 모든 것이 예수는 정치범이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리심. 정치범 예수. 그러나 오늘날은 정치범 예수라고 고백 안함. 일시에 모든 사람이 예수라는 고유명사 뒤에 신앙고백 그리스도를 붙여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고 있음. 정치범이었던 청년이 어떤 사건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졌을까? 부활.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은 죽은지 사흘만에 돌아가신 그 자리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 아직도 핏자국이 낭자한데 함부로 떠들다가 발각되면 생명을 지키지 못한다. 제자들도 다 도망가서 숨어있는 상태.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말하기 시작. 그럼에도 예루살렘이 조용했다는 것. 부활은 역사적 사실. 예수님은 살아나셨다. 그들이 뭉쳐서 교회가 생겨난 것. 이것은 교회가 세월과 함께 만들어낸 신앙이 아니다. 진짜 그는 부활하셨다.
부활이 왜 중요한가? 예수님이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도 부활할 것 때문에.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곡식에서 첫 열매 익고 난 후에 바로 전체가 익기 시작한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우리도 곧 부활한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믿음은 예수가 부활했고 그를 받아들이는 나도 부활한다는 것.
부활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1)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우리는 죽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생명이 이상한 것이고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생식, 다이어트, 골프, 에어로빅도 하는데 이 죽음을 조금 늦출 순 있지만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은 죽음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죽음을 정복하게 만드심. 마지막에 하는 협박이 죽인다는 것. 그러나 죽음이 겁나지 않다면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2)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삶의 자세가 틀려진다. 삶은 삶으로 살아가는게 아니다. 죽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할 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진정으로 알게 됨. 우리는 후에 부활하여 육신의 몸을 입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된다. 54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영광스러운 몸을 입음. 예수님이 부활 때 시체를 샀던 세마포가 그대로 내려음. 그리고 육신을 가지고 제자들을 만나심. 손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게 했을 때 만져졌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 오실 때는 문 열고 안 들어오심. 벽을 뚫고 들어오심. 영혼이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 몸을 가지고 일어서서 이 몸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
신앙에 있어서 오늘 우리의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우리의 영과 몸은 하나. 영혼과 몸은 분리할 수 없음. 영혼은 중요하고 본질적이고 육체는 썩어서 없어져 버린다 생각하니까 낙태, 동성애가 가능하다고 생각. 남자외도를 하면서 아내에게 난 당신의 영혼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존재는 분리 안됨.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입을 몸. 오늘 몸으로 거룩을 만들어 감. 이것이 부활의 신앙.
부활 신앙은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신앙. 발은 땅을 딛고 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마지막 부활할 날에는 우리가 그 나라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요한계시록 “내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리니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 믿음으로 오늘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사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 부활 신앙. 배가 물에 떠가지만 물이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가라앉지 않듯이,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의 실패에서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때에 기도하는 것이 응답되지 않아도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은 죽음을 넘어가기 때문에.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천국 보내고 땅을 치고 먼저 천국 보내고 울었지만, 소망을 가지라. 다시 만난다. 몸으로 만난다.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 한 가족으로 만나서 영원히 사는 날이 반드시 온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연습한다. 죽음은 인정하고 탐구대상. “매일 죽음을 연습하라” 다이어리를 새벽에 씀. 장기적 목표는 있다. 그 사명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리고 잠든다. 그러나 내일 일어날 거라 생각 안 한다. 부르시면 가야 한다. 그날이 반드시 올 것. 그러나 다시 일어날 것. 우리는 매일 죽음을 연습한다. 그 뒤에 영원한 삶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주님이 먼저 보여주셨고 나도 따라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 부활은 사실이고 나도 부활할 것. 부활신앙으로 죽음과 삶의 관점이 달라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