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상황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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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views1. 14년만의 예루살렘행 2. 유력한 자들 3. 바울의 부탁과 복음의 상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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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만의 예루살렘행
14년만의 예루살렘행
지난 주 우리는 유승은 목사님을 통해 자신의 사도직을 변론했던 바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거나 3년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는 아니었으나 사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분에게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도직을 변론해야 했던 이유는 또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끊임없이 공격하던 사람들은 “선교를 위해 복음의 상황화가 너무 심해졌다!” “순수했던 복음이 오염되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오염되어졌다 말하는 복음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가르쳤다.
할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말해도, 아브라함의 자손 즉 유대인이 될 수 없다!
둘째,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아무나 다 받아주는 아주 과격한 복음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부정한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바울은 부정한 사람들을 교회 안에 들여와 부정한 상태로 두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바울의 복음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라고 유대주의자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정말로 오염된 것일까요?
이방인들에게도 율법과 할례를 지키라고 반드시 강요해야 맞는 것일까요?
제가 20대 때 필리핀과 인도에서 지내면서 선교활동을 할 때 깨달았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깨닫게 된 것을 지금 청년들과 함께 선교훈련을 하면서 나누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상황화입니다.
복음의 상황화는 복음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한체, 그 나라의 상황 속에 들어가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상황화는 복음을 들고 간 사람의 문화와 가치관을 강제로 주입하면서 이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와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상황에 맞게 변화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복음을 변질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익숙한 가치관과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청년부는 올 7월말 8월초에 선교훈련을 필리핀으로 떠나게 됩니다. 선교 훈련 첫 시간에 제가 청년들에게 이야기 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 나라 문화를 수용하고 받아드릴 적극적이고도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적극적이고도 열린 마음이 없다면, 복음의 상황화를 이루어 낼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나누어주는 봉사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선교를 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선교훈련을 하러 가는 것이며,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 땅에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이 바로 “열린 마음" 즉, 복음을 현지 상황에 맞게 변화시키려는 상황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에게 ‘복음의 상황화'를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무한하고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그 존재가, 한정된 시간과 특별한 문화 속에 인간으로 오셨거든요.
신의 모습 그 자체로 신비롭게 강림하셔서 모든 것들을 뒤바꾸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완벽한 인간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복음의 본질을 유지하고, 상황에 따라 변화를 가져가야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오염된 복음을 전한다며 비난했던 바울의 복음이 바로 이렇게 ‘상황에 맞게 변화시킨 복음’이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어떤 문제가 없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복음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여러 이유들로 인해 바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으며, 회심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통제하고 싶어했습니다.
사실 유대주의자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론 나의 믿음 혹은 나의 복음을 다른 이에게 강요할 때가 있거든요.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성경을 보고 한 분이신 성령님을 각자의 삶에 모시고 살아가는데, 이상하게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통된 목표를 갖고 사역을 준비하고 진행을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갈라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분명한데, 각자가 처한 상황과 지위 그리고 생각들이 다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이 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았는가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더 오래 있었으니까, 내가 더 잘 아니까, 내가 더 경험이 많으니까 등등의 이유들로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거나, 그 생각의 이유를 묻지도 않고 내 신앙과 복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는 이 시간 그리고 오늘 남은 하루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쉬고)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14년만에 예루살렘에 두번째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앍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계시를 따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고 있음을 밝힙니다. 그는 혼자 가지 않고, 이방인 회심자 디도와 함께 올라갑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된 이유는 그 지역에 굉장히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이방에 세워진 교회에서 모아준 사랑의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바울이 예루살렘에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바울은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등장한 이방인 디도를 향해 유대지도자들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
“할례를 받으라 할 것인가?”
“유대지도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일까?” 라는 궁금증과
“유대지도자들이 이방인 선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에 의해 부흥하고 있는 이방인 선교가 굉장히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유대지도자들간의 논쟁이 커지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력한 자들이 바울의 사역을 당분간 중지 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이 참된 복음임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지만, 유대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사역의 현장에서 맺어지는 수많은 열매들을 보았습니다.
복음은 특정한 민족 혹은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열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는 것임을 그는 매순간마다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주의자들은 바울과 달랐습니다.
선교의 현장에 가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곳에서만 허용되어지는 습관과 문화를 갖고 살아가던 사람에 불과 했습니다.
선교 현장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에, 바울의 사역과 그에 따라오는 성령님의 은혜 등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회심한 이방인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다신문화권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신을 믿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여러 제약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당연하게 누리던 문화와 일들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러다보니 모두가 YES 할 때 NO라고 외쳐야 하는 상황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유별나게 행동한다며, 일자리에서 해고 당하기도 하고 무리에서도 소외되기도 했습니다. 경제활동이 어려워졌고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괜찮았습니다.
먹을 것이 예전처럼 풍족하지 않아도,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어도 그들의 삶의 이유가 되며,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감사하며 버틸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머물면서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사도들은 바울이 힘들게 이루어 낸 복음의 상황화를 완전히 뒤흔들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첫 사역지에서 초등학교 5-6학년들과 함께 1년간의 선교훈련을 끝내고 필리핀으로 비전트립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5-6학년 17명과 저 그리고 두분의 선생님이 함께 동행했습니다. 비행기에 타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교는 봉사가 아니다. 단순히 베풀고 무엇인가를 나누어주고 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봉사의 개념으로 선교를 간다면, 다녀온 이후 현지에 남아있는 선교사님이 굉장히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사역을 많이 크게 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면 남은 선교사님께서 뒷수습을 하느라, 그 분의 사역에 어려움이 생기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선교사님의 사역을 돕고, 그 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나라의 문화를 마음껏 느끼고 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만큼 복음을 전하고 오자!”
