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때(막12: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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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시리즈*
“부활 때”(본문 마가복음 12:18~27)
·구약 상호본문 창19:1 출2:24,25,3:15 ·신약 상호본문 롬6:1~13, 롬8:11~13
▣ 목 차 ▣
1. 본문확정 및 번역비교 · 2
1.1 반복어 · 5 1.2 유사어 · 5 1.3 반의어 · 5 1.4 중심 어휘 · 5 1.5 동사 시제 · 5
2. 구조분석 · 6
2.1 22장 구조분석 · 5 2.2 본문 구조분석 · 5.6
3. 단어 연구 · 6
3.1 ἀνίστημι 일으켜 세우다 · 6
3.2 νεκρός 죽은 · 7
3.3 죽은자와 살리다 용례 · 8
3.4 ἄγγελος 천사, 사자 · 10 (천사, 사자, 사탄, 인간)
3.5 πλανάω 오도하다, 기만하다, 속이다 · 16 (속이다. 오도되다. 믿지 않다. 미혹된)
4. 역사적 정황(배경연구) · 22
4.1 마가신학 · 22
4.2 메시아 비밀 · 22
4.3 기록 연대 · 24
4.4 기록 동기, 제자들의 실패 · 24
4.5 배경 · 24
4.5.1 기록 배경 24
4.5.2 사두개인 · 25
4.5.3 사두개인들의 질문 유대인의 책 토비트 인용 · 26
4.5.4 수혼제 · 27
5. 문학적 정황 · 28
5.1 병행구절 · 28
5.1.1 누가복음 병행구절 구조분석(누가복음 20:27~40) · 29
5.2 문맥분석 · 31 (책 내에서의 내 본문 위치)
5.3 본문구조분석 · 33
5.4 주제흐름 분석 · 35
6. 정경적 정황 · 59
6.1 언약 · 59
6.1.1 언약이란, 행위언약 · 59 6.1.2 신약성경에 나타난 행위언약 · 60
6.1.3 바울의 행위언약 진술(고전15장)· 61 6.1.4 아브라함 언약· 61 6.1.5 언약의 종말론 · 62
6.2 구약비교본문 연구 · 63
6.2.1 부활과 천사를 부정하는 사두개인(창19:1) · 63
6.2.2 천사를 부정하는 사두개인 행23장 · 64
6.2.3 언약과 알다관려(출2:24,25,3:15) · 65
6.3 신약 비교 본문 연구 · 67
6.3.1 롬6:1~13 · 68 6.3.2 롬8:11~13 · 69 6.3.3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 70
6.4 신, 구약 죽은자 일으킨 사건 조사 · 71
1. 본문확정 및 번역비교(마가복음12:18~27) 4/7,10,11,12,13,14,17,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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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28
18Καὶ ἔρχονται Σαδδουκαῖοι πρὸς αὐτόν, οἵτινες λέγουσιν ἀνάστασιν μὴ εἶναι,
καὶ ἐπηρώτων αὐτὸν λέγοντες ·*
19διδάσκαλε,* Μωϋσῆς ἔγραψεν ἡμῖν ὅτι ἐάν τινος ἀδελφὸς ἀποθάνῃ
καὶ καταλίπῃ γυναῖκα καὶ ⸂μὴ ἀφῇ τέκνον⸃, ἵνα λάβῃ ὁ ἀδελφὸς αὐτοῦ τὴν γυναῖκα ⸆
καὶ ἐξαναστήσῃ σπέρμα τῷ ἀδελφῷ αὐτοῦ.*
20ἑπτὰ ἀδελφοὶ ἦσαν ·* καὶ ὁ πρῶτος ἔλαβεν γυναῖκα
καὶ ἀποθνῄσκων οὐκ ἀφῆκεν σπέρμα ·
21καὶ ὁ δεύτερος ἔλαβεν αὐτὴν καὶ ἀπέθανεν ⸂μὴ καταλιπὼν⸃ σπέρμα ·
καὶ ⸄ὁ τρίτος ὡσαύτως ·
22καὶ οἱ ἑπτὰ⸅ οὐκ ἀφῆκαν σπέρμα. ⸂1ἔσχατον πάντων⸃ ⸉καὶ ἡ γυνὴ ἀπέθανεν⸊.
23ἐν τῇ ἀναστάσει ⸋[ὅταν ἀναστῶσιν]⸌ τίνος αὐτῶν ἔσται γυνή;
οἱ γὰρ ἑπτὰ ἔσχον αὐτὴν γυναῖκα.
24⸂Ἔφη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 οὐ διὰ τοῦτο πλανᾶσθε μὴ εἰδότες τὰς γραφὰς μηδὲ
τὴν δύναμιν τοῦ θεοῦ*;
25ὅταν γὰρ ἐκ νεκρῶν ἀναστῶσιν οὔτε γαμοῦσιν οὔτε γαμίζονται,*
ἀλλʼ εἰσὶν ὡς ⸀ἄγγελοι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26περὶ δὲ τῶν νεκρῶν ὅτι ἐγείρονται οὐκ ἀνέγνωτε ἐν τῇ βίβλῳ Μωϋσέως
ἐπὶ τοῦ βάτου πῶς εἶπεν αὐτῷ ὁ θεὸς λέγων ·*
ἐγὼ ὁ θεὸς Ἀβραὰμ καὶ ᄚ1[ὁ] θεὸς Ἰσαὰκ καὶ ᄚ1[ὁ] θεὸς Ἰακώβ;*
27οὐκ ἔστιν ⸆ θεὸς νεκρῶν ἀλλὰ ⸇ ζώντων · ⸆1 πολὺ πλανᾶσθ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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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ㄴ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ㄱ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1.1 반복어
γυναῖκα아내/6 ἀδελφὸς형제/4
ἀναστάσει ἀναστῶσιν 살아날 때(부활 때) /3ζώντων 살아있는자/1 νεκρῶν 죽은자/3
θεὸς/6 τινος 누가. 무엇/3 σπέρμα 상속자. 씨/4
βίβλῳ 책/1 γραφὰς 성경/1 Μωϋσέως 모세/2
ἄγγελοι 천사/1 οὐρανοῖς 하늘/1 ἔσχατος 최후의/1
1.2 유사어
ἀνάστασιν부활/2 ζώντων 살아있는자/1 ἄγγελοι 천사/1
βίβλῳ 책/1 γραφὰς 성경/1 Μωϋσέως 모세/2
αταλίπῃ 부과능직 3단버리고 가다 떠나다/2 ἀφῆκεν 부과능직 3단 보내다 가게하다
σπέρμα 중단대 상속자 씨-2 τέκνον 남단대 아이
γαμίζονται 현수직 3복 결혼하다/1 γαμοῦσιν 현능직 3복 장가들다/1
ἀναστῶσιν 부과능가 3복 살아나다. 부활하다/2 ἐγείρονται 일어나다/1
1.3 반의어
γυναῖκα아내 ἀδελφὸς형제
ζώντων 살아있는자 νεκρῶν 죽은자
εἰδότες 완능분남복 알다 πλανᾶσθε 현수직2복 오해하다. 미혹하다
καταλίπῃ 부과능직 3단 버리고 가다 떠나다 ἀφῆκεν 부과능직 3단 보내다 ↔ ἐξαναστήσῃ 부과능가 3단 세우다
ἀναστῶσιν 부과능가 3복 살아나다. 부활하다/2 ἐγείρονται 일어나다 ↔ ἀποθάνῃ 부과능직 3단 죽다 /1
1.4 중심 어휘
ἀναστάσει ἀναστῶσιν 살아날 때(부활 때) ζώντων 살아있는자
νεκρῶν 죽은자들의 일어남
νεκρῶν ἀναστῶσιν 죽은자의 일어남(25절) ἤγειρεν ἐκ νεκρῶν ⸀Ἰησοῦς 나사로
σπέρμα 상속자. 씨
ἄγγελοι 천사
ἔσχατος 최후의
1.5 동사 시제
ἀναστῶσιν 부과능가 3복 살아나다. 부활하다/2 ἐγείρονται 일어나다/1
ἀποθάνῃ 부과능직 3단 죽다 /1
καταλίπῃ 부과능직 3단버리고 가다 떠나다/2
ἀφῆκεν 부과능직 3단 보내다/2
πλανᾶσθε 현수직2복 오해하다. 미혹하다/2
εἰδότες 완능분남복 알다/1
ἐξαναστήσῃ 부과능가 3단 세우다
ἔγραψεν 부과능직 3단 기록되다/1
γαμίζονται 현수직 3복 결혼하다/1
γαμοῦσιν 현능직 3복 장가들다/1
2. 구조분석
2.1 마가복음 구조분석
I. Prologue to the Gospel,(복음의 서막) Ch. 1:1–13
II. The Initial Phase of the Galilean Ministry, (갈릴리 직무의 초기 국면)Ch. 1:14–3:6
III. Later Phases of the Ministry in Galilee, (갈릴리 직무의 후기 국면)Ch. 3:7–6:13
IV. Withdrawal Beyond Galilee,(갈릴리 넘어 물러남) Ch. 6:14–8:30
V. The Journey to Jerusalem, (예루살렘 여행)Ch. 8:31–10:52
VI. Ministry in Jerusalem,(예루살렘의 직무) Ch. 11:1–13:37
VII. The Passion Narrative, Ch. 14:1–15:47
VIII. The Resurrection of Jesus, Ch. 16:1–8
I.복음의 시작 II.III.IV. 그리스도의 사역 V.VI.VII,VIII. 그리스도의 수난
2.2 12장 구조분석
VI. Ministry in Jerusalem,(예루살렘의 직무) Ch. 11:1–13:37
1. The Parable of the Defiant Tenants.(무례한 소작인의 비유) Ch. 12:1–12
2.The Question Concerning Tribute. (세금에 관한 질문)Ch. 12:13–17
3.The Question Concerning the Resurrection. Ch. 12:18–27
4. The Question Concerning the Great Commandment. Ch. 12:28–34
5. The Question Concerning David’s Son. Ch. 12:35–37
6. The Warning Concerning the Scribes.(율법학자 또는 서기관에 대한 경고) Ch. 12:38–40
7. The Widow Who Gave Everything. Ch. 12:41–44
2.3 본문 구조분석 12:18~27
A 사두개의 예수님과 만남 (18절)
B 사두개인들의 질문(19~23절 율법의 형사 취수제근거)
B’ 예수님의 대답(성경과하나님의 능력에 근거)
A’ 예수님의 최종 결론(26,27절 산자의 하나님)
3. 단어 연구
3.1 ἀνίστημι 일으켜 세우다, 일어나다, 깨어나다. 미래 능동태. ἀναστήσω; 부정과거 능동태. ἀνέστησα; 완료 능동태. ἀνέστα; 부정과거 수동태. ἀνεστάθην. 히브리어 등가: קום (187). 아람어 등가: קום (2). 사도행전 45번 누가복음 27번,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사가운데서 가장 많이 사용
1) 일어서다 (일어남) — 자신의 발로 일어서다. 의미상 반의어: (주저) 앉다; 눕다. ἐγείρω.
막 5:41~42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회당장 야이로의 딸)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2) 일어나다 — 행동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올라오다. ἐγείρω. 관련 주제: 높이 들다
눅 9: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눅 9:19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행 5: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행 9: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다비다)
3) 부활하다 ⇔ 일어나다 — 부활하다, 자신의 발로 일어선다고 생각하여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예수)
막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막12: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행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살전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4) 부활하다 (사람) ⇔ 일으켜 세우다 — 누군가를 부활시키다, 사람이 자신의 발로 일어나도록 돕는다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행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 이라
행3: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13: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ㄱ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ㄴ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ㄷ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행20:10 유두고를 살린 사도바울을 통한 성령의 역사
3.2 νεκρός -οῦ, ὁ; (nekros), 형용사. 죽은. 히브리어 등가: מות (21), חָלָל (4).
1) 죽은 — 더 이상 생명이 없는. 의미상 반의어: 생명의 (살아있는). 관련 주제: 죽음; 구덩이; 끝; 멸망하다; 내세; 스올; 지하 세계로 내려가기.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1)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2) 영적으로 죽은† — 영적 생활이나 활기가 부족한 특징을 가지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한. 관련 주제: 멸망하다.
엡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골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3) 죽은 ⇔ 쓸모 없는† — 유익하게 사용하거나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생명이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 관련 주제: 무익; 허영; 공허함. 사도행전 17번 가장 많이사용 로마서 16번 누가복음 14번
히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1)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4) 사회적으로 죽은† — 사회적으로 또는 관계적으로 비존재로 여겨지는;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3.3 죽은자와 살리다. 용례
마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7: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마22: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28:32 ㄱ)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막9: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막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 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눅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나인성 과부의 아들살리심)
눅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행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3)이 일에 증인이라
행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2)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행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죽은 것 살리심이 사라의태에서 시작- 사라의 믿음의 반응 또한 중요
롬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후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갈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엡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빌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2:12 너희가 1)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 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딤후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히6:2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죽었다는 의미가 행실과 연관됨)
히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 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벧전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4: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1)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3.4 ἄγγελος 천사-ου, ὁ; (angelos), 명사. 사자, 천사. 히브리어 등가: מַלְאָךְ (183). 아람어 등가: עִיר (2), אֱלָהּ (1), מַלְאַךְ (1).
1) 천사 —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된 초자연적인 존재; 하나님의 사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관련 주제: 그룹들; 천사; 초자연적인 존재; 일곱 교회의 천사들; 미카엘 (대천사); 가브리엘; 라구엘 (천사).
마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행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ㄱ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ㄴ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행 7:29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32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벧후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계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
계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2) 사자 —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 대개 다른 상징적 기능을 함 관련 주제: 전달자; 대사.
마 11:10 기록된 바 ㄱ)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ㄱ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눅 7:24 τῶν ἀγγέλων Ἰωάννου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눅 9:52 καὶ ἀπέστειλεν ἀγγέλους πρὸ προσώπου αὐτοῦ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고후 12:7 ἄγγελος Σατανᾶ,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칠십인역
시 103편 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욥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학1:13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단4:13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 가운데에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마18:10 천사
마태복음의 천사는 작은자 중의 하나를 업신 여기는 자에 대한 천사들이 하는 일을 말한다. 작은 자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수호천사로 해석한다. 수호천사는 유대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며 “그들의 천사들이”이기 때문에 소자들을 지키는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0절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라고 한다. 천사들은 하늘에 있으며 하늘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하늘 회의, 하늘 궁정, 하늘 법정의 구성원들이다. 하늘의 천사들ㅇ과 같은 하늘의 존재들을 하나님 앞에 서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하고 하나님의 평결과 지시를 받기 위해 기다린다. 그래서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10절은 구약과 유대 묵시 문헌에 등장하는 하늘의회의 전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다. 에녹 1서에서 수 천사들을 의인들의 탄식과 목소리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들을 신원해 주시고 압제자들을 벌하시기를 간구한다. 에녹1서9:1~3a. 4~9 그렇다면 10절의 천사들을 수호천사들의 개념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하늘 의회 내지 하늘 궁정의 구성원들로서 소자들을 실족시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늘에서 전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으며, 인자가 오실 때는 최후 심판을 집행하는 일을 맡을 것이다
13:39~43,49~50.24:31,25:31~46
그러므로 10절과 14절의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을 비교해 보면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는 묘사와 아버지 앞에 있는 뜻이 비교되므로 천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이유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25:31~46 인자가 올때, 천사, 마지막, 최후는 심판
인자가 올대 일어날 일을 언급한다. 인자가 와서 집행할 재판 장면을 강렬한 언어로 묘사한다. 29~31에 등장한 인자와 천사들의 행동이 본 단락의 계속이어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자가 다시 올 때 곧 최후 심판이 일어날 때 모든 사람은 재판을 받는다. 재판은 하늘의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의인들은 보상을 받고 악인들을 형벌에 처하게 된다. 인자,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 천사들의 역할이 체적이지 않지만 그들을 사람들을 재판장 앞에 불러모으고 악인들에게 형벌을 집행할 것이다. 24:31“인자가 영광으로 올 때” “모든 천사들이 그와 함께” 할 것이다.
13:39~43 인자는 그의 천사들과 함께 와서 심판을 수행할 것인대 재림이 바로 종말의 추수가 일어날 시간이다.
천사
창조는 목적이 있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역인데, 이런 창조 사역은 하나님 자신 밖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창조 교리는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말하는 교리인데, 온 세상 만물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다루는 교리다. 하나님께서는 무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가 보시기에 선하게 보이는 대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의미가 창조된 질서가 완전한 존재로 갑자기 생겨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총 “6일” 동안으로 대변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창조 단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발전 또한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 창조세계 내에서 서식하는 각종 동식물은 생육하고 번성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 사역의 최고의 영광스러운 작품인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차후에 인간을 통해 피조될 것들은 무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활용해야만 한다. 피조물이 가진 잠재력의 발전은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 창조와 더불어 물질적 세계 너머에 존재하지만 물질적 세계 안에서 활동이 가능한 영적인 존재도 창조하셨다. 이런 영적인 존재를 가리켜 천사(“전달자”)라고 부르며 천사는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한 부류는 타락한 천사이며 또 다른 부류는 여전히 신실함을 가지고 있는 천사다. 자신의 창조주를 거역한 천사를 “악령“이라고 부르며 이들의 지도자가 사탄 혹은 악마다. 하나님을 향해 충성심을 여전히 갖고 있는 천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다. 천사와 악령의 숫자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 숫자가 많을 것으로 묘사한다.
인간은 독특한 존재인데, 그 이유는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면서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적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즉 물질적 세계 속에 흐르는 각종 자연 법칙 아래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 즉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선과 악 사이의 싸움은 천사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역을 저지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악은 창조 질서 가운데 원래 존재했던 자연적인 영역으로 볼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에 거역하는 순간부터 악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질적 존재는 우리에게 영적인 피해를 입히지도 혹은 영적으로 치유의 손길을 내밀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영적인 목적을 위해 물질적 존재를 사용하는 것은 우상 숭배의 한 형태다. 왜냐하면 물질적 존재가 창조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아질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단순히 물리적인 영역만을 창조하지 않으셨고 영적인 영역 또한 창조하셨다. 이 영적인 영역 속에는 비물질적 존재인 천사와 악령이 포함되어 있다.
현대 기독교 신학은 천사에 관한 교리에(골 2:18)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회는 늘 영적이고, 비물질적인 존재에 대해 믿어왔다. “천사”로 불리는 영적인 존재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존재다. “악령”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존재다. 이런 영적인 존재가 정확히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은 이런 영적인 존재가 비물질적 존재라는 점이다. 성경은 천사를 물질적 존재와는 다른 영적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마 8:16; 12:45; 눅 7:21; 8:2, 30; 11:26; 24:39; 엡 6:12; 히 1:14).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상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 또한 만드셨다고 가르쳐왔다. 본래의 물질적인 세상이 그랬듯이 모든 천사 또한 원래는 선했다(요 8:44; 벧후 2:4; 유 6). 그러나 일부 천사가 사탄의 지도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고 결국 악의 존재가 되었다(마 9:34; 25:41; 엡 2:2; 계 12:4). 악한 천사는 자신들의 의지로 하나님께 대항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결정을 영원부터 허용하셨다(히 2:16; 벧후 2:4; 유 6).
영적인 영역이 언제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는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가 동시에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사의 창조는 창세기 1–2장에 등장하지 않는다. 욥기 38:4–7과 시편 148:2, 5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천사는 물질 세계가 창조될 때 존재했다. 이렇게 볼 때 천사는 물질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창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 일부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예를 들면, 존 밀튼은 그의 실락원 에서 물질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천사와 그들의 타락이 있었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 역시 우주의 창조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이 우주가(모든 피조물의 총합으로 우주를 이해한다면) 창조되기 전에 존재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창세기 1:1–2은 물질적 세계의 창조만큼 영적인 존재의 창조 또한 말하고 있는 본문이다. 천사의 창조에 대한 성경적 묘사는 시편 33:6, 느헤미야 9:6, 골로새서 1:16 등에 등장한다.
마태복음 22:30과 누가복음 20:36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할 때 모든 천사는 계속적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며,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묘사하듯이 천사의 수는 “천만 천사”, 즉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히 12:22).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도 묘사한다(계 5:11; 참조. 신 33:2; 시 68:17; 막 5:9, 15). 기독교 신학에서는 천사를 선명한 계급 구조 안에서 그 등급을 구별해 이해한다(엡 1:21; 3:10; 골 1:16, 21; 2:10; 벧전 3:22).
천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지적, 도덕적, 영적 존재인데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성경은 다른 피조물처럼 천사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러나 천사가 언제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천사를 지칭함에 있어 성경은 “군대,” “하나님의 아들들,” “거룩한 자들,” “영들”과 같은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천사는 강한 능력을 가진 지적인 존재다. 성경은 천사의 주된 역할을 천상에서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지키고, 위험으로부터 구하며, 신적 명령을 그들에게 전달하고,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천사를 사용하신다.
과연 천사의 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많은 숫자를 본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다”(계 5:11). 천사의 숫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명백하게도) 천사는 자식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천사가 계급 구도 안에 위치한다고 가르친다. 미가엘이라고 불리는 천사는 “천사장”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미가엘은 확실히 천사 가운데 최고위 리더일 것이다. 성경은 이외에도 천사를 다양하게 분류하는데, 즉 그룹과 스랍이다. 하지만 그룹과 스랍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다.
인간과는 다르게 천사는 아담의 타락의 영향력 아래 위치하지 않기 때문에 죄로 왜곡되지 않았다. 천사는 무흠하며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존재다. 비록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이 땅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고 인간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천사는 구속사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그리스도의 탄생, 부활, 승천과 같은 중요한 순간에 자주 등장한다.
사탄
사탄은 악령들의 우두머리다. 사탄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이끈 존재다. 사탄은 현재도 이 세상에 악을 퍼트리는 사역을 앞장서서 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사탄은 특별히 강력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천사였는데, 하나님께 대항해 반역을 저지른 천사 가운데 우두머리다(엡 2:2; 계 12:1–12). 사탄의 히브리어 뜻은 “적대자”이다. 성경은 사탄을 가리켜 “마귀”라고도 부르며(마 4:1, 5; 눅 4:2, 3; 엡 6:11), “뱀”(창 3:1; 고후 11:3; 계 20:2), “큰 용”(계 12:9; 참조. 계 20:2),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이 세상의 신”(고후 4:4), “악한 자”(마 13:19, 38; 요 17:15; 엡 6:16), “귀신의 왕”(마 9:34; 12:24; 막 3:22; 눅 11:15), “참소하던 자”(계 12:10), “시험하는 자”(마 4:3; 살전 3:5) 등으로 표현한다. 다른 천사들 및 악령들과 마찬가지로, 사탄은 대단히 지능이 뛰어나고 강력한 보이지 않는 존재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한 책임이 있는 존재다. 사탄을 통해 인류의 첫 조상이 죄에 빠지게 되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의 존재를 사탄과 일치시키지는 않지만, 이후의 성경에서는 이 둘을 등치시키시고 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계 20:2도 살펴보라). 사탄은 과거에도 하나님께 반역을 꾀했으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사역을 하고 있는 존재다. 사탄은 눈이 가리워진 불신자들이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한 복음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드는 존재다(고후 4:4). 게다가 사탄은 교회를 핍박하고(고후 12:7; 살전 2:17–18; 계 2:10), 거짓된 가르침이 편만하도록 노력하는 존재다(요 8:44; 참조. 딤전 4:1).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빠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부추기는 존재이며, 신자들이 불의의 노예가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다(고후 11:3). 사탄은 비난하는 자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믿음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존재다(욥 1:9–11; 계 12:10).
사탄은 강력한 존재이지만, 여전히 피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의 존재가 아니다. 사탄은 다른 악령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아래 완전히 거하는 존재다(욥 1:6–12; 2:1–10).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허용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영광을 위해 그 일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모든 시대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셨다” (『구약 성경 주해』(Explanatory Notes upon the Old Testament), 2:1521).
재림이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사탄과 그의 졸개들을 완전히 물리치실 것이며 그들을 불못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마 8:29; 25:41; 계 20:10).
귀신
귀신은 하나님을 대항해 반란을 저지른 타락한 천사를 가리키며 이 땅에서 여전히 악을 퍼트리고 있는 존재다.
성경은 하나님을 대항해 반란을 저지른 천사를 귀신과 동일시한다. 귀신은 사탄을 따라 불순종을 일삼고 죄를 짓는 존재다(계 12:1–12). 천사처럼 귀신 역시 능력을 가진 지적 존재다. 귀신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귀신도 인간의 모습을 지닌 채 나타나기도 하며 인간을 통해 말하기도 한다(눅 4:31–37). 귀신이 이 세상 속에서 주로 하는 일은 천사와 우주적 전쟁을 치를 뿐만 아니라(단 10:13; 계 12:1–12), 인간을 죄로 이끌고(엡 6:11), 영적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인간을 거짓말로 속이는 역할 또한 감당한다(딤전 4:1). 성경은 귀신이 인간을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모습도 언급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간의 의지를 굴복시켜 조종하는 모습 또한 언급하고 있다(막 5:1–20).
천사의 정확한 수가 감춰져 있는 것처럼, 귀신의 정확한 수에 대해서도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은 귀신의 총수보다 천사의 총수가 더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2:4에 보면 천사의 삼분의 일이 사탄의 반란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어떤 해석자들은 이 본문이 우주적 전쟁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는 본문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이 본문을 통해 이끌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귀신은 사탄의 뒤를 따라가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조차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아래 속해 있다(욥 1:6–12; 2:1–10; 막 5:1–20).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아래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고 거룩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이 세상 속에서 귀신을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귀신은 구속사 가운데서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했다. 특별히 예수는 수많은 귀신의 무리와 조우하셨으며, 귀신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궁극적으로 귀신은 불구덩이 안에 던져지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대항했던 그들의 반란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마 8:29; 25:41; 계 20:10).
