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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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실패한 인생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예수님은 용기 잃은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셔서 그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체험하게 하신다. 또한 자신을 배신한 베드로와 개인적인 대화를 하시고, 그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신다. 이를 통해 제자들을 격려하시고 굳건하게 세우셔서, 그의 교회를 든든하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직접 목격하였다(20:1-10). 또한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다(20:19-23). 그런데 갈릴리에 도착한 베드로가 갑자기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한다(3절). 베드로는 왜 고기를 잡으러 갔을까? 첫째,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예수님의 소명을 뒤로하고, 베드로는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둘째, 단지 먹을 것을 구하는 차원에서 고기를 잡으러 갔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왜 세 번이나 하셨을까? 이는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대조되는 장면을 연출하시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수치요 상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굳건하게 하셔서, 그의 양을 돌보는 목자로 세우신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같은 질문으로 그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격려하신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베드로를 회복시키고 격려하시기 위해 반복적인 질문을 하신다. 그러한 회복과 격려 위에 위대한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사명 위임은 어떤 의미일까?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은 ‘회복’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회복을 넘어 선교적 사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베드로의 회복과 사명은 밀접한 관련을 맺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의도하신 것 같다.
사랑에 대한 질문으로 유명한 이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순서다.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다. 베드로에게 사랑을 요구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베드로를 사랑하셨다. 그를 먼저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함께하셨다.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배신한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셨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에게 그도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물으시며 사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3:16).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랑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사랑, 에수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는 형제 사랑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하는데(요일 4;11), 요한복음에서 에수님은 그의 사랑을 경험한 자는 그를 사랑하도록 요구하신다. 물론 요한복음 전체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있고, 또한 이 단락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양을 치도록 요청받고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사랑에 대한 교훈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이라 부르신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아마도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나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이나 아픔을 지우시고, 의도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시는 것이다.
‘이 사람들보다’(15절)는 문법적으로 3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둘째,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셋째, 네가 이것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들’은 물고기 혹은 물고기 잡는 것과 관련한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첫 번째 해석을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한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베드로의 헌신은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진다(6:67-69; 13:36-38; 18:10; 21:7; 18-19). 베드로는 누구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다짐했다. 그러나 배신의 추억은 그를 움츠리게 했고, 위대한 사명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이에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사랑과 헌신을 불러일으킨다. 베드로는 언제나 가장 강력한 자부심을 드러내 왔다. 예수께서 팔리던 밤에도 다른 제자들은 조용히 있었는데, 베드로는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 말고의 귀를 벤 것도 베드로였다. 그러나 그 밤에는 육신적인 담대함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베드로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했기” 때문에 공적으로 주를 부인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장래에 주를 섬길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로부터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 사이에서 복권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예수의 첫 번째 질문은 베드로의 존재를 깊이 파고 들어간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사랑으로 자기가 예수를 사랑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고, 주님이 이미 안다는 쪽에 무게를 실어서 대답을 한다. 그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은 사실상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의 비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그러한 선언을 받아들여서 틀림없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준다.
예수께서는 이 동일한 것을 세 번 묻는다. 베드로가 근심하게 된 것(17절)은 예수께서 동일한 것을 세 번이나 물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기본적이면서도 심오한 신앙고백을 세 번 요구한다. 베드로의 반응 속에는 자기의의 흔적이 전혀 없다. 그는 단지 주님이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도 안다는 사실에만 호소한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실 때마다, 그에게 사명을 주신다. “양을 먹이라” 혹은 “양을 치라”는 말씀은 목자의 사명을 암시한다. 양을 먹이는 것은 원래 예수님의 사명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들을 위탁하시며, 자신을 대신하는 목자가 되라고 하신다. ‘치다’의 문자적인 뜻은 양을 먹이고, 지키고, 인도하는 목자의 전반적인 목양 활동을 가리킨다.
