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앞에서(대하20장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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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두려움 앞에서
본문 : 역대하 20장 1-4절
언제나 늘 그렇지만,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처음 묵상하며 깨닫게 하셨던 은혜가 많은 경우 그대로 이어져가는데요. 그런데, 가끔은 처음 묵상의 은혜 말고, 다른 묵상의 은혜를 주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랬는데요. 큰 틀에서는 오늘 설교 제목대로 영적 싸움을 이기는 비결이 본문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할수록, 이 부분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겁니다.
그곳이 바로 3절에 이 부분입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두려움이라는 이 주제가 머리에서 자꾸만 맴도는 겁니다.
사실, 두려움이란 것도 영적 싸움이라는 범주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적싸움에 중점을 두면, 이 두려움에 대해서는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두려움에 머물러서 묵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요, 지난 며칠 동안, 계속 두려움과 관계되는 말씀들을 찾아서 이제 묵상하고 또 그것을 돌아보고, 생각하고 이런 시간을 가졌는데요.
그러다가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 담임목사님인 노희송 목사님께서 쓰신 “빈 배”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읽게 되었는데요. 한 번 들어보십시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명령은 ‘사랑하라’ ‘섬기라’가 아닙니다. 바로 ‘두려워말라’입니다.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장 크게 가로막습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앙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믿음의 반대가 두려움과 염려라고 말합니다.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366번 등장합니다. 곧 365일 두려워말고 한 번 더 염려하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정말 크게 공감했습니다.
특히 이 부분이요.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366번 등장합니다. 곧 365일 두려워말고 한 번 더 염려하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두려움은 생긴 얼굴만 다르지 다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고통당하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고, 자녀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이런 것들이 우리를 자꾸만 두려움 가운데 머물게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두려움 앞에는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라고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겉으로는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사실 저도 이 두려움과 염려를 앉고 살고 있거든요. 교회 이미지가 지금 땅에 떨어지고, 목회자의 영적 권위가 자꾸 실추되는 이러한 현상을 방치하면 되는 건가. 앞으로 나는 그럼 어떤 목회를 해야하는가 하는 두려움이 있구요.
또한 너무나 많은 청년들이 지금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통계를 보면서, 우리 교회 아이들을 향한 절실한 마음이 때론 큰 두려움으로 저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지금도 뉴스에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서,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이런 고통 중에 있는 분이 많으실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깐, 참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두려움이란 결코 때놓을 수 없습니다.
두렵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를 걱정하게 만들고, 극심한 슬픔에 빠지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한번 베어내어도 끊임없이 더 무성하게 자라나는 잡초처럼,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또 다른 두려움으로 자라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여기에서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면,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면, 그 두려움을 잘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자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여호사밧이 이것을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극심한 두려움의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떻게 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를 여호사밧은 오늘 우리에게 그 해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의 여호사밧은 굉장한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심한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 1-2절에 말씀합니다.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
지금 여호사밧의 남유다로 바다 저쪽 아람에서부터 모압과 암몬 자손, 그리고 마온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모여서 공격해온 겁니다. 이 일을 여호사밧이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사실 여호사밧 왕이 다스리는 남유다는 군사력으로 보면 이들에게 크게 밀리는 전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보다 더 강력합니다.
17장 12-13절에 보면, 여호사밧의 군사력에 대해 나오는데요.
“여호사밧이 점점 강대하여 유다에 견고한 요새와 국고성을 건축하고 유다 여러 성에 공사를 많이 하고 또 예루살렘에 크게 용맹스러운 군사를 두었으니”
그리고 쭉 군사의 수효가 나오는데, 나온 군사 수만 더해도 116만명 입니다.
별로 놀라지 않을 숫자라서 안놀라시는거죠.
현재 우리나라 군사력 순위가 세계 6위입니다. 굉장히 높은 순위이죠.
