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아래 있는 사람들 (롬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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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 있는 말씀을 계속해서 전하겠습니다.
유대인을 수백만이나 죽인 독일의 <아히히만>을 평생동안 추적한 유대인이 어느 날, 아르헨티나에서 아히히만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발견 당시 그는 어린 손자를 돌보고 있는 인자한 노인이더랍니다.
순간 ‘저 사람이 정말로 수백만명을 가스실에서 죽인 사람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선한 시민인데, 그 속에는 살인마가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본래는 선한 사람인데, 어쩌다가 환경을 잘못 만나서 그렇게 변한 것이라고 해야합니까?
아니면 그 속에 죄의 악한 뿌리가 있다고 해야 합니까?
로마서는 1장부터 지금까지 분명하게 선언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1장부터 지금까지 분명하게 선언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죄인이라고? 웃기지 마라. 나는 그렇게 까지는 타락하지 않았다’--이것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까? 어느 정도의 선이라도 행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까?’ 라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세요.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라는 말에서 우리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고, 우리입니다! 즉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또는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라는 말에서 우리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고, 우리입니다! 즉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또는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인간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성경의 견해이고, 세상 사람들은 다릅니다.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유학의 두 거두 맹자와 순자는 서로 정 반대의 주장을 했습니다.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유학의 두 거두 맹자와 순자는 서로 정 반대의 주장을 했습니다.
<맹자>는 인간의 모든 성품은 근본적으로 선함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주장, 성선설이지요.
<맹자>는 인간의 모든 성품은 근본적으로 선함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주장, 성선설이지요.
그러나 <순자>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함을 가지고 태어난다, 성악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함을 가지고 태어난다, 성악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인간은 선하다>는 견해가 교육학이나, 상담학, 심리학에 만연해서 [자율학습이론]이 오늘날의 교육철학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빙자해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지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경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인간 자신의 의무나, 책임, 잘못들, 인간의 게으름, 포악함, 욕심, 미움, 술과 마약 폭력문제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는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에 근거한 교육과 철학이 결국 어떤 인간과 사회를 이루어놓았는지는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전혀 비교할 수조차도 없는 범죄와 폭력과 타락과 무질서는 이제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까지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9절)은 인간관입니다.
1. 그런데도 왜 이런 오해가 생길까요?
1. 그런데도 왜 이런 오해가 생길까요?
우리는 여기서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9절)을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죄>라는 말씀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복수로 죄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수로 죄들>이란 말은 사람들이 흔히 사람들이 범하는 여러 가지 죄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롬1:28-32에서 말하는 여러가지 죄의 열매들을 말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그러나 본문은 말하는 <죄>는 단수입니다. 이것은 죄를 사람처럼 의인화 시켜서 죄가 사람위에 군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죄의 실체, 죄의 세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엡6장>에 보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람을 지배하는-사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죄>도 바로 이 사단처럼 인간을 지배하는 실체입니다.
▶그래서 <다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아래>라는 말은 그 밑에 눌려있습니다.
▶그래서 <다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아래>라는 말은 그 밑에 눌려있습니다.
또는 그것에 의해서 묶여 있고, 붙잡혀 있습니다, 그 손아귀에 꽉 잡혀서 끌려간다는 뜻입니다.
(통치권) 즉 죄라는 쇠사슬에 묶여서 평생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죄들은 어느 정도 막을 수가 있지만, 죄 그 자체는 인간이 처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도 안되고, 법을 강화해도 안되고, 강한 정부를 만들어도 안됩니다.
모두 다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합니다. 병 그 자체를 고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7:23~ 24)에 탄식하기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했습니다.
무엇이 우리 목을 움켜잡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숨도 못 쉬게 지배합니까?
죄의 세력입니다! 죄가 우리 배후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죄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죄가 사회생활 속에서 우리를 죄 아래 있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마비시켜서 바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귀를 마비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손과 혀를 마비시켜서 바른 것을 못 느끼고, 좋은 것을 못 잡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마비시키고, 질식시켜서 우리를 무감각하고, 둔감하게 하며, 우리 영혼이 그 고통을 못 느끼게 합니다.
2. 이렇게 죄 아래 붙잡힌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고, 사악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10-18절)입니다.
2. 이렇게 죄 아래 붙잡힌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고, 사악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10-18절)입니다.
이 부분은 구약성경 시편과 이사야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3가지로 요약하면,
1)첫째로, (10-12절)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1)첫째로, (10-12절)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칼빈은 [날개를 꺾어놓은 새는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갖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지는 못한다. 죄를 짓고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유는 갖지만 하나님께로 접근할 수는 없다.]고 설명하는데,
▶본문에서는 “다, 한가지로, 없다, 없다, 없다, 하나도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타락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강원도에, 대관령에 관광오는 사람들 중에 의인이 하나도 없을까요?
