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빌립보서 3:7-9 2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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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 (NKRV)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사람들은 명언들을 참 좋아합니다. 많은 명언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엘빈 토플러의 “배우고, 배운것을 잊고, 다시 배워라”, 링컨의 “오늘 회피한다고 내일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등 여러분은 어떤 명언들을 좋아하시나요? 오늘날 명언들은 대체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명언들을 대체적으로 좋아합니다. 대체적으로 어떠한 명언들을 좋아하는가에 따라서 지금 내가 어떤 인생을 살기 원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있고 어떠한 삶을 살길 원하시나요?
저도 좋아하는 명언이있습니다. 사실 명언은 아니고 성경구절입니다. 학생시절부터 이 말씀을 좋아했고 이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았고 이 말씀이 삶의 동기부여도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 함께 읽은 빌립보서 3장 7절부터 8절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서 해석했고 다른 세상적 지식보다 더 우월한 하나님의 지식을 열심히 읽고 배우는 것을 더 우선시하고 더 고차원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그것을 다른것보다 우선시 해야한다는 동여부여 및 명분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그러한 의미로 바라볼 수는 있지만 사도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4절에 보면 “육체를 신뢰할”이라는 말을 쓰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4절 이전에 말씀에 나오는 대적자들인 손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따라다니며 육체의 할례를 주장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기에 사도바울이 이들에게 유대적으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고백은 사도바울이 당대에 얼마나 대단하고 스펙이 대단한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너희들이 유대인이면 나도 유대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부러워할만한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총 7가지를 나열하며 말합니다.
첫째,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이 할례를 받는 기간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의 자손은 만 13세가 되어야 받을 수 있었고 이방인의 자손은 성인이 되어서야 할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사도 바울은 나는 순수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는 이스라엘 족속이다. 바울 또한 그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특권을 받은 민족이라는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나는 베냐민 지파이다. 사도바울은 베냐민지파라는 것을 통해 나의 출신이 명문 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베냐민지파는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의 가문이고 중간시대때 페르시아에 살면서 민족을 구원했던 지도자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가문이었습니다. 유다지파와 함께 귀환했던 찬란했던 지파가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러한 명문 가문출신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언어학적 특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이라는 말은 히브리말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이후로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그 당시 1세대는 히브리말을 했겠지만 차츰 히브리말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당시 주 언어인 헬라말을 사용했고 그렇게 잊어버리기시작합니다. 물론 그중에도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가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가정에서 히브리말을 배웠을 것입니다. 가문 자체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것입니다. 다섯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민족주의자에 경건한 사람들. 그 당시 바리새인은 6천명정도로 추정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는 특권층이었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 중에 바리새인이라고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당대 최고 학자인 가말리에 문하에서 직접 공부한 사람입니다. 최고 학벌과 최고 지성을 자랑하는 자가 바울이었습니다. 여섯 째, 교회를 핍박함. 그가 굉장한 권세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아무나 핍박할 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권세를 가졌어야 감옥에 넣을수 있었고 그가 고위직에 있었다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추측이지만 아마도 바울은 부잣집 아들에 로마 시민권자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부러워할 대다수의 축복을 다 소유하고 있었을것이다라고 보여집니다. 일곱째,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돈도 많고 권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도덕적으로도 흠잡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스펙이면 당대 최고의 스펙일것입니다. 현대로 친다면 정말 최고의 스펙이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스펙을 가진 사람인 사도바울이 7절에서 그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을보면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던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주님, 바울에게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서 그 분에 품 안에 거하는 것.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최고의 열망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위치는 그 분 안에 있다. 여태 내가 가진 스펙들은 모두 가짜였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최고지만 그리스도를 만나니 모두 가짜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진짜를 발견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 참된 평안,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 영원한 나라의 소망이 모두 예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해도 나는 가장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것. 모든 것을 잃어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가십니까?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품안으로 들어와서 진정한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먼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드롤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단지 이론을 배우는 지식이 아닙니다. 어떠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은 ‘야다’라고 하는데 이 지식은 관계성을 말합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뭐냐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고 만나서 그분의 사랑 가운데 사는 것이 최고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상하라는 품위나 몸가짐이 높고 훌륭하다라는 뜻인데 헬라어 원어에서는 우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니 다른 모든 것이 배설물 같이 여겨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안에 들어오길 원하신다면 이 가치선언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흔히 말하는 세상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움지쥐고 살아갑니다. 8절에 나오는 이 배설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스쿠발라라고 합니다. 이 스쿠발라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에게 던져주는 음식이란 뜻이 있는데 저급하고 더러운 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두번째는 의학용어로 소화가 끝난 후 신체로부터 축출된 음식 찌꺼기와 소화 분비액에 집합체라는 설명입니다. 다른말로 하면 똥입니다. 킹제임스 버전에 영어성경은 dung이라는 단어로 번역해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것이라고해도 진짜를 발견하면 똥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배설물을 바라보면 아이고 아쉬운데 이를 어쩌지? 이렇게 반응할까요? 뒤도 돌아보지않고 버릴 것입니다. 배설물이라는 것은 그런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 배설물을 우리는 버리지 못하고 움켜잡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배설물에서 냄새가 나는 것처럼요. 인간 관계를 망치는 대부분의 이유가 거의 사실 대부분은 돈 문제입니다. 배설물인데 돈을 움켜잡으려고 하니까 그것을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고 하니까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진실도 가리고 관계도 버리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배설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최고의 가치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배설물로 선포할 수 있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것은 없다. 다른 것은 다 배설물이다. 라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서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두번째로 지속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9절에 보면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내가 가진 의라는 것은 내가 이룩하고 내가 쟁취한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의라고 표현합니다. 구원론의 관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관계가 회복된 것이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회복된순간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주신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교훈이고 성서적 진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믿음으로 받는 이 구원을 하나의 라이센스로 봅니다. 천국을 가는.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과 관계를 맺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길 원하는 마음입니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길 원했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길 원했습니다. 지속적으로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그분께로 계속 나아가게 될 때에 그리스도안에 감춰진 축복이 우리 소유가 되고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소유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고 지속적으로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 누리게 되면 가장 험악한 광야속에서도 찬양하고 감사하며 노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보았던 영상중에 ‘life is like a cup of coffee’라는 영상이 있습니다. 이 영상에서는 인생에서 매우 성공한 동창들이 대학 교수님을 찾아갑니다. 이 동창들은 교수님에게 자기들의 성공과 일을 얘기하다 일과 관계, 삶에 대한 불평을 이야기 하기 시작합니다. 교수님은 손님들에게 커피를 권했고 부엌으로 가서 도자기, 플라스틱, 유리, 크리스탈, 평범해 보이는 것, 비싼 것, 정교한 것 등 다양한 컵을 들고 돌아와서 커피를 따라주고 커피를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은 자신을 위해 최고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불만과 문제, 스트레스의 원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컵 자체가 커피의 품질을 좌우하지 않는 다는 것을 교수님은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싼 컵에 주목하고 더 좋은 컵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이 커피의 향을 더 좋게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교수는 인생은 커피 잔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커피 잔은 직업, 소유한 돈, 사회에서의 지위 등이 컵에 해당하는데 컵은 내 삶의 이야기를 담거나 담아내는 도구이자 구조일 뿐이며 어떤 컵을 가지고 있느냐가 삶의 질을 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겼느냐가 중요하고 커피를 마시고 음미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원하는 것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잔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잔에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져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것이고 그 안에 다른 것이 담겨져 있다면 그 향기가 날 것입니다. 처음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안에 발견되려 한다라는 고백이 여러분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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