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6 양청] 소요리문답 9-10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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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문. 창조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답. 창조의 사역은 하나님이 무에서 모든 것을 만드신 것인데
자긴의 권능의 말씀으로, 엿새 동안에, 그리고 매우 심히 좋게 만드신 것입니다.
10문.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답.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되,
지식과 의와 거룩에 있어 자기 자신의 형상을 따라
피조물들을 지배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소요리문답의 구조를 항상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문에서 사람의 주된 목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2-3문에서 성경 말씀이 그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이 1-3문까지가 말하는 바였다. 4-12문까지 신론이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신론인데, 이 중에서 4-6문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7-12문까지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한다. 우리가 지난 시간부터 생각해 보고 있는 것이, 시간 이라는 것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역이 바로 작정이었고, 오늘과 다음주에 살펴볼 창조와 섭리는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오늘은 9-10문까지 창조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1번처럼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롬4:17 의 말씀을 찾아보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소요리문답이 인용하는 성경구절들은 매우 중요하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실 때 반드시 기억하며 암송할 수 있었음 좋겠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인공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었다는 것이다.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일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장면이다. 아브라함은 진지했다. 척 하려고 했던 게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설명하기를,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믿음이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믿음이라는 것이 이 정도 경지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명백한 명령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인격에 대한 신뢰, 이것이 바로 믿음 아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창조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존재하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단어이다. 그런데 가끔씩 사람에게도 ‘창조'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면 ‘창조경제’라던가,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라면, 인간은 얼마든지 있는 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뭔가 재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뭔가를 새롭게 하고, 뭔가를 잘 만들어내고, 잘 구상한다고 하면 그 사람을 창조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창의적이라고 말한다. 죄로 완전히 부숴졌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아주 조금이나마 반영하는 존재임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2번을 보라.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창1 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빛이 있으라 하니 생겼고, 낮과 밤이 나뉘라 하시니 나뉘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대로 지어졌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창조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그 만드시는 방법으로 구분할 때,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창 1-2 장을 보면 온 우주만물을 자신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이 과정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지 않은 것이 등장한다. 오직 이 존재만큼은 말씀으로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었다. 사람은 어떻게 만드셨는가? 흙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셔서. 또 하나의 사람은 뭘로 만드셨나? 첫번째 사람의 갈비뼈로. 사실 한글 번역으로는 흙이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흙 먼지’이다. 사람이 제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 세상의 티끌과 같은, 흙먼지와 같은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고 할 때, 우리는 창세기 말씀을 통해 그렇게 들어왔으니까, 또한 인간이 죽어 그 몸이 썩거나 화장을 하게 되면 그 몸이 흙이 된다는 것을 보고 들어왔으니까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우리가 이 흙이라는 재료로 이 몸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게 이해가 되는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 같다. 여러분 중에 혹시 프라모델과 같은 장난감 조립에 취미가 있는 분들 계실지 모르겠다. 뭔가 작품을 만들려면 그에 걸맞는 재료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몸에는 물도 있고, 피도 있고, 피부도 있고, 근육도 있고, 신경도 있고, 뼈도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단지 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해가 되는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흙을 한 포대 갖다 주면 이 몸둥아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것도 일반 흙도 아니고, 어디 머드축체 어디냐? 거기서 사용할 법한 아주 좋은 흙을 가져다 준다 한들, 그 흙으로 여러분의 몸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고장난 몸을, 고장난 신체기관을, 고장난 피부를 흙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러니까 몸의 본질이라 하는 것은 흙과는 본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딜 봐서 이 몸이 흙으로 만들어졌느냐. 그런데 죽어 썩는거 보면 흙이 된다. 기가 막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들었다고 하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하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질 않는데, 죽어 썩는 것을 보면 그 말씀대로 흙이 된다. 이 점만 보아도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여러분들 교재2번의 B를 보시면, 1차적 창조와 2차적 창조의 구분이 필요하다. 1차적 창조는 말씀으로 말씀대로 창조하시는 것을 가리킨다면, 2차적 창조는 그것의 본질과 상관이 없는 재료를 가지고 그것을 창조하신 것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2차적 창조도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놀라운 창조를 이루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인간은 제 아무리 창의적이라 하더라도, 그가 고작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은 재료와 상관이 있는 것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플라스틱으로 플라스틱 제품을, 알루미늄으로 알루미늄 제품을 만들어낼 뿐이다.
3번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6일 간 창조하셨다. 성경은 “엿새 동안”에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6일동안이나 창조를 하셔야 했을까? 그 무한하신 능력으로 하루만에, 아니 한 시간만에 다 끝내셨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10일이면 10일이고 한달이면 한달이지 왜 하필 6일일까?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는 과정 가운데 시간을 필요로 하셨을까? “오늘은 너무 일을 많이 해서 여기까지만 좀 쉬어야겠다. 나머지는 내일 해야지" 이러셨을까?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시간에 속박되셨는가? 시간에 얽메이셨는가? 이것이 아니라면 왜 6일간 창조하셨을까?
물론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에 대해서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살펴볼 때 발견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6일 창조 사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주 분명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보라.
이런 대칭구조가 있다. 질서가 있다. 하나님께서 생각나는대로 마구잡이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무엇이든 차분하게 정돈하시고, 질서있게 하시는 분이다.
이제 4번을 보라. 창조의 선함.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라고 말씀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좋았다" 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로 “토브" 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할때, 하나님의 그 선하신 속성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셨을 때, 창조주의 선함이 창조물 하나하나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선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유용함과 유익함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로 유익하게 하시는 선함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우리 말로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다. 이런 선하심이 피조세계에 나타났다.
