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1 새벽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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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사무엘하 13:1–14 (NKRV) 한절씩 교독하겠습니다 / 제가 먼저 1절 봉독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2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3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4 그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당신은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냐 내게 말해 주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하니라
5 요나답이 그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떡을 먹이되 내가 보는 데에서 떡을 차려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하니
6 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그를 볼 때에 암논이 왕께 아뢰되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가 보는 데에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니
7 다윗이 사람을 그의 집으로 보내 다말에게 이르되 이제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8 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9 그 냄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10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11 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12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13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의 저자이자 기독교 철학가인 제임스 스미스는 ‘인간은 끊임없이 마음의 갈망하는 상태에 놓여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는 갈망의 유무가 아니라 갈망의 대상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항상 우리는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때때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그것이 우리를 역으로 끌고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갈망합니까? 그 갈망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를 끌고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 가운데 자신의 욕망을 따라 갔던 사람을 봅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붙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아들 중 하나인 ‘암논’입니다. 1-2절을 보시면 그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욕망이 강렬할 때 똑같이 느끼는 것은 마치 그것에 끌려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것이 강하게 나를 속박한다는 점입니다. 미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입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그것만을 생각하면서, 완전히 불살라지기 전까지는 식을 줄 모르고 뜨겁게 타오릅니다. 그러나 사랑과 욕망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상대를 위한 것인지 그 목적부터 다릅니다. 그리고 방식도 다릅니다. 사랑은 오히려 선을 넘지않고 지키려고 하지만, 욕망은 선을 넘어버리려고 애를 씁니다.
다윗의 아들이었던 암논은 ‘사랑'이라고 불렀지만 ‘욕망'이라는 본명을 가진 갈망으로 가득차있었습니다. 2절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자신이 원했지만 ‘어찌할 수 없’었던 그의 누이 다말로 인해서 앓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암논의 모습을 본 친구 요나답은 암논에게 다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계략을 알려줍니다. 심각한 병에 든 것처럼 병상에 드러누워버리고 아버지 다윗이 찾아오거들랑 누이 다말이 음식을 만들어 자신에게 먹여달라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은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이 엄격하게 통제되었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통해서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으라고 한 것이죠. 다윗의 허락으로 다말이 왔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을 다 물리고, 다말만 홀로 침실에 들어오게 한 뒤 그녀에게 동침하자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냄으로 둘만 있는 상황을 만들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냅니다. 결혼을 약속하지 않는 처녀와 동침하는 것이 당시에 금지되어 있었고, 또한 형제자매와 이복형제자매 간 성관계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암논이 다말을 불러내고 동침하자고 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다말이 ’그 어리석고 욕되게 하는 일, 수치스럽게 될 일을 해선 안된다’는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강간하고 맙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불타는 사람이었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힘이 세므로 억지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룹니다. 다말의 수치와 욕됨에 대해서나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 이미 지워져버렸습니다. 욕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힘을 다해 억지로 얻어낼 뿐이었습니다. 그의 갈망은 죄악된 갈망이었습니다. 그 목적도, 그리고 방법도 모두 잘못된 것이었고, 악한 것이었습니다. 1절에는 ‘암논이 그녀를 사랑하'였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사랑이라고 말하기보단 ‘들끓는 욕망'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정확했고, 조금 다르게 표현해보자면 그는 다말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계략을 부리던 다윗의 모습이 생각나게 합니다. 그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해선 안될 일을 했습니다. 다윗의 가장 큰 오점이었던 그 사건이 이 암논의 사건에서 연상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가 다윗의 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부모를 보고 자식은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둘이 달랐던 점이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갈망했긴 했지만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갈망 또한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불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두 갈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자신의 욕망을 향한 갈망 두가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파멸적인 행동을 했던 암논을 오늘 말씀가운데 봅니다. 또한 그를 통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죄악된 과거를 오버랩하여 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갈망하며 살아야하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암논 뿐 아니라 경건했던 다윗의 죄악된 과거까지 함께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우리도 항상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사랑인지, 아니면 욕망인지를 우리는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강렬한 감정만 가지고 그것을 얻기위해 억지로 힘으로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는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십자가의 지혜로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인생을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선을 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합리적일지라도, 효율적이고 지혜로워 보일지라도 그것이 세상적 욕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또는 선을 넘거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갈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고, 그분의 영광을 갈망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