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2:17~29)

로마서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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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유대인이 유대인이아니요 이면적유대인이 유대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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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에서 로마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저작 시기는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러 있었던 3차 전도여행 말기로 생각이 됩니다(행 20:1–3).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육로로 마게도냐로 가서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보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행 20:6),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것은 그보다 몇 달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고 있던 57년 말 또는 58년 초쯤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수신자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1:7).
그리고 이들은 전에 말씀드린데로 바울이 직접 전도한 자들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때까지 로마에 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어떻게 로마에 교회가 설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 온 순례객들 중에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가 있었다고 합니다(행 2:10).
이들은 직역하면 ‘임시로 거주하는 로마인들’입니다. 곧,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서 거주하고 있던 순례객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의 상당수가 오순절 날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로마로 돌아가서는 핍박을 피해서 일종의 “가정교회” 형태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나름대로 믿음을 지켰지만 체계적으로 신앙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여러 주제들을 통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신앙교육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많은 주제들이 나타나지만 주된 주제를 굳이 하나 선정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보면

1. 사도바울의 탁월한 이야기 전개방식을 보게 됩니다.

당시 수사학에서 유행하던 대화체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키는 방법을 디아트리베(diatribe)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기록된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이 방법이 잘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를 공부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단어입니다.
디아트리베는 영어에서는 통렬한(매섭고 날카롭게) 비난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디아트리베'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정확히 번역되기는 어렵지만 대화 논법, 강화, 세미나, 짧은 논설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대화법은 상대방이 내 앞에 없지만 있는 것을 가상으로 해서 질문을 던지면서 답변해 가는 대화 형식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18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진노, 즉 심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에게 있고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이 보여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2장에 들어가면서 사도 바울의 디아트리베가 빛을 발합니다. 그런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지’,‘당연하지’를 연발하고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던지는 신랄하게 지적하는 말씀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사도바울의 이런 형태의 대화법으로 여러부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디아트리베를 잘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로마서 7장에도 있듯이 여기 ‘형제들’, ‘법 아는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대상입니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추정되는 유대인들인 것입니다.

2. 그러면 대상이 왜 유대인입니까?

본문에는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들어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특징을 먼저 살펴보면, 그들은 우월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율법을 의지하며”(17)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따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613개로 나누었습니다. 그중 248개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 365개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으로 분류해서 그 율법들을 전부 외우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자랑하며”(17)라고 했습니다.

이는 매사에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경을 인쇄할 수 없었기에 손으로 옮겨 적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쓰다가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쓰는 것을 멈추고 목욕을 하고 와서 다시 썼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해서, 모음 자를 빼고‘아도나이’ 즉 ‘나의 주님’이라고 바꾸어 읽거나 소리 없이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이렇게 하다 보니 나중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글자는 남아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한글 성경의 여러 역본들 가운데 개역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번역하고 공동번역 성경은 ‘야훼’ 라고 번역하는데,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셋째,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18)라고 했습니다.

이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은, 내가 나를 부인하지 못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실은 말씀으로 나의 욕심을 강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욕심이 있으면 자신에게 필요한 말만 선택하게 됩니다.

넷째,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18)라고 했습니다.

선한 것을 분간한다는 것은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 알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사람을 장려하고 칭찬할 줄도 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19,20)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며 어둠에 있는 사람을 빛으로 인도해 내는 말씀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받았으며, 율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저절로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적어도 겉으로는 완벽한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흠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겉모습을 한 꺼풀 벗겨 내면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21–24절은 다음과 같이 고발합니다.

첫째,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21상)

둘째,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도 자기는 도둑질한다는 것입니다(21하).

셋째,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간음한다는 것입니다(22상).

넷째,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도 자기는 신전(神殿) 물건을 도둑질한다는 것입니다(22하).

한 마디로, 다른 사람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지키지 않는 위선(僞善)적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대로 남의 눈에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명확한 신앙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신은 ‘예외’로 돌리거나 ‘특별한 경우’로 여깁니다. 이런 것은 결국 위선(僞善)이고 가식(假飾) 이며 교만(驕慢)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이러한 죄악상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속에는‘탐욕’과‘방탕’이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마 23:25).
또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막 12:40).
누가는 직설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눅 16:14). 물론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도 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지나친 탐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23절)“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여기서 ‘욕되게 하다’는 것은 ‘영화롭게 하다’의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율법을 어김으로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큰 교회에 다닌다고, 목사님의 설교가 좋다고 자랑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 설교가 은혜롭고 성경공부가 재미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나는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좋아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잘 가르치고 있는가?