인간
인간은 물질적 몸과 영적인 영혼이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다. 즉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몸으로만 존재할 수 없고 또는 마치 서식지처럼 영혼이 몸 안에 사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물질적 몸과 영적인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과 영혼은 서로 구별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서로 분리될 수도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과 영혼은 하나의 연합을 이룬 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온 창조세계의 축소판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죽음을 경험한 뒤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 인간은 천사와 견줄 만한 존재며, 다른 동물과는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는 존재다. 구원의 성경적 소망은 당연히 “심신적”(心身的)이다. 즉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구원은 몸과 영혼 둘 다를 포함하는 구원이다. 인간의 몸이 죽더라도 영혼은 계속적으로 존재하며,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소망은 형체가 없는 채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
몸과 영혼의 구별은 성경 전반에 걸쳐 잘 드러나 있다. 몸의 거룩 혹은 몸의 오염, 영혼의 거룩 혹은 영혼의 오염에 대한 구별이 성경에 잘 드러나 있다(고전 7:34; 고후 7:1). 영혼, 즉 마음은 원하나 육신이 약할 뿐이다(마 26:41). 오직 몸만을 멸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하는 반면, 몸과 영혼 둘 다를 멸할 수 있는 자도 존재한다(마 10:28). 몸의 멸망은 영혼의 구원을 낳는다(고전 5:5).
성경에서는 인간의 영혼을 생물학적인 삶의 원리, 생각의 시작점, 상상력, 기억, 의지, 욕구, 감각, 성품의 궁극적 원리로 삼는다. 창조 기사에 잘 나타난 것처럼 아담의 몸은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 “생령”이 되었다. 성경은 “마음”, “영혼”, “생각”, 그리고 “영” 등을 모두 사람의 내적인 요소로 본다.
몸은 인간이 존재함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다. 몸은 인간이 거하는 땅의 장막이다(고후 5:1). 사람의 몸은 의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롬 6:12–13). 특별히 신약 성경은 우리의 몸이 “주를 위해” 있다고 가르친다(고전 6:13). 우리는 선악 간에 우리의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 구약 성경 역시 죽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시 115:17). 심지어 죽은 후에도 영혼의 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행위나 순종은 이 땅에서의 삶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신자들이 죽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몸과 함께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한다(고후 5:8). 중간 상태는 몸과 분리된 의식 있는 영혼의 상태다. 영혼은 몸과 분리되어도 존재한다. 중간 상태는 인간 존재의 불완전한 상태이므로 신자들의 마지막 상태는 아니다.
최후 심판과 구원은 몸과 영혼 둘 다에 미친다.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몸을 멸망시킬 수 있지만, 인간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마 10: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몸은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할 것이고, 그들의 영혼과 재결합된 후 영원토록 존재하게 될 것이다(요 6:40).
3.5 πλανάω (planaō), 동사. 오도하다, 기만하다, 속이다. 미래 능동태.πλανήσει; 부정과거 능동태. ἐπλάνησά; 완료 능동태. πεπλάνηκα; 부정과거 수동태. ἐπλανήθην; 완료 중간태. πεπλάνημαι. 히브리어 등가: תעה (16), שׁגה (5) 본문 현수직
1) 속이다 —누군가 진실이 아닌 것을 믿도록 하다. 관련 주제: 교활; 사기; 사기꾼; 기만; 배신자;
거짓말; 황홀하게 하다; 기만.
마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요일 1:8 ἔχομεν, ἑαυτοὺς πλανῶμεν καὶ
요일 2:2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요일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계 12:9πλανῶν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 ὅλην—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1)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2) 방황하다 — 정처없이 또는 어떤 지향점 없이 움직이다. 관련 주제: 방황하다; 갓에 대하여.
마 18:12 πρόβατα καὶ πλανηθῇ ἓν
마 18:12 καὶ πορευθεὶς ζητεῖ τὸ πλανώμενον;
마 18:13 τοῖς μὴ πεπλανημένοις.
히 11:38 ἐπὶ ἐρημίαις πλανώμενοι καὶ ὄρεσι καὶ σπηλαίοις
벧전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 느니라
3) 오도되다 (속다) — 합당한 믿음이나 행동으로부터 오도되다.
마 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막 12: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딤후 3:13 καὶ πλανώμενοι.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약 1:16 μὴ πλανᾶσθε,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4) 오해하게 하다 (속이다)제대로 된 믿음이나 행동으로부터 떠나게 하다,
관련주제: 교활 사기 사기뿐 기만 배신자 거짓말, 황홀하게하다. 기만.
딤후 3:13 τὸ χεῖρον, πλανῶντες καὶ
계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계 20: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 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계 20: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5) 믿지 않다 ⇔ 멀리 방황하다, 차츰 또는 천천히 믿지 않다. 지시나 바른 경로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해하여
약 5: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칠십인역(강대훈교수의 마태복음 주석 찾아보기
마 18:13 로 부터 B. 헤매는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 (18:12~13)
마 22:29 로 부터 3.2. 부활에 대한 질문과 대답 (22:23~33)
마 24:4 로 부터 (1) 일반적 사건들 (24:4~8)
마 24:24 로 부터 (2) 교회와 세상에 일어날 일 (24:23~28)
신 11: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 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신27:18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왕하21:9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
시94: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욥 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사 35: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 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 니지 못할 것이며
겔14:9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를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 거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를 멸할 것이라
6) 미혹된
사람은 본성적으로 그 생각이 교만해져 있다. 이에 복음이 능력 가운데 그에게 임할 때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다”(고후 10:5). 겸손한 생각은 본성의 뜰에서 자라나는 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심겨진 새로운 마음에서 자라나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높게 생각하는데 이는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원이 거짓의 빛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빛으로 두더지가 파놓은 흙더미를 보면 마치 산처럼 보인다. 그의 미혹된 지각은 수천수만의 허상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그는 자신에 대해 “허망한 사람이 지혜로울 것이다”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간주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고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다”(욥 11: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옳아 보이기 때문에”(잠 21:1) 그에게는 자기가 택한 길이 옳게 여겨진다. 그는 자신의 상태가 좋다. 이는 그가 더 나은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이 없이 자기 멋대로 산다(롬 7:9). 그러므로 그의 소망은 강력하고 그의 확신은 견고하다. 이는 하늘을 대항하여 높아지는 또 다른 바벨탑이다. 사람의 생각은 어둠의 세력이 붙들어 주는 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생각을 강타해도 여전히 서며 그 안에 균열이 생겨도 신속하게 고쳐진다. 또 어떤 때는 생각 전체가 흔들리지만, 다시 자리를 잡고 일어선다. 오직 하나님이 친히 성령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지진을 일으켜 그의 생각이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지게 하시거나(고후 10:4~5) 또는 죽음이 그를 강타하여 그 토대를 헐어 버릴 때에야 무너진다(눅 16:23).
본성적인 인간이 자신을 높게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외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낮게 생각한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복음의 교훈과 그리스도의 신비는 그에게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실제 삶에서도 그것들을 그렇게 대한다(고전 1:18, 2:14).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세상의 통치 하에 두고 자신의 육적인 이성의 법정 앞에 세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건방진 자세로 하나님의 사역과 그분의 말씀을 견책하고 정죄한다(호 14:9).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일반적인 제약이 풀어지면 사탄이 자유롭게 육의 생각을 마음껏 부추긴다. 그럴 경우 인간의 생각은 마치 들쑤셔진 개미집처럼 의심과 부인과 사악한 사상들이 가득 차게 되어 그것들에 반대되는 그 어떤 주장으로도 절대 정복될 수 없게 된다. 오직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만이 그 지각을 굴복시켜 부패한 법칙들의 반란을 진정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반 정도밖에 말하지 못했지만, 이해의 부패에 대해 충분하게 다뤘기 때문에 당신은 중생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의 이해를 “영광이 그곳에서 떠났으니 이가봇”(삼상 4:21)이라고 부르라. 이를 생각하고 본성의 부패 상태에 있는 당신은 주 앞에서 신음하며 자신의 경우를 주께 고하라. 당신이 영원한 어둠에 갇히지 않도록 의의 태양이 당신에게 비추게 해 달라고 간구하라. 당신의 이해가 생명의 빛이 전혀 없이 본성적인 어둠과 혼란에 쌓여 있다면, 당신의 세상 지혜가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당신의 종교적인 성취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의 재능과 업적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레위기의 나병 환자 경우처럼 “그를 확실히 부정하다고 할 것이요 그 환부가 머리에 있다”(레 13:44)고 선포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필자가 곧 보여 주겠는데, 부패는 마음 안에 있으니 인간의 의지 역시 부패했다.
(a) 정서는 죄가 속임을 통해 미혹하기 좋은 대상에 대해 자주 상상에 사로잡힐 때 미혹된다
정서는 죄가 속임을 통해 꾀고 미혹하기 적절한 대상에 대해 자주 상상에 사로잡힐 때 확실히 미혹됩니다. 죄가 기승을 부릴 때 정서가 쉽게 죄를 따라가면, 죄는 정서를 상상으로 가득 채우고, 그 결과 정서는 죄의 심상과 모양과 표상들로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그래서 그것을 행할 만한 힘이 생기면, 곧 “그들의 손에 힘이 있을” 때 죄를 실행에 옮깁니다(미 2:1). 특히 베드로는 우리에게 그런 자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벧후 2:14)고 말합니다. 즉 그들의 상상은 계속 그들의 욕심의 대상에 대한 표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정서가 죄에 연루되어 죄를 피하려고 시작할 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요한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요일 2:16)고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시각을 통해 영혼에 전달되는 욕심입니다. 여기서 안목(eyes)은 육체의 시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기 원하는 대상들에 대한 의식으로 인해 욕심이 대상에 고정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안목”으로 불리는 이유는, 눈이 외부의 대상들을 내면의 의식에 전달하는 것처럼, 안목을 통해 사실들이 즉시 지성과 영혼에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눈으로 보는 외적 대상들은 이러한 욕심의 원천이 됩니다. 그래서 아간은 죄가 어떻게 자기를 엄습했는지 설명합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수 7:21). 첫째, 아간은 금덩이와 시날 산 외투를 보고, 그것들을 탐냈습니다. 아간은 그것들이 주는 유익 곧 쾌락에 사로잡혀 그것들을 자신의 욕심 속에 집어넣고 그것들을 취하는 것에 마음을 고정시켰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뿌리 깊이 죄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만일 사람이 마음의 상상이 자주 죄와 타협하고 죄에 대한 상상에 빠지는 것을 발견한다면, 이런 사람은 자신의 정서가 은밀하게 죄에 의해 미혹되고 미끼에 걸린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b) 지성이 헛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상상을 은밀히 즐기고 만족스러워 할 때 정서는 미혹된다
정서의 미혹은 지성이 헛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상상을 은밀히 즐기고 만족스러워할 때 더 강해집니다. 결의론자들은 이것을 ‘쾌락에 집착하는 생각(Cogitatio morosa cum delectatione)’이라 부릅니다. 금지된 대상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어쨌든 실제로는 죄악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의지가 죄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영혼이 세상에서 그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지성 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이런 “헛된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커다란 죄악으로 간주하고, 포기할 것을 명령합니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렘 4:14). 이런 생각들은 모두 상상과 정서 사이를 오가며 죄를 끌어들이는 전달자 역할을 하고, 그 결과 상상을 자극하고 정서를 더욱 혼란시켜 죄를 훨씬 심각하게 촉진시킵니다. 아간은 금덩이를 생각하는데, 그 생각으로 인해 금덩이를 더 좋아하고 더 애착을 갖습니다(수 7:21). 금덩이를 좋아하게 됨으로써 그의 생각은 더욱 가열되어 금덩이의 가치와 외형미에 대한 상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조금씩 영혼은 죄로 감염됩니다. 여기서 의지가 주권을 내놓으면, 죄가 실제로 잉태됩니다.
i. 죄의 유혹에 속임을 당한 지성이 의지를 압박하는 경우
그 결과를 통해 우리는 어떤 특별한 죄의 속임으로 인해 지성에서 나온 부패하고 타락한 생각들이, 어떻게 의지를 지배해서 죄에 대해 동의하게 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i) 의지는 죄에 대한 용서가 클수록 은혜도 더 크다는 지성의 부패한 생각에 넘어가 죄에 대해 동의하게 된다
첫째, 의지는 죄사함이 클수록 은혜가 그만큼 더 크고 더 큰 자비가 죄인들에게 주어진다는 지성의 부패한 생각에 넘어가기 때문에 죄에 대해 동의하게 됩니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것은 먼저 지성을 속이고, 나아가 의지로 하여금 악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죄에 동의하는 문을 열어 놓고 맙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마음은 그들의 자유가 “멸망의 종”(벧후 2:19)이 되는 데 있다고 판단하게 할 정도로 이러한 생각이 크게 지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독성은 종종 신자들의 지성도 오염시키고 부패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이 점에 대해 크게 경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은혜에 대한 교리를 악용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다른 주의 사항을 덧붙이고, 이 점에 대해 빛을 던져 주는 성경의 한 본문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신비한 이중적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죄의 최대의 목적은 이 이중적 은혜의 교리와 신비를 왜곡시키는 것으로서, 죄는 이 둘을 서로 어긋나게 함으로써 서로가 방해하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고, 이 두 사실들에 대해 은혜의 영향을 차단시킴으로써 신자에게 아무런 발전이 없도록 획책합니다. 이에 대해 빛을 던져 주는 요한일서 2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이 본문에는 복음의 전체 목적과 용도가 간략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1장 2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즉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나타나심에 대한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1장 7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죄사함 곧 속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수신자들에게 이것을 쓰는 목적과 의도가 무엇입니까?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철저히 죄를 삼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 교리의 유일하고 적절한 참된 목적입니다. 그러나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합당한 상태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그러면 이 경우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죄를 전제로 할 때,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복음 속에 우리 영혼과 양심을 구원할 대책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화해와 중보 속에는 우리를 위한 충분한 구원책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직접 적용되는 복음 교리의 순서와 방법은 이렇습니다. 곧 복음은 먼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그 다음에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죄의 속임이 들어오는데,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일이 벌어지고, 결국 부대는 터지고 포도주는 쏟아져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이처럼 죄의 속임은 복음 진리의 적용 순서와 방법을 바꿔 버립니다. 후자의 의미(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구원)를 먼저 취함으로써, 전자의 의미(죄로부터의 구원)를 철저히 배제시킵니다. 그러므로 “누가 죄를 범하여도 죄사함이 주어지나니”라는 말은 죄가 사람들 속에 즐겁게 퍼뜨리는 사이비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전자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주로 후자 곧 죄에 대한 용서를 제시할 때에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에 제시되어야 할 사실은 후자 곧 죄에 대한 용서가 있다는 것이고, 복음이 전자 곧 죄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하기 위한 의도입니다.
그런데 죄의 속임에 넘어가 깨어 있지 못하고 복음의 참된 목적에서 벗어난 미혹된 지성은 다양한 동의를 얻기 위해 의지를 압박합니다. 그 중 두 가지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i) 시험의 때에 속임을 당한 지성은 부지중에 부패한 생각을 의식 속에 침투시킴으로써 의지를 압박한다
시험의 때에 속임을 당한 지성은 부패한 생각을 불시에 의지 속에 침투시킴으로써 의지를 압박합니다. 시험은 실제로 또는 전체적으로 악하지만, 외관상 또는 일시적으로 선한 것처럼 사실을 위장시킵니다. 적당한 시기에 강력한 도발성을 갖고 시험이 영혼을 엄습할 때, 의지 속에 있는 은혜의 원리는 당연히 시험을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죄에 속임을 당한 지성이 불시에 복음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부패하고 타락한 생각을 의지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의지는 처음에는 주저하고, 이어서 죄에 대한 반대를 약화시키며, 결국 악을 선으로 오인하고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여 죄에 대해 동의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잉태함으로써, 시험의 편을 드는 사태가 벌어지고 맙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후손이 몰렉에게 제물로 바쳐지고, 그리스도의 무기가 마귀를 돕는 데 악용됩니다.
(ii) 속임을 당한 지성은 의지 속에 부패한 생각을 집어넣어 의지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의지를 압박한다
속임을 당한 지성은 의지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의지를 압박합니다. 속임을 당한 지성은 의지를 완전히 지배할 때까지 부패한 생각의 독을 조금씩 의지 속에 스며들게 합니다. 거룩함과 순종을 통해 복음의 교훈을 지킨 결과 영혼 속에는 복음의 구조와 형상이 만들어집니다(롬 6:17). 따라서 복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배교는 주로 거짓된 생각이 영혼 속에 들어와 은혜와 용서를, 죄를 짓는 빌미로 악용할 때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영혼은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지고, 특정한 의무들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일과 특정한 죄들을 피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속임을 당한 지성은 영혼으로 하여금 은혜의 법의 신비(무익한 종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주권적 자비에 의지하여 의무를 다 수행한 것처럼 구원을 바라보고, 그렇게 구원을 얻고 난 후에는 자비를 기대하지 않은 것처럼 전력을 다해 의무를 수행하는 것 곧 자유와 해방을 얻었지만 더 부지런히 종으로 수고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도록 역사합니다. 그런데 죄의 속임은 어떻게든 이 신비를 영혼이 의식하지 못하도록 획책하여 의지가 특정한 죄에 대해 동의하도록 부패시킵니다.
ii) 속임을 당한 지성은 죄에 동의할 때 주어질 이득을 제시하는 것으로 의지를 압박한다
속임을 당한 지성은 죄에 동의할 때 주어질 이득을 제시하는 것으로 의지를 압박합니다. 물론 이것은 지성 자체를 끌어내리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속임을 당한 지성은 절대적인 악을 일시적으로 선한 것으로 보도록 만듭니다. 하와가 그랬습니다(창 3장). 하와는 하나님의 법과 언약과 경고에 대한 모든 생각을 피해 즉시 죄를 범함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질 이득과 즐거움과 이점들을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해 의지의 동의를 구하려고 골몰합니다. 하와는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6절)고 의지에게 말합니다. 이때 하와는 열매를 따먹는 것말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와의 의지는 동의했고, 그래서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순종에 대한 염원은 사라지고, 단지 죄에 대한 즐거움만 고려 대상이 됩니다. 아합도 나봇에게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왕상 21:2). 아합의 미혹된 지성은 이런 생각으로 그의 의지를 압박해서 완강하게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도록 하고, 거짓말과 살인을 저지르도록 획책함으로써 나봇과 그의 가문을 철저히 파멸시켰습니다. 죄책과 성향은 이득과 즐거움에 대한 탐욕 아래 숨겨져 있고, 영혼 속에 죄를 잉태시킵니다.
ii. 미혹된 정서가 의지를 압박하는 경우
지성이 속임을 당하는 것만큼 정서도 미혹에 빠지고, 이 미혹된 정서는 의지로 하여금 죄에 대해 동의하도록 압박함으로써 영혼 속에 죄를 잉태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일으킵니다. 미혹된 정서가 의지의 동의를 통해 영혼 속에 죄를 잉태시키는 과정은 다음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i) 미혹된 정서는 포악한 욕심의 준동이나 적당한 시험을 통해 의지 속에 불시에 어떤 충동이나 감정을 집어넣음으로써 죄에 동의하도록 의지를 압박한다
어떤 포악한 욕심의 준동이나 적당한 시험을 통해 의지 속에 불시에 어떤 충동이나 감정을 자극하고 주입시키고 이끌어 냄으로써, 미혹된 정서는 전체 영혼을 흥분시키고, 죄에 대해 동의하도록 의지를 압박합니다. 다윗이 나발을 대할 때가 그랬습니다. 미련한 고집쟁이 나발이 극도로 무가치한 행동으로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자극하자 다윗은 순식간에 포악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삼상 25:13). 다윗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나발의 온 가족을 몰살시키기로 결심합니다(33~34절). 하나님이 은혜로 역사하시지 않았다면, 다윗은 죄를 결심하고 죄에 대해 동의한 순간에 복수와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미혹되고 헝클어진 정서는 불시에 그의 의지 속에 침투하여 참혹한 피를 흘리는 죄를 잉태시키도록 의지의 동의를 강요한 것입니다. 아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사는 분노에 차자 선지자를 가혹하게 학대했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빠지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죄를 잉태시키는 미혹된 정서를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의지의 동의가 갑자기 이루어져 죄가 갑자기 잉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죄 자체가 실제로 낳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영혼은 죄책을 감당해야 합니다.
ii) 미혹된 정서는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의지를 유혹함으로써 죄에 대해 동의하도록 의지를 압박한다 이때 미혹된 정서는 죄에 대해 무감각하도록 기반을 제공하고 의지를 장악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 37:4). 형들은 아버지가 자기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해서 동생인 요셉을 미워합니다. 요셉이 꾼 꿈과 같은 경우를 통해 그들의 정서는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미혹됩니다. 이 정서가 형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자 동생을 죽이기로 결의할 때까지 그들의 의지를 유혹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부당하고 불법적인 행동에 대한 의식, 연세가 많은 아버지에 대한 염려, 형들의 영혼의 죄책감 등은 사라지게 됩니다. 형들의 의지가 동생을 죽이는 일에 동의할 때까지 동생에 대한 형들의 미움과 시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패한 정서가 이처럼 점진적으로 의지를 장악하여 영혼을 죄로 물들게 하는 과정에 대해 지혜자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 23:31~35). 이것은 죄가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영혼을 파멸시키는 공통적인 방법입니다. 죄가 하나의 시험을 통해 정서를 혼란시키고, 의지로 하여금 죄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하여 영혼이 의무를 게을리하거나 빛 가운데 거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에게서 철저히 멀어집니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는 인간의 영혼이나 육체에 속한 모든 속성을 갖고 계셨다. 아니 그 이상을 갖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성이 지닌 모든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다. 오직 죄만 없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의 본성이 지닌 연약함’이라고 표현했다. 추위, 더위,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 연약함, 고통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연약함을 모두 가지고 계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연약함에는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본성적인 것도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만 있는 개인적이고 고유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나면서부터 다리를 절거나 눈이 보이지 않거나 병약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쉽게 우울함에 빠지거나 허약하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은 아니었다. 그분의 몸은 성령이 순결한 동정녀의 피로 지으셨기 때문에 분명히 각 기관과 부분들이 최고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제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아들들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분의 얼굴은 “단지 약간만 드러내어도 베일 속에 가려진 너무나 눈부신 별처럼 그 광채가 제자들의 마음을 황홀케 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 빛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수 있었다. 또한 그분의 빛은 적들도 놀라움과 경외감에 빠지게 해 비틀거리다 땅에 쓰러지게 할 정도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개인적인 연약함을 지니신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본성적이고 선한 이성을 지니셨다. 사실 그분은 인간 자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신성과 연합된 인간의 본질을 취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구주가 왜 반드시 인간이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구주가 우리 죄로 인해 고난당하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성만을 지닌 하나님은 하실 수 없는 일이다. 둘째, 우리 구주가 율법에 순종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을 주신 분에게는 합당치 않은 일이다. 셋째, 우리 구주가 하나님의 공의를 어겼던 자와 같은 본질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 15:21). 넷째, 또한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히 4:15, 5:2).
4. 역사적 정황(배경연구) 구절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 저자와 최초 독자들의 동일한 언어와 문화권
4.1 마가신학
복음서는 당시의 대부분의 문서들처럼 큰 소리로 읽도록 기록되었을 것이다. 헬라와 로마세계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던 초기의 시도들은 그분을 “신적인 사람”로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두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로마 역사 속에서 죽음에 도전했던 전설적인 영웅들에 대한 뵤사와 유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가는 이것을 예수에 대한 편파적인 이해라고 보았다. 그는 예수를 신적인 이적의 수행자로 강조하면서 동시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수치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 로버트 건드리는 예수가 능력있는 분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는데 예수는 일관되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심으로 그분이 환경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임을 보이셨다. 마가는 예수의 일생과 그의 제자들의 삶속에 나타난 예수의 영광과 십자가의 중심성이라는 두가지 핵심적인 진리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8:31~9:1) 랄프 마틴은 마가복음을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장 균형있게 강조한 책으로 보았다. 마가가 이러한 균형을 이루려고 시도했을지라도 예수의 죽음이 가진 최고이 역할과 마가가 다른 복음서에 비교해서 더 많은 관심을 여기에 쏟고 잇는 것을 볼수 있다. 마가의 독특한 기독론적 명칭들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사이의 이러한 균형과 맥락을 같이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비록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승격된 역할을 강조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등장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표제의 일부를 형성하며 예수가 죽으실 때 로마 백부장의 결정적인 고백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예수의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되실 때 사용된 “아들”이라는 명칭은 마귀에 의해서도 사용되는데 예수에 대한 마귀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보여준다. 마가복음의 두드러진 주제는 “메시아 비밀”이다. 다른 복음서들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더욱 빈번하게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설하지 말도록 분부하신다. 마가는 “은폐”를 만듦으로써 왜 초대교회 시기에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 자신은 그러한 견해를 주장할 수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자신을 진정으로 그리스도라고 믿었을 것이며 단지 이러한 호칭을 받아들이거나 섣부른 열심 때문에 자신의 사명이 무너지는 것을 조심하셨을 것이다. (메시아 비밀)왜냐하면 당시 일반이들이 품은 기독론적인 기대에서는 고난 당하시는 메시아를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의 10:45야말로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여정을 요약해서 강조해 주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대속물이라는 용어는 시장의 노예들을 속량하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대신해서 죽으셔야 하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의 필요성을 강조해준다. 고난 받는 종의 개념은 비록 마가가 직접적으로 사용한 적은 없지만 예수의 성품과 사명이 가진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면을 가장 잘 요약해서 설명해준다. 마가복음은 왜 예수가 죽으셨는지에 관한 책이다. 또한 책 전체를 이끄는 주요하고 전략적인 본문들에 나오는 예수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시대의 계시적 전환점”이라고 역설하는 것, “마귀의 권세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강조하는 것, 예수를 믿는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형태의 영적 시각이며 이방인들은 영적으로 맹인으로 남는 것이라고 서술하는 것, 그리고 베드로를 주로 부정적인 시각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경건한 자가 아닌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 와서 “그들을 위해 죽음을 맞이했”음을 그리고 그리스도가 먼저 유대인을 위해 그러나 다음은 또한 헬라인들을 위해 왔고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동일한 상태의 유대인과 헬라인의 통합은 “모든 음식들”을 깨끗하게 함을 통해서 음식 규례를 따로 구별해 놓음으로써 가능해졌다고 강조한다. 마가의 신학의 강조점들은 예수의 죽음, 부활 이후에만 의미가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여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상에서의 생애에 대하여 쓰고 있는 것이 강조점이다. 예수 신학을 위해 마태와 누가가 마가를 일차 자료로 사용했을 점을 생각할 때 마가가 유일하게 독특한 점들은 많이 없을것이라는 것이다.
