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이해를 넘어 삶으로] 안식일, 완료를 넘어 완성으로(창1:24-2:3)
0 ratings
· 10 viewsNotes
Transcript
일시 : 2023년 4월 30일 주일 청년부
시리즈 : 안식일, 이해를 넘어 삶으로
제목 : 안식일, 완료를 넘어 완성으로
본문 : 창세기 1장 24절-2장 3절 *구2
결단찬양 : 삶의 예배
[무엇이 완벽이라 말할 수 있는가?]
‘완벽’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며, ‘과연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얼마나 있을까? 완벽한 것이 있긴할까?’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아름다운 자연만물, 창조의 감사를 자아내는 노을 빛과 새벽의 안개 등 ‘완벽하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지만, 더 나아가 질문해보자면 ‘우리가 만든 것중 완벽한 것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완벽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름 이과출신으로, 또 수리와 물리를 참 좋아했던 저에게 있어서 ‘공식’이 참 완벽하다 생각하며 지냈는데, ‘과연 이 공식이 영원할 수 있을까? 영원하지 않다면 과연 완벽하다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니 이 또한 완벽하다 말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또 연예인들을 보며, ‘완벽한 외모’를 지녔다 말하곤 합니다. 정우성을 보면 참 잘생겼습니다. 뭐 하나 부족함 없을 것 같은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는 ‘큰 키’가 콤플렉스여서 구부정하게 다닌다 인터뷰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큰 키가 무슨 콤플렉스인가 싶긴하다만, 본인 스스로가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완벽하다 말하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 종교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각자가 나름의 교리를 들이 밀며 ‘완벽’하다 말합니다. 천주교는 자신들의 교리가 완벽하다며, 불교는 자신들의 교리들이 완벽하다며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JMS나 신천지도 나름의 교리를 들이 밀며 완벽하다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교리를 들어보면 뭐하나 완벽한 것이 하나 없습니다. 늘 허점이 존재합니다. 이들의 허점을 찌르면 또 다른 교리들을 만들어 와 그것들의 허점을 보완하려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미 이들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교리의 허점을 막기 위해 또 다른 교리를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심지어 이들이 말하는 완벽은 늘 사람에게 있다 주장하기도 합니다. 교황이 완벽하다, 무소유를 통달한 중이, 정명석이, 이만희가 완벽하다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 별로라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담 진짜 ‘완벽’은 도대체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국어사전이 말하는 완벽은 ‘결함이 없이 완전한 것, 흠 없음’ 이라 표기 합니다. 그리고 예시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녀의 연주는 완벽에 가까웠다.’ 예시만 보아도, 완벽은 인간이 건들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리하자면, 완벽은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함을 의미한다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성경이 그렇습니다. 성경은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경 그 자체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며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안의 기록된 모든 내용이 아주아주 완벽한데, 오늘은 그 중 안식에 대해 나눠보려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2주에 걸쳐 ‘안식일’에 대해 나누려 합니다. 그리고 안식을 통해, 개인적 소망과 바램은 예배의 회복이 타오르길 소망합니다.
[여섯째날, 창조를 완성하시다]
오늘 본문의 안식을 논하기 전에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창조는 총 몇일에 걸쳐 이루어 졌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고민함에 있어 도움을 드리고자 창세기 1장 31절과 2장 1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이제 조금 힌트가 되었을까요? 창조에 대해 발자취를 밟아봅시다. 첫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날 ‘물’과 ‘궁창’을 나누사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셋째날,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바다’를, 뭍이 드러난 곳을 ‘땅’이라 불렀습니다. 넷째날, ‘낮’과 ‘밤’을 나누시며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습니다. 다섯째날, ‘새’와 ‘바다생물’을 만드셨으며, 여섯째날은 ‘땅의 생물’들과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2장 1절을 보니 어떻게 기록합니까? ‘다 이루어졌다’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의 끝을 여섯째 날이라 보곤 합니다.
또 원어를 볼 때, 우리는 ‘다 이루어졌다’는 내용의 의미를 조금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사용된 원어는 ‘카라’라는 단어인데, 긍정적인 뜻과 부정적인 뜻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뜻으로는 ‘어떤 과정을 계속하여 충만하게 만들어 완성한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뜻으로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소비하거나 사용하여 전부 없어질 때까지 계속한다는 것’ 이란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을까요? 여섯째날 창조하시고 사용된 뜻은 긍정적인 뜻으로서 ‘충만하게 하시고 완성하심’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여섯째날 다 이루심은 단순히 ‘다 했다’가 아닌 ‘너무 완벽하게 완성하셔서 더 이상 추가될 것이 없음’을 의미함을 보게 됩니다.