‘먹이다’와 ‘치다’는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베드로의 어떤 목양을 일컫는 말일까? 목자로서 예수님은 양들에게 꼴을 제공하셨다(10:9). 그리하여 양들을 생명의 풍성함으로 인도하셨다(10:10). 또한 삯꾼과 달리, 예수님은 이리로부터 목숨을 다해 양들을 지키셨다(10:12-15). 그리고 양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도 인도하셔서, 두 종류의 양들이 하나가 되게 하셨다(10:16). 이러한 목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은 베드로의 모델이 된다. 양을 목양하는 예수님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첫째, 양들을 꼴로 먹여야 한다. 양이 꼴을 먹고 자란다면, 성도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성도들을 예수님과 성령께로 인도하여 생명을얻도록 해야 한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에수님은 말씀을 통해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6:3), 목자들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먹여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파하고 가르쳐서 성도들을 먹여야 한다.
둘째, 양들을 지켜야 한다. 위협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
셋째, 다른 양들을 인도하여 하나 되게 해야 한다. 제자들은 복음 전도를 통해 우리 밖의 다른 양들이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한다. 전도되어 공동체에 새로 들어 온 사람들과 기존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신다. 그 양이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양 무리를 치되, 양들이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기억해여 했다. 목자이신 주님을 본받아. 자신의 목숨을 다해 주님의 소유를 지켜야 했다.
교훈과 적용
예수님은 회복시키는 분이다. 베드로는 자칫 배신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주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고통 가운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마음을 쓰다듬어 주시고, 영혼을 강건하게 하신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의 제자들이 그를 닮은 목자가 되게 하신다.
예수님은 아시는 분이다. 베드로는 사명을 받기 전에,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때 베드로는 에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의지한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상황을 아시며, 우리 마음의 중심을 아신다. 사람들은 비록 몰라주더라도, 예수님이 아신다는 것을 믿고, 꿋꿋하게 사명자의 길을 가야 한다.
예수님은 사명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최종적 목표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 양들이 예수님을 만나 영생을 누리도록 꼴을 먹여야 한다. 양들이 위협이나 거짓에 휘둘리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그들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많은 양들이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목자들은 먹이고, 지키고, 확장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베드로를 “시몬 베드로”라고 부르는 것은 1장 42절과 ‘인클루지오’를 이룬다. 베드로에게 섬김을 명하기 전에 예수가 베드로에게 질문하는 한 가지가 사랑 특히 예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라는 점은 확실히 의미심장하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를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돌보라고 맡기신 사람들을 더 사랑할 것이다.
“네가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의 진의를 알아내야 한다. 예수의 질문은 베드로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인가? 아니면 베드로가 이 사람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느냐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는 베드로가 이 물고기들, 즉 자신의 소유를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인가? 어떤 면에서 세 가지가 다 해당한다. 즉 베드로는 다른 사람(마 10:37; 눅 14:26)이나 천직(막1:16~18; 눅 5:1~11)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를 사랑해야 한다. 또한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며 주님을 위해 기꺼이 특별한 희생을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사실 베드로는 일찍이 다른 제자들을 능가하는 헌신을 예수에게 하겠다고 주장했었다. 따라서 문맥상 여기서는 두 번째 안이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즉 예수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베드로에게 요구하는 사랑이 예수의 양 무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일차적으로 예수에 대한 것으로 “온전한 애착과 배타적인 섬김의 사랑”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중요하게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섬기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더 큰 희생을 치러야만 한다.
베드로가 자신의 충성을 입증하는 자신의 행위를 가리켜 보이지 않고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는 반응을 보인 것은 자신에 대한 예수의 지식에 판단을 맡기는 것이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을 예수가 알지 못한다면, 베드로가 예수를 납득시기키 위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베드로는 마침내 자기 힘으로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능력 주심보다 자신의 의지적인 힘에 더 의존해 자신의 충성을 확언하는 것이 공허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최선의 의도대로 행하더라도 거기에 한계가 있다는 겸손한 인식보다는 자기 의존을 드러내는, 오늘날의 이기적인 충성 서약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향한사랑으로 인도받고, 그리스도를 순종하며 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고, 그분의 삶에 참여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애쓴다.
베드로는 지난번 숯불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18:18). 그래서 이 숯불 주위에서 베드로가 또 다시 예수님에 대해 질문을 세 번 받는 것은 적절하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질문들은 베드로를 회복하시려는 것이다. 질문을 던지시는 분이 이미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르셨기 떄문이다.
“요한의 시몬”이라는 표현은 우리를 예수가 베드로와 처음 만났을 때로 데려간다. 당시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라고 말하고, 베드로의 이름이 “게바”, 곧 베드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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