4.2 메시아 비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본 이후에 마가복음은 자주 예수가 얼마나 그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얘기하는지를 강조한다. 비록 마태와 누가 모두 이현상의 몇가지 예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둘은 마가 만큼 그것을 자주 활용하지는 않는다. 이 주제가 처음 나타나는 곳은 귀신 들린 자가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알아보았을 때 그가 그 안의 더러운 영에게 잠잠하라고 말하는1:25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그를 그 남자에게서 모두 쫒아낸다. 예수가 계속해서 더러운 영들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나병환자를 고친고 난후 예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한다. 소위 메시아 비밀에 대한 주제는 5:43에 계속 나오는데 여기서 예수는 거라사 광인에게서 귀신을 내 쫓고 나서 다시 바닷가 맞은편 유대 쪽 지역인 가버나움에 돌아와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지만 이후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는 완전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일을 한다. 예수가 고침을 받은 맹인에게 벳새다 마을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말하는 이러한 본문들의 목록에 같이 포함시켜야 할지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조용히 하라고 명한 것 자체는 없지만 만약 마을을 피해서 집으로 갔다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마을 사람들에게 즉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변형된 이후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이 마가복음에서 침묵에 대한 주제가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마지막이다. 그날에 대한 공통적인 유대인의 기대가 정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메시아에 대한 것이었다면 치유와 축귀는 쉽게 너무 이른 시점에 등장하여 왕적 승리주의로 잘못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요한도 오천 명을 먹인 사건 이후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능한 한 숨기신다는 것은 첫째 “메시아는 다윗계보의 왕이었으며 즉위식 때에야 공식적으로 그러한 칭호를 받았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최종저그로 십자가에서 ‘관를 쓰셨다.’ 둘째로 예수님의 사명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메시아에 대한 정치적 견해들과도 완전히 달랐다.예수님의 메시아직은 자신의 사명의 특성을 토대로 그 단어를 규정하기까지는 그분에게 부적합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사명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비추어 볼때에만 이해될수 있다. 더 나아가 가능한한 비밀을 지키려 한 예수님의 시도는 몇몇 저명하 구약 선지자들과 비교할 수 잇다. 몇몇 선지자들은 종종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사명만을 완수 하기 위해서 은밀하게 일했다.
4.3 기록 연대
외부적 증거는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클레멘트가 다음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성령에 의해 복음을 전하자 그 곳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마가에게 베드로이 말을 기록하도록 부탁하였는데, 마가는 오랫동안 베드로를 따라 다녔으며 그가 한 말을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여 자신에게 요청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나누어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드로는 그것을 엄하게 금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크게 장려하지도 않았다고 (교회사 6.14.6-7)
마가 저작설의 가장 이르면서도 가장 중요한 증거는 유세비우스에게서 발견되는 파피아스의 증거와 관련있다. (교회사 3.39.1~17)
알렉산드리아의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록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거나 행하시거나 행하신 것들을 순서대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마가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주님을 따라니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대로 마가는 후에 베드로를 따라다녔다. 베드로는 주님의 담화들을 순서에 따라 전해 준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었다. 따라서 마가는 어떤 잘못도 저지른 것이 아니며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몇가지를 기록했다. 마가는 대단히 주의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이 들었던 것은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또 거짓된 것을 진술하지도 않았다. (교회사3.39.15)
한편 이레네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떠난”후에 “베드로의 제자이자 번역가 마가 역시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에 대해 그가 기록한 것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했을 때는 베드로가 이미 사망한 것으로 믿었으리라고 추정할수 있다. 이레니우스는 마가복음이 베드로가 사망한 이후에 전달되었다는 것으로 추정한다. 마가가 베드로 생전에 기록하였다면 그리고 초대교회의 전승대로 베드로가 주후 68년 이전에 네로의 치세에 순교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마가는 아마도 이른 시기에 그의 복음을 저작했을 것이다. 정확한 집필연대는 알기 어렵지만 60년대 기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추측이다. 가장 일반적인 주장은 마가가 주후 64년경 로마에서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썼다는 것이다. 마가의 저작 장소는 가장 빈번하게 로마라는 주장이 있다. 마가의 청중은 아마도 팔레스틴 외부에 살고 있었을 것이며 대부분 유대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 러 주장들 중 로마일 가능성이 가장 많지만 확실하지 않다.
4.4 기록 동기, 제자들의 실패
교회에서 마가복음을 읽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그들이 주님으로 예배했던 예수님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마가는 이 이야기들을 연결해서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전기를 만든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세력과 싸우실 때 권능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고난도 겪으셨다는 것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알기 원했다. 마가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으며 그들의 증거와 믿음을 통해 역사 하시리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한 공동체에게 글을 썼다. 그들은 또한 그 증거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기억해야 했다. 그들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실패를 보면서, 만일 그들이 아직 주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급진적인 생활방식대로 살지 못했다면, 주님은 지금도 그들의 그러한 수준의 헌신에 이르도록 돕기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상기 할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이 상황으로 보아 여기서 마가가 글을 쓰게 된 것은 로마의 그리스도인이 네로 치하에서 주후 64년에 시작된 고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많다.
4.5 배경
4.5.1 기록 배경
마가의 독자들은 다양한 구약 인물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유대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무런 설명없이 언급되는 이사야(1:2,7:6,7), 모세(1:44,7:10,9:4,5) 다윗(2:25,10:47~48,11:10), 엘리야(6:15,8:28), 엘리야와 모세(9:4,5), 그리고 12장 26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및 야곱등에 대한 언급들에서 알수 있다. 마가의 독자들은 이스라엘의 통치 중심부가 산헤드린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14:55,15:21) 독자들은 상징주의, 특히 예수가 열두 제자를 선택한 것의 의미를 이해 할 것으로 기대된다.(3:14~15) 게다가 독자들은 유대교의 절기들, 이스라엘의 삶속에서 안식일의 중요성, 설명 없이 소개되는 다양한 유대교 집단들, 그리고 다양한 유대교 전통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그 전통들의 중요성들을 알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과연 마가복음은 어떤 배경에서 탄생되었을까? 마가복음의 내적 증거를 고려한다면 로마를 기록 장소로 보는 견해가 보다 더 타당하다. 때문에 마가복음이 의도하는 독자들이 지리적 위치와 관련하여 전승에 따르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록했다고 말한다. 초기 교회 전승에서 발견되는 마가복음과 로마와의 연관성은 상당히 중요하며 여러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마13:9~13 및 다른 곳에서 있는 경고들의 복음서 독자들에 대한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회당과 국가 모두로부터의 박해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이 국가는 유대 전쟁동안 팔레스타인 교회에 대한 박해로 추정되기 보다는 네로시대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교회가 형성되기 이전임을 보여주는 제자들에 대한 부정적임 묘사가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강조한 것 등은 갈등하는 공동체(수신자들)에게 그들 역시 핍박에 맞서 승리할 수 있고 그 승리는 고난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 성도들이 주후 49년에 로마로부터 추방된 것을 생각할 때 공동체 내의 점증하는 긴장과 그들이 50년대에 귀환한 이후의 정부와 주후 64-68년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핍박등으로 인해 로마의 성도들은 그와 같은 위로와 격려이 메시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4.5.2 사두개인
명칭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 동안 유대 사상의 주요한 세 학파 가운데 하나. 사두개인들은 모세 율법에 대한 엄격한 준수와 부활과 영혼의 두 개념의 거부로 유명하다
심지어 어원 불확실, 사독계열이라는 것도 불확실, 제사장적인 귀족주의 , 현실주의자들, 로마의 지배권 수용, 기득권 수호, 부활, 심판, 영생, 천사, 귀신존재 부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시떨기나무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 또한 스데반은 가시떨기에서 나타나서 그러한 현상을 나타나게 한존재가 천사라는 것을 말한다.
행 7:29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32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사두개인"이라는 이름에 대한 다양한 설명 중, 어느 것도 공감대를 얻거나, 철학적인 문제가 없는 것은 없다. 한 가지 제안은 사독계의 이름에서 "사두개"가 파생됐다는 것이다. 대제사장 사독은 다윗 및 솔로몬의 통치 시 섬겼으며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온 후 대제사장은 그의 후손들에게만 이어졌다(삼하 15:24, 27절, 29절, 35절, 17:15, 19:11, 왕상 1:39, 대상 6장, 9:10–13, 겔 44:15). 이 접근 방식은 사두개인과 제사장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가정한다. 또 다른 설명으로, 이름이 히브리어 형용사 "정당한" 또는 "의로운"(צַדִּיק, 짜디크)에서 파생됐다는 것이다. 세 번째 설명으로, 그 이름은 원래 사해 사본에 나온 "사악한 제사장"이나 "번지르르한 것을 추구한 이들(Seekers of Smooth Things)"처럼 모호하고 암시적인 명칭이었다. 이전 세기들에서 이 이름의 잠재적인 기원은 AD 1세기의 사두개인을 이해하는 데 거의 아무 역할도 못한다(Goodman, “Place of the Sadducees,” 141; Saldarini, Pharisees, 225–26). 요세푸스의 주장은(Josephus, Antiquities18.11) 너무 일반적이어서 그룹의 기원을 파악하는데 별 역할을 못한다. 사두개파는 하스몬 시대에 시작됐을 수 있다. 요세푸스는 요한 히르카누스가 바리새인을 이탈해 사두개인이 된 것을 설명하는데, 이는 사두개파가 우세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Josephus, Antiquities 13.288–98).
사두개파는 사독계의 이름과 혈통과 관련한 성직자 집단일 것이다(Stemberger, “Sadducees,” 430–31; Baumbach, “Sadducees,” 179–80).
신약
신약은 8번의 다른 상황에서 총 14번 사두개인을 언급한다. 마태복음이 복음서 중 가장 많이 사두개인을 언급한다(마 3:7; 16:1, 6, 11–12절; 22:23, 34절; 비교, 막 12:18; 눅 20:27).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독사의 자식들"(마 3:7)이라고 물리치면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고 덧붙인다. 마태복음 16:1 에서 사두개인은 다시 바리새인과 짝을 이루어 예수에게 하늘의 표징을 요구한다(마 16:1–4). 이어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가르침에 주의하라고 경고한다(마 16:5-12). 마태복음 22:23–34 / 마가복음 12:18–27 / 누가복음 20:27–40의 공관복음 전승에서, 복음서 저자들에 따르면, 사두개인들은 사두개인은 부정했던 부활에 대해 예수에게 질문한다.
사도행전은 세 구절(행 4:1, 5:17, 23:6-7)에서 사두개인을 언급한다. 이들은 민족의 지도자 중 하나로 등장하며, 두 구절에서는 이들의 부활에 대한 거부가 두드러지에 표현된다. 이런 이야기는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사도행전 4:1에서 사두개인은 제사장들과 성전 관리자들과 합세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한다. 이 구절에 따르면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관리자들과 구분되는 무리이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4:5-6에서는 제사장이 사두개인이라는 어떤 암시도 드러내지 않는다. 베드로와 요한에 대한 사두개인의 주요 관심사는 부활 자체가 아니라 예수 를 통해 부활이 왔다는 주장이다(행 4:2, 7절). 사도행전 5:17-18에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은 사도들을 또 다시 체포한다. 사도행전 5:17은 대제사장을 사두개인으로 식별하지 않으며, 이 특별한 상황에서 사두개인이 대제사장과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 사두개인에 대한 마지막 언급 인 사도행전 23:1-10에서는 유대인 공의회에 선 바울의 변호를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부활에 관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간의 신학적 차이를 활용한다.
4.5.3 사두개인들의 질문 유대인의 책 토비트 인용
토비트는 눈이 멀게 된 후 그의 아들 토비아스를 먼 메대로 보내 돈을 되찾아오도록 했다. 가는 길에 토비아스는 변장한 대천사 라파엘을 만났다. 라파엘은 토비아스에게, 일곱 남편을 두었던 그리고 악마 아스모데우스에게 고통받는 과부인 사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라파엘은 그후, 토비아스가 사라와 결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아스모데우스를 무찌르도록 토비아스를 도왔다. 토비아스와 사라는 토비트에게 돌아왔고 라파엘은 마지막 행동으로서 토비아스에게 어떻게 하면 토비트의 실명을 치료할 수 있는지 말해 주었다.(제 2 정경, 외경 토비트)
12 And now, Lord,d I turn my face to you, and raise my eyes toward you.
13 Command that I be released from the earth and not listen to such reproaches any more.
14 You know, O Master, that I am innocent of any defilement with a man,
15 and that I have not disgraced my name or the name of my father in the land of my exile. I am my father’s only child; he has no other child to be his heir;
and he has no close relative or other kindred for whom I should keep myself as wife.
Already seven husbands of mine have died. Why should I still live?
But if it is not pleasing to you, O Lord, to take my life, hear me in my disgrace.”
An Answer to Prayer
(Num 36:6–9)
16At that very moment, the prayers of both of them were heard in the glorious presence of God. 17So Raphael was sent to heal both of them: Tobit, by removing the white films from his eyes, so that he might see God’s light with his eyes; and Sarah, daughter of Raguel, by giving her in marriage to Tobias son of Tobit, and by setting her free from the wicked demon Asmodeus. For Tobias was entitled to have her before all others who had desired to marry her. At the same time that Tobit returned from the courtyard into his house, Sarah daughter of Raguel came down from her upper room. 그리고 이제 주님, 당신께 제 얼굴을 돌립니다.그리고 당신을 향해 내 눈을 들어.
내가 땅에서 풀려나도록 명령하시오 그런 비난을 더 이상 듣지 마십시오. 오 스승님, 제가 결백하다는 것을 아시지요? 사람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내가 내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나의 포로된 땅에 있는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나는 아버지의 유일한 자녀입니다. 그는 상속인이 될 다른 자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까운 친척이나 다른 친척이 없습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아내로 있어야 합니다.
이미 일곱 명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왜 아직 살아야 합니까? 그러나 주님, 제 목숨을 거두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불명예 속에서 내 말을 들어라.”
기도에 대한 응답
(민수기 36:6~9)
바로 그 순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두 사람의 기도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라파엘은 두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라구엘의 딸 사라를 토빗의 아들 토비아와 결혼시키고 악귀 아스모데우스에게서 그녀를 해방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토바야스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먼저 그녀를 가질 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빗이 뜰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에 라구엘의 딸 사라가 다락방에서 내려오니
4.5.4 수혼제
고대 근동에서의 수혼제
바빌론, 앗시리아, 히타이트, 누지 및 우가리트를 포함하여 많은 고대 근동 사회는 수혼제를 실시했다. 이 관습은 현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도 존재했다(Falusi, “African Levirate,” 300–08). 고대 근동 대부분에서 그러한 관습의 목적은 가족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여성이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규정이 존재했고 일부다처제와 입양을 통해 자손의 증식이 가능했지만, 다양한 상황들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수혼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Davies, “Rights,” 138–41).
구약의 수혼제
구약의 세 구절에서 수혼제를 언급한다.
1. 유다의 자녀들: 유다의 아들 오난은 레비르(남편의 형제)로서의 의무를 이행해서그의 형제의 과부인 다말을 임신시키는 것을 거부한다(창 38:6-10). 오난이 다말과 결혼할 것에 대한 유다의 기대는 그 관습이 이후의 법령보다 앞섰다는 것을 암시한다(참조, 신 25:5–10).
2. 신명기의 율법: 신명기는 도덕적 의무로서 형제의 과부와 결혼해야하는 남자의 의무를 제시한다(신 25:5-10). 형제가 이 의무를 거절하면 과부는 그의 신을 제거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카마이클은 이 의식이 가족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생식력을 사용하지 않는 모습을 상징한 완곡한 성적 표현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Carmichael, “Ceremonial Crux,” 329). 하지만 마노르는 이런 모습을 소유권과 수치의 단순한 상징으로 보고 카마이클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Manor, “Brief History,” 133–34).
3. 룻기: 룻기의 이야기는 룻이 죽은 남편의 친족 중에서 새 남편을 구해야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이야기에서 룻은 상황의 변화로 인해 신명기 25장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수혼제의 기대는 먼 친척에까지 확장된다. 룻대신 보아스가 신을 교환하는 일에 참여한다. 이 경우 신의 교환은 재산을 법적으로 이전하는 것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룻 4:7–8). 이 이야기는 고인의 재산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고인의 과부와 결혼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룻 4:5).
더 넓은 고대 근동에서는 이스라엘의 수혼제의 사례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히브리 관습은 가나안의 전통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출처가 무엇이든 이 수혼제는 혈통을 통해 고인의 존재를 보존하고 과부의 권리를 지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Burrows, “Marriage in Israel,” 25–30).
신약에서의 수혼제
신약에서 수혼제를 가장 명확하게 언급한 곳은 마태복음 22:23–33, 마가복음 12:18–27, 그리고 누가복음 20:27–40이다. 사두개인들은 내세에 대한 전통적 관점에 도전하기 위해 단일 가문 내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가상의 수혼제에 관해 예수에게 질문한다. 예수는 내세의 결혼에 대한 어떠한 역할도 거부하고 사두개인의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무지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포드는 고린도전서 7:36–40에서 바울이 수혼제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Ford, “Levirate Marriage, 361–65).
5. 문학적 정황
6.1 병행구절
마태복음22:23~33(11절)
마가복음12:18~27(10절)
누가복음20:27~40(14절)
배경 21장 예루살렘 입성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ㄱ)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ㄱ)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배경 11장 예루살렘 입성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ㄴ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ㄱ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배경 19장28절 이하 예루살렘 입성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ㄱ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ㄴ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6.1.1 누가복음 병행구절 구조분석(누가복음 20: 27~40)
마태복음에서 사두개인들은 더 자주 등장하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사두개인이 오직 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누가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부인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들이 부활을 부인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모세오경을 포함(출6:4,15:1민 15:31 ,18:28, 신 31:16)하여 부활의 소망을 지지해 주는 본문(욥19:26,시16:9,11, 사26:19)들에 대해 말한다. 랍비들은 예수가 사용한 출3:6절을 부활을 증거해 주는 본문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 뿐 아니라 또한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단순히 영혼이 죽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의 부활에는 영혼과 몸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수혼법과 관련된 사례를 묘사하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한다. 수혼법은 자식이 없이 죽은 남자의 대를 잇기 위한 것이다. (신25:5, 룻4:1~12, 미쉬나의 ‘예바모트 ’Yebamot’)는 수혼법에 대해 다루는 중요한 문헌)만약 어떤 남자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형수를 자기의 아내로 맞아들여서 죽은 형을 위해 자식을 낳아야 했다. 그리고 그 자식은 죽은 형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 율법의 목적은 죽은 형을 휘해 후손을 잇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이 율법이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문제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 율법 규정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며 깊이 묵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명히 어떤 가족이 많은 집아네서 죽은 형을 대신해서 동생들이 차례대로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결혼이 이어진다. 이 사례는 토비트3장8절, 6장9~12 및7장11~13절과 평행을 이룰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논지는 그들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아무도 상속자가 없었다는 것이 강조점이 아니다. 사실상 사두개인들은 자식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관심을 갖는 대상은 남편이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한 가정의 일곱 형제가 차례대로 한 여인을 계속해서 아내로 맞이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빚어낸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 상황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침내 그 여인도 죽었다는 말로 비극적으로 끝난다. 따라서 이 가정은 상속자가 없는 것이다. 일곱형제들이 한 여인을 아내로 취했지만 한명의 자식도 남기지 못했다.”이 세상에서 일곱명의 남편을 두었던 이 여인은 과연 사후의 세상에서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이질문에 대한 배후에는 많은 전제들이 있다. 1) 이 질문은 저 세상에서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고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가정한다. 2) 이 세상에서의 혼인과 마찬가지로, 저 세상에서의 혼인 관계도 일부일처제라고 전제한다. 3) 이 여인이 처해 있는 딜레마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사실상 사두개인들은 이 딜레마에 대한 적합한 대답이 전혀 없다고 확신하며 예수에게 질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여인에게 이 세상에서 일곱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떻게 이 여인이 저 세상에서 오직 한명의 남편만있을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대답은 두 시대를 대조한다. 이 대조를 통해 그 여인의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오는 시대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의 삶은 전혀 다른 존배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 이전의 현실의 모습으로써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누가의 판본은 마태오 마가의 평행 본문과 훨씬 짧다 누가는 사두개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했다는 예수의 책망을 언급하기 않는다. 오직 누가만 이세상의 자녀들의 삶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누가는 여기서 어떤 추가 자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0:35절의 예수는 부활한 다음에 인간관계에 변화를 강조하면서 두가지 사항을 지적한다. 1) 모든 사람이 부활한 다음에 하나님의 복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저 세상에 속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이어지는 삶에서 하나님의 복에서 제외된다고 밝혀준다. ‘저세상’이라는 언급은 오직 신약 성경에만 나타난다. 아마도 그 표현은 어떤 경고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다른 본문들을 모든 사람이 부활하지만 그들이 모두 부활의 새로운 삶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혀준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오직 의인들의 부활에 대해서만 말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의인들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 언급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그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조시켜준다. 하지만 누가는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부활 이후의 삶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과 관련해서 오는 세상에서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과 다르다. 자녀를 낳아서 가정을 이루고 가계를 이루어 가는 결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부활한 다음에는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의 삶을 새로운 질서 체계를 지니고 있다. 이 질서 체계안에서 결혼의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부활의 부조리를 드러낼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그 질문의 유효성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예수는 자신을 진퇴양난에 빠지게 하려던 사람들을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은 오직 누가만 “저 세상과 및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 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라고 언급한다. 이 의미는 마태와 마가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마가의 “사람이 죽으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 대해 말한다. 부활의 살메 더 이상 결혼이 필요 없는 지는 부활의 삶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한 사람들을 천사들과 같다. 유대교에서 천사들은 음식이나 결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천사들과 비교하는 것을 통해 예수는 사두개인들이 부인하는 또 다른 가르침을 들려준다. 곧 천사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활한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오는 세상에서의 인간관계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관계와 다르다. 새로운 삶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 및 “부활의 자녀”가 될 것이다.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르는 것 욥1:6, 38:7, 시29:1, 89:6) 부활에 대한 사두개인들을 이해는 이세상에서의 삶의 구조와 질서에 기초하고 있다. 오는 세상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다. 따라서 다른 부모관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누가는 ‘천사와 동등’이요 라고 하면서 마태 마가의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같은 표현을 하며 오직 누가만 부활하는 사람들은 다시 죽지 않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부활의 자녀임을 강조한다.예수는 사두개인들이 최고의 권위라고 인정하는 토라를 기초하여 부활에 대해 설명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토라에 속한 어떤 본문이 부활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을 것이다. 예수는 모세가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것을 계시해 주었다. 만약 구약시대의 족장들이 단지 죽은 상태로만 머물러 있다면 약속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 일 수 없다. 여기서 예수는 족장들이 죽은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실현되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시기 위해서 부활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38절예수는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과 관계하신다는 설명을 보충해 주신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족장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또한 그들이 약속이 이우어지는 것을 경험하려면 그들을 반드시 부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다. 모든 생명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절대 주권을 지니신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며 돌보신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나 오는 세상에서의 생명이거나 사실상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주어진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며 그는 영원한 생명을 지닌다.