여기에 우리나라 정규군은 53만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여호사밧의 군사력이 다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요. 17장 19절에 보면, 집계된 군사 수 외에도 온 유다 성읍들에 군사를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깐, 전략적으로 보면, 지금처럼 다양한 최신 무기가 있는게 아니라, 그때 당시는 오로지 군사 수가 곧 전력이었기 때문에, 군사력으로 결코 밀리지 않는 나라가 유다였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또 한 가지,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길을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의 남유다를 강하게 지켜주고 계셨습니다. 17장 10절 “여호와께서 유다 사방의 모든 나라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처음 이 20장의 여호사밧의 두려움이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뭐가 두려웠을까. 두려울 일이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오늘 본문에 여호사밧의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차게 한 치명적인 잘못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니깐, 바로 18장의 내용입니다.
다들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치고 있을 때, 북이스라엘 역사 중에 가장 악한 왕이라고 꼽히는 아합 가문과 사돈관계를 맺습니다. 여호사밧의 아들과 아합의 딸을 결혼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깐,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굉장히 친절하게 대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합이 아람 땅인 길르앗 라못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데, 여호사밧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을 하게 되고, 그 제안을 여호사밧은 너무나도 쉽게 수긍해버립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향한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려고 하는데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먼저 묻자고 합니다. 이에 아합은 탐탁치 않아 하면서,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짓 예언을 듣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사밧의 마음에 뭔가 꺼림직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여호사밧이 일차적으로 멈출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아합에게 한 번 더 선지자에게 물어보고자 합니다.
그 선지자가 미가야인데요.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이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합이 듣지 않은 것이지, 미가야가 거짓 예언을 한게 아닙니다. 미가야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미가야는 참된 예언을 합니다. 그 예언은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정말 놀라운 말을 더합니다.
22절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이쯤되면, 여호사밧은 이 전쟁을 정말 멈췄어야 합니다.
아합보다, 아니요. 아합과 다르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여호사밧이었기에, 더더욱 미가야의 예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말씀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28절.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정말 웃긴 장면이 나오는데요. 29절에 보면, 티내지 않았지만 미가야의 말에 겁먹은 아합은 변장을 하는데,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아합의 말대로 합니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장면 아닙니까. 이처럼 하나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이처럼 비겁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착하다고 해야할까요. 순진하다고 해야할까요.
하나님 안에 있는 여호사밧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드립니다.
결국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아십니까.
30-3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람 왕이 그의 병거 지휘관들에게 이미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하고만 싸우라 한지라 병거의 지휘관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하나님의 도우심 아니었으면, 적어도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이지, 그렇지 않았지만, 벌써 죽은 목숨 아닙니까.
지금처럼 첨단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였고, 그러니 아합 왕의 얼굴도 당연히 모르는 것이구요. 왕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딱 그 왕복 뿐이었을텐데, 아합은 비겁하게 자신은 살겠다고 변장해놓고, 여호사밧은 아합이 그렇게 해라고 하니깐, 의심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왕복을 입고 나가고. 그러니깐 이러한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여호사밧에게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된 것입니다. 극심한 두려움이 된 것입니다.
제가 앞서서 지금 여호사밧이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된 것은 치명적인 잘못 때문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바로 이 18장에서의 경험이 여호사밧에게 두려움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18장의 여호사밧과 같을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매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도 듣구요. 찬양도 하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그런 삶을 살고 있다”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또 그만한 은혜도 받습니다.
그런데, 주일을 지나고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세상에서의 삶에 딱 놓이면, 하나님보다 세상에 더 가까이 있을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이 다 세상의 말들로 가득하고, 세상의 지혜가 넘쳐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더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보니, 내 안에 믿음이 있어도, 신앙이 있어도, 행동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상당 부분 세상의 말과 지혜를 그대로 따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도 어떻게 됩니까. 똑같은 두려움을 소유하게 되고, 세상의 이들처럼, 그 두려움 앞에서 똑같이 절망하고 낙망하고, 좌절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세상의 두려움 앞에 우리도 똑같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사밧이 지금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된 이유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에 똑같이 끌려다니게 된 것입니다.
