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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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심
[서론]
손흥민 경기를 보면서 흥미로운 장면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손흥민이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손흥민이 크리스천일 것이라고 강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흥민은 종교가 없습니다.
단지 시합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신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복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을 보기도하고, 굿이나 부적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꼭 챙겨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쉽게 운세나 타로점을 볼수 있는 어플도 있습니다.
제가 커피숍에서 공부하고 있을때 앞에 있던 두 중학생 여자아이들 생각이 납니다.
제 앞에서 엄청 떠들길래 무슨 말을 하는지 가만히 들어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본 자신들의 점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미래가 어두울수록 이처럼 점보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복에 대해서는 굉장한 열심을 보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이 여전히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수년전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 오랫동안 전세계 베스트 셀러였습니다.
아마 대부분 한권쯤은 여러분들 책꽂이에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기복주의 신앙은 신앙생활의 동기와 목적이 모두 내가 복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별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복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할까요?
[본론]
민수기 22장부터 24장까지 등장하는 발람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굉장히 독특한 이야기입니다.
말하는 당나귀가 등장하고, 이방 주술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을 합니다.
판타지 같아 황당하기도 하고,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발락은 모압의 왕입니다.
현재 발락왕은 모압 평지에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시혼 왕과 바산 왕 옥을 쳐부순 소문을 들은 후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 최고의 주술사로 알려진 발람이란 자를 데려옵니다.
요즘 우리말로 치면 아주 용한 무당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를 데려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부탁하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전쟁에 앞서 주술사를 통해 상대방을 저주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발락왕은 우여곡절끝에 겨우 그를 데려왔고 그에게 저주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발람은 두번이나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발람의 입에서 하나님의 뜻만 뱉어내도록 압박하셨기 때문입니다.
저주를 하라고 데려왔더니 축복을 하는 바람에 화가난 발락왕은 계속해서 장소를 옮깁니다.
이방신들처럼 장소를 옮기면 신의 뜻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27-28절입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말하였다. “함께 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이면 거기에서 나에게 유리하도록 그들을 저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발락은 발람을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로 데리고 갔다.
발락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이면 저주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는게 하나님뜻이 아니라는데 발락왕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저주할수 없다면 어떻게든 저주할수 있게 해달라고 발람을 은근히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되면 하나님 뜻이라도 바꿔서 저주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는데 실패한 발람은 이제 그만둘 법도 한데 또다시 그의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두번이나 드렸던 제사를 또다시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구합니다.
그만큼 발람이라는 사람은 이중 인격의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의 뜻만 전달하는 유능한 주술사처럼 보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이 받을 복채에 미련을 갖는 탐욕스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25장에 가면 발람이 꾸민 계략때문에 이스라엘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아무튼 그는 또다시 7개의 제단, 7마리의 소와 양을 제사드립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로서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일방적인 제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레위기에는 이런 제사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또다시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앞선 두번의 경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발람이 홀로 조용한데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번에는 그에게 직접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24장 1-2절입니다.
발람은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주님의 눈에 좋게 보였다는 것을 알고는, 매번 으레 하던 것처럼 마술을 쓰려하지 않고, 대신 광야쪽으로 얼굴만 돌렸다. 발람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진을 친 이스라엘을 바라보았다. 그 때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렸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만 했던 첫번째, 두번째 경우와 달리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왜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까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할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받아들이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수 있는 단서가 ‘매번 으레 하던 것처럼 마술을 쓰려하지 않고’입니다.
이 말은 앞선 두번의 경우는 점치듯 어떤 징조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마음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의 영적인 눈이 열렸고, 그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축복의 말을 쏟아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발락과 발람의 은밀한 음모를 어떻게 알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를 막기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것입니다.
발람을 한번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두번이나 거부했다가 결국 발락왕에게 방문합니다.
가는 도중에 희한한 당나귀 사건도 겪었습니다.
당나귀가 하나님의 천사를 보았고, 자신에게 말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발람에게 경고의 말까지 했습니다.
이 정도 희한한 일들을 겪었으면 알아듣고 포기해야 정상아닙니까?
그런데도 발람은 발락왕의 요청을 세번째 들어주고 있습니다.
무슨 고집이 이렇게 셉니까?