40절 누가는 예수가 자기의 대적자들을 침묵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들을 더 이상 예수에게 질문을 제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을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들을 예수의 지혜와 지식을 도저히 감다하지 못한다. 예수는 여전히 모든 사건을 주도하고 잇다. 이제까지 가능한 모든 무리들이(바리새인들, 민족주의자등,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백성의 지도자들)가 예수를 ejwdp 걸리게 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예수의 사역, 정치, 및 신학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모든 논쟁에서 예수는 유대교 자기의 대적자들을 압도했다. 그들의 공개적으로 예수에게 질문을 제기해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아무것도 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논쟁은 예수가 놀라운 지식, 지혜 및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내 주었다. 이와 같은 논쟁들이 가져온 결과는 명백하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이끌수 있는가. 유대지도자들인가, 아니면 예수인가. 자신의 놀라운 답변들을 통해 지혜의 교사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답변들을 통해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지혜를 전한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오직 누가만 예수가 자기 대적자들이 아무것도 어 물을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마태와 마가는 다음에 이어지는 추가 논쟁 큰 계명에서 이와 같은 언급을 한다. 누가는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예수의 비슷한 가르침을 이미 소개 했다. 이와 같이 세 공관복음서 저자는 각자가 선택한 부분에서 예수가 모든 논쟁에서 자기의 대적자들을 압도한것에 대해 요약적으로 언급한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도전은 예수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예수는 가장 진정한 선생님이다.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예수의 존재, 권위, 우월성을 깨달아야 한다. 부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예수가 다시 올 때 부홀하여 하나님을 대면하게되며 하나님에 의해 각 사람의 믿음과 삶이 평가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모든 그리스도은 부활이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고대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날마다 신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장차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과 이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부활 이후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다르다. 앞으로 부활은 반드시 일어난다. 예수가 다시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으과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오직 하나님에게 합당하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들만이 의인들의 부활의 삶에 동참할 것이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반드시 부활의 삶에 실질적으로 동참 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내 맡긴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사두개인들처럼 우리는 부활 한 후에는 본문에서 언급되는 여인이 어떤 사람을 자기 남편으로 결정해야 할지 고민한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부활의 삶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를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2 문맥분석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에 대한 복음의 시작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막1:1~13 단락은 마가복음 전체를 들여다 볼수 있는 렌즈의 역할을 한다. 이 복음의 시작은 세례 요한으로 시작하는데, 세례요한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면서 오시는 이를 위해 광야에서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사역을 했고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으라 요청함으로써 자기 뒤에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이를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킨다. 마가는 예수의 무대 등장과 예수가 세례 받은 것에 대해 말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예수위에 내려오며,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를 통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는 증언을 하신다. 그리고 예수는 사탄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저항함으로 복음의 시작을 전진한다. 예수의 복음은 가버나움에 초점을 맟추고 일련의 갈등 이야기 (2:1~12,15~17,18~22,23~28, 3:1~6)들을 포함하며 마가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신의 독자들에게 알려주며 자신으 제자들과 동행하는 예수를 묘사한다. 이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론적 뼈대 안에 두고 있다. 선지자들 중 마지막인 요한이 체포된 후 예수는 갈릴리로 돌아가서 새 시대의 시작 및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 예수의 무대등장과 하나님ㅇ 나라의 도래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예수는 자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다. 왕이 왔기 때문에 그 나라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격상 하나님 중심적임 뿐 아니라 그리스도도 중심적이기도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온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d 한다는 것은 절대 필요한 일이다. 마가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복음 요약은 독자들이 하나님께 했던 헌신과 하나님이 독자들에게 하셨던 헌신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의도되었다. 마가복음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복음을 믿도록“ 도전 할 것이다.
가버나움과 갈릴리를 무대로 하여 예수는 따르는 자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들과 치유의 능력과 죄사함의 권능들을 소개한다.(2:1~3:6)
제자도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포함한다. 제자도의 부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의 자신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속과 새 언약을 가져올 것이다. 예수의 가버나움과 갈릴리의 사역은 예수가 귀신을 쫒아내는 사역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예수의 어떤 독특한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한다. 예수는 귀신의 집을 강탈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였다. 더러운 귀신들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초자연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귀신들은 마가 기독론의 대변자들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거룩한자“ 이기 때문에 예수는 말하기만 하면 되고 귀신들을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예수는 더 큰 능력을 가지고잇으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사탄의 지배를 강탈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요한보다 큰 이시며, 하늘과 귀신들이 모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마가는 병을 고치는 예수의 보편적 능력을 보여준다. 신체적 질병과 귀신 세계는 모두 예수의 능력에 복종한다. 예수가 보여준 권위와 능력, 표적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예수의 능력은 예수의 명성이 온 갈릴리에 퍼져 나가게 했다. 마가는 자신의 독자들이 이를 알고서 격려받기를 의도한다. 그들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는 예수의 전파 및 귀신 축출, 나병환자 치유, 중풍병자, 손마른 사람 치유와 죄사함 대한 엄청난 반응을 통해 입증되었다.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서 예수에 대한 엄청난 경외감과 놀람으로 예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귀신 축출은 예수가 실제로 자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분 임을 그들에게 증거한다.(1:27,32~34,39)
예수의 사역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에서 이방인들, 부정한 세계에 대한 예수의 사역과 두로 지방의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는 것과 데가볼리에서 돌아오자 예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고치면서 부정함을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행하신다. 예수는 선지자들 중 가장 큰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기에’라는 질문은 질병에 대한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은 예수가 병자와 귀먹고 말더듬는 자를 고침으로써 계속 나타날 것이고 귀신 들린 더러운 영을 쫒아냄으로서 다시 한번 입증될 것이며 자연에 대한 예수의 지배는 오천명과 사천 명을 먹이는 일에 떡과 물고기를 증식시키고 바다위를 걷고 폭풍우를 잔잔하게 하는 일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중요한 전환점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일어나며 이곳에서 제자들은 에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는 자신의 사역의 목적과 목표를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신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권위적인 위대한 일을 나타내 보이고 세 번의 수난 예고를 하심으로서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가르쳤다.
마가복음 11장 이후는 예루살렘을 입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전에서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예수의 고난과 죽음 및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 논쟁이 있는 11장~12장 40절은 논쟁 이야기 모음집으로 예수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며 자신의 반대자들을 손쉽게 논박하고 가까우면서도 보다 먼 미래,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가 인자로 오는것에 대하여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 가운데 본문은 예수의 권위문제, 세금문제, 부할문제, 가장 큰계며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 가운데 한부분으로서 사두개인들의 예수에 대한 책을 잡으면서 시작되는 부활 논쟁이다. 이를 통해 예수는 선생으로서 보다 더 위대한 권위를 분명히 드러내면서 예수의 승리가 절대적임을 보여준다. 사두개인들을 반박했던 예수는 자신의 죽으자들로부터 사라날 것을 가르첬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수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다. 예수의 무덤은 영원히 빈 무덤이며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나타났다. 예수가 가르쳤던 것이 그 자신의 부활을 통해 입증되었다. 사두개인들이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으며 또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일으키실 것이다.
6.3 본문 구조분석
A 18,19 사두개인 질문(모세 오경 기반)
B 20~23 최후, 부활 때 질문
B` 24, 25 예수님의 부활 때 대한 대답
A` 26,27 모세의 책에 근거한 예수님 대답
18 일반적으로 사두개파는 대제사장과 예루살렘의 다른 주요 가문들로 구성된 귀족 집단이었다고 추정됩니다.특정 사두개파 문서가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 기원과 발전, 정치적, 신학적 방향에 대한 질문은 문제가 됩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과 왕권의 분리를 주장하거나 다윗 왕국의 부흥을 바라는 순수주의자들의 항의를 무릅쓰고 하스모니아 왕위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정치적 파벌로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그들은 역연혼에 대한 모세의 규정을 언급하면서 자유롭게 신명기를 인용했습니다. 25:5 이하. 그리고 그 규례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모두 자녀 없이 죽은 여자와 그녀의 일곱 남편의 이야기를 조정했습니다.이 이야기는 토빗서의 대중적인 판본에서 각색되었을 수 있다(7명의 남편과 결혼한 한 여성의 경우, 모두 자녀 없이 사망함, 참조, 토빗 3:8, 15; 6:13; 7:11; 역연혼 , 참조 토빗 4:12; 6:9–12; 7:12 f)그들의 의도는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18,19 많은 랍비적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오경에 있는 법적 본문이라는 공통 근거에서 출발한다. 오경의 규정을 Μωϋσῆς(“모세”)의 것으로 구체적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는 1:44, 7:10, 10:3–4을 참조하라. 이어지는 내용은 신 25:5–6에 있는 기본적인 수혼법을 다시 표현한 것으로, 이는 이 법의 유명한 실제 본보기인 LXX 창 38:8에 나오는 ἀνάστησον σπέρμα τῷ ἀδελφῷ σου(“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라는 구절의 인용을 포함한다. 수혼법은 한 남자가 가족의 혈통이 이어짐을 통해 “생존”하게 된다는 전제에 근거하며, “부활”의 다른 어떤 형태도 알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됐다. 창 38:8을 반영할 때 동사 ἐξαναστήσῃ(“세울지니라”)를 사용하는 것(LXX ἀνάστησον)은, 사두개인들이 ἀνάστασις(“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상기한 내용에 곧 바로 이어지면서, 이것이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부활”이라고 적절히 강조한다. 구약에서 이 법을 준수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지만(그리고 기록된 2가지 사례에서 생존자 측에서 저항이 있다. 창 38:9–10; 룻 4:6–8), 이 주제에 대해 상당한 분량의 랍비 법이 있다는 것(미쉬나, Yebamot편)은, 이것이 예수 당시에 여전히 시행중이었음을 가리킨다.
20,23 이 질문 시험 사례는 허구로 간주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이런 당황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부활 교리를 불신하도록 고안됐다. 일곱 번의 완성되지 않은 결혼을 겪은 사라의 이야기(Tob. 3:8)는 그들에게 이 시나리오에 대한 힌트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야기는 수혼법의 원리와 관련되지 않고, 단순히 과부생활과 재혼이 반복되어 행복하게 결말이 맺어지지만 말이다. 23절의 ὅταν ἀναστῶσιν(“그들이 살아날 때”)라는 구절(본문비평 주를 보라)은 ἐν τῇ ἀναστάσει(“부활 때”) 뒤에 불필요하게 등장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야기의 핵심, 곧 “그들 여덟 명 모두가 일어났을 때”라는 점을 끌어내는 데 기여할 것이다.
24,25 예수님은 두 가지 반대 질문으로 대답하셨는데, 각각은 긍정적인 진술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두개인의 오류의 근본 원인은 성경의 취지나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26절에 인용된 구절은 부활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증거하며, 하나님의 능력은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의 선물을 주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사두개인들은 부활 생명의 특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가 단순히 그들의 “잘못”(πλανάομαι[“오해하다”]; 또한 27절 참조)을 제쳐두지 않고 분석하신다. διὰ τοῦτο(“이것 때문에”)는 마가가 이 구절을 다른 두 곳에서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6:14; 11:24) 보통 바로 앞에 나오는 단어들을 이유로 언급하지만,126) 여기서는 예수의 이전 말씀이 없기에, 이것은 더 자연스럽게 μὴ εἰδότες(“알지 못하므로”)라는 분사 구절로 설명되는 이유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διὰ τοῦτο ὅτι와 διὰ τοῦτο ἵνα처럼). 그들의 잘못의 이유는 이중적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τὰς γραφάς(“성경”)를 모른다. 복수형에 대해서는 14:49을 참조하라. 자신들의 입장이 후대에 생겨난 개념이 아니라 성경에 토대를 두었다고 이해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것은 특히 상처를 주는 비난이며, 예수가 26–27절에서 입증할 필요가 있는 고발이다. 예수가 거기서 성경에 대해 해석하신 것을 그들이 옳은 해석으로 받아들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그들은 τὴν δύναμιν τοῦ θεοῦ(“하나님의 능력”)도 놓쳤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한 것은 세속적 관점에서 기인하는 결과다. 이 혐의는 25절에서 전개된다.본문은 제기된 특정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결혼의 구체적인 요점만을 다루지만 이 즉각적인 문제 너머를 지적합니다. 부활 후에 지상 관계가 재개될 것이라는 현재의 유대교 관념에 반대하여, 예수님은 부활의 삶이 천사들이 누리는 삶에 비견될 수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 위대한 목적과 중심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누가가 주장한 대로 사두개인들이 천사를 믿지 않는다면(행 23:8–10), 천사의 특성을 사용한 논증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을 테지만, 누가의 주장(Josephus가 사두개인들에 대해 기술한 부분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다)은 사두개인들의 신앙이 기초했다고 추정되는 오경에 천사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놀랍다.
26,27 예수님은 성경과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에 호소함으로써 부활 생명의 사실을 주장하셨습니다. Ex. 3:6은 사두개인들이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한 성경 부분인 오경에서 가져온 것입니다.Precisely here,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그 근원이 있는 사두개인들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객관적으로 참된 가르침을 통해 그 오류를 바로잡고 무지를 제거하셔야 합니다.여기서 이 표현은 사두개인들의 구체적인 질문에서 그 질문의 기저에 있는 부활 신앙에 대한 근본적 거부로 주제가 옮겨감을 표시한다. 이런 근본적인 거부는 질문의 바탕을 이루며, 이에 대해 예수는 방금 사두개인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비난받는 이유가 된 γραφαί(“성경”)에 근거하여 도전하신다 공식에 대한 이 1세기(및 그 이전) 해석은 출애굽기의 문자적 의미와 완전히 일치합니다.예수는 이제 사두개인들에게 그들이 19절에서 인용한 Μωϋσῆς(“모세”)를 동일하게 언급하신다. 인용된 본문의 자료는 특이하게도 구체적으로 책(ἐν τῇ βίβλῳ Μωϋσέως[“모세의 책 중”]. 이는 모세 이야기가 주로 전해지는 출애굽기뿐 아니라 오경 전체를 가리킬 것이다)만이 아니라,129) ἐπὶ τοῦ βάτου(“가시나무 떨기에 관한”)라는 단락으로 식별된다. 장과 절의 번호가 없을 때 본문의 주목할 만한 특징을 사용하는데, 이 경우 모세가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을 만난 특징은 출전 표시의 적절한 수단이 된다 3:6.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맥락에서 자신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자신을 족장들과 맺은 언약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주로 조상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구원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행동에 있습니다. Ex. 3:6은 “내가 네 열조의 하나님이 된 것 같이” 즉 그들의 인도자, 돕는 자, 붙드는 자가 된 것 같이 현재의 환난 중에 네 구원자가 되리라. 공식은 Ex에서 반복됩니다. 3:6, 15, 16; 4:5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구원과 구출을 약속하시고 그 구출에 대한 보증의 역할을 하시는 구절에서이다.이러한 이해는 27절에서 "그는 보호자나 죽은 자의 구원자가 아니요 산 자의 구주시라"로 번역될 수 있는 예수님의 승리의 확언에 빛을 비춥니다. "죽은 자의 신"이라는 개념은 노골적인 모순을 암시합니다. 특히 사두개인이 죽음을 부활의 희망이 없는 소멸로 이해하는 맥락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족장들을 그들의 생애 동안 불행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맡으셨지만 그들의 희망을 결정적이고 절대적으로 저지하는 최고의 불행에서 그들을 구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보호는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구원의 일부 부분적인 증거를 제공하고 인간 존재의 모든 불행과 고통은 단지 미리 맛보는 것에 불과한 죽음에 대한 최종 명령을 내버려 두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족장들의 죽음이 그들의 역사의 마지막 말이라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언약으로 보장된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자를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것은 그분의 계약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Ex를 인용하면서. 3:6 예수님은 부활신앙이 어떻게 성경적 계시의 중심 개념인 언약에 심오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족장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어떻게 부활의 확신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 사두개인들로 하여금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부활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의 논리는 살아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행하시는 언약의 헌신을 믿는 신앙에 달려 있는데, 이 신앙은 출 3:6뿐 아니라 오경 전체의 이야기와 신학에 확고한 토대를 둔다. 따라서 사두개인들은 예수가 도출한 결론의 성경적 토대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이 이 특정 본문에서 이끌어낸 예수의 추론이 너무 미묘하다고 보았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죽은 자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모세의 책에 계시된 대로 야웨에게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6.4 주제흐름 분석
죽은 자 가운데 살리는
마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7: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마22: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28:32 ㄱ)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막9: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막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 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눅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나인성 과부의 아들살리심)
눅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행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3)이 일에 증인이라
행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2)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행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죽은 것 살리심이 사라의태에서 시작- 사라의 믿음의 반응 또한 중요
롬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후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갈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엡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빌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2:12 너희가 1)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 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딤후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히6:2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죽었다는 의미가 행실과 연관됨)
히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 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벧전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4: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1)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피조물 천사, 사탄, 인간
마18:10 천사
마태복음의 천사는 작은자 중의 하나를 업신 여기는 자에 대한 천사들이 하는 일을 말한다. 작은 자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수호천사로 해석한다. 수호천사는 유대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며 “그들의 천사들이”이기 때문에 소자들을 지키는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0절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라고 한다. 천사들은 하늘에 있으며 하늘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하늘 회의, 하늘 궁정, 하늘 법정의 구성원들이다. 하늘의 천사들ㅇ과 같은 하늘의 존재들을 하나님 앞에 서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하고 하나님의 평결과 지시를 받기 위해 기다린다. 그래서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10절은 구약과 유대 묵시 문헌에 등장하는 하늘의회의 전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다. 에녹 1서에서 수 천사들을 의인들의 탄식과 목소리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들을 신원해 주시고 압제자들을 벌하시기를 간구한다. 에녹1서9:1~3a. 4~9 그렇다면 10절의 천사들을 수호천사들의 개념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하늘 의회 내지 하늘 궁정의 구성원들로서 소자들을 실족시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늘에서 전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으며, 인자가 오실 때는 최후 심판을 집행하는 일을 맡을 것이다
13:39~43,49~50.24:31,25:31~46
그러므로 10절과 14절의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을 비교해 보면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는 묘사와 아버지 앞에 있는 뜻이 비교되므로 천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이유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25:31~46 인자가 올때, 천사, 마지막, 최후는 심판
인자가 올대 일어날 일을 언급한다. 인자가 와서 집행할 재판 장면을 강렬한 언어로 묘사한다. 29~31에 등장한 인자와 천사들의 행동이 본 단락의 계속이어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자가 다시 올 때 곧 최후 심판이 일어날 때 모든 사람은 재판을 받는다. 재판은 하늘의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의인들은 보상을 받고 악인들을 형벌에 처하게 된다. 인자,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 천사들의 역할이 체적이지 않지만 그들을 사람들을 재판장 앞에 불러모으고 악인들에게 형벌을 집행할 것이다. 24:31“인자가 영광으로 올 때” “모든 천사들이 그와 함께” 할 것이다.
13:39~43 인자는 그의 천사들과 함께 와서 심판을 수행할 것인대 재림이 바로 종말의 추수가 일어날 시간이다.
천사
창조는 목적이 있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역인데, 이런 창조 사역은 하나님 자신 밖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창조 교리는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말하는 교리인데, 온 세상 만물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다루는 교리다. 하나님께서는 무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가 보시기에 선하게 보이는 대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의미가 창조된 질서가 완전한 존재로 갑자기 생겨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총 “6일” 동안으로 대변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창조 단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발전 또한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 창조세계 내에서 서식하는 각종 동식물은 생육하고 번성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 사역의 최고의 영광스러운 작품인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차후에 인간을 통해 피조될 것들은 무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활용해야만 한다. 피조물이 가진 잠재력의 발전은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 창조와 더불어 물질적 세계 너머에 존재하지만 물질적 세계 안에서 활동이 가능한 영적인 존재도 창조하셨다. 이런 영적인 존재를 가리켜 천사(“전달자”)라고 부르며 천사는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한 부류는 타락한 천사이며 또 다른 부류는 여전히 신실함을 가지고 있는 천사다. 자신의 창조주를 거역한 천사를 “악령“이라고 부르며 이들의 지도자가 사탄 혹은 악마다. 하나님을 향해 충성심을 여전히 갖고 있는 천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다. 천사와 악령의 숫자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 숫자가 많을 것으로 묘사한다.
인간은 독특한 존재인데, 그 이유는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면서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적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즉 물질적 세계 속에 흐르는 각종 자연 법칙 아래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 즉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선과 악 사이의 싸움은 천사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역을 저지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악은 창조 질서 가운데 원래 존재했던 자연적인 영역으로 볼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에 거역하는 순간부터 악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질적 존재는 우리에게 영적인 피해를 입히지도 혹은 영적으로 치유의 손길을 내밀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영적인 목적을 위해 물질적 존재를 사용하는 것은 우상 숭배의 한 형태다. 왜냐하면 물질적 존재가 창조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아질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단순히 물리적인 영역만을 창조하지 않으셨고 영적인 영역 또한 창조하셨다. 이 영적인 영역 속에는 비물질적 존재인 천사와 악령이 포함되어 있다.
현대 기독교 신학은 천사에 관한 교리에(골 2:18)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회는 늘 영적이고, 비물질적인 존재에 대해 믿어왔다. “천사”로 불리는 영적인 존재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존재다. “악령”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존재다. 이런 영적인 존재가 정확히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은 이런 영적인 존재가 비물질적 존재라는 점이다. 성경은 천사를 물질적 존재와는 다른 영적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마 8:16; 12:45; 눅 7:21; 8:2, 30; 11:26; 24:39; 엡 6:12; 히 1:14).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상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 또한 만드셨다고 가르쳐왔다. 본래의 물질적인 세상이 그랬듯이 모든 천사 또한 원래는 선했다(요 8:44; 벧후 2:4; 유 6). 그러나 일부 천사가 사탄의 지도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고 결국 악의 존재가 되었다(마 9:34; 25:41; 엡 2:2; 계 12:4). 악한 천사는 자신들의 의지로 하나님께 대항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결정을 영원부터 허용하셨다(히 2:16; 벧후 2:4; 유 6).
영적인 영역이 언제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는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가 동시에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사의 창조는 창세기 1–2장에 등장하지 않는다. 욥기 38:4–7과 시편 148:2, 5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천사는 물질 세계가 창조될 때 존재했다. 이렇게 볼 때 천사는 물질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창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 일부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예를 들면, 존 밀튼은 그의 실락원 에서 물질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천사와 그들의 타락이 있었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 역시 우주의 창조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이 우주가(모든 피조물의 총합으로 우주를 이해한다면) 창조되기 전에 존재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창세기 1:1–2은 물질적 세계의 창조만큼 영적인 존재의 창조 또한 말하고 있는 본문이다. 천사의 창조에 대한 성경적 묘사는 시편 33:6, 느헤미야 9:6, 골로새서 1:16 등에 등장한다.
마태복음 22:30과 누가복음 20:36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할 때 모든 천사는 계속적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며,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묘사하듯이 천사의 수는 “천만 천사”, 즉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히 12:22).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도 묘사한다(계 5:11; 참조. 신 33:2; 시 68:17; 막 5:9, 15). 기독교 신학에서는 천사를 선명한 계급 구조 안에서 그 등급을 구별해 이해한다(엡 1:21; 3:10; 골 1:16, 21; 2:10; 벧전 3:22).
천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지적, 도덕적, 영적 존재인데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성경은 다른 피조물처럼 천사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러나 천사가 언제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천사를 지칭함에 있어 성경은 “군대,” “하나님의 아들들,” “거룩한 자들,” “영들”과 같은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천사는 강한 능력을 가진 지적인 존재다. 성경은 천사의 주된 역할을 천상에서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지키고, 위험으로부터 구하며, 신적 명령을 그들에게 전달하고,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천사를 사용하신다.
과연 천사의 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많은 숫자를 본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다”(계 5:11). 천사의 숫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명백하게도) 천사는 자식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천사가 계급 구도 안에 위치한다고 가르친다. 미가엘이라고 불리는 천사는 “천사장”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미가엘은 확실히 천사 가운데 최고위 리더일 것이다. 성경은 이외에도 천사를 다양하게 분류하는데, 즉 그룹과 스랍이다. 하지만 그룹과 스랍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다.
인간과는 다르게 천사는 아담의 타락의 영향력 아래 위치하지 않기 때문에 죄로 왜곡되지 않았다. 천사는 무흠하며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존재다. 비록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이 땅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고 인간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천사는 구속사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그리스도의 탄생, 부활, 승천과 같은 중요한 순간에 자주 등장한다.
사탄
사탄은 악령들의 우두머리다. 사탄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이끈 존재다. 사탄은 현재도 이 세상에 악을 퍼트리는 사역을 앞장서서 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사탄은 특별히 강력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천사였는데, 하나님께 대항해 반역을 저지른 천사 가운데 우두머리다(엡 2:2; 계 12:1–12). 사탄의 히브리어 뜻은 “적대자”이다. 성경은 사탄을 가리켜 “마귀”라고도 부르며(마 4:1, 5; 눅 4:2, 3; 엡 6:11), “뱀”(창 3:1; 고후 11:3; 계 20:2), “큰 용”(계 12:9; 참조. 계 20:2),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이 세상의 신”(고후 4:4), “악한 자”(마 13:19, 38; 요 17:15; 엡 6:16), “귀신의 왕”(마 9:34; 12:24; 막 3:22; 눅 11:15), “참소하던 자”(계 12:10), “시험하는 자”(마 4:3; 살전 3:5) 등으로 표현한다. 다른 천사들 및 악령들과 마찬가지로, 사탄은 대단히 지능이 뛰어나고 강력한 보이지 않는 존재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한 책임이 있는 존재다. 사탄을 통해 인류의 첫 조상이 죄에 빠지게 되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의 존재를 사탄과 일치시키지는 않지만, 이후의 성경에서는 이 둘을 등치시키시고 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계 20:2도 살펴보라). 사탄은 과거에도 하나님께 반역을 꾀했으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사역을 하고 있는 존재다. 사탄은 눈이 가리워진 불신자들이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한 복음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드는 존재다(고후 4:4). 게다가 사탄은 교회를 핍박하고(고후 12:7; 살전 2:17–18; 계 2:10), 거짓된 가르침이 편만하도록 노력하는 존재다(요 8:44; 참조. 딤전 4:1).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빠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부추기는 존재이며, 신자들이 불의의 노예가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다(고후 11:3). 사탄은 비난하는 자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믿음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존재다(욥 1:9–11; 계 12:10).
사탄은 강력한 존재이지만, 여전히 피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의 존재가 아니다. 사탄은 다른 악령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아래 완전히 거하는 존재다(욥 1:6–12; 2:1–10).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허용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영광을 위해 그 일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모든 시대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셨다” (『구약 성경 주해』(Explanatory Notes upon the Old Testament), 2:1521).
재림이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사탄과 그의 졸개들을 완전히 물리치실 것이며 그들을 불못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마 8:29; 25:41; 계 20:10).
귀신
귀신은 하나님을 대항해 반란을 저지른 타락한 천사를 가리키며 이 땅에서 여전히 악을 퍼트리고 있는 존재다.
성경은 하나님을 대항해 반란을 저지른 천사를 귀신과 동일시한다. 귀신은 사탄을 따라 불순종을 일삼고 죄를 짓는 존재다(계 12:1–12). 천사처럼 귀신 역시 능력을 가진 지적 존재다. 귀신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귀신도 인간의 모습을 지닌 채 나타나기도 하며 인간을 통해 말하기도 한다(눅 4:31–37). 귀신이 이 세상 속에서 주로 하는 일은 천사와 우주적 전쟁을 치를 뿐만 아니라(단 10:13; 계 12:1–12), 인간을 죄로 이끌고(엡 6:11), 영적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인간을 거짓말로 속이는 역할 또한 감당한다(딤전 4:1). 성경은 귀신이 인간을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모습도 언급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간의 의지를 굴복시켜 조종하는 모습 또한 언급하고 있다(막 5:1–20).