교회에서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좋은 선생이지만, 가정에서 또한 훌륭한 아버지이고 훌륭한 어머니인가? 가족들을 향하여서도 내가 가르친 대로 행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과연 나는 제대로 행하고 있는가? 한국 교회가 어떻다고 돌을 던지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게 있는 문제점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 받는 주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가 부족해서입니까? 찬양이 덜 뜨거워서입니까? 믿음의 행위가 중요합니다. 덕을 세우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혹시 저와 여러분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 하면서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방인의 진노와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때는 나와 상관 없는 말로 듣고 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지, 그렇고 말구.”하면서 맞장구를 쳤는데, 갑자기 그 화살이 유대인에게로 향하자 모두가 황당해하며 불만을 들어냅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과 그들은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며, 할례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우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2:1-11절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의 기준, 곧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자기의 행위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이 말씀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저들보다 낫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보다 더 못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볼 2:12-16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율법의 소유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생각에 대해서 절대 그렇지 못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2:17-24에서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에 대해서 그 허구성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그들이 뒤에서 하는 행위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2:25-29절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할례는 무익하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할례 받았다는 것으로 자랑을 삼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 마지막으로, 3:1-8에서는 자신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의 항의에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 항의도 이미 예상된 것입니다. 결국 이 단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선포에서 종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복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3. 구원을 얻는데는 신분이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 단락, 즉 2:1-11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2:11)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모라는 것은 유대인이라는 신분, 우리로 말하면 모태신앙이라든지 혹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입니다.
우리는 간혹 나는 모태신앙이야, 우리 아버지는 목사야 또는 우리 가족은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야!.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자랑해도 됩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과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예수믿고 구원받고 변화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유대인이라고 해서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를 입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전체를 끌고 가는 핵심 요절은 역시 1:16-17절입니다. 끊임없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유대인을 심판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2:13 NKRV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서 알고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삶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한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 홍해바다를 건넜던 1세대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왜 약속을 받았지만 그들은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몰랐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았고, 아침마다 새벽에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었고, 고기가 필요할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메추라기를 먹었고, 물이 없을 때 광야에서 샘물을 내서 하나님이 먹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이런 기적을 경험했지만,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그들은 감사하고 찬양하기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그 원망과 불평의 삶이 고질병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고쳐야 될 어떤 고질병이 있습니까?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도, 사도바울도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루하루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저녁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살아내게 하시는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지식에 멈춘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삶으로 나타날 때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사도 바울의 논리에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너무 잘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쏟아 부은 노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그들이 개만도 못한 이방인들과 함께 똑같은 취급을 받는 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다시 질문과 답변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락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만약 네가 유대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왜 너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가?”라는 도전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합당한 유대인이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출석하다보면 때로 신앙의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신앙을 갖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해야 되고, 저것은 어떻게 해야 되고 설명합니다. 가르쳐주는 것 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것은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랑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에게 약점은 있습니다. 이 약점을 가지고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음악을 할 때 박자가 어떻고, 음표가 어떻고, 이론을 기막히게 잘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몰라도 노래 잘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글자를 모른다고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혹 전도하다 보면 글씨 몰라서 못나온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글씨 몰라도 신앙생활 잘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글씨 모른다고 천국 못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유창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좋은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창한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이것이 곧 내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더 많은 기회는 얻을 수 있겠지만, 큰 교회를 출석하면서 괜히 어깨에 힘을 주면서 나 어느 교회 출석한다고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면 유대인들 같이‘헛된 자부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이런 근거 없고 헛된 자부심에 대해서 신랄하게 성경의 잣대를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율법을 가진 것도 맞고, 성경 지식도 있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인 것도 맞지만 과연 그 율법이 삶이 되어 열매를 맺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어지는 질문들을 들어보십시오. 어쩌면 이 질문은 바로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앙생활을 그래도 오래 했고, 나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사, 전도사, 목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남을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을 듣고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보다 자신의 쾌락이 우선이라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도 일하는 것이 우선이라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도 자녀가 우선이라면 자녀도 우상이 되고, 건강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주먹도 우상이 됩니다.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까지도 우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우상이 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보다 내 자존심이, 내 자부심이 우선이 되고 교만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육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는 것입니다. 껍질이 아니라 알맹이를 보는 것입니다. 겉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속을 단장하는 것입니다.
삼상16장7절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나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자부심을 갖는 이 할례는 '언약의 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다 받았습니다. 할례는 요즘 말하면 남자아이가 태어난지 8일만에 행해지는 ‘포경’을 말합니다. 요즘에는 위생적으로 하지만 그러나 구약에는 이것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상징이었습니다. 곧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서약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출19:8).
할례를 이렇게 은밀한 곳에 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를 행한 것 자체가 공로가 되거나 믿음의 표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가 진정한 할례가 되려면 율법을 잘 지키면서 할례를 받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서 할례만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까? 그것은 참된 유대인은 겉으로만 보이는 '표면적 유대인' 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행한 사람이 진정한 할례를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단락은 자신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현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수많은 신앙적인 행동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행과 예배와 헌금이 마음의 할례로부터 시작된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신앙생활이냐는 것입니다.
은근히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나는 다 알고 있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까? 그래서 배우는 일에 인색하고 판단하는 일에 열심 내는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목사인 저는 가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판단 자가 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신앙적인 행위들로 경건의 표지를 삼으려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면적인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의를 밖으로 드러난 경건의 모양에서 찾지 말고 매일매일 말씀 가운데서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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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독교 밴드(제자선교회)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이 가지고 있는 일곱 가지 덕목을 배우자는 글이었습니다.
첫째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을 배우자고 합니다.
둘째는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구정물까지 받아주는 포용력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어떤 그릇에도 다 담기는 융통성을 배워야 한다.
다섯 번째는 어떤 바위도 뚫을 수 있는 인내와 끈기를 배워야 합니다.
여섯 번째는 장엄한 폭포처럼 투신하는, 헌신하는 용기를 배워야 한다.
일곱 번째는 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다 받아서 포용해야 하는 물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풍부에도 비천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던 사도 바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물의 지혜를 교회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바위도 뚫어 버리는 변함없음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물의 속성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여러분! 외형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셔서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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