사람의 창조를 보라. 10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되, “지식과 의와 거룩에 있어 자기 자신의 형상을 따라 피조물들을 지배하게 창조하셨다" 고 말한다. “지식과 의와 거룩에 있어..." 이는 인격을 말한다. 짐승에게는 지식과 의와 거룩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것이 창조의 절정이자 정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B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 정, 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처음에 발휘하는 능력을 보라. 아인슈타인이 역사상 최고로 똑똑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뇌를 7% 사용했다고 한다. 인간의 두뇌라는 것이 참 대단하다. 그 뛰어나다는 알파고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가.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지식과 의와 거룩함을 수여받은 놀라운 존재였다. 그가 얼마나 위대하고 존귀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의 한 대목이 있다. 창2: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물들을 보내어 주시고 아담은 그가 받은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그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물들의 종류가 어디 한두 종이었겠는가? 정말 셀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들이었을 것이다.
아담이 자신에게 몰려드는 셀 수 없이 많은, 정말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을 서있는 동물들을 바라보면서 “아니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귀찮은 일을 맡기셨을까" 라고 생각했을까. 재미있는 상상이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결코 하루 이틀만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어떤 존재에게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 단순할 것 같지만 정말 단순한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어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은 그가 가진 존재와도 같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불러 주시고, 사래를 사라 라고 이름을 바꿔 주시고, 야곱을 이스라엘 이라고 바꿔 불러주시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의 존재와 의미와 사명이 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지어주는 작명소 같은 거 말고. 어떤 가정에 아이가 태어날 때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가? 누군가의 이름을 만들고, 그 이름을 그 존재에게 불러 줄 때, 그 사람과 나와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저는 아담이 그 앞에 몰려든 셀수 없이 많은 동물들을 보면서 실제로 어떻게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지금처럼 영어, 한국어, 프랑스어로 나뉘어진 때가 아니라 온 세상의 언어가 아직 하나일 때였으니까. 아담은 그 앞에 모인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줄 때 귀찮음으로, 건성건성 붙이지 않았다. 너는 첫번째로 왔으니까 1호, 너는 둘째로 왔으니 2호, 너는 셋째로 왔으니 3호 라고 부르자. 이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글로 예를 들자면 기린이 지나간다. “너는 기니까 앞으로 기린이라고 불러줄게! 강아지가 지나가는데, 너는 멍멍 우니까 앞으로 멍멍이라고 불러줄게! 너는 몸집이 크니까 하마가 좋겠어" 아담이 이 많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 이거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땅에 있는 모든 짐승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그 존재가 가진 본성을 파악하고 그 짐승과 나와의 독특한 관계를 맺는 행위였다. 하나님께서 혼돈 속에 있던 이 땅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그 질서대로 창조하셨던 것처럼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던 자로서 이 땅에 질서를 부여하던 놀라웠던 존재였다는 것이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창조세계의 통치자로서 사람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2: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을 지으실 때 창세기1장은 수도 없이 반복하기를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셨는데, 처음으로 보기 좋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막상 사람을 지으시고 보니까 남자 혼자 있는게 뭔가 하자가 있어 보였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불완전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창1:26 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어떤 상태로 지으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데, 잘 보시면 “우리" 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들되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다. 사람을 만들되 “그”로 다스리게 하자가 아니라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들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셨던 것처럼, 사람도 혼자가 아닌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과만 살아갈 존재가 아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라. 혹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나는 하나님만 열심히 사랑하면서 살면 돼! 사람들과의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나는 사람들과 관계맺으며 힘들어하고 상처받고 이런 일들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 오히려 그 에너지를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일에 써야지!” 그러나 여러분, 이는 결코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교회’ 라는 공동체로 부르셨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부르시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부르셨음을 기억하라. 이는 나 혼자 하나님 열심히 섬기고 사랑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앞뒤양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남성성과 여성성은 구별된다. 확실히 구별된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화가 반 성경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확실하게 구별하셨지만, 이 구별에는 우열이 없다. 그러나 질서는 존재한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등하시나 질서 가운데 존재하신다. 성자께서 성부께 복종하신 것은 성부에 비해 성자께서 뭔가 열등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자원하여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주셨고, 육신을 입고 게실 때에도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행하신다 하신 것은 자원하여 철저히 복종하는 자리에 서신 것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부부 안에서 남녀의 질서와 위치를 회복해야 한다. 우열은 없다. 그러나 질서 차원에서 말씀하셨다.
부부는 한 몸인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것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짝이 필요하다. 사람에겐 인간관계 가운데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부르시기 전부터, 이미 한 몸으로부터 취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하와를 만드시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창조 교리를 통해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해보며 마치려 한다. 첫째, 인간 창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아야 한다. 1-2장에서 나타나는 창조의 이야기는 인간의 필요나 인간의 어떤 것도 구하기도 전에 먼저 만드셔서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과 때에 따라 우리에게 먼저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선하신 하나님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이를 간과하니까 고린도교회는 무질서한 교회가 되어버렸다. 성령의 이름으로 말이다. 오늘날에도 고린도교회와 같이 질서를 가볍게 여기는 교회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질서를 세워가신다.
셋째로,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이에 대해 깊게 살펴보면 좋겠다. 이게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논의하길 떠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또한 한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도록 정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도 생명을 창조할 수 없는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생명을 만들어내도록 질서를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이를 잘 분별해야 한다.
영원한 사귐으로
성령이여 우리를 예수께로 예수여 우리를 아버지께로
아버지 우리를 예수께로 예수여 우리를 성령께로
인도하소서 그 친밀한 사랑으로 인도하소서 그 영원한 사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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