천사의 정확한 수가 감춰져 있는 것처럼, 귀신의 정확한 수에 대해서도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은 귀신의 총수보다 천사의 총수가 더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2:4에 보면 천사의 삼분의 일이 사탄의 반란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어떤 해석자들은 이 본문이 우주적 전쟁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는 본문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이 본문을 통해 이끌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귀신은 사탄의 뒤를 따라가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조차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아래 속해 있다(욥 1:6–12; 2:1–10; 막 5:1–20).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아래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고 거룩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이 세상 속에서 귀신을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귀신은 구속사 가운데서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했다. 특별히 예수는 수많은 귀신의 무리와 조우하셨으며, 귀신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궁극적으로 귀신은 불구덩이 안에 던져지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대항했던 그들의 반란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마 8:29; 25:41; 계 20:10).
인간
인간은 물질적 몸과 영적인 영혼이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다. 즉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몸으로만 존재할 수 없고 또는 마치 서식지처럼 영혼이 몸 안에 사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물질적 몸과 영적인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과 영혼은 서로 구별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서로 분리될 수도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과 영혼은 하나의 연합을 이룬 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온 창조세계의 축소판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죽음을 경험한 뒤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 인간은 천사와 견줄 만한 존재며, 다른 동물과는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는 존재다. 구원의 성경적 소망은 당연히 “심신적”(心身的)이다. 즉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구원은 몸과 영혼 둘 다를 포함하는 구원이다. 인간의 몸이 죽더라도 영혼은 계속적으로 존재하며,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소망은 형체가 없는 채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
몸과 영혼의 구별은 성경 전반에 걸쳐 잘 드러나 있다. 몸의 거룩 혹은 몸의 오염, 영혼의 거룩 혹은 영혼의 오염에 대한 구별이 성경에 잘 드러나 있다(고전 7:34; 고후 7:1). 영혼, 즉 마음은 원하나 육신이 약할 뿐이다(마 26:41). 오직 몸만을 멸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하는 반면, 몸과 영혼 둘 다를 멸할 수 있는 자도 존재한다(마 10:28). 몸의 멸망은 영혼의 구원을 낳는다(고전 5:5).
성경에서는 인간의 영혼을 생물학적인 삶의 원리, 생각의 시작점, 상상력, 기억, 의지, 욕구, 감각, 성품의 궁극적 원리로 삼는다. 창조 기사에 잘 나타난 것처럼 아담의 몸은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 “생령”이 되었다. 성경은 “마음”, “영혼”, “생각”, 그리고 “영” 등을 모두 사람의 내적인 요소로 본다.
몸은 인간이 존재함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다. 몸은 인간이 거하는 땅의 장막이다(고후 5:1). 사람의 몸은 의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롬 6:12–13). 특별히 신약 성경은 우리의 몸이 “주를 위해” 있다고 가르친다(고전 6:13). 우리는 선악 간에 우리의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 구약 성경 역시 죽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시 115:17). 심지어 죽은 후에도 영혼의 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행위나 순종은 이 땅에서의 삶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신자들이 죽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몸과 함께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한다(고후 5:8). 중간 상태는 몸과 분리된 의식 있는 영혼의 상태다. 영혼은 몸과 분리되어도 존재한다. 중간 상태는 인간 존재의 불완전한 상태이므로 신자들의 마지막 상태는 아니다.
최후 심판과 구원은 몸과 영혼 둘 다에 미친다.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몸을 멸망시킬 수 있지만, 인간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마 10: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몸은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할 것이고, 그들의 영혼과 재결합된 후 영원토록 존재하게 될 것이다(요 6:40).- 3.3, 3.4 성경의 사용 용례와 사전 참고
미혹된
사람은 본성적으로 그 생각이 교만해져 있다. 이에 복음이 능력 가운데 그에게 임할 때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다”(고후 10:5). 겸손한 생각은 본성의 뜰에서 자라나는 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심겨진 새로운 마음에서 자라나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높게 생각하는데 이는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원이 거짓의 빛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빛으로 두더지가 파놓은 흙더미를 보면 마치 산처럼 보인다. 그의 미혹된 지각은 수천수만의 허상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그는 자신에 대해 “허망한 사람이 지혜로울 것이다”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간주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고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다”(욥 11: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옳아 보이기 때문에”(잠 21:1) 그에게는 자기가 택한 길이 옳게 여겨진다. 그는 자신의 상태가 좋다. 이는 그가 더 나은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이 없이 자기 멋대로 산다(롬 7:9). 그러므로 그의 소망은 강력하고 그의 확신은 견고하다. 이는 하늘을 대항하여 높아지는 또 다른 바벨탑이다. 사람의 생각은 어둠의 세력이 붙들어 주는 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생각을 강타해도 여전히 서며 그 안에 균열이 생겨도 신속하게 고쳐진다. 또 어떤 때는 생각 전체가 흔들리지만, 다시 자리를 잡고 일어선다. 오직 하나님이 친히 성령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지진을 일으켜 그의 생각이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지게 하시거나(고후 10:4~5) 또는 죽음이 그를 강타하여 그 토대를 헐어 버릴 때에야 무너진다(눅 16:23).
본성적인 인간이 자신을 높게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외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낮게 생각한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복음의 교훈과 그리스도의 신비는 그에게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실제 삶에서도 그것들을 그렇게 대한다(고전 1:18, 2:14).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세상의 통치 하에 두고 자신의 육적인 이성의 법정 앞에 세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건방진 자세로 하나님의 사역과 그분의 말씀을 견책하고 정죄한다(호 14:9).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일반적인 제약이 풀어지면 사탄이 자유롭게 육의 생각을 마음껏 부추긴다. 그럴 경우 인간의 생각은 마치 들쑤셔진 개미집처럼 의심과 부인과 사악한 사상들이 가득 차게 되어 그것들에 반대되는 그 어떤 주장으로도 절대 정복될 수 없게 된다. 오직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만이 그 지각을 굴복시켜 부패한 법칙들의 반란을 진정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반 정도밖에 말하지 못했지만, 이해의 부패에 대해 충분하게 다뤘기 때문에 당신은 중생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의 이해를 “영광이 그곳에서 떠났으니 이가봇”(삼상 4:21)이라고 부르라. 이를 생각하고 본성의 부패 상태에 있는 당신은 주 앞에서 신음하며 자신의 경우를 주께 고하라. 당신이 영원한 어둠에 갇히지 않도록 의의 태양이 당신에게 비추게 해 달라고 간구하라. 당신의 이해가 생명의 빛이 전혀 없이 본성적인 어둠과 혼란에 쌓여 있다면, 당신의 세상 지혜가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당신의 종교적인 성취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의 재능과 업적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레위기의 나병 환자 경우처럼 “그를 확실히 부정하다고 할 것이요 그 환부가 머리에 있다”(레 13:44)고 선포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필자가 곧 보여 주겠는데, 부패는 마음 안에 있으니 인간의 의지 역시 부패했다.
(a) 정서는 죄가 속임을 통해 미혹하기 좋은 대상에 대해 자주 상상에 사로잡힐 때 미혹된다
정서는 죄가 속임을 통해 꾀고 미혹하기 적절한 대상에 대해 자주 상상에 사로잡힐 때 확실히 미혹됩니다. 죄가 기승을 부릴 때 정서가 쉽게 죄를 따라가면, 죄는 정서를 상상으로 가득 채우고, 그 결과 정서는 죄의 심상과 모양과 표상들로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그래서 그것을 행할 만한 힘이 생기면, 곧 “그들의 손에 힘이 있을” 때 죄를 실행에 옮깁니다(미 2:1). 특히 베드로는 우리에게 그런 자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벧후 2:14)고 말합니다. 즉 그들의 상상은 계속 그들의 욕심의 대상에 대한 표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정서가 죄에 연루되어 죄를 피하려고 시작할 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요한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요일 2:16)고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시각을 통해 영혼에 전달되는 욕심입니다. 여기서 안목(eyes)은 육체의 시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기 원하는 대상들에 대한 의식으로 인해 욕심이 대상에 고정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안목”으로 불리는 이유는, 눈이 외부의 대상들을 내면의 의식에 전달하는 것처럼, 안목을 통해 사실들이 즉시 지성과 영혼에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눈으로 보는 외적 대상들은 이러한 욕심의 원천이 됩니다. 그래서 아간은 죄가 어떻게 자기를 엄습했는지 설명합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수 7:21). 첫째, 아간은 금덩이와 시날 산 외투를 보고, 그것들을 탐냈습니다. 아간은 그것들이 주는 유익 곧 쾌락에 사로잡혀 그것들을 자신의 욕심 속에 집어넣고 그것들을 취하는 것에 마음을 고정시켰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뿌리 깊이 죄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만일 사람이 마음의 상상이 자주 죄와 타협하고 죄에 대한 상상에 빠지는 것을 발견한다면, 이런 사람은 자신의 정서가 은밀하게 죄에 의해 미혹되고 미끼에 걸린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b) 지성이 헛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상상을 은밀히 즐기고 만족스러워 할 때 정서는 미혹된다
정서의 미혹은 지성이 헛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상상을 은밀히 즐기고 만족스러워할 때 더 강해집니다. 결의론자들은 이것을 ‘쾌락에 집착하는 생각(Cogitatio morosa cum delectatione)’이라 부릅니다. 금지된 대상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어쨌든 실제로는 죄악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의지가 죄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영혼이 세상에서 그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지성 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이런 “헛된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커다란 죄악으로 간주하고, 포기할 것을 명령합니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렘 4:14). 이런 생각들은 모두 상상과 정서 사이를 오가며 죄를 끌어들이는 전달자 역할을 하고, 그 결과 상상을 자극하고 정서를 더욱 혼란시켜 죄를 훨씬 심각하게 촉진시킵니다. 아간은 금덩이를 생각하는데, 그 생각으로 인해 금덩이를 더 좋아하고 더 애착을 갖습니다(수 7:21). 금덩이를 좋아하게 됨으로써 그의 생각은 더욱 가열되어 금덩이의 가치와 외형미에 대한 상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조금씩 영혼은 죄로 감염됩니다. 여기서 의지가 주권을 내놓으면, 죄가 실제로 잉태됩니다.
i. 죄의 유혹에 속임을 당한 지성이 의지를 압박하는 경우
그 결과를 통해 우리는 어떤 특별한 죄의 속임으로 인해 지성에서 나온 부패하고 타락한 생각들이, 어떻게 의지를 지배해서 죄에 대해 동의하게 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i) 의지는 죄에 대한 용서가 클수록 은혜도 더 크다는 지성의 부패한 생각에 넘어가 죄에 대해 동의하게 된다
첫째, 의지는 죄사함이 클수록 은혜가 그만큼 더 크고 더 큰 자비가 죄인들에게 주어진다는 지성의 부패한 생각에 넘어가기 때문에 죄에 대해 동의하게 됩니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것은 먼저 지성을 속이고, 나아가 의지로 하여금 악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죄에 동의하는 문을 열어 놓고 맙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마음은 그들의 자유가 “멸망의 종”(벧후 2:19)이 되는 데 있다고 판단하게 할 정도로 이러한 생각이 크게 지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독성은 종종 신자들의 지성도 오염시키고 부패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이 점에 대해 크게 경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은혜에 대한 교리를 악용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다른 주의 사항을 덧붙이고, 이 점에 대해 빛을 던져 주는 성경의 한 본문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신비한 이중적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죄의 최대의 목적은 이 이중적 은혜의 교리와 신비를 왜곡시키는 것으로서, 죄는 이 둘을 서로 어긋나게 함으로써 서로가 방해하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고, 이 두 사실들에 대해 은혜의 영향을 차단시킴으로써 신자에게 아무런 발전이 없도록 획책합니다. 이에 대해 빛을 던져 주는 요한일서 2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이 본문에는 복음의 전체 목적과 용도가 간략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1장 2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즉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나타나심에 대한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1장 7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죄사함 곧 속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수신자들에게 이것을 쓰는 목적과 의도가 무엇입니까?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철저히 죄를 삼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 교리의 유일하고 적절한 참된 목적입니다. 그러나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합당한 상태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그러면 이 경우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죄를 전제로 할 때,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복음 속에 우리 영혼과 양심을 구원할 대책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화해와 중보 속에는 우리를 위한 충분한 구원책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직접 적용되는 복음 교리의 순서와 방법은 이렇습니다. 곧 복음은 먼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그 다음에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죄의 속임이 들어오는데,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일이 벌어지고, 결국 부대는 터지고 포도주는 쏟아져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이처럼 죄의 속임은 복음 진리의 적용 순서와 방법을 바꿔 버립니다. 후자의 의미(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구원)를 먼저 취함으로써, 전자의 의미(죄로부터의 구원)를 철저히 배제시킵니다. 그러므로 “누가 죄를 범하여도 죄사함이 주어지나니”라는 말은 죄가 사람들 속에 즐겁게 퍼뜨리는 사이비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전자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주로 후자 곧 죄에 대한 용서를 제시할 때에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에 제시되어야 할 사실은 후자 곧 죄에 대한 용서가 있다는 것이고, 복음이 전자 곧 죄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하기 위한 의도입니다.
그런데 죄의 속임에 넘어가 깨어 있지 못하고 복음의 참된 목적에서 벗어난 미혹된 지성은 다양한 동의를 얻기 위해 의지를 압박합니다. 그 중 두 가지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i) 시험의 때에 속임을 당한 지성은 부지중에 부패한 생각을 의식 속에 침투시킴으로써 의지를 압박한다
시험의 때에 속임을 당한 지성은 부패한 생각을 불시에 의지 속에 침투시킴으로써 의지를 압박합니다. 시험은 실제로 또는 전체적으로 악하지만, 외관상 또는 일시적으로 선한 것처럼 사실을 위장시킵니다. 적당한 시기에 강력한 도발성을 갖고 시험이 영혼을 엄습할 때, 의지 속에 있는 은혜의 원리는 당연히 시험을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죄에 속임을 당한 지성이 불시에 복음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부패하고 타락한 생각을 의지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의지는 처음에는 주저하고, 이어서 죄에 대한 반대를 약화시키며, 결국 악을 선으로 오인하고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여 죄에 대해 동의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잉태함으로써, 시험의 편을 드는 사태가 벌어지고 맙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후손이 몰렉에게 제물로 바쳐지고, 그리스도의 무기가 마귀를 돕는 데 악용됩니다.
(ii) 속임을 당한 지성은 의지 속에 부패한 생각을 집어넣어 의지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의지를 압박한다
속임을 당한 지성은 의지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의지를 압박합니다. 속임을 당한 지성은 의지를 완전히 지배할 때까지 부패한 생각의 독을 조금씩 의지 속에 스며들게 합니다. 거룩함과 순종을 통해 복음의 교훈을 지킨 결과 영혼 속에는 복음의 구조와 형상이 만들어집니다(롬 6:17). 따라서 복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배교는 주로 거짓된 생각이 영혼 속에 들어와 은혜와 용서를, 죄를 짓는 빌미로 악용할 때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영혼은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지고, 특정한 의무들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일과 특정한 죄들을 피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속임을 당한 지성은 영혼으로 하여금 은혜의 법의 신비(무익한 종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주권적 자비에 의지하여 의무를 다 수행한 것처럼 구원을 바라보고, 그렇게 구원을 얻고 난 후에는 자비를 기대하지 않은 것처럼 전력을 다해 의무를 수행하는 것 곧 자유와 해방을 얻었지만 더 부지런히 종으로 수고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도록 역사합니다. 그런데 죄의 속임은 어떻게든 이 신비를 영혼이 의식하지 못하도록 획책하여 의지가 특정한 죄에 대해 동의하도록 부패시킵니다.
ii) 속임을 당한 지성은 죄에 동의할 때 주어질 이득을 제시하는 것으로 의지를 압박한다
속임을 당한 지성은 죄에 동의할 때 주어질 이득을 제시하는 것으로 의지를 압박합니다. 물론 이것은 지성 자체를 끌어내리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속임을 당한 지성은 절대적인 악을 일시적으로 선한 것으로 보도록 만듭니다. 하와가 그랬습니다(창 3장). 하와는 하나님의 법과 언약과 경고에 대한 모든 생각을 피해 즉시 죄를 범함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질 이득과 즐거움과 이점들을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해 의지의 동의를 구하려고 골몰합니다. 하와는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6절)고 의지에게 말합니다. 이때 하와는 열매를 따먹는 것말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와의 의지는 동의했고, 그래서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순종에 대한 염원은 사라지고, 단지 죄에 대한 즐거움만 고려 대상이 됩니다. 아합도 나봇에게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왕상 21:2). 아합의 미혹된 지성은 이런 생각으로 그의 의지를 압박해서 완강하게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도록 하고, 거짓말과 살인을 저지르도록 획책함으로써 나봇과 그의 가문을 철저히 파멸시켰습니다. 죄책과 성향은 이득과 즐거움에 대한 탐욕 아래 숨겨져 있고, 영혼 속에 죄를 잉태시킵니다.
ii. 미혹된 정서가 의지를 압박하는 경우
지성이 속임을 당하는 것만큼 정서도 미혹에 빠지고, 이 미혹된 정서는 의지로 하여금 죄에 대해 동의하도록 압박함으로써 영혼 속에 죄를 잉태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일으킵니다. 미혹된 정서가 의지의 동의를 통해 영혼 속에 죄를 잉태시키는 과정은 다음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i) 미혹된 정서는 포악한 욕심의 준동이나 적당한 시험을 통해 의지 속에 불시에 어떤 충동이나 감정을 집어넣음으로써 죄에 동의하도록 의지를 압박한다
어떤 포악한 욕심의 준동이나 적당한 시험을 통해 의지 속에 불시에 어떤 충동이나 감정을 자극하고 주입시키고 이끌어 냄으로써, 미혹된 정서는 전체 영혼을 흥분시키고, 죄에 대해 동의하도록 의지를 압박합니다. 다윗이 나발을 대할 때가 그랬습니다. 미련한 고집쟁이 나발이 극도로 무가치한 행동으로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자극하자 다윗은 순식간에 포악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삼상 25:13). 다윗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나발의 온 가족을 몰살시키기로 결심합니다(33~34절). 하나님이 은혜로 역사하시지 않았다면, 다윗은 죄를 결심하고 죄에 대해 동의한 순간에 복수와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미혹되고 헝클어진 정서는 불시에 그의 의지 속에 침투하여 참혹한 피를 흘리는 죄를 잉태시키도록 의지의 동의를 강요한 것입니다. 아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사는 분노에 차자 선지자를 가혹하게 학대했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빠지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죄를 잉태시키는 미혹된 정서를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의지의 동의가 갑자기 이루어져 죄가 갑자기 잉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죄 자체가 실제로 낳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영혼은 죄책을 감당해야 합니다.
ii) 미혹된 정서는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의지를 유혹함으로써 죄에 대해 동의하도록 의지를 압박한다 이때 미혹된 정서는 죄에 대해 무감각하도록 기반을 제공하고 의지를 장악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 37:4). 형들은 아버지가 자기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해서 동생인 요셉을 미워합니다. 요셉이 꾼 꿈과 같은 경우를 통해 그들의 정서는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미혹됩니다. 이 정서가 형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자 동생을 죽이기로 결의할 때까지 그들의 의지를 유혹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부당하고 불법적인 행동에 대한 의식, 연세가 많은 아버지에 대한 염려, 형들의 영혼의 죄책감 등은 사라지게 됩니다. 형들의 의지가 동생을 죽이는 일에 동의할 때까지 동생에 대한 형들의 미움과 시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패한 정서가 이처럼 점진적으로 의지를 장악하여 영혼을 죄로 물들게 하는 과정에 대해 지혜자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 23:31~35). 이것은 죄가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영혼을 파멸시키는 공통적인 방법입니다. 죄가 하나의 시험을 통해 정서를 혼란시키고, 의지로 하여금 죄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하여 영혼이 의무를 게을리하거나 빛 가운데 거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에게서 철저히 멀어집니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는 인간의 영혼이나 육체에 속한 모든 속성을 갖고 계셨다. 아니 그 이상을 갖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성이 지닌 모든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다. 오직 죄만 없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의 본성이 지닌 연약함’이라고 표현했다. 추위, 더위,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 연약함, 고통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연약함을 모두 가지고 계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연약함에는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본성적인 것도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만 있는 개인적이고 고유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나면서부터 다리를 절거나 눈이 보이지 않거나 병약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쉽게 우울함에 빠지거나 허약하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은 아니었다. 그분의 몸은 성령이 순결한 동정녀의 피로 지으셨기 때문에 분명히 각 기관과 부분들이 최고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제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아들들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분의 얼굴은 “단지 약간만 드러내어도 베일 속에 가려진 너무나 눈부신 별처럼 그 광채가 제자들의 마음을 황홀케 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 빛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수 있었다. 또한 그분의 빛은 적들도 놀라움과 경외감에 빠지게 해 비틀거리다 땅에 쓰러지게 할 정도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개인적인 연약함을 지니신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본성적이고 선한 이성을 지니셨다. 사실 그분은 인간 자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신성과 연합된 인간의 본질을 취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구주가 왜 반드시 인간이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구주가 우리 죄로 인해 고난당하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성만을 지닌 하나님은 하실 수 없는 일이다. 둘째, 우리 구주가 율법에 순종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을 주신 분에게는 합당치 않은 일이다. 셋째, 우리 구주가 하나님의 공의를 어겼던 자와 같은 본질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 15:21). 넷째, 또한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히 4:15, 5:2).
4. 마가신학
복음서는 당시의 대부분의 문서들처럼 큰 소리로 읽도록 기록되었을 것이다. 헬라와 로마세계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던 초기의 시도들은 그분을 “신적인 사람”로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두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로마 역사 속에서 죽음에 도전했던 전설적인 영웅들에 대한 뵤사와 유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가는 이것을 예수에 대한 편파적인 이해라고 보았다. 그는 예수를 신적인 이적의 수행자로 강조하면서 동시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수치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 로버트 건드리는 예수가 능력있는 분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는데 예수는 일관되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심으로 그분이 환경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임을 보이셨다. 마가는 예수의 일생과 그의 제자들의 삶속에 나타난 예수의 영광과 십자가의 중심성이라는 두가지 핵심적인 진리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8:31~9:1) 랄프 마틴은 마가복음을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장 균형있게 강조한 책으로 보았다. 마가가 이러한 균형을 이루려고 시도했을지라도 예수의 죽음이 가진 최고이 역할과 마가가 다른 복음서에 비교해서 더 많은 관심을 여기에 쏟고 잇는 것을 볼수 있다. 마가의 독특한 기독론적 명칭들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사이의 이러한 균형과 맥락을 같이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비록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승격된 역할을 강조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등장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표제의 일부를 형성하며 예수가 죽으실 때 로마 백부장의 결정적인 고백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예수의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되실 때 사용된 “아들”이라는 명칭은 마귀에 의해서도 사용되는데 예수에 대한 마귀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보여준다. 마가복음의 두드러진 주제는 “메시아 비밀”이다. 다른 복음서들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더욱 빈번하게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설하지 말도록 분부하신다. 마가는 “은폐”를 만듦으로써 왜 초대교회 시기에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 자신은 그러한 견해를 주장할 수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자신을 진정으로 그리스도라고 믿었을 것이며 단지 이러한 호칭을 받아들이거나 섣부른 열심 때문에 자신의 사명이 무너지는 것을 조심하셨을 것이다. (메시아 비밀)왜냐하면 당시 일반이들이 품은 기독론적인 기대에서는 고난 당하시는 메시아를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의 10:45야말로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여정을 요약해서 강조해 주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대속물이라는 용어는 시장의 노예들을 속량하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대신해서 죽으셔야 하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의 필요성을 강조해준다. 고난 받는 종의 개념은 비록 마가가 직접적으로 사용한 적은 없지만 예수의 성품과 사명이 가진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면을 가장 잘 요약해서 설명해준다. 마가복음은 왜 예수가 죽으셨는지에 관한 책이다. 또한 책 전체를 이끄는 주요하고 전략적인 본문들에 나오는 예수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시대의 계시적 전환점”이라고 역설하는 것, “마귀의 권세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강조하는 것, 예수를 믿는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형태의 영적 시각이며 이방인들은 영적으로 맹인으로 남는 것이라고 서술하는 것, 그리고 베드로를 주로 부정적인 시각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경건한 자가 아닌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 와서 “그들을 위해 죽음을 맞이했”음을 그리고 그리스도가 먼저 유대인을 위해 그러나 다음은 또한 헬라인들을 위해 왔고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동일한 상태의 유대인과 헬라인의 통합은 “모든 음식들”을 깨끗하게 함을 통해서 음식 규례를 따로 구별해 놓음으로써 가능해졌다고 강조한다. 마가의 신학의 강조점들은 예수의 죽음, 부활 이후에만 의미가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여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상에서의 생애에 대하여 쓰고 있는 것이 강조점이다. 예수 신학을 위해 마태와 누가가 마가를 일차 자료로 사용했을 점을 생각할 때 마가가 유일하게 독특한 점들은 많이 없을것이라는 것이다.
