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됨의 축복(롬3:1~8)
0 ratings
· 24 views유대인의 질문. 1. 첫 번째 질문(1,2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두 번째 질문(3-4절) 나의 불신이 하나님의 미쁘심 즉 신실하심을 없어지게 할 수 있는가? 3.세 번째 질문(5-7절) 인간의 불의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불의 하시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는가?
Notes
Transcript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을 보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네가지 중요한 목적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은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전해 주고자 하는 열망에서 바울은 여러 번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자 먼저 글로써 하나님의 복음을 써서 보낸 것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은혜의 복음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기 때문에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이 없는 복음,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또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넘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방인에게 구원이 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셋째로, 바울은 자신의‘로마와 서바나(스페인) 방문 계획’에 대해 알리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 니다 (15:22–29). 바울은 서바나(스페인)를 방문할 계획을 여러 해 전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제할 뿐만 아니라, 서바나로 가는 전도여행에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미리 준비하도록 편지를 써서 뵈뵈 편으로 보낸 것입니다.
넷째로, 바울은 지금 성도들의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데, 이 구제의 일을 무사히 완수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15:30–33).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이 구제를 기쁨으로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에게서 바울이 건짐을 얻도록, 그래서 바울이 로마로 가서 로마 성도들과 평안한 교제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신앙의 삶에 대해서 지적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받았으며, 율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완벽한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흠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위선이 낱낱이 드러나고 죄성이 들어났습니다. 그러자 이제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의 지적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질문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아동센터 아이들 24명이 이용을 합니다. 매년마다 1,2학년들이 새로들어옵니다. 그런데 1,2학년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질문이 많습니다. 선생님 뒤를 쫓아다시면서 질문을 합니다. 아이들이 어찌나 질문은 많이 하는지, 늘 “목사님, 뭐해요”, “목사님, 이게 뭐예요?”,“목사님, 왜 이렇게 해요?”이것이 입에 올라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 중에서도 유난히 질문이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보통 그런 아이들에 대해서 머리가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든지 부모가 다 해주지 말고 질문을 많이 하도록 아이를 가르치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때로 맨붕이 올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지치지 아이들은 지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들을 더 성숙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은 둘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첫째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나, 의심이 많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둘째는 모든 문제를 사려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질문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두 다 유대인들에게 하는 질문들이고, 모두 다 종교적인 질문들입니다. 끊임없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처럼 피곤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의 생각을 꿰뚤어 보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질문하고 대답니다.
(롬2장)에서 바울은 도덕적이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지적했습니다.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마음으로 변화된 유대인이 유대인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합니다”라고 지난 시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은 유대인들을 향한 사도바울의 가상 질문입니다.
1. 첫 번째 질문(1,2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1. 첫 번째 질문(1,2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여기서 유대인의 나음 <나음>이라는 말은 <특권, 유익>이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하면, 할례받은 특권이 무엇인가? 묻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범사에 많다” 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된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즉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얼마나 탁월한 민족입니까? 많은 특권들이 있지만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2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탁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원해서 주도적으로 맡은 것이 아닙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다”가 됩니다. ‘맡겨졌다’(에피스튜떼산, ἐπιστεύθησαν)는 영어로 “피스튜오”,“신뢰”라는 단어도 됩니다. 이 단어는 수동태로서 ‘위탁되었다’,‘하나님이 믿고 맡겼다’뜻이고,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책임도 부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내가 맡겠습니다”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맡겨주셨다, 위탁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유대인들의 우월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사용된 도구들입니다.
먼저 됨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맡았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것은 이방인들이 누리지 못한 큰 특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맡았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것은 이방인들이 누리지 못한 큰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없는 이방인들은 자기 신들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 온갖 미신을 동원합니다.
새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점을 치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에 점치는 사이트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인터넷에서 돈을 버는 드문 직업 중에 하나가 점쟁이라고 합니다. 또 동물의 내장을 꺼내서 그 모양으로 점을 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굉장히 방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디로 이사할까? 언제 이사할까? 어떤 사람과 결혼할까? 내 장래는 어떻게 될까? 내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이번 선거에 내 출마할까 말까? 언제쯤 내 일이 잘 풀릴까? 등등 그러나 아무리 점을 치고, 비법을 구해도 속 시원한 방법은 없습니다. 더 허망해 질 뿐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이 축복을 축복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특권이 자기들이 잘나서 받은 것처럼 교만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특권이 자기들이 잘나서 받은 것처럼 교만하기도 하고,
▶오히려 이 특권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비난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 특권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비난한 것입니다.