-세계 60억 인구 중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적십자 활동은? 사회 봉사활동은? 구제사업은? 선이 아닙니까?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명확하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명확하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깨닫는 사람”이라는 뜻의 [쉬니에미]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를 함께 세워놓고 비교하여 참과 거짓을 가려낸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참된 길을 가려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옳은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만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만심과 교만 때문입니다.
▶또 어느 정도로 무능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합니다.
인간이 본능적인 하나님 의식마저 갖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이 있을 지도 몰라>라는 막연한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지만, 알면서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우리는 종교를 갖고 있고,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람이 종교를 가짐으로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종교로 대체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맹인이 된 것입니다.
▶12절에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치우쳐>라는 [엑스엑크리난]이라는 말은 [구부러지고,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원래 ‘죄’라는 말은 ‘하말타아’ ‘과녁에서 빗나간 화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치우친 화살, 빗나간 화살은 무익한 것, 쓸모없는 것일 뿐입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예정된 코스를 정확하게 가서 명중할 때에 비로소 그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 엉뚱한 곳에 박힐 때는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익하게 되었다’라고 번역된 [에크레오테산]이란 말은 <못쓰게 되었다>는 뜻으로
[쉰 우유처럼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못쓰게 되어 버린 우유를 먹으면 오히려 그것은 독약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때문에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어떤 선한 모습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가 술꾼에다가, 난봉꾼이었답니다. 어머니를 두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겁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갈등이 많았고, 집안이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른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쁜 여자에게 빠져서 불륜관계를 맺어버렸습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아버지와 동일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예배도 못 드리고, 신앙생활도 안 되는데, 아내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이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쉰 우유와 빗나간 화살>처럼, 비뚤어지고 빗나간 길을 올바른 길로 착각하고 열심히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생각도 못하고, 해서는 안될 일에는 비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할 능력은 없으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는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빛으로 나올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는 있어도, 하나님을 찾을 능력이 없습니다.
-마치 날개죽지가 부러진 새와 같습니다. 날아갈 자유는 있지만, 그러나 날지는 못합니다.
-영적으로 무능해진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은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은 안 합니다.
2.두 번째로 (13-15절)은 <죄인은 부패했다>고 합니다.
2.두 번째로 (13-15절)은 <죄인은 부패했다>고 합니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이 부분에서는 (10-12절)과는 전혀 다른 강조를 한다--‘없다’의 강조에서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몸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의 행위가 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의 존재 자체가 죄 가운에 있음을 의미한다.
▶원래 <열린 무덤>이란 두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죽은 자를 받아드릴 준비가 된 무덤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하나는 무덤을 관리할 임자가 없어서 도굴꾼들에게 파헤쳐지고 뚜껑이 열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후자의 뜻이 더 정확하겠지요. “썩은 악취가 나는”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왜 “목구멍”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를 생각할 때 아마도 뿌리깊은 악을 가리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목구멍--혀--입술--입)은 모두 마음으로 통하는 통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악인은 입을 벌려 말함으로써 타락한 본성을 드러낸다고 말슴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취가 진동하는 열린 무덤처럼 더럽고, 추악하고, 냄새가 난다는 말입니다.
▶그 입 속에서는 항상 거짓이 쏟아져 나오고, 저주와 욕설이 가득합니다.
그들의 혀는 속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마 12:34)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의 대화에서보다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의 말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말만큼 거칠지는 않지만 종종 천국보다 세상과 더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 불의 한 자의 발은 어떻습니까? <피 흘리는데 빠르다>
살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해치는 모든 행위들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살벌하다면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서로 사랑할 능력을 상실하고, 경쟁이 아니면, 다른 사람을 이용만 하려 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능력도 없습니다. 이것이 죄인입니다!
목구멍에서부터 발까지...밖에서부터 속까지, 인간의 모든 부분이 철저하게 구석구석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어느 각도로 봐도 타락의 영향을 안 받은 곳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3. 결국 이런 인간의 모습 때문에 (16,17절)은 죄인은 절망이라고 합니다.
3. 결국 이런 인간의 모습 때문에 (16,17절)은 죄인은 절망이라고 합니다.
16,17절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파멸(쉰트림마)은 폐허를 말하고, 고생(탈라이포리아)은 “불행”을 말합니다.
파멸(쉰트림마)은 폐허를 말하고, 고생(탈라이포리아)은 “불행”을 말합니다.