요즘 기억하기 싫은 일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 뉴스가 연일 계속 들려와서 마음이 좀 아픈데요. 지금 수도권과 인천지역에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데요.
그 과정에서 전세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으로 벌써 세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이가 20~30대입니다. 모두가 다 사회 초년생 혹은 이제 인생에서 가장 큰 열정과 힘을 가지고 도전하는 그런 젊은이들이 사지로 내몰려 진 것입니다.
그중에서, 지난 14일입니다. 2주도 안됐는데요. 스스로 생을 마감한 20대 청년의 이야기가 참으로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A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남동공단 등지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이 오피스텔을 전셋집으로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A씨는 이른바 건축왕으로 불리던 건축업자에게 오피스텔 보증금 9천만을 돌려받지 못하는 전세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A씨가 사망하기 며칠 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이 때 수술을 앞둔 어머니에게 용기를 복돋워 주던 그는, 전화를 끝기 직전 힘겹게 2만원만 보내달라는 말을 꺼냈다고 합니다.
20만원도 아니고 2만원이라니, 어머니는 의아했지만, 더 묻지 못하고 아들에게 10만원을 보냈고, 이게 엄마와 아들의 마지막 대화였다고 합니다.
같은 경험을 한 저로써는 이 20대 청년의 마음이 너무나도 와닿고 또한 아팠습니다.
부모님께 괜한 걱정 끼칠까 봐 말도 꺼내지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면서,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하지’ 하는 막연한 인생의 두려움이 결국 이 청년을 안타까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저도 그때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전세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가장 컸습니다. 받고 안받고 의 문제가 아니라, 이 이후에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저를 가장 많이 힘들게 했거든요..
그때에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두려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이 땅에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게 주셨던 이 말씀들이 저를 두려움에서 일어설 수 있게 했는데요.
시편 42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56편 3-4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의 상황과 문제만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짓눌려 있던 저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여전히 나의 내면의 두려움은 떨칠 수 없지만, 그러한 두려움이 밀려올 때,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려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작동되도록 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상황과 문제는 이 땅을 사는 날동안 계속됩니다.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두려움 속에 갇혀버리면, 세상에 속한 이들과 똑같이 두려움을 대하면, 결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으로, 세상의 지혜로, 세상의 방법으로는 결코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방법으로는 그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바로 이것을 지금 여호사밧이 본문을 통해서 증명합니다.
비록 세상의 두려움에 넘어졌지만, 세상과 같이 두려움에 빠져서 좌절하고 낙망하고 포기하는게 아니라, 다시금 그의 마음 중심에 계신 하나님을 여호사밧은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3절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전쟁의 트라우마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지만, 여호사밧은 온 힘을 다해서, 여호와께로 낯을 향합니다. 두려움의 대상에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의 고백과 결단을 합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아멘.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내면에서 강력히 울려퍼지는 선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문제와 상황 앞에 믿음의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포 뒤에 여호사밧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이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유다의 구원을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싸울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들은 여호사밧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의 멍에를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음으로 확신함으로,
전쟁 도구가 아니라, 찬양의 악기를 듭니다.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들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든 적군을 물리치시고, 거기에 더해 수많은 전리품까지 더 하게 하십니다. 두려움의 전쟁터가 하나님의 승리하심과 찬송이 가득한 예배의 현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브라가입니다.
26절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두려움의 그 현장을 주님은 찬송의 현장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두려움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이기게 하심을 경험하게 하는 영적 브라가가 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두려움을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보면 자꾸만 세상의 오염되고 타락한 것들이 쌓여지기만 할 뿐입니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승리의 공식을 붙잡으십시오.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께 주목함으로, 그 어떠한 두려움에서도 일어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해서 떠올려지는 찬송이 있는데요.
이 찬송으로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찬송가 370장인데요.
특히 2절의 가사가 오늘 말씀을 너무나도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시간이 좀 갔지만, 370장을 함께 고백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