아니면 무슨 놈의 돈독이 제대로 올라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발람의 고집보다 더 센 고집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고집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고집을 꺾으시고,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축복하십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발람이 말한 첫번째 축복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두번째 축복은 하나님이 축복의 약속을 결코 깨뜨리실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아에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축복하시는지 그 축복의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이처럼 3이라는 완전수를 볼때 우리는 감동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번의 축복을 통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열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3이라는 완전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들렸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고, 축복하려는줄 알고 있니?’
생각해보십시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배신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볼수 없고, 알수 없는 곳에서조차 열심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이 이야기를 알게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을 너무 잘 표현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121편 4절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졸더라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우리가 자더라도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처럼 열심히 복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알려주는 더 좋은 표현이 있을까요?
어떤 종교가 신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그만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각별한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말입니다.
내일 5월 8일은 어버이 날입니다.
부모님만큼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시는 분이 계실까요?
부모님만큼 자식을 축복해주시는 분이 계실까요?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자녀라고 부르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의 이런 마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상처받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를 복주시려는 변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복은 세상 사람들의 복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이 주는 무엇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을 기쁘게 해서 어떻게든 그가 주는 복을 얻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든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이렇게 열심히 복을 주시려 하시는 것일까요?
5절 이하에 나온 발람의 예언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발람의 예언은 발람 자신의 말이 아닙니다.
앞선 두번의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그가 전달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세번째 예언은 하나님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복을 주십니까?
먼저, 5-7절입니다.
야곱아, 너의 장막이 어찌 그리도 좋으냐! 이스라엘아, 너의 사는 곳이 어찌 그리도 좋으냐! 계곡처럼 뻗었구나. 강가의 동산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목 같구나. 냇가의 백향목같구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뿌린 씨는 물을 흠뻑 먹을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너무 아름답고 예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이스라엘의 과거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린시절 추억과 함께 그들의 미래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황량하고 모든 것이 궁핍한 광야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곧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보시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요?
현재 내 모습을 보면 메마른 광야의 말라 비틀어진 잡초처럼 초라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시냇가에 심은 풍성한 나무처럼 보십니다.
침향목, 백향목은 향이 나며 아름답고 튼튼한 나무들입니다.
저번 설교에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후 스스로를 메뚜기같은 존재라고 폄하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강한 민족들 앞에서 자신들은 메뚜기라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주신 이스라엘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7절 하반절부터 9절입니다.
그들의 임금은 아각을 누르고, 그들의 나라는 널리 위세를 떨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에게는 들소와 같은 힘이 있다. 그는 나라들, 곧 대적들을 집어삼키고, 대적들의 뼈를 짓부수며, 활을 쏘아 대적들을 꿰뚫을 것이다. 엎드리고 웅크린 모양이 수사자같기도 하고, 암사자 같기도 하니, 누가 감히 일으킬 수 있으랴! 너에게 복을 비는 이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임금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들소와 같은 힘으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무찌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사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집어삼키고, 짓부수며, 꿰뚫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더이상 이스라엘이 메뚜기가 아니라 사자라고 하십니다.
사자는 동물의 왕으로서 어느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존재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존재가 될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집트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이런 힘을 갖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풍성함과 원수에 대한 승리의 약속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복입니다.
복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새 이스라엘인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세상속에서 스스로를 메뚜기처럼 여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눈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메뚜기가 아니라 사자라고 하십니다.
사자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도대체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물질의 복, 명예의 복, 성공의 복과 뭐가 다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복은 내가 잘되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기복주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복을 얻기위해 하나님을 도구 삼아버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게 신앙생활의 최종목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복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풍요와 승리가 도착할 목적지는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누리는 풍요와 승리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의 복인 풍요와 승리는 저주가 되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많은 것을 누렸지만 그들은 더 갖기 위해 가나안 우상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그 땅위에 세우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했고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심히 복주시는 이유는 나를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9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너에게 복을 비는 이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원래 창세기 12장 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2장 2-3절에 나온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무것도 없던 아브라함에게 복에 대한 놀라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이 되어 세상 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복의 통로가 된다는 말이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복이 되어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복이 되었지만 복의 통로가 되는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신 복이 하나님의 저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복주시기 원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의 최종 목적은 우리만 잘먹고 잘사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복이 되어 하나님의 복이 세상 속으로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시는 최종 목적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직장과 우리의 삶에 이런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