▶또한 이 특권을 감사하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이 특권을 감사하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은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현대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은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감사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만이 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정죄하는 칼날이 된다면 오히려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모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애굽의 종노릇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해 놓았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뭡니까?
언제 무엇 때문에 불만을 합니까? 이럽니다. “애굽에서는 종노릇을 했지만, 고기는 먹지 않았는가? 애굽에 있을 때 힘들긴 했어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는데, 마실 물도 넉넉했는데...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 그들은 받은 것보다는 끊임없이 없는 것만 생각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려고 그들을 데리고 갔더니 “우리를 광야에서, 여기서 죽게 하려고 그러는 구나”라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통곡을 합니다.
불만이 체질인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늘 항상 불평과 불만을 합니다. 바로 고질병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가장 중요한 축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우리는 감사하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이익이 무엇인가? 왜 나는 믿어도 이 문제가 안 해결됩니까?
▶예수 믿는 이익이 무엇인가? 왜 나는 믿어도 이 문제가 안 해결됩니까?
믿는데도 왜 나는 여전히 가난합니까? 왜 안 고쳐집니까?
그렇게 믿었는데도 왜 내 자식을 합격시켜 주지 않는 겁니까?
우리도 귀한 말씀의 축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고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이 고질병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2. 두 번째 질문(3-4절) 나의 불신이 하나님의 미쁘심 즉 신실하심을 없어지게 할 수 있는가?
2. 두 번째 질문(3-4절) 나의 불신이 하나님의 미쁘심 즉 신실하심을 없어지게 할 수 있는가?
유대인들(=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축복이라면,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라지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그러나 사도바울은 4절에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래서 3절에 하나님의 ‘미쁘심’(피스티스, πίστις)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유대인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신실치 아니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폐하다’(카타르게오, καταργέω)는 것은‘효력 없게 하다, 무효화하다’는 말입니다. (롬 3:31; 4:14; 6:16 등 참조).
그래서 3절에 하나님의 ‘미쁘심’(피스티스, πίστις)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유대인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신실치 아니함’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폐하다’(카타르게오, καταργέω)는 것은‘효력 없게 하다, 무효화하다’는 말입니다. (롬 3:31; 4:14; 6:16 등 참조).
그러면서 4절에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말합니다.
“참되다”는 말은 약속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4하) 시편 51:4에 나오는 다윗의 말을 인용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여기서 ‘심판하실 때에’는 ‘법정에서 다툴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해 법적으로 논란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인정)되시고 이기신다는 의미입니다. 곧, 하나님은 참되시고 의로우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잘못인가?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가? 사람들은 그렇다고 합니다. 마치 내가 잘못되는 것이 다 조상 탓이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즉 나의 불성실, 나의 부실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영향을 주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불성실함에 의해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내가 진리를 바꾼다고 해서 진리 자체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내가 말씀을 어기고, 깨뜨렸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충족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중심이 어떠한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기 위해 항상 최고의 것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 안 믿는 자에 관계하지 않으시고 햇빛과 비를 골고루 베풀어주시는 분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마치 사람들은 자기 삶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신실하시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면 애굽의 박해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바라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호렙으로 부르셔서 그 백성을 해방시킬 사역을 맡기십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 동족들이 너를 누가 보냈냐고 물을 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라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나는 나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다」라는 말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첫째는 인간들의 반응과는 전혀 관계없이 영원 전부터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첫째는 인간들의 반응과는 전혀 관계없이 영원 전부터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항상 변하지 않는 존재로 계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항상 변하지 않는 존재로 계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나를 잊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너희를 지키고 보호해주고 있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제나 오늘도 또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바로 나를 지켜주고,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비록 나는 생활에 바빠서, 삶의 짐이 너무 버거워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 속에 휩쓸려 살고 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까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어려움 속에 처해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자비와 사랑과 능력의 팔을 내미시고 구원을 갈구하는 우리의 손을 내미시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인간들은 모두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되신 분이십니다.
3.세 번째 질문(5-7절) 인간의 불의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불의 하시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는가?
3.세 번째 질문(5-7절) 인간의 불의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불의 하시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는가?
▶우리의 불의(죄)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이 아닌가?
오히려 진노를 내리는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 아닌가? 오히려 상을 주어야 하지 않는가?
이것도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이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참됨을 드러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할 수 없지 않는가?