메시아 비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본 이후에 마가복음은 자주 예수가 얼마나 그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얘기하는지를 강조한다. 비록 마태와 누가 모두 이현상의 몇가지 예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둘은 마가 만큼 그것을 자주 활용하지는 않는다. 이 주제가 처음 나타나는 곳은 귀신 들린 자가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알아보았을 때 그가 그 안의 더러운 영에게 잠잠하라고 말하는1:25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그를 그 남자에게서 모두 쫒아낸다. 예수가 계속해서 더러운 영들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나병환자를 고친고 난후 예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한다. 소위 메시아 비밀에 대한 주제는 5:43에 계속 나오는데 여기서 예수는 거라사 광인에게서 귀신을 내 쫓고 나서 다시 바닷가 맞은편 유대 쪽 지역인 가버나움에 돌아와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지만 이후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는 완전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일을 한다. 예수가 고침을 받은 맹인에게 벳새다 마을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말하는 이러한 본문들의 목록에 같이 포함시켜야 할지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조용히 하라고 명한 것 자체는 없지만 만약 마을을 피해서 집으로 갔다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마을 사람들에게 즉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변형된 이후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이 마가복음에서 침묵에 대한 주제가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마지막이다. 그날에 대한 공통적인 유대인의 기대가 정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메시아에 대한 것이었다면 치유와 축귀는 쉽게 너무 이른 시점에 등장하여 왕적 승리주의로 잘못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요한도 오천 명을 먹인 사건 이후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능한 한 숨기신다는 것은 첫째 “메시아는 다윗계보의 왕이었으며 즉위식 때에야 공식적으로 그러한 칭호를 받았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최종저그로 십자가에서 ‘관를 쓰셨다.’ 둘째로 예수님의 사명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메시아에 대한 정치적 견해들과도 완전히 달랐다.예수님의 메시아직은 자신의 사명의 특성을 토대로 그 단어를 규정하기까지는 그분에게 부적합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사명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비추어 볼때에만 이해될수 있다. 더 나아가 가능한한 비밀을 지키려 한 예수님의 시도는 몇몇 저명하 구약 선지자들과 비교할 수 잇다. 몇몇 선지자들은 종종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사명만을 완수 하기 위해서 은밀하게 일했다.
기록 동기, 제자들의 실패
교회에서 마가복음을 읽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그들이 주님으로 예배했던 예수님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마가는 이 이야기들을 연결해서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전기를 만든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세력과 싸우실 때 권능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고난도 겪으셨다는 것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알기 원했다. 마가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으며 그들의 증거와 믿음을 통해 역사 하시리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한 공동체에게 글을 썼다. 그들은 또한 그 증거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기억해야 했다. 그들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실패를 보면서, 만일 그들이 아직 주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급진적인 생활방식대로 살지 못했다면, 주님은 지금도 그들의 그러한 수준의 헌신에 이르도록 돕기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상기 할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이 상황으로 보아 여기서 마가가 글을 쓰게 된 것은 로마의 그리스도인이 네로 치하에서 주후 64년에 시작된 고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많다.
기록 연대 와 배경
기록 연대
외부적 증거는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클레멘트가 다음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성령에 의해 복음을 전하자 그 곳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마가에게 베드로이 말을 기록하도록 부탁하였는데, 마가는 오랫동안 베드로를 따라 다녔으며 그가 한 말을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여 자신에게 요청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나누어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드로는 그것을 엄하게 금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크게 장려하지도 않았다고 (교회사 6.14.6-7)
마가 저작설의 가장 이르면서도 가장 중요한 증거는 유세비우스에게서 발견되는 파피아스의 증거와 관련있다. (교회사 3.39.1~17)
알렉산드리아의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록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거나 행하시거나 행하신 것들을 순서대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마가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주님을 따라니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대로 마가는 후에 베드로를 따라다녔다. 베드로는 주님의 담화들을 순서에 따라 전해 준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었다. 따라서 마가는 어떤 잘못도 저지른 것이 아니며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몇가지를 기록했다. 마가는 대단히 주의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이 들었던 것은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또 거짓된 것을 진술하지도 않았다. (교회사3.39.15)
한편 이레네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떠난”후에 “베드로의 제자이자 번역가 마가 역시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에 대해 그가 기록한 것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했을 때는 베드로가 이미 사망한 것으로 믿었으리라고 추정할수 있다. 이레니우스는 마가복음이 베드로가 사망한 이후에 전달되었다는 것으로 추정한다. 마가가 베드로 생전에 기록하였다면 그리고 초대교회의 전승대로 베드로가 주후 68년 이전에 네로의 치세에 순교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마가는 아마도 이른 시기에 그의 복음을 저작했을 것이다. 정확한 집필연대는 알기 어렵지만 60년대 기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추측이다. 가장 일반적인 주장은 마가가 주후 64년경 로마에서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썼다는 것이다. 마가의 저작 장소는 가장 빈번하게 로마라는 주장이 있다. 마가의 청중은 아마도 팔레스틴 외부에 살고 있었을 것이며 대부분 유대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 러 주장들 중 로마일 가능성이 가장 많지만 확실하지 않다.
기록 배경
마가의 독자들은 다양한 구약 인물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유대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무런 설명없이 언급되는 이사야(1:2,7:6,7), 모세(1:44,7:10,9:4,5) 다윗(2:25,10:47~48,11:10), 엘리야(6:15,8:28), 엘리야와 모세(9:4,5), 그리고 12장 26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및 야곱등에 대한 언급들에서 알수 있다. 마가의 독자들은 이스라엘의 통치 중심부가 산헤드린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14:55,15:21) 독자들은 상징주의, 특히 예수가 열두 제자를 선택한 것의 의미를 이해 할 것으로 기대된다.(3:14~15) 게다가 독자들은 유대교의 절기들, 이스라엘의 삶속에서 안식일의 중요성, 설명 없이 소개되는 다양한 유대교 집단들, 그리고 다양한 유대교 전통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그 전통들의 중요성들을 알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과연 마가복음은 어떤 배경에서 탄생되었을까? 마가복음의 내적 증거를 고려한다면 로마를 기록 장소로 보는 견해가 보다 더 타당하다. 때문에 마가복음이 의도하는 독자들이 지리적 위치와 관련하여 전승에 따르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록했다고 말한다. 초기 교회 전승에서 발견되는 마가복음과 로마와의 연관성은 상당히 중요하며 여러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마13:9~13 및 다른 곳에서 있는 경고들의 복음서 독자들에 대한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회당과 국가 모두로부터의 박해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이 국가는 유대 전쟁동안 팔레스타인 교회에 대한 박해로 추정되기 보다는 네로시대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교회가 형성되기 이전임을 보여주는 제자들에 대한 부정적임 묘사가 십자가의 길을 영광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강조한 것 등은 갈등하는 공동체(수신자들)에게 그들 역시 핍박에 맞서 승리할 수 있고 그 승리는 고난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 성도들이 주후 49년에 로마로부터 추방된 것을 생각할 때 공동체 내의 점증하는 긴장과 그들이 50년대에 귀환한 이후의 정부와 주후 64-68년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핍박등으로 인해 로마의 성도들은 그와 같은 위로와 격려이 메시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두개인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 동안 유대 사상의 주요한 세 학파 가운데 하나. 사두개인들은 모세 율법에 대한 엄격한 준수와 부활과 영혼의 두 개념의 거부로 유명하다
심지어 어원 불확실, 사독계열이라는 것도 불확실, 제사장적인 귀족주의 , 현실주의자들, 로마의 지배권 수용, 기득권 수호, 부활, 심판, 영생, 천사, 귀신존재 부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시떨기나무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 또한 스데반은 가시떨기에서 나타나서 그러한 현상을 나타나게 한존재가 천사라는 것을 말한다.
행 7:29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32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사두개인"이라는 이름에 대한 다양한 설명 중, 어느 것도 공감대를 얻거나, 철학적인 문제가 없는 것은 없다. 한 가지 제안은 사독계의 이름에서 "사두개"가 파생됐다는 것이다. 대제사장 사독은 다윗 및 솔로몬의 통치 시 섬겼으며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온 후 대제사장은 그의 후손들에게만 이어졌다(삼하 15:24, 27절, 29절, 35절, 17:15, 19:11, 왕상 1:39, 대상 6장, 9:10–13, 겔 44:15). 이 접근 방식은 사두개인과 제사장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가정한다. 또 다른 설명으로, 이름이 히브리어 형용사 "정당한" 또는 "의로운"(צַדִּיק, 짜디크)에서 파생됐다는 것이다. 세 번째 설명으로, 그 이름은 원래 사해 사본에 나온 "사악한 제사장"이나 "번지르르한 것을 추구한 이들(Seekers of Smooth Things)"처럼 모호하고 암시적인 명칭이었다. 이전 세기들에서 이 이름의 잠재적인 기원은 AD 1세기의 사두개인을 이해하는 데 거의 아무 역할도 못한다(Goodman, “Place of the Sadducees,” 141; Saldarini, Pharisees, 225–26). 요세푸스의 주장은(Josephus, Antiquities18.11) 너무 일반적이어서 그룹의 기원을 파악하는데 별 역할을 못한다. 사두개파는 하스몬 시대에 시작됐을 수 있다. 요세푸스는 요한 히르카누스가 바리새인을 이탈해 사두개인이 된 것을 설명하는데, 이는 사두개파가 우세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Josephus, Antiquities 13.288–98).
사두개파는 사독계의 이름과 혈통과 관련한 성직자 집단일 것이다(Stemberger, “Sadducees,” 430–31; Baumbach, “Sadducees,” 179–80).
신약
신약은 8번의 다른 상황에서 총 14번 사두개인을 언급한다. 마태복음이 복음서 중 가장 많이 사두개인을 언급한다(마 3:7; 16:1, 6, 11–12절; 22:23, 34절; 비교, 막 12:18; 눅 20:27).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독사의 자식들"(마 3:7)이라고 물리치면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고 덧붙인다. 마태복음 16:1 에서 사두개인은 다시 바리새인과 짝을 이루어 예수에게 하늘의 표징을 요구한다(마 16:1–4). 이어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가르침에 주의하라고 경고한다(마 16:5-12). 마태복음 22:23–34 / 마가복음 12:18–27 / 누가복음 20:27–40의 공관복음 전승에서, 복음서 저자들에 따르면, 사두개인들은 사두개인은 부정했던 부활에 대해 예수에게 질문한다.
사도행전은 세 구절(행 4:1, 5:17, 23:6-7)에서 사두개인을 언급한다. 이들은 민족의 지도자 중 하나로 등장하며, 두 구절에서는 이들의 부활에 대한 거부가 두드러지에 표현된다. 이런 이야기는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사도행전 4:1에서 사두개인은 제사장들과 성전 관리자들과 합세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한다. 이 구절에 따르면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관리자들과 구분되는 무리이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4:5-6에서는 제사장이 사두개인이라는 어떤 암시도 드러내지 않는다. 베드로와 요한에 대한 사두개인의 주요 관심사는 부활 자체가 아니라 예수 를 통해 부활이 왔다는 주장이다(행 4:2, 7절). 사도행전 5:17-18에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은 사도들을 또 다시 체포한다. 사도행전 5:17은 대제사장을 사두개인으로 식별하지 않으며, 이 특별한 상황에서 사두개인이 대제사장과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 사두개인에 대한 마지막 언급 인 사도행전 23:1-10에서는 유대인 공의회에 선 바울의 변호를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부활에 관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간의 신학적 차이를 활용한다.
사두개인들의 질문 유대인의 책 토비트 인용
토비트는 눈이 멀게 된 후 그의 아들 토비아스를 먼 메대로 보내 돈을 되찾아오도록 했다. 가는 길에 토비아스는 변장한 대천사 라파엘을 만났다. 라파엘은 토비아스에게, 일곱 남편을 두었던 그리고 악마 아스모데우스에게 고통받는 과부인 사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라파엘은 그후, 토비아스가 사라와 결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아스모데우스를 무찌르도록 토비아스를 도왔다. 토비아스와 사라는 토비트에게 돌아왔고 라파엘은 마지막 행동으로서 토비아스에게 어떻게 하면 토비트의 실명을 치료할 수 있는지 말해 주었다.(제 2 정경, 외경 토비트)
12 And now, Lord,d I turn my face to you, and raise my eyes toward you.
13 Command that I be released from the earth and not listen to such reproaches any more.
14 You know, O Master, that I am innocent of any defilement with a man,
15 and that I have not disgraced my name or the name of my father in the land of my exile. I am my father’s only child; he has no other child to be his heir;
and he has no close relative or other kindred for whom I should keep myself as wife.
Already seven husbands of mine have died. Why should I still live?
But if it is not pleasing to you, O Lord, to take my life, hear me in my disgrace.”
An Answer to Prayer
(Num 36:6–9)
16At that very moment, the prayers of both of them were heard in the glorious presence of God. 17So Raphael was sent to heal both of them: Tobit, by removing the white films from his eyes, so that he might see God’s light with his eyes; and Sarah, daughter of Raguel, by giving her in marriage to Tobias son of Tobit, and by setting her free from the wicked demon Asmodeus. For Tobias was entitled to have her before all others who had desired to marry her. At the same time that Tobit returned from the courtyard into his house, Sarah daughter of Raguel came down from her upper room. 그리고 이제 주님, 당신께 제 얼굴을 돌립니다.그리고 당신을 향해 내 눈을 들어.
내가 땅에서 풀려나도록 명령하시오 그런 비난을 더 이상 듣지 마십시오. 오 스승님, 제가 결백하다는 것을 아시지요? 사람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내가 내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나의 포로된 땅에 있는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나는 아버지의 유일한 자녀입니다. 그는 상속인이 될 다른 자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까운 친척이나 다른 친척이 없습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아내로 있어야 합니다.
이미 일곱 명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왜 아직 살아야 합니까? 그러나 주님, 제 목숨을 거두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불명예 속에서 내 말을 들어라.”
기도에 대한 응답
(민수기 36:6~9)
바로 그 순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두 사람의 기도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라파엘은 두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라구엘의 딸 사라를 토빗의 아들 토비아와 결혼시키고 악귀 아스모데우스에게서 그녀를 해방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토바야스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먼저 그녀를 가질 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빗이 뜰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에 라구엘의 딸 사라가 다락방에서 내려오니
수혼제
고대 근동에서의 수혼제
바빌론, 앗시리아, 히타이트, 누지 및 우가리트를 포함하여 많은 고대 근동 사회는 수혼제를 실시했다. 이 관습은 현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도 존재했다(Falusi, “African Levirate,” 300–08). 고대 근동 대부분에서 그러한 관습의 목적은 가족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여성이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규정이 존재했고 일부다처제와 입양을 통해 자손의 증식이 가능했지만, 다양한 상황들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수혼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Davies, “Rights,” 138–41).
구약의 수혼제
구약의 세 구절에서 수혼제를 언급한다.
1) 유다의 자녀들: 유다의 아들 오난은 레비르(남편의 형제)로서의 의무를 이행해서그의 형제의 과부인 다말을 임신시키는 것을 거부한다(창 38:6-10). 오난이 다말과 결혼할 것에 대한 유다의 기대는 그 관습이 이후의 법령보다 앞섰다는 것을 암시한다(참조, 신 25:5–10).
2) 신명기의 율법: 신명기는 도덕적 의무로서 형제의 과부와 결혼해야하는 남자의 의무를 제시한다(신 25:5-10). 형제가 이 의무를 거절하면 과부는 그의 신을 제거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카마이클은 이 의식이 가족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생식력을 사용하지 않는 모습을 상징한 완곡한 성적 표현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Carmichael, “Ceremonial Crux,” 329). 하지만 마노르는 이런 모습을 소유권과 수치의 단순한 상징으로 보고 카마이클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Manor, “Brief History,” 133–34).
3) 룻기: 룻기의 이야기는 룻이 죽은 남편의 친족 중에서 새 남편을 구해야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이야기에서 룻은 상황의 변화로 인해 신명기 25장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수혼제의 기대는 먼 친척에까지 확장된다. 룻대신 보아스가 신을 교환하는 일에 참여한다. 이 경우 신의 교환은 재산을 법적으로 이전하는 것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룻 4:7–8). 이 이야기는 고인의 재산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고인의 과부와 결혼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룻 4:5).
더 넓은 고대 근동에서는 이스라엘의 수혼제의 사례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히브리 관습은 가나안의 전통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출처가 무엇이든 이 수혼제는 혈통을 통해 고인의 존재를 보존하고 과부의 권리를 지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Burrows, “Marriage in Israel,” 25–30).
신약에서의 수혼제
신약에서 수혼제를 가장 명확하게 언급한 곳은 마태복음 22:23–33, 마가복음 12:18–27, 그리고 누가복음 20:27–40이다. 사두개인들은 내세에 대한 전통적 관점에 도전하기 위해 단일 가문 내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가상의 수혼제에 관해 예수에게 질문한다. 예수는 내세의 결혼에 대한 어떠한 역할도 거부하고 사두개인의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무지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포드는 고린도전서 7:36–40에서 바울이 수혼제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Ford, “Levirate Marriage, 361–65).
본문 거시, 근접 문맥분석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에 대한 복음의 시작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막1:1~13 단락은 마가복음 전체를 들여다 볼수 있는 렌즈의 역할을 한다. 이 복음의 시작은 세례 요한으로 시작하는데, 세례요한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면서 오시는 이를 위해 광야에서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사역을 했고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으라 요청함으로써 자기 뒤에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이를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킨다. 마가는 예수의 무대 등장과 예수가 세례 받은 것에 대해 말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예수위에 내려오며,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를 통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는 증언을 하신다. 그리고 예수는 사탄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저항함으로 복음의 시작을 전진한다. 예수의 복음은 가버나움에 초점을 맟추고 일련의 갈등 이야기 (2:1~12,15~17,18~22,23~28, 3:1~6)들을 포함하며 마가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신의 독자들에게 알려주며 자신으 제자들과 동행하는 예수를 묘사한다. 이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론적 뼈대 안에 두고 있다. 선지자들 중 마지막인 요한이 체포된 후 예수는 갈릴리로 돌아가서 새 시대의 시작 및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 예수의 무대등장과 하나님ㅇ 나라의 도래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예수는 자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다. 왕이 왔기 때문에 그 나라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격상 하나님 중심적임 뿐 아니라 그리스도도 중심적이기도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온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d 한다는 것은 절대 필요한 일이다. 마가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복음 요약은 독자들이 하나님께 했던 헌신과 하나님이 독자들에게 하셨던 헌신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의도되었다. 마가복음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복음을 믿도록“ 도전 할 것이다.
가버나움과 갈릴리를 무대로 하여 예수는 따르는 자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들과 치유의 능력과 죄사함의 권능들을 소개한다.(2:1~3:6)
제자도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포함한다. 제자도의 부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의 자신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속과 새 언약을 가져올 것이다. 예수의 가버나움과 갈릴리의 사역은 예수가 귀신을 쫒아내는 사역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예수의 어떤 독특한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한다. 예수는 귀신의 집을 강탈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였다. 더러운 귀신들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초자연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귀신들은 마가 기독론의 대변자들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거룩한자“ 이기 때문에 예수는 말하기만 하면 되고 귀신들을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예수는 더 큰 능력을 가지고잇으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사탄의 지배를 강탈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요한보다 큰 이시며, 하늘과 귀신들이 모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마가는 병을 고치는 예수의 보편적 능력을 보여준다. 신체적 질병과 귀신 세계는 모두 예수의 능력에 복종한다. 예수가 보여준 권위와 능력, 표적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예수의 능력은 예수의 명성이 온 갈릴리에 퍼져 나가게 했다. 마가는 자신의 독자들이 이를 알고서 격려받기를 의도한다. 그들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는 예수의 전파 및 귀신 축출, 나병환자 치유, 중풍병자, 손마른 사람 치유와 죄사함 대한 엄청난 반응을 통해 입증되었다.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서 예수에 대한 엄청난 경외감과 놀람으로 예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귀신 축출은 예수가 실제로 자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분 임을 그들에게 증거한다.(1:27,32~34,39)
예수의 사역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에서 이방인들, 부정한 세계에 대한 예수의 사역과 두로 지방의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는 것과 데가볼리에서 돌아오자 예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고치면서 부정함을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행하신다. 예수는 선지자들 중 가장 큰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기에’라는 질문은 질병에 대한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은 예수가 병자와 귀먹고 말더듬는 자를 고침으로써 계속 나타날 것이고 귀신 들린 더러운 영을 쫒아냄으로서 다시 한번 입증될 것이며 자연에 대한 예수의 지배는 오천명과 사천 명을 먹이는 일에 떡과 물고기를 증식시키고 바다위를 걷고 폭풍우를 잔잔하게 하는 일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중요한 전환점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일어나며 이곳에서 제자들은 에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는 자신의 사역의 목적과 목표를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신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권위적인 위대한 일을 나타내 보이고 세 번의 수난 예고를 하심으로서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가르쳤다.
마가복음 11장 이후는 예루살렘을 입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전에서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예수의 고난과 죽음 및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 논쟁이 있는 11장~12장 40절은 논쟁 이야기 모음집으로 예수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며 자신의 반대자들을 손쉽게 논박하고 가까우면서도 보다 먼 미래,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가 인자로 오는것에 대하여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 가운데 본문은 예수의 권위문제, 세금문제, 부할문제, 가장 큰계며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 가운데 한부분으로서 사두개인들의 예수에 대한 책을 잡으면서 시작되는 부활 논쟁이다. 이를 통해 예수는 선생으로서 보다 더 위대한 권위를 분명히 드러내면서 예수의 승리가 절대적임을 보여준다. 사두개인들을 반박했던 예수는 자신의 죽으자들로부터 사라날 것을 가르첬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수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다. 예수의 무덤은 영원히 빈 무덤이며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나타났다. 예수가 가르쳤던 것이 그 자신의 부활을 통해 입증되었다. 사두개인들이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으며 또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일으키실 것이다.
누가복음 병행구절 구조분석(누가복음 20: 27~40)
마태복음에서 사두개인들은 더 자주 등장하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사두개인이 오직 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누가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부인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들이 부활을 부인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모세오경을 포함(출6:4,15:1민 15:31 ,18:28, 신 31:16)하여 부활의 소망을 지지해 주는 본문(욥19:26,시16:9,11, 사26:19)들에 대해 말한다. 랍비들은 예수가 사용한 출3:6절을 부활을 증거해 주는 본문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 뿐 아니라 또한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단순히 영혼이 죽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의 부활에는 영혼과 몸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수혼법과 관련된 사례를 묘사하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한다. 수혼법은 자식이 없이 죽은 남자의 대를 잇기 위한 것이다. (신25:5, 룻4:1~12, 미쉬나의 ‘예바모트 ’Yebamot’)는 수혼법에 대해 다루는 중요한 문헌)만약 어떤 남자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형수를 자기의 아내로 맞아들여서 죽은 형을 위해 자식을 낳아야 했다. 그리고 그 자식은 죽은 형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 율법의 목적은 죽은 형을 휘해 후손을 잇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이 율법이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문제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 율법 규정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며 깊이 묵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명히 어떤 가족이 많은 집아네서 죽은 형을 대신해서 동생들이 차례대로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결혼이 이어진다. 이 사례는 토비트3장8절, 6장9~12 및7장11~13절과 평행을 이룰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논지는 그들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아무도 상속자가 없었다는 것이 강조점이 아니다. 사실상 사두개인들은 자식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관심을 갖는 대상은 남편이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한 가정의 일곱 형제가 차례대로 한 여인을 계속해서 아내로 맞이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빚어낸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 상황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침내 그 여인도 죽었다는 말로 비극적으로 끝난다. 따라서 이 가정은 상속자가 없는 것이다. 일곱형제들이 한 여인을 아내로 취했지만 한명의 자식도 남기지 못했다.”이 세상에서 일곱명의 남편을 두었던 이 여인은 과연 사후의 세상에서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이질문에 대한 배후에는 많은 전제들이 있다. 1) 이 질문은 저 세상에서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고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가정한다. 2) 이 세상에서의 혼인과 마찬가지로, 저 세상에서의 혼인 관계도 일부일처제라고 전제한다. 3) 이 여인이 처해 있는 딜레마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사실상 사두개인들은 이 딜레마에 대한 적합한 대답이 전혀 없다고 확신하며 예수에게 질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여인에게 이 세상에서 일곱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떻게 이 여인이 저 세상에서 오직 한명의 남편만있을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대답은 두 시대를 대조한다. 이 대조를 통해 그 여인의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오는 시대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의 삶은 전혀 다른 존배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 이전의 현실의 모습으로써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누가의 판본은 마태오 마가의 평행 본문과 훨씬 짧다 누가는 사두개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했다는 예수의 책망을 언급하기 않는다. 오직 누가만 이세상의 자녀들의 삶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누가는 여기서 어떤 추가 자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0:35절의 예수는 부활한 다음에 인간관계에 변화를 강조하면서 두가지 사항을 지적한다. 1) 모든 사람이 부활한 다음에 하나님의 복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저 세상에 속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이어지는 삶에서 하나님의 복에서 제외된다고 밝혀준다. ‘저세상’이라는 언급은 오직 신약 성경에만 나타난다. 아마도 그 표현은 어떤 경고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다른 본문들을 모든 사람이 부활하지만 그들이 모두 부활의 새로운 삶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혀준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오직 의인들의 부활에 대해서만 말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의인들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 언급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그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조시켜준다. 하지만 누가는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부활 이후의 삶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과 관련해서 오는 세상에서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과 다르다. 자녀를 낳아서 가정을 이루고 가계를 이루어 가는 결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부활한 다음에는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의 삶을 새로운 질서 체계를 지니고 있다. 이 질서 체계안에서 결혼의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부활의 부조리를 드러낼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그 질문의 유효성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예수는 자신을 진퇴양난에 빠지게 하려던 사람들을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은 오직 누가만 “저 세상과 및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 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라고 언급한다. 이 의미는 마태와 마가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마가의 “사람이 죽으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 대해 말한다. 부활의 살메 더 이상 결혼이 필요 없는 지는 부활의 삶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한 사람들을 천사들과 같다. 유대교에서 천사들은 음식이나 결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천사들과 비교하는 것을 통해 예수는 사두개인들이 부인하는 또 다른 가르침을 들려준다. 곧 천사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활한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오는 세상에서의 인간관계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관계와 다르다. 새로운 삶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 및 “부활의 자녀”가 될 것이다.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르는 것 욥1:6, 38:7, 시29:1, 89:6) 부활에 대한 사두개인들을 이해는 이세상에서의 삶의 구조와 질서에 기초하고 있다. 오는 세상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다. 따라서 다른 부모관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누가는 ‘천사와 동등’이요 라고 하면서 마태 마가의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같은 표현을 하며 오직 누가만 부활하는 사람들은 다시 죽지 않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부활의 자녀임을 강조한다.예수는 사두개인들이 최고의 권위라고 인정하는 토라를 기초하여 부활에 대해 설명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토라에 속한 어떤 본문이 부활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을 것이다. 예수는 모세가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것을 계시해 주었다. 만약 구약시대의 족장들이 단지 죽은 상태로만 머물러 있다면 약속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 일 수 없다. 여기서 예수는 족장들이 죽은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실현되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시기 위해서 부활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38절예수는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과 관계하신다는 설명을 보충해 주신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족장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또한 그들이 약속이 이우어지는 것을 경험하려면 그들을 반드시 부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다. 모든 생명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절대 주권을 지니신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며 돌보신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나 오는 세상에서의 생명이거나 사실상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주어진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며 그는 영원한 생명을 지닌다.