[일곱째날, 창조를 마치시다]
그리고 2장 2절을 이어 보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또 한 번 마치심이 등장하고, 이때 사용된 단어 또한 ‘카라’입니다. 근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여섯째날에 ‘모든 것을 완성하여 더 이상 마치실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곱째 날이 되자 또 한 번의 ‘카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사실 일곱째 날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일곱째 날이 되어 ‘완성’하셨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이 힌트를 우리는 같은 구절인 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2절 하반절을 보니, 그가 모든 일들을 그치셨음을, 모든 일들로부터 멈추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일곱째날이 되어 ‘카라’가 또 한 번 등장한 것은,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더 하셨다는 의미가 아닌 그 일들로부터 멈추셨다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하시다]
흔히 우리는 ‘안식’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 쉬는 날, 일들로부터 쉬는 하루 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창세기를 보면 ‘안식’이 가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안식은 완성입니다.
창조 행위에 더 이상 추가하실 것이 없고, 만들기 원하셨던 모든 것들을 만드시며 성취하신, 더 이상의 창조가 아닌 완성이 곧 안식입니다.
2장 2절 한 번 더 봅시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때 등장하는 안식은 ‘샤바트’는 곧 출애굽기, 우리가 다음주 함께 나눌 말씀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에도 동일하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십계명의 안식일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기엔 또 어려움이 있습니다.
‘샤바트’는 ‘멈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우리는 주로 ‘안식하다’, ‘쉬다’ 정도로 번역하여 보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보기에, 배경이 가지고 있는 해석과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쉬다’의 해석으로 보자니, 안식이 육체의 피곤함과 노쇠함으로 인해 쉰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기에, 원뜻 그대로 가지고 오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지치실리 없고, 육체적 어려움을 겪으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리 이해하기란 분명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 해석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감히 제한하는 것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그렇기에 창세기가 말하는 ‘샤바트’ 곧 안식일은 단순히 육체적 노동으로부터의 쉼이 아닌 하나님 계획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안식, 곧 복과 거룩. 하지만]
그리고 3절을 보니, 일곱째 날에 대한 추가 설명이 기록됩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안식하심과 함께 그 날을 복되게 하셨고, 또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일곱째 날을 완성하시고 마치셨습니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깁니다. 영원한 안식과 복과 거룩함이 거했던 이곳에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바로 ‘죄’가 들어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고, 그로인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타락하여 이 땅에 죄가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해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창조하실 것 없이 성취하셨던 모든 계획이 한낱 인간에 의해 와르르 무너집니다.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성경 이 두꺼운 책에 하나님이 불순종과 죄 하나 없이 깨끗했던 세상에서의 기쁨이 고작 창세기 1장과 2장, 겨우 두 장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순종과 죄가 가득한 이 세상을 향해, 또 죄를 범한 인간을 향해 궁극적인 심판을 내리시기보다 오히려 구원의 약속을, 다시 우리가 복과 거룩을 향할 수 있도록 약속을 주십니다.
원시복음이라 불리는 창세기 3장 1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는 곧 무엇을 말합니까?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이루실 구원사역 아닙니까? 구원의 완성 아니겠습니까? 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과 거룩으로 설명하시며, 안식의 개념을 언급하시는데, 오늘 날 우리가 드리는 이 주일은 어떤 날이어야 합니까? 바로 완성된 구원이 뒤틀렸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회복된 이 날, 즉 단순 완료가 아닌 모든 것을 이루신 완성을 바라보는 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이 매 주일의 예배가 단순히 매주 돌아오는 하루가 되지 않길 소망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게 안식일을 허락하셨는지, 그 의미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우리 되길 소망합니다.
죄에 죽어 마땅한 우리를 살리시고자 구원의 약속을 허락하심으로, 이미 완성하신 하나님의 안식을 다시 회복케 하기 위해 허락하신 구원, 그리고 성취로 인한 구원의 회복. 그리고 회복을 묵상하며 기억하고 그리고 감사로 고백하며 나아가는 귀한 날.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그런 날이 되어야 합니다. 늘 마지막인 것 처럼,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완성하신 주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우리 또한 기뻐 받아 누리는 날.
오늘의 예배가, 또 우리의 예배가 진정 주님 앞에 매 순간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하고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Ⅰ 우리 삶에 예배의 회복이 능히 이뤄지게 하소서
Ⅱ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모든 것, 모든 삶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 되게 하소서
[찬양 후 기도제목]
Ⅲ 예배를 통해 영적 회복이 일어나며, 예배를 통해 우리는 감히 할 수 없는 은혜를 주께서 부어주심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창조의 완성으로 안식을 거룩과 복으로 선포하신 주님 앞에
예배로 회복을 다짐한 자들과
영적 회복과 은혜의 충만함을 사모하며 나아가겠노라 결단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