(예)가룟 유다가 오히려 공로자가 아닐까? (필요악인가?) 왜요?예수님을 팔았으니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죽어야 부활도 있고, 그리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예)가룟 유다가 오히려 공로자가 아닐까? (필요악인가?) 왜요?예수님을 팔았으니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죽어야 부활도 있고, 그리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내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유익이 된다면 하나님은 내 죄 때문에 <덕>을 보는 셈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 죄를 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불의를 통해서 이렇게 영광을 받으신다면, 결국 불의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를 미혹하는 여호와의 증인들 역시 똑같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을 모르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옥을 만드실 수 있으며, 심판을 하실 수 있겠는가 말합니다.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지상천국을 만드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인들의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6절)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미국의 어느 사형수가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기 전에 한가지 소원을 부탁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마지막 키스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사형수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상례여서 그 어머니를 아들에게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전대미문의 희한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별의 키스를 하던 아들이 어머니의 혀를 물어뜯어 잘라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유는 그 어머니의 혀 때문에 자신이 죽게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우연히 길가에 놓여져 있는 핸드백을 줍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간 아들이 핸드백을 어머니에게 건네자 어머니는 그 속에 돈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오히려 그 아들을 잘했다고 칭찬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칭찬을 들은 이 아들은 결국 어머니의 칭찬을 듣고싶을 때마다 아예 남의 물건을 훔쳐 집으로 들어가게끔 되었습니다. 결국 이 아이는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고, 점점 죄악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어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경우에 물론 어머니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의 모든 잘못을 어머니 탓으로만 돌리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그래서 자기가 벌을 받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는 원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5절하-6절)“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8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것이 선을 이루는 것이니 악을 행하자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지막까지도 자신들의 개똥철학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려는 교만한 몸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이없고 교만한 발상입니까?
▶이 얼마나 어이없고 교만한 발상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더 누릴 려면 죄를 더 많이 짓고 회개하면 더욱 값진 것이 될 수 있지 않냐는 발상이며,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일단은 죄를 많이 짓고 보자는 그런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일단은 죄를 많이 짓고 보자는 그런 생각입니다.
이것은 무의미한 궤변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구원된다고 주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더욱 빈정대며 이렇게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8절하)「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죄 값이 크면 그 구속의 은총이나 속죄의 감격이 무한히 커질 것은 당연하겠죠?
그렇다고 이쑤시개 하나를 만들기 위해 100년된 생소나무 한 그루를 모두 깎아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앞에 말씀드린 대로 만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룟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성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니 그 죄가 없는 것입니까? 오히려 상을 받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말씀하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방법으로 든지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악하게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되지 말고 선하게 쓰임받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더욱 기도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개인의 선택은 자기의 몫이지만, 그것을 선하게 쓰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심판을 피하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집중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인은 이런 값싼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심판을 피할까하는 비껴 가는 삶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말씀을 정리합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송충이가 착각해서 자신이 송충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고 합시다. 그래서 소나무보다 장미꽃이 훨씬 예쁘니 앞으로 장미꽃에 붙어 살겠다고 한다면 송충이는 가시에 찔려 곧 죽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당위명제는 자기 자신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과도함과 비극이 자신을 잘못 인식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2400여 년 전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고 했던 말은 최고의 명언이 아닐 수 없는데, 실은 성경에서도 이미 언급된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자신을 바로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목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입니다. 유대인은 먼저 믿은 성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됨의 축복, 우리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먼저됨의 축복, 우리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먼저 믿고, 하나님의 은혜과 축복과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열매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남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향해 한없이 참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배반하고 멀어지려하는 우리를 향해 한없는 인내와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올바로 세우시기 위해 열심을 다하시고 계십니다.
아무리 좋은 교회다니고 좋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 스스로가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으면 오히려 세상에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말씀으로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말씀으로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우리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잘못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짓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흠도 없이 점도 없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솔직히 인정하고 뉘우치도록 해야 합니다.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항상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수단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수단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이루기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이 합리화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요하면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도 하고, 거짓말도 쉽게 합니다. 오늘날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성 교회에 파고들어 교회를 파괴하기도 하고 빼앗기도 합니다. 이처럼 악한 수단을 용납하는 것은 마귀에게서 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관계없이 나와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를 끝까지 보살피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뿌리 위에 놓여진 도끼자루를 잡는 것을 미루시고 이제나 저제나 우리를 통해 나타날 열매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을 가진 성도는 비록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이고, 열매있는 성도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철저하게 순종하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