40절 누가는 예수가 자기의 대적자들을 침묵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들을 더 이상 예수에게 질문을 제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을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들을 예수의 지혜와 지식을 도저히 감다하지 못한다. 예수는 여전히 모든 사건을 주도하고 잇다. 이제까지 가능한 모든 무리들이(바리새인들, 민족주의자등,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백성의 지도자들)가 예수를 ejwdp 걸리게 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예수의 사역, 정치, 및 신학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모든 논쟁에서 예수는 유대교 자기의 대적자들을 압도했다. 그들의 공개적으로 예수에게 질문을 제기해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아무것도 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논쟁은 예수가 놀라운 지식, 지혜 및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내 주었다. 이와 같은 논쟁들이 가져온 결과는 명백하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이끌수 있는가. 유대지도자들인가, 아니면 예수인가. 자신의 놀라운 답변들을 통해 지혜의 교사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답변들을 통해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지혜를 전한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오직 누가만 예수가 자기 대적자들이 아무것도 어 물을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마태와 마가는 다음에 이어지는 추가 논쟁 큰 계명에서 이와 같은 언급을 한다. 누가는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예수의 비슷한 가르침을 이미 소개 했다. 이와 같이 세 공관복음서 저자는 각자가 선택한 부분에서 예수가 모든 논쟁에서 자기의 대적자들을 압도한것에 대해 요약적으로 언급한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도전은 예수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예수는 가장 진정한 선생님이다.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예수의 존재, 권위, 우월성을 깨달아야 한다. 부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예수가 다시 올 때 부홀하여 하나님을 대면하게되며 하나님에 의해 각 사람의 믿음과 삶이 평가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모든 그리스도은 부활이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고대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날마다 신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장차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과 이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부활 이후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다르다. 앞으로 부활은 반드시 일어난다. 예수가 다시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으과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오직 하나님에게 합당하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들만이 의인들의 부활의 삶에 동참할 것이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반드시 부활의 삶에 실질적으로 동참 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내 맡긴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사두개인들처럼 우리는 부활 한 후에는 본문에서 언급되는 여인이 어떤 사람을 자기 남편으로 결정해야 할지 고민한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부활의 삶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를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구조분석
A 18,19 사두개인 질문(모세 오경 기반)
B 20~23 최후, 부활 때 질문
B` 24, 25 예수님의 부활 때 대한 대답
A` 26,27 모세의 책에 근거한 예수님 대답
18 일반적으로 사두개파는 대제사장과 예루살렘의 다른 주요 가문들로 구성된 귀족 집단이었다고 추정됩니다.특정 사두개파 문서가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 기원과 발전, 정치적, 신학적 방향에 대한 질문은 문제가 됩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과 왕권의 분리를 주장하거나 다윗 왕국의 부흥을 바라는 순수주의자들의 항의를 무릅쓰고 하스모니아 왕위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정치적 파벌로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그들은 역연혼에 대한 모세의 규정을 언급하면서 자유롭게 신명기를 인용했습니다. 25:5 이하. 그리고 그 규례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모두 자녀 없이 죽은 여자와 그녀의 일곱 남편의 이야기를 조정했습니다.이 이야기는 토빗서의 대중적인 판본에서 각색되었을 수 있다(7명의 남편과 결혼한 한 여성의 경우, 모두 자녀 없이 사망함, 참조, 토빗 3:8, 15; 6:13; 7:11; 역연혼 , 참조 토빗 4:12; 6:9–12; 7:12 f)그들의 의도는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18,19 많은 랍비적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오경에 있는 법적 본문이라는 공통 근거에서 출발한다. 오경의 규정을 Μωϋσῆς(“모세”)의 것으로 구체적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는 1:44, 7:10, 10:3–4을 참조하라. 이어지는 내용은 신 25:5–6에 있는 기본적인 수혼법을 다시 표현한 것으로, 이는 이 법의 유명한 실제 본보기인 LXX 창 38:8에 나오는 ἀνάστησον σπέρμα τῷ ἀδελφῷ σου(“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라는 구절의 인용을 포함한다. 수혼법은 한 남자가 가족의 혈통이 이어짐을 통해 “생존”하게 된다는 전제에 근거하며, “부활”의 다른 어떤 형태도 알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됐다. 창 38:8을 반영할 때 동사 ἐξαναστήσῃ(“세울지니라”)를 사용하는 것(LXX ἀνάστησον)은, 사두개인들이 ἀνάστασις(“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상기한 내용에 곧 바로 이어지면서, 이것이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부활”이라고 적절히 강조한다. 구약에서 이 법을 준수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지만(그리고 기록된 2가지 사례에서 생존자 측에서 저항이 있다. 창 38:9–10; 룻 4:6–8), 이 주제에 대해 상당한 분량의 랍비 법이 있다는 것(미쉬나, Yebamot편)은, 이것이 예수 당시에 여전히 시행중이었음을 가리킨다.
20,23 이 질문 시험 사례는 허구로 간주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이런 당황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부활 교리를 불신하도록 고안됐다. 일곱 번의 완성되지 않은 결혼을 겪은 사라의 이야기(Tob. 3:8)는 그들에게 이 시나리오에 대한 힌트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야기는 수혼법의 원리와 관련되지 않고, 단순히 과부생활과 재혼이 반복되어 행복하게 결말이 맺어지지만 말이다. 23절의 ὅταν ἀναστῶσιν(“그들이 살아날 때”)라는 구절(본문비평 주를 보라)은 ἐν τῇ ἀναστάσει(“부활 때”) 뒤에 불필요하게 등장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야기의 핵심, 곧 “그들 여덟 명 모두가 일어났을 때”라는 점을 끌어내는 데 기여할 것이다.
24,25 예수님은 두 가지 반대 질문으로 대답하셨는데, 각각은 긍정적인 진술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두개인의 오류의 근본 원인은 성경의 취지나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26절에 인용된 구절은 부활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증거하며, 하나님의 능력은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의 선물을 주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사두개인들은 부활 생명의 특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가 단순히 그들의 “잘못”(πλανάομαι[“오해하다”]; 또한 27절 참조)을 제쳐두지 않고 분석하신다. διὰ τοῦτο(“이것 때문에”)는 마가가 이 구절을 다른 두 곳에서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6:14; 11:24) 보통 바로 앞에 나오는 단어들을 이유로 언급하지만,126) 여기서는 예수의 이전 말씀이 없기에, 이것은 더 자연스럽게 μὴ εἰδότες(“알지 못하므로”)라는 분사 구절로 설명되는 이유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διὰ τοῦτο ὅτι와 διὰ τοῦτο ἵνα처럼). 그들의 잘못의 이유는 이중적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τὰς γραφάς(“성경”)를 모른다. 복수형에 대해서는 14:49을 참조하라. 자신들의 입장이 후대에 생겨난 개념이 아니라 성경에 토대를 두었다고 이해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이것은 특히 상처를 주는 비난이며, 예수가 26–27절에서 입증할 필요가 있는 고발이다. 예수가 거기서 성경에 대해 해석하신 것을 그들이 옳은 해석으로 받아들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그들은 τὴν δύναμιν τοῦ θεοῦ(“하나님의 능력”)도 놓쳤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한 것은 세속적 관점에서 기인하는 결과다. 이 혐의는 25절에서 전개된다.본문은 제기된 특정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결혼의 구체적인 요점만을 다루지만 이 즉각적인 문제 너머를 지적합니다. 부활 후에 지상 관계가 재개될 것이라는 현재의 유대교 관념에 반대하여, 예수님은 부활의 삶이 천사들이 누리는 삶에 비견될 수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 위대한 목적과 중심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누가가 주장한 대로 사두개인들이 천사를 믿지 않는다면(행 23:8–10), 천사의 특성을 사용한 논증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을 테지만, 누가의 주장(Josephus가 사두개인들에 대해 기술한 부분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다)은 사두개인들의 신앙이 기초했다고 추정되는 오경에 천사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놀랍다.
26,27 예수님은 성경과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에 호소함으로써 부활 생명의 사실을 주장하셨습니다. Ex. 3:6은 사두개인들이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한 성경 부분인 오경에서 가져온 것입니다.Precisely here,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그 근원이 있는 사두개인들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객관적으로 참된 가르침을 통해 그 오류를 바로잡고 무지를 제거하셔야 합니다.여기서 이 표현은 사두개인들의 구체적인 질문에서 그 질문의 기저에 있는 부활 신앙에 대한 근본적 거부로 주제가 옮겨감을 표시한다. 이런 근본적인 거부는 질문의 바탕을 이루며, 이에 대해 예수는 방금 사두개인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비난받는 이유가 된 γραφαί(“성경”)에 근거하여 도전하신다 공식에 대한 이 1세기(및 그 이전) 해석은 출애굽기의 문자적 의미와 완전히 일치합니다.예수는 이제 사두개인들에게 그들이 19절에서 인용한 Μωϋσῆς(“모세”)를 동일하게 언급하신다. 인용된 본문의 자료는 특이하게도 구체적으로 책(ἐν τῇ βίβλῳ Μωϋσέως[“모세의 책 중”]. 이는 모세 이야기가 주로 전해지는 출애굽기뿐 아니라 오경 전체를 가리킬 것이다)만이 아니라,129) ἐπὶ τοῦ βάτου(“가시나무 떨기에 관한”)라는 단락으로 식별된다. 장과 절의 번호가 없을 때 본문의 주목할 만한 특징을 사용하는데, 이 경우 모세가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을 만난 특징은 출전 표시의 적절한 수단이 된다 3:6.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맥락에서 자신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자신을 족장들과 맺은 언약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주로 조상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구원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행동에 있습니다. Ex. 3:6은 “내가 네 열조의 하나님이 된 것 같이” 즉 그들의 인도자, 돕는 자, 붙드는 자가 된 것 같이 현재의 환난 중에 네 구원자가 되리라. 공식은 Ex에서 반복됩니다. 3:6, 15, 16; 4:5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구원과 구출을 약속하시고 그 구출에 대한 보증의 역할을 하시는 구절에서이다.이러한 이해는 27절에서 "그는 보호자나 죽은 자의 구원자가 아니요 산 자의 구주시라"로 번역될 수 있는 예수님의 승리의 확언에 빛을 비춥니다. "죽은 자의 신"이라는 개념은 노골적인 모순을 암시합니다. 특히 사두개인이 죽음을 부활의 희망이 없는 소멸로 이해하는 맥락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족장들을 그들의 생애 동안 불행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맡으셨지만 그들의 희망을 결정적이고 절대적으로 저지하는 최고의 불행에서 그들을 구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보호는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구원의 일부 부분적인 증거를 제공하고 인간 존재의 모든 불행과 고통은 단지 미리 맛보는 것에 불과한 죽음에 대한 최종 명령을 내버려 두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족장들의 죽음이 그들의 역사의 마지막 말이라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언약으로 보장된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자를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것은 그분의 계약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Ex를 인용하면서. 3:6 예수님은 부활신앙이 어떻게 성경적 계시의 중심 개념인 언약에 심오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족장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어떻게 부활의 확신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 사두개인들로 하여금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부활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의 논리는 살아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행하시는 언약의 헌신을 믿는 신앙에 달려 있는데, 이 신앙은 출 3:6뿐 아니라 오경 전체의 이야기와 신학에 확고한 토대를 둔다. 따라서 사두개인들은 예수가 도출한 결론의 성경적 토대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이 이 특정 본문에서 이끌어낸 예수의 추론이 너무 미묘하다고 보았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죽은 자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모세의 책에 계시된 대로 야웨에게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6. 정경적 정황
6.1 언약
6.1.1 언약이란, 행위언약
언약이라는 말은 창6:18 홍수 기사가 나올 때까지 성경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언약”이라는 말이 창세기1-3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관계가 언약 관계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언약이라는 말이 없는 것이 반드시 창1-3장 에 언약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약속을 주시는 사무엘 하 7장이나 역대상17장에는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본문들은 이 관계를 언약으로 간주한다. (삼하23:5,시89:3,28.132:11~12) 창세기1-3장도 이와 상황이 비슷하다. “언약”이라는 말이 창세기 첫 부분 장들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이후에 성경은 창세기 1-3장을 언급하며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래서 (호6:7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에 대한 설명을 보라) 그러므로 열쇠는 창세기 1-3장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는지 여부가 아니라 언약의 요소가 나타나는지 여부다. 아담과의 언약, 행위언약은 하나님과 자연적 관계를 갖는자로서 자연적 관계와 언약 관계으 구분은 시간적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사법적이다. 아담은 한 순간도 행위 언약을 벗어나 존재한 것이 없었다. 아담은 행위 언약의 조건을 만족시키면 이 언약을 통해 영생에 대한 권리를 받았다. 창조당시 인간의 하나님과의 자연적 관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1에서 설명된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이 매우 크기 때문에 비록 이성적 피조물이 그들의 창조자인 하나님에게 마땅히 순종하더라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어떤 열매도 그들의 복과 상을 취할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이 언약의 방식으로 기쁘게 표현하신 어떤 자발적인 낮추심으로 말미암아 취할 숭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1
이 자연적 관계는 순종이 요구되는 창조자-피조물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인간에게 순종에 대해 상을 주는 특별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언약 관계가 요구되었다. 성경에서 “언약” 이라는 말은 노아와 훙수를 배경으로 처음 나타난다. 노아는 의인, 당대에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지칭된다. “의로운(짜디크) 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충성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전 관계에서 나오는 행위를 가리킨다. 노아의 행위는 당대 다른 사람들의 죄악과 대조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심판을 위해 자신이 땅에 보낼 훙수에 대비해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하신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꼐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6:18)언약의 첫 출범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통상적 동사는 언약을 “자르는(카라트)것이다. 그러나 창6:18에서 사용된 단어는 ”세우다“ 쿰) 이라는 동사다. 이 동사는 하나님이 노아와 언약 관계를 처음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언약이 지속되는 것을 암시한다. 창9:1-17은 노아를 둘째 아담으로 제시하고 타락한 세상의 배경 속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것과 같은 명령으로 채워져있다. 창6:18은 창조 자체로 말미암아 세워진 신적 관계를 가리킨다. 덤브렐은 오직 하나의 신적 언약이 있을수 있다고 주장한다. 행위언약의 존재는 구속 언약의 존재를 지시한다.
행위 언약은 구속 언약의 신학적 “미러 이미지” 곧“거울”상이다. 행위언약의 존재는 반드시 구속 언약의 존재를 함축한다. 행위 언약은 하나님과 누가복음 3:38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아담 사이에 체결된다. 게다가 누가복음 3-4장의 전체 배열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거울 상으로 보도록 이루어진 것 같다. 마태의 계보는 아브라함으로 시작해 예수로 끝나지만 누가는 왜 자신의 계보를 줄곧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제시 할까? 왜 마태가 그런 것처럼 아브라함에서 멈추지 않을까? 왜 마태의 계보와 반대 순서로 이름을 제시할까? 왜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할까? 여기서 문제는 누가복음 4장에서 누가가 그리스도의 세가지 시험을 마태가 제시한 것과 다른 순서로 제시하는 것을 볼 때 더욱 복잡해 진다. 엄밀히 말해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면 누가복음에서는 마지막 두가지 시험이 마태복음과 반대 순서로 제시된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는 성령의 감동 아래 아담과 그리스도를 거울상으로 제시 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다. 누가가 예수의 시험을 제시하는 순서는 창세기3장의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어지는 시험과 정확히 같은 순서로 나타난다. 육신의 정욕(사람이 떡으로 살것), 안목의 정욕(절하면 보이는 세상다주마), 교만,이생의 자랑(떨어질 때 발이 부딫치지 않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림), 따라서 누가복음 3-4장에서 누가가 아담까지 줄곧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를 본다. 누가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아담으로 끝나는 방식으로 계보를 제시한다. 그런 다음 즉각 그리스도의 시험을 다루는 기사로 전환하고 거기서 창3장에 나타난 정확히 같은 순서로 모든 사실을 기록한다. 여기서 요점은 예수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아들이신 둘째 아담이라는 데 있는 것 같다. 예수는 첫째 아담의 “거울 상”으로 첫째 아담이 행위 언약에서 실패한 것을 원상태로 복원하고자 오셨다. 우리는 아담의 실패가 하나님을 놀라게 한 일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담의 “거울 상”으로 세상에 보내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하고 아담의 실패의 결과를 원상태로 복원하도록 계획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관계가 언약 안에 담겨 있다고 가르친다면 이것을 그리스도를 아담의“거울 상”으로 세우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언약도 있는 것이 틀림 없고 이 언약은 그 조치의 특정 조건과 약속에 대해 삼위 일체 세 위격 사이에 하나님의 뜻의 의논에 따라 창세전에 이루어진 합의가 있었음을 함축한다. 나아가 은혜 언약의 존재도 구속 언약의 존재를 지시한다. 은혜언약은 시간 속에서 체결되고 그리스도가 은혜 언약의 중보자로 기능하기 때문에 은혜 언약을 밑받침하고 세우고 보증하는 다른 언약이 이미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은혜 언약이 시간 속에서 체결되는 것은 은혜 언약의 조건과 약속들을 세우고 동의하는 다른 언약이 창세전에 이미 체결된 것이 틀림없음을 함축한다. 이 은혜 언약을 밑받침하고 보증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맹세”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히7:20)이 맹세는 언약관계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으로 널리 간주된다.
구속 언약은 택함 받은 자의 구원을 보증하고 그 구원을 절대 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맹세가 구속 언약의 배후에 놓여있고,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거짓말 하 실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수포로 돌아갈수 없다.
구속 언약은 하나님이 택함 받은 자에게 보여 주신 믿을 수 없이 큰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체로 갖고 계시는 사랑의 표현으로 성자가 성부에 대해 갖고 있는 상호 즐거움에 따라 택함 받았다. 구속 언약은 우리가 결국은 성부가 성자에게 주시고 성자가 성부에게 되돌려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브라켈 의 시
사랑은 아버지를 움직이고 사랑은 주 예수를 움직였다. 구속 언약은 이 두분 사이의 사랑의 언약인데 그분들의 사랑은 이 사랑의 대상 속에 어떤 매력이 전혀 없이도 그분들 자신 속에 나오는 사랑이다. 오 이 언약에 참여하여 이 영원한 사랑에 둘러 싸이고 이 사랑으로 빛나는 자는 얼마나 복될까. 이런 자는 이 사랑에 대한 답례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라고 외친다.
6.1.2 신약성경에 나타난 행위언약
”행위언약“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행위 언약의 개념은 아주 많이 나타난다. 신약성경 저자들 특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 하지만 아담이 최초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기 전 어느 한 시점에, 아담과 언약 속에 들어가신 것으로 이해한다. 이 언약에서 아담은 대표 인간으로 활동했다. 말하자면 아담의 후손의 운명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따른 아담의 행위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은 창조 이후로 아담에게 그에게 의무로 부과된 도덕적 명령에 계속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또 아담에게 선약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특별히 주가된 명령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다. 아담이 계속 하나님에게 순종했더라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확실하고 상실되지 않은 생명 속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불순종했고 그 결과 자기 자신과 자신의 후손을 온갖 형태의 죄와 저주와 사망속에 집어 넣고 말았다. 이런 언약 관점에 따라 신약 성경은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말한다.
신약 성경헤는 행위 언약을 상세히 언급하는 두 주요 본문이 있다. 갈3:1-4:11, 롬9:30~10:21은 모세 언약에 대해 말한다. 바울이 모세 언약의 조건과 모세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가져온 결과에 대해 말할 때 이 해석은 바울이 자신이 모세 언약을 어떤 면에서 행위 언약이 재반포로 이해하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추론한다.
브라켈 의 시
사랑은 아버지를 움직이고 사랑은 주 예수를 움직였다. 구속 언약은 이 두분 사이의 사랑의 언약인데 그분들의 사랑은 이 사랑의 대상 속에 어떤 매력이 전혀 없이도 그분들 자신 속에 나오는 사랑이다. 오 이 언약에 참여하여 이 영원한 사랑에 둘러 싸이고 이 사랑으로 빛나는 자는 얼마나 복될까. 이런 자는 이 사랑에 대한 답례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라고 외친다.
6.1.3 고린도 전서 15장 (바울의 행위언약에 대한 진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상세히 반성하는 문맥에서 행위언약을 다룬다. 고전15장 바울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는“ ”어떤 사람들(15:12)“에게 답변한다. 바울의 주장은 1~11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활이 복음의 본질 요소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그들에게 전하고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 믿는 것은 바로 이 복음이다. 15-34절에서 바울은 신자의 육체의 부활의 필연성을 증명한다. 35-58절에서 바울은 육체 부활의 ”방법“을 다룬다. 바울은 부활한 몸의 본질과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우리가 부활한 몸을 받게되는 방식에 대해 말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15:22)
6.1.4 아브라함 언약
창1-11장의 독자는 이미 인간과 언약을 세우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 창세기 3장의 저주에서 여호와는 피조물을 “좋다”고 보는 판단을 취소하지 않으신다. 대신 여호와는 세상 역사의 사건들의 특징이 될 싸움,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원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후 다양한 세대의 인물들을 통해 여자이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싸움을 추적한다. 아벨, 에녹, 노아는 다 자기들이 여자의 후속에 신실하게 참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호 받고 해방되는 개개의 사례로 제한 되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 언약에서 구속 계획은 하나님의 백성과 온 세상을 위한 적극적 유익 가운데 하나 즉 복으로 이동한다. 이 핵심 주제들은 “아브라함 이야기가 창세기의 핵심”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구속사는 점진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련의 언약들로 구성되고 각 시기는 각 언약의 구성요소, 역사적 토대, 규정, 복과 저주, 비준등을 포함하는 언약의 단일 국면을 대표한다. 각 시기에 언약은 구속의 성취가 원활하게 일어나게 하려고 등장한다. 언약의 출범과 인간 역사에 대한 언약의 적용은 신적으로 정해지고 신적 계시와 활동, 인간적 믿음오가 행동을 포함하는 포괄적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시작되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그리스도의 언약의 대표는 믿음과 행위로 하나님이 시작하신 언약의 방식에 특히 중요하다. 각 구속 언약의 시행은 신적 지정 및 구원하는 믿음에 따른 행동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다. 그러나 구속사 속에서 구원하는 믿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도구이지만 참된 믿음과 참된 믿음에서 유기적으로 흘러나오는 신실함은 항상 명확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신실함은 참된 믿음에서 필수적으로 흘러나온다. 노아는 완전한 자로 묘사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다윗의 마음은 여호와의 관심을 이끌어 낸다. 이들의 부르심은 또한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이 참된 믿음이 전면에 부각된다. 믿음에 항상 우선권이 있다. 창15장의 언약 비준 의식이 여호와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단언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창22장 그에게 임한 시험으로 확증된다. 아브라함의 복은 아브라함의 후손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그들을 축복할 모든 자를 위해 세상에서 신적 복의 연결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 및 그의 후손과 동일시되고 따라서 아브람과 그의 후손을 축복하는자는 누구나 신적 복을 받으며 이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 공동체와 동일화 함으로써 자신의 포괄적인 구속 계획의 토대를 구축하신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신학적 토대가 되고 이스라엘이 인구, 지역, 세계적 영향력에 있어 누리게 될 복을 공식적으로 최초로 예견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하자 여호와가 아브라함과 맺으신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심으로써 출애굽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족장들에 대한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은 멸망의 쟁앙을 피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동일하게 보신다. 또한 모세의 언약을 충분히 구성하는 요소도 아브라함 언약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후손과 땅에 대해 세계적 여파가 미치는 것을 지시한다. 구약 성경의 지평 안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는 믿는 이스라엘ㄹ로 이해되고 이들은 믿음과 회개를 고수하는 모든자를 의미한다. 포로의 불길도 단순히 참된 남은자를 청결하고 순결하게 만드는 연단의 불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신실한 이스라엘과 즉각 동일시한다. 예수는 친히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해 사용된 성경의 생생한 은유닌 참 포도나무라고 주장하실 때 이런 전통을 환기시키신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아브라함 언약이 지시하는 인물인 단수형 그 자손이라고 주장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6,29)그의 후손이 세상에 복을 베풀게 될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구원하는 믿음을 통해 신적 구속 계호기 속에 민족들을 들어오게 만드는 의로운 자손이다.