사59장 7절에서도 이 악한 생각의 결국은 “황폐와 파멸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중국의 독재자 모택동이 1976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공산당 서기장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택동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라> 그래서 의사와 담당자들은 22리터의 포름알데히드(요즘 미군부대에서 한강에다 부었다고 난리가 난 그 약품)을 시체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모택동의 얼굴은 공처럼 부어 올랐고, 목이 머리처럼 부어 올랐습니다. 땀구멍마다 화학 약품이 스며 나왔습니다.
시체 보존 팀이 수건과 탈지면으로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를 닦기 위해서 5시간동안 매달렸습니다. 겨우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가슴은 너무 부풀어 올랐기 때문에 웃옷이 찢어졌습니다. 장례식이 끝났는데, 상부에서는 천안문에 영구적으로 보존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모택동과 똑같은 밀랍인형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밀랍인형은 천안문 광장에 있는 화려한 무덤이 진열되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수정으로 만들어진 관을 지나갔고, 경의를 표했습니다. 심지어 의사들도 자신들이 모택동의 진짜 시신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밀랍인형을 보는 것인지 구분을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죄가 인간성을 모두 점령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곳을 밀랍인형으로 꾸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파멸과 고생이 도사리고 있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인생입니다. 여기에 무슨 평강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더 기막힌 절망은 자신의 운명이 절망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무지입니다.
4. 그런데 절망스런 죄인이 아주 건방진 태도를 갖습니다.
4. 그런데 절망스런 죄인이 아주 건방진 태도를 갖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8절)--“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흔히 성경에서 눈은 인간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죄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죄인의 마음이 부은 것입니다. 간덩이가 부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떨 줄 알아야 작은 소망이라도 있는 것인데, 그 하나님을 향해서 눈을 치켜 뜨고, 냉소하며, 꼿꼿이 서서 똑바로 바라보는 눈에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모든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죄에게 결박당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주 주보에 기록했던,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톨스토이가 쓴 《참회록》에 실린 우화에는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맹수를 피하려 우물 속으로 들어가 넝쿨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물 밑바닥에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독사는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우물 위에서는 맹수가 기다리고 있는데, 더 기막힌 것은 그 넝쿨의 윗부분을 생쥐 두 마리가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생쥐 두 마리는 낮과 밤을 상징합니다. 넝쿨은 자꾸 약해져 갔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언제 떨어질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가 하고 있던 일은 자기가 붙잡고 있는 넝쿨 줄기에서 떨어지는 벌꿀을 빨아먹는 것이었습니다.
꿀의 단맛 때문에 밑에 독사가 있다는 것, 위에 맹수가 있다는 것, 지금 줄이 끊어지고 있다는 것을 새하얗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그 줄에 매달린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면 무엇을 간구했겠습니까?
단물이 더 나오게 해달라는 것일 텐데, 바로 이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입니다.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내 욕심, 내 소원, 내 뜻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탐욕으로 이전투구(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를 벌이는 모습은 자신이 매달린 줄에서 나오는 단물을 조금이라도 더 빨아먹겠다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그 단물을 더 이상 빨아먹을 수 없을 것이며 하늘을 향해 구원을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단물이 영원한 안식과 생명에 결코 비할 바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죄인들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없으니까....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죄인인 사람도 목회자가 될 수 있고, 장로가 될 수 있고, 권사 집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정말로 죄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하나님 앞에 부들부들 떠는 자리까지 오려면 모두가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십자가의 사랑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아직도 나라는 자존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의로우려고 노력하는 그것까지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모든 죄보다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부터(=죄의식, 죄에 대한 절망)에서부터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가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 곧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신에 대해서 절망해야만,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하나님께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해야만, 은혜의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결심해야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죄 많은 삶을 살았으니, 하나님께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나 같은 죄인이 주님께 구원받고 할 일이 있다면, 주님을 위해 사는 것밖에 없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당에 나와서 열심히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이것도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누구십니까? 진리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불의와 벗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올바른 길을 걸어갑니다.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주님께서 앞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거짓을 꾀하지 않습니다. 신실하고 성실합니다. 나태하거나 방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 진리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모두를 유익하게 합니다. 모두에게 덕이 되게 합니다.
우물 안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우물 밖 새로운 생명의 삶으로 인도해 줍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이 진리를 위해 희생하자 로마제국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이 진리를 위해 희생하자 로마제국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가 그 복음의 열매를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어받아 진리를 위해 희생한다면, 앞으로 이 땅에 태어날 후손들은 대를 거듭하며 진리의 열매를 누리는 축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꺼이 당신의 몸을 찢으며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 새로운 권능, 새로운 힘을 내려 주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승리자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날마다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