선교팀의 사소한 실수가 선교사님이 해오신 사역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현지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선교사님의 요청을 잘 따라야 합니다. 그 분만큼 복음을 현지에 맞게 상황화 시킨 사람은 선교팀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만 있었던 사도들의 말 한마디에, 현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선교가 멈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력한 자들
유력한 자들
여러 생각과 떨리는 마음으로 예루살
렘을 찾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유력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갈라디아 유대주의자들이 원하는 그림은 유력한 자들이 바울의 사역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할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력한 자들은 갈라디아 유대주의자들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9절을 보면 유력한 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청했다 말합니다. 친교의 악수를 청했다는 것은 유대주의자들의 모든 바람이 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친교의 악수는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은 바울의 사역을 인정하며 디도를 우리의 형제로 받아들이겠다 뜻이거든요. 이들은 친교의 악수를 통해 서로의 사역을 축복합니다.
첫째,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사역은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큰 도움이 된다.
둘째, 이방인 선교는 유대인 전도와 동일한 사역이다. 사역의 분야만 다를 뿐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위는 동일하다.
셋째, 사역을 계속하도록 우리도 돕겠다. 라는 마음을 담아 악수를 하고 있는 것이죠.
각자가 사역하는 자리는 다르지만, 동일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유력한 자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악수를 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저는 진짜 기분이 째졌을 것 같습니다.
유력한 자들의 말 한마디 무게가 엄청났기에 자신들의 모든 사역들이 부정 당할 수도 있고, 이방인 선교의 문이 닫힐 수 있었거든요.
인정을 넘어서 함께 협력하겠다는 그들의 축복은 바울과 바나바가 해왔던 모든 사역들이 헛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던 일이었음을 인정해주는 것이었기에 기분이 째졌을 것입니다.
유력한 자들이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베드로가 겪었던 사건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방인 회심자 백부장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이방인이기에 복음을 전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여러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구원의 복음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여전히 부담을 느꼈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외면할 수 없었던 베드로는 결국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갔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고넬료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 율법과 할례와 상관없이 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것을 사도들에게 나누었고, 사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있음을 들었기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전혀 오염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일하심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죠.
그래서 유력한 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부탁과 복음의 상황화
바울의 부탁과 복음의 상황화
자신들의 사역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게 된 바울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한가지 부탁을 합니다.
“문화적인 차이에 매이지 말고 각자의 은사가 다름을 인정합시다.”
작년 10월 말 저는 태국을 다녀왔습니다.
그 곳에서 제가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선교사로 살겠노라고 9살 때 서원을 했습니다. 필리핀과 인도를 간 것도 선교사의 삶을 살아보고 필요한 부분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보다 먼저 선교지에 나가 선교를 하고 있는 목사님이 부럽기도 하고 또 궁금하기도 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중 한가지가 “우리가 갖고 있는 데이터들은 코로나 이전의 것들이라 현재 적용하는 것이 참 어려울 것 같은데, 코로나 이후 선교가 어떻게 바뀌었습나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대답이 나왔을 것 같으신가요? 그 목사님의 대답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유튜브를 해야 해. 유튜브 구독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복음을 전할 기회가 많아져"
“선교지에 와서 영상 촬영하고 편집하고 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놀러 갔냐고 비판하시더라구.
하지만 유튜브를 통해 현지의 삶을 소개하고, 또 거기에 현지어로 자막을 달면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열리더라구.”
“예전처럼 찾아가서 봉사하듯이 무언가를 나눠주고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유튜브야"
바울이 유력한 자들에게 말한 “문화적인 차이에 매이지 말자"라는 것.
바울이 선교지에서 상황화를 통해 복음을 전했던 것이 지금은 유튜브와 같은 생각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같은 복음을 전하지만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유대주의자들은 이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유지한체 비본질적인 요소들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데 그것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을 붙들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것만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여러분에게 복음은 무엇인가요?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드리기 전과 받아드리고 난 후 어떤 것이 가장 많이 바뀌셨나요?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까요. 바로 우리에게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드리기 전 우리는 죄에 완전히 묶여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파멸. 지옥을 향해 달려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 조자 몰랐던, 무엇이 죄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던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랬던 우리에게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복음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 고백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에서 자유해졌습니다. 정말 믿으시나요?
우리를 둘러싼 상황과 환경은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그 상황의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시기에 어려워도 이겨낼 수 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살아갈 이유와 목적이 되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그래도 웃을 수 있고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작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합니다.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아무나 다 받아주는 과격한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교회에는 부정한 사람들로 가득차 부정하게 되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 역시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바울의 복음을 동일하게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정했습니다.
왜요?
바울이 전한 복음이 죄에 사로잡혀 있고,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던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유를 선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쉬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반드시 나는 복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유대주의자들처럼 오랜시간동안 나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복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거든요.
나에게 익숙하게 굳어진 복음을 지키려는 열정으로 인해, 비본질적 요소를 본질이라고 오해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진짜 복음을 들고 있는 사람은, 비본질적인 요소를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복음을 들고 있는 사람은, 내가 원하는 존재로 상대방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나만의 유익을 위해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복음을 들고 있는 사람은, 내가 받은 은혜의 감격을 다른 사람도 느끼기를 바라며,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쉬고)
우리는 한 복음을 같은 관점으로 바라보고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그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그 삶의 자리에서 나를 변화시켰고, 삶을 이끌어 가고 있는 그 복음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을 통해 제2가족의 삶에 다양한 열매가 맺혀지고, 그것을 통해 기쁨과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