6.1.5 언약의 종말론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가졌던 친교는 잠정적 상태에 불과했다. 성경의 계시가 시작될 때부터 행위 언약의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한 안식의 완성된 질서 속에서 확증된 의의 영광스러운 상태 속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행위 언약에 순종하셨을 때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가 땅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상의 기쁨이 실현된 상태 속에 들어간다. 우리는 회복된 무죄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의 완성된 영광 속에 들어가고 이 영관은 아담이 상시리한 상을 둘째 아담이 우리를 위해 얻으신 것이다. 가이 워터스는 “그리스도는 단순히 아담이 행한 일을 되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담이 행하지 못한 일을 행하셨다.” 진실로 성경은 언약의 참된 약속에서 주어진 새 예루살렘의 완성된 영광에 대한 환상으로 끝난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 종말론적 생명을 더 높은 생명이다. 다른 질서에 속한 부활 생명이다. 더구나 이 충만한 생명은 신자가 영관 속에 들어가는 것을 단순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늘에 있는 자격을 확실히 하며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다.
구속 언약의 요지는 잃은 인간 가운데 얼마를 값 없이 생명을 얻도록 택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풍성한 은혜의 영광을 위해 창세전에 구속자로 정하신 성자 하나님을 그들에게 주셨다. 성자는 영혼과 몸으로 이루어진 인성을 취해 자신의 신성과 인격적 연합을 이루심으로써 자기를 낮추는 상태를 취하셨다. 그런 다음 그들의 이름으로 저주받은 십자가의 죽음의 고난을 받으실 정도로 그들을 위해 대속물이 되어 율법에 복종하고 그들을 위해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그들의 죄와 사망에서 속량하고 구속하셨다. 그리고 의로 이끄는 모든 구원의 은혜로 그들의 의와 영생을 얻도록 자기 자신에게 정해진 대로 그들 모두에게 적절한 때에 효과적으로 적용하셨다. 성경의 여러 본문은 그리스도를 백성의 중보자로, “택함 받고”, “임명되고” 또는 “지장된” 자로 묘사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언약에 따라” 자신의 중보적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정하신 사실을 가르치는 내용으로 이해되었다. 시편 40편의 말씀을 기록하고 그 말씀을 그리스도의 입술에 두는데 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에게 직접 주어진 것이다.(10:7)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소원”(10:5)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10:6) 과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세상에 오신 것(10:7)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모든 것은 아들이 세상에 오기 전에 이 일들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그분도 기꺼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예비하신 몸을 취하고 하나님의 소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실제로 이 일들을 행하기 오래전에 동의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일들은 성자가 육체를 취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오래 전에 이미 구약 성경이 기록 되었고, 이것은 이 일들이 구약 성경에 기록 되기 훨씬 이전에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결정된 것이 틀림 없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7:5 “창세전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간청은 응답 받았다. 성부는 성자에게 민족들을 그의 기업으로 주셨고, 성자가 자기를 비우기 전에 가졌던 위치로 다시 높이셨다.(빌2:5~9) 이는 모세 언약을 암시한다. 구속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구원하는 믿음을 통해 신적 구속 계획 속에 민족들을 들어오게 만드는 의로운 자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들은 아브라함을 유업, 곧 지금도 지상 명령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사역으로 함께 모이고 있다. 사도들은 오순절에 바벨에 대한 중대한 해결책으로 능력을 얻고 있다. 민족들이 구속계획되는 일은 해 하늘과 새 땅에서 완료된다. 앞서 언급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들의 세계적 범주는 신적 구속 사역이 이스라엘 땅을 경계로 멈추거나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후손으로 제한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함축한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믿음으로 항상 “세상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롬4:13)
6.2 구약 비교 본문 연구
6.2.1 부활과 천사를 부정하는 사두개인, 창19:1
창 19:1
행 23:6~9
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창 28:12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
모세오경
·천사 지칭 창19:1,15, 2회 ·사자 지칭 창5회,출1회 ·지칭하지 않지만 나타난 천사: 창87회,출1,신1회
📷 : 사자, 천사. 헬라어 등가: ἄγγελος (183).
1. 천사 —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된 초자연적인 존재; 하나님의 사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관련 주제: 그룹들; 천사; 초자연적인 존재; 일곱 교회의 천사들; 미카엘 (대천사); 가브리엘; 라구엘 (천사). 삿 6:11,삿 13:3, 슥 1:12, 슥 3:1, 대상 21:12
2. 사자 —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 대개 다른 상징적 기능을 함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נגד, צִיר 2, צִיר 4. 관련 주제: 전달자; 대사. 삼상 19:11 ,왕상 19:2, 학 1:13, 말 2:7, 말 3:1
3. 특사 — 타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임무를 가지고 보냄을 받은 사람.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מֵלִיץ, צִיר 2. 관련 주제: 특사; 전달자; 대사. 민 20:14, 민 21:21, 민 22:5, 민 24:12, 왕하 17:4
6.2.2 행 23:6~10
6절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아셨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의 신적인 주인 (Divine Master) 은 어떤 경우에도 ‘나는 바리새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가 없다.”18)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즉 바울의 신적인 주인은 “나는 바리새인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바리새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 그의 주장은 자신이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일관성 있는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더욱이 바울은 파랄 학장과 그의 도시대 학자들이 안고 생각한 것보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훨씬 더 잘 알았다. 그리고 바울이 산헤드린의 바리새파 회원들과 공유했던 부활에 대한 믿음은 매우“부분적이면서도 제한적인 동의가 아니라 근본적인 동의”였다. 바울과 산헤들린의 회원들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소망이 죽은자의 부활에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바울 그리고 예수를 믿는 다른 바리새인들은 훨씬 더 나아갔고 이스라엘의 소망이 약 30년 이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신 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지만 바울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특별한 부활에 대한 믿음은 죽은자의 일반적인 부활과 퍼즐이 완전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고전15:16~17) 사두개인은 자신이 속한 당파의 독특한 신학적 교리를 버리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었지만, 바리새인은 적어도 사도들의 시대에는 바리새인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었다.20)
7~8절 바울의 선언은 산헤드린의 회원들 사이에서 불화의 씨가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핵심적인 바리새파 교리를 그토록 견고하게 믿는 사람의 마음이 결국에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지만,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최근에 만들어진 이단인 것을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호소하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 더 격노했다. 왜냐하면 누가가 유대교의 주요 두 당파 사이의 신학적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듯이, 사두개인들은 육체 부활 교리를 부인하고, 천사들과 귀신들의 영적 세례에 대한 믿음을 배격한 반면 바리새인들은 두가 모두 자기들 신조의 핵심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다. 사두개인들은 이런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옛 정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에 조로아스터교의 몇몇 특징을 가져왔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바리새인들””(Pharisees, “분리된 자들”)이라는 용어가 “페르시아화된 자들”(Persianizers) 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고까지 생각되었다. 그러나 포로기 후 시대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긴밀히 혼합되었고, 그것은 언젠가부터 ‘규범적인’ 유대교의 근본적인 원리가 되었다. 미쉬나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장차 올 시대에서 얻을 몫이 없는’ 자들 가운데 포함되었다.26)
BHS 출2:24,25,3:15
NKRV 출2:24,25,3:15
📷 📷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 (야다)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본문 막12:24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막12:24 알다
οἶδα (oida), 동사. 알다, 깨닫다. 미래 능동태. εἰδήσει; 부정과거 능동태. εἴδον; 완료 능동태. οἶδα. 히브리어 등가: 📷 107). 아람어 등가: אֲנָה (1).
1. 알다 (인지) — 어떤 사실이나 특별한 정보의 조각에 대해 인식하거나 깨닫다; 무엇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다. 의미상 반의어: 알지 못하다. 관련 주제: 경험; 지식의 나무; 지식; 영지주의.
2. 알다 (경험적으로) — 알다 또는 무엇에 대해 지식을 가지다; 보통 관찰이나 감각을 통해 획득한 것으로서. 관련 주제: 경험;
6.2.3 출2:24,25,3:15
출애굽기는 수세기 전에 애굽으로 내려온 야곱의 아들들의 목록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시작점은 창세기 내러티브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이 요소들은 궁극적으로는 출애굽기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항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창세기가 제공해준 맥락속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가족들이 수적으로 팽창한 것에 대한 묘사 역시 창세기의 창조기록에 사용된 문체를 반영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 창조의 제 6일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라고 하셨다. 이처럼 독자들이 창세기와 관련 속에서 출애굽기를 읽도록 초청 받은 가운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애굽 왕이 등극하였다.(출1:8) 요셉은 감옥에서 잊혀지 채로 머물러야함 했던 적이 있었다.(창40:23) 이제 다시 한번 요셉이 잊혀지게 되자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에게 골칫거리로 인식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의 영토 속에서 창조시의 축복을 성취하였다. 그 때문에 일련의 사건들이 촉발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결국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위치한 성막을 채우게 될 것이다. 애굽 땅은 한 소구 인종집단에 의해서 채워지고 있었다. 그 결과 노예생활과 압제가 발생했으며, 그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자 아이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등의 일들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와중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 드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엇따. 그는 그들의 조상들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다. 그는 그들을 구원해 내셨으며, 이스라엘을 하나의 나라로 세우셨다. 또한 언약 형태의 말씀을 주셨으며, 자신의 영광이 거할 처소를 만들라고 지시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세우는 데까지 이르는 모든 연쇄적인 서사시적 사건들을 그들이 땅을 채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이중적인 방법, 즉 잔혹한 노예생활, 유아살해 란 방법을 사용하였다. 첫 번째 방법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방법은 처음에는 실패하였다. 바로는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바로 죽여버리라고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왕이 산파들에게 왜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는지를 물었을 때 산파들이 말하길 히브리 여인들은 다르며 그들의 아이들은 항상 산파가 도착하기 전에 아이를 낳아버린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명의 여인 구원자들을 축복하셨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숫자는 더 증가했다.
애굽왕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이번에는 칙령을 하나 내렸다. 그것은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져 주구이는 것이었다 모세가 태어난 것은 바로 이런 반셈족주의적인 공포정치가 행해지던 와중이었다. 장차 구원자가 될 모세는 여인들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레위지파 출신의 그의 어머니는 가능한 한 오래도록 그를 숨겼다. 그러다 그녀는 큰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녀는 작은 상자를 만들어서 자기 아들을 나일 강 위에 뛰워보냈다. 여기에 사용된 “상자”란 단어는 홍수 심판때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을 구해 냈던 큰배를 가리키는 “방주”(테바)란 단어와 같은 단어였다. 바로의 딸들중 하나가 이 방주를 보고 아이를 구출했다. 그녀는 그를 물에서 건져냈기 때무누에 그에게 “모세”라는 애굽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가 입양한 이 아이가 왕좌를 차지할 후계자였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출애굽 본문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고대의 다른 대부분의 통치자들오가 마찬가지로 바로는 수 많은 아내와 첩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가 그의 딸들 중의 한명에게 입양되었다는 것은 곧 그가 고대 애굽사회의 엘리트 집단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꼭 왕좌를 차지할 만한 자리에 이르렀다고는 볼수는 없다. 모세가 바로의 거대한 왕가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 외에 그가 정확히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가 하는 것은 성경의 스토리텔러의 관심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모세는 “자기 형제들”인 히브리인들을 보러 나갔다가 한 애굽사람이 한 히브리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애굽 사람을 살해하였다. 바로가 그 사실을 들었을 때 그는 모세를 죽이려고 ᅟᅳᆯ었다. 미래의 구원자가 될 모세는 사막으로 도피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르우엘 가문의 이드로라는 목자의 일곱 딸들을 다른 목자들의 무리로부터 구출했다. 모세는 이드로의 딸들 중 십보라와 결혼하여 광야에서 살았다.
출애굽기 1-2장은 한 세기 어간의 시간을 다루고 2장의 시간은 80년정도에 걸쳐서 일어났다.(7:7)다시 말해 시간은 책의 서두에서는 빨리 지나가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산위에서 계시하신 후에는 거의 멈춘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천천히 흘러간다.
출 2장 끝으로 가면서 장면은 하나님에게로 이동한다.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이본문은 “하나님+동사”의 패턴을 4중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창조의 첫날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2:24~25) “기억하셨더라”는 히브리어 원어 야다이며 24절의 기억하사(자카르) 와 다르다. 모세의 태어나기 전까지 억압은 아브라함이 본 환상 속에서는 이스라엘이 4세기 동안 학대를 당하게 될것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창15:13)모세가 태어나가 전까지의 80년에 출애굽기 1,2장의 세월을 더한 기간 동안에만 국한시켜 본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때에 그 억압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두세대 이상의 시간 동안 고통 때문에 부르짖었고, 하나님의 응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 방심하시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 서두르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는 내레이터는 침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작하신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이 기억하사”라는 표현은 그냥 단순히 수동적인 정신적 작용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게서 행동하신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바람으로 물을 제거하셨다. 라헬을 기억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녀가 요셉을 잉태하게 해주셨다. 이아 마찬가지로 출2장에서 하나님께서 세 족장과의 언약을 기억하셨다, 알고 계셨다. 는 진술은 이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 즉 구원과 약속의 땅으로의 인도 등의 사건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주셨고 또 그 말씀에 신실하셨다. (사두개인들은 우리는 예수께서 지금도 죽은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부활하심을 똑바로 알아야 했다. 그것은 출애굽 당시에 세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구원과,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는 필수적 사건이었다. )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그것을 살펴 보려고 다가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라고 임무를 주셨다. 그는 구원자가 되려고 했다가 실패한 적이 예전에 한번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공식적으로 그 임무를 부여 받았다. 야웨의 사자는 자신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밝혔다. 모세는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은 백성의 고난을 자신이 직접 목도하셨으며, 이제 그들을 구출해서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고자 하시며, 그이일을 모세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다는 점을 말씀하신다.(모세에게 주신 임무는 이제 예수님의 임무가 되었고, 예수님의 구원자로서의 사역은 야웨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나서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심과 같은 병행으로 하나님의 구출사역을 감당하실 것이고, 그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것을 사두개인들, 즉 유대인들은 알지못하였다. 모세 오경을 전문으로, 모세오경만을 인정하는 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은 맹인이었다. 바울이 로마에서 전도할 때(행28:26~27)에 그들이 예수님의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증거할 때에 알지못하였음을 이사야의 말씀을 적용함과 같다. 요12:40, 마13:11~18 인용 )
이사야 6:9,10 ( 13:14, 막4:12, 요12:40, 행28:26인용)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6.3 신약 비교 본문 연구
롬 6:11~13
롬 8:11~13
na28 롬6:13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3μηδὲ παριστάνετε τὰ μέλη ὑμῶν ὅπλα ἀδικίας τῇ ἁμαρτίᾳ*, ἀλλὰ παραστήσατε ἑαυτοὺς τῷ θεῷ ὡσεὶ ἐκ νεκρῶν* ⸀ζῶντας καὶ τὰ μέλη ὑμῶν ὅπλα δικαιοσύνης τῷ θεῷ*
na28 롬8:11~13
11εἰ δὲ τὸ πνεῦμα τοῦ ἐγείραντος* ᄚτὸν Ἰησοῦν ἐκ νεκρῶν οἰκεῖ ἐν ὑμῖν, ὁ ἐγείρας ⸂Χριστὸν ἐκ νεκρῶν⸃ ζῳοποιήσει* ᄚ1καὶ τὰ θνητὰ σώματα ὑμῶν διὰ ⸄τοῦ ἐνοικοῦντος αὐτοῦ πνεύματος⸅ ἐν ὑμῖν*.
12Ἄρα οὖν, ἀδελφοί, ὀφειλέται ἐσμὲν οὐ τῇ σαρκὶ τοῦ κατὰ σάρκα ζῆν*, 13εἰ γὰρ κατὰ σάρκα ζῆτε, μέλλετε ἀποθνῄσκειν ·* εἰ δὲ πνεύματι τὰς πράξεις ⸂τοῦ σώματος⸃ θανατοῦτε, ζήσεσθε*.
행17:31,32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설교
행17:31,32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설교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1καθότι ἔστησεν ἡμέραν* ⸋ἐν ᾗ μέλλει⸌ κρίνειν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 ἐν δικαιοσύνῃ,* ⸂ἐν ἀνδρὶ⸃ ᾧ ὥρισεν, πίστιν ⸀παρασχὼν πᾶσιν ἀναστήσας αὐτὸν ἐκ νεκρῶν.*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로마서 25회 가장 많이 사용, 사도행전 18회, 사도행전 바울의 1차 전도여행부터 더 빈번히 사용(13장~26장)
6.3.1 롬 6:11~13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결과로서의 소망(5:1~8:39)
죄의 권세에 대한 은혜의 승리(6:1~23)
6장에서 바울은 죄의 권세가 신자들의 삶속에서 결정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들의 성취가 하나님의 새 백성에 대해 실제로 하나의 현실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에 옛 아담은 지나갔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꼐 살아났다. 죄와 사망의 옛 권세들이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영역으로 옮겨졌다. 신자들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참여할 것이며 죄의 영역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죄의 어떤 지배도 거부하도록 권면을 받는다. 율법의 통제 아래 죄가 증가했다고 해도 율법이 소망을 억누룰 수 없는데 이는 죄가 번창한 무대에서도 은혜가 승리함으로써 그 우월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죄가 증가한 것 이상으로 은혜의 힘이 알려진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이 야기된다.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 만일 죄가 더해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비할 떼 없는 성격을 뚜렷하게 완화시킨다면 죄는 결국 유익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2~14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받았던 은혜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은혜가 죄의 지배를 깨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은혜는 단순히 죄 용서만 수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주재권의 이전을 수반하여, 신자들이 더 이상 죄의 압제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죄에 대한 승리를 경험하는 것처럼 신자들은 죄와 사망에 대해 충분하고도 완전한 승리를 확신한다.
11절 너희가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니께 대하여는 살아있는자로 여기라”는 몸으로 행하는 구체적인 행동들을 통해 죄가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죄의 욕구에 대해 싸워야 한다. 몸은 불의의 무기가 아닌 의의 무기로 사용되어야 한다 각 사람의 삶 속에서 죄를 정복하는 것은 2~10절에서 묘사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죄의 지배가 무너졌다는 약속에 근거해 있다. 신자들을 율법과 사망을 통해 죄가 지배권을 행사했던 옛 구속사 시대에 더 이상 있지 않다. 신자들은 은혜가 지배하는 새 구속사 시대에 있다. 바울은 은혜가 들어온 것이 실제로는 죄를 조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국면을 역전 시켰다. 그와 반대로 죄에 종 노릇하는 자들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며 한편 죄에 대해 승리하는 자들은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다.
6.3.2 롬 8:11~13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결과로서의 소망(5:1~8:39)
율법의 권세에 대한 은혜의 승리(7:1~8:17)
5절에서는 육신이 아닌 영에 따라 행하는 자들이 율법을 이룬다는 것을 단언한다. 즉 신자들이 율법을 성취하는 이유는 성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반대로 불신자들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수 없ᄃᆞ. 5~11절은 성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가를 서술한다. 신자들이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그들 마음속에 있는 성령이 역사한 결과다. 새로운 순종은 성령의 변화시키는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에 율법은 외부에서 부여되는 짐이 아니라 내부에서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이다. 육신 혹은 영을 따라 ‘행하는자’들은 그들이 육신 혹은 영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행동은 존재 혹은 그 사람의 본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바울의 논증이다. 이것은 육신과 영이 인간의 본성을 수반한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바울은 육신과 영을 따르는 자들의 실제적인 생각을 서술한다. 5절~8절의 ‘육신에 있는 자들’이 결코 신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신자들의 상태를 숙고하고 있다는 것은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 안에 계신다. 영이 신자들 안에 거하신다. 바울은 영을 가진 사람들은 영의 생각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율법을 성취하는 이유는 그들이 영을 가졌기 때문이다. 영을 소유하는 자들을 영의 일을 생각한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법을 지킬수 없다. 율법을 지키는 유일한 희망은 새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수 있게 된다. 에스겔 37장에서 온 “생명의 영”이라는 문구가 바울적 표현의 선례들중 하나이다. 에스겔 37장이 바울의 사고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에 부활을 일으킨 수단이 여호와의 영이었음을 에스겔이 말하는 것으로 바울이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회복은 ‘죽은자 가운에서 살아나는 것’으로 말하는데 이는 아마도 죽은자의 부활은 이스라엘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은 일 다음에 일어날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신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 그러나 신자들은 의로 말미암아 일으키심을 받는다. 여기서 ‘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가리킨다. 우리의 현재 몸은 죄 때문에 언젠가는 죽어야 하지만 부활의 몸은 죽지 않으며 썩지 않을 것이다.
12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빚진자가 아니다. 이 의미는 신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일상생활에 대해 육신의 압제와 지배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절에서 이미 신자들이 여전히 육체적으로 죽어야 한다. 신자들은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한다. 신자들은 ‘너희가 육신에 따라 살면 죽을 것이고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육신에 따라 살아가는 빚진자가 아니다’ 라로 말하는 것이 된다. 육신대로 살며 반드시 죽을것이라고 직설법에 있는 자유는 육신에 굴복하지 말라고 경고를 배제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육신에 굴복하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를 받는다. 신자가 율법과 죄에 대해 죽은 것이 죄를 극복하나ᅟᅳᆫ 것을 필요하고도 가능하게 만든다. 육신대로 사는 자들이 반드시 죽을것이라고 단언한다. 죽음의 확실성이 드러나는데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다. 왜냐면 10~11절에 영에 있는자들도 모두 육체적 죽음을 경험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죽음은 위협을 당하는 죽음이며 정죄와 관련된 죽음이기도 하다. 13절에서의 죽음은 종말론적 죽음을 가리킨다면 13절의 생명은 종말론적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당연하다. 신자들이 육신이 아닌 영의 인도를 받는다 해도 죄와 계속 투쟁하는 것을 강조하는 본문에서 ‘몸’이라는 용어는 신자들이 여전히 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신자들의 몸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것은 또한 신자들에게 있는 죄가 그들의 썩을 수밖에 없고 죽을 수 밖에 없는 몸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활의 날에 몸이 구속될 때 완전한 구속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은 신자을은 몸의 행실을 죽일 것을 권면 받는다. 몸의 행실을 실행하고자 하는 욕구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이 욕구를 극복하는 것은 이를 동경하여 삶속에 나타나는 것을 죽이라는 것으로 가장 잘 묘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죄의 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인간의 의지력이라는 기능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유신대로‘사는’자들은 ‘죽을’것이다. 그러나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들은 ‘살 것이다’ 영으로써 승리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우리 안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정욕들에 정항할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는 영을 의지하고 신뢰함으로써 신자들이 죄의 정욕을 이길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신뢰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데, 이것이 진자들로 하여금 ‘몸의 행실’이 요구하는 것을 따름으로써 제공되는 ‘즐거움’과 싸울 수있게 했다. 영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들이 영생을 경험할 것임을 말한다. 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영에 복종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고 영을 가지지 않는 자들은 영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 즉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다. 이는 영의 ‘통제를 받는 것’ 혹은‘결정을 받는 것’ 혹은‘지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영이 그리스도인의 순종에 주요 행위자임을 암시하며, 또한 신자들의 순종을 설명하는 신자들 안에서 행하시는 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6.3.3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설교(행17:31,32)
31절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또한 만물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주권적인 방침 가운데,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또 다른 성경적 표현) 날을 정하셨다. 그리스 사상은 성경적 계시가 선언하는 그런 종말론적인 심판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은 정해져 있을 뿐 아니라 심판을 시행하는 자도 임명되었다. 바울은 직접적으로 다니엘 7:13의 인간 (“인자와 같은 이”) 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사람이고, 아버지 하나님이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부여하신 사람이다 (요 5:27)더욱이 바울은 그의 청중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시켰다. 즉 하나님은 이 사람이 죽으자 가운데서 부활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게 하셨다는 확고한 증거를 제시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아레오바고 연설을 결론짓는다. 이 연설이 청중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듣고 그것을 비웃음으로써 심각하게 단축되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 연설 자체는 문화 수준이 높은 이교도들에게 기독교의 서론적 가르침을 탁월하게 요약한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아덴 사람들이 배워야 했던 맨 처음 것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살전 1:9)
여기서 제기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단지 철학적인 분과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책임을 포함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아덴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었던 이 지식이 없는 것으로 인해, 연설을 듣는 자들은 회개하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구약 성경에서 진리, 선, 변함없는 사랑과 같은 도덕적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참조. 호 4:1; 6:6). 반면, 이 지식이 없으면, 그 결과 망하게 된다 (호 4:6).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수행되고, 그분의 언약이 마침내 그의 백성과 함께 수립될 때에 온 땅은 이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합 2:14; 렘 31:34). 비록 선지자들의 말씀이 공식적으로 인용되지는 않지만, 이 연설은 그 배후에 그 선지자들의 사상이 있고, 이 범주 안에서 움직인다
.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온 후에,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 예수, 곧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했다 (살전 1:10). 여기 아덴에서 예수가 소개되는 용어는 그분이 데살로니가에서 소개되는 용어만큼이나 확실히 종말론적이다.
32절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바울의 연설을 들은 아덴 청중 대부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불편한 개념이었다. 만약 바울이 개인의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말했다면,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을 제외한 그들 모두가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의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해서라면, 아덴 사람들은 아레오바고 법정이 아덴의 후원 여신인 아테네에 의해 설립되었을 때에 표현된 아폴로 신의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땅은 그의 피를 마시고, ‘부활은 없다’”라는93) 정서를지지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터무니 없어 보이는 바울의 진술을 비웃었다. 다른 사람들, 똑같이 회의적이긴 하지만 좀더 예의가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바울의 가르침을 더 상세하게 들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94)
6.4 신구약 죽은 자 일으킨 사건 조사
구약
죽은 것 살리심 표현, 사라의 태를 들어 표현됨
엘리야 사렙다 과부의 아들 살림
엘리사 수넴 여인의 아들 살림
에스겔 마른뼈가 살아나 군대가 됨- 딤후 예수의 좋은 군사와 연결이 되는가?
신약
예수님 사역
회당장 야이로의 딸 살림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 살림
나사로를 살림
베드로 사역
욥바의 다비다 일으킴
바울 사역
드로아의 유두고 살림
6.5 관련 성구
롬4:19 그가 백센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으밍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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