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함 받은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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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는 말을 듣는 가면 기분이 드는가? 우리 아내는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나를 지금 보여지 는 모습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아닌가? ‘나 다움’이 바로 자아 정체성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나 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철 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다. 소크 라테스가 이 말을 한 것은 재판장에서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 해서 이 말을 했는데 그의 표현은 “나는 나 자신을 안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만의 확고한 인생철학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인생이 기억되는 이유가 아닐까...
오늘 본문은 재판장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다. 재판이 기소된 사람들은 한 사람이 아니라 민족 단위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기소되어 재판장에 선 것이다. 각 민족들은 저마다의 증인을 앞세워 자신들이 옳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하나님의 백성들도 서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너 희가 나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 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하나님의 택하심은 바꿀 수 없다. 여기에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완료형으로 되어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다. 생사가 걸려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증인으로 세우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택한 종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종이 누구인가?
그는 주인의 뜻을 안다.
그는 주인의 뜻을 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너희가 나를 알고..”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이 어떤 하나님 인지에 대해서 밝히신다. 그는 지음 받은 신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 이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어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심으로써 왜 그가 택하신 종의 주인이어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주인은 그 누 구도 의존하지 않는 자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다. 비행기 안에 있는 승객의 자유는 조종사에게 달려 있다. 조종사는 어떤가? 비행기를 조종한다는 면에서는 자유롭지만 그는 관제사에게 의존해야 한다. 관제사가 없으면 이륙도 착륙도 안전하게 할 수 없다. 관제사는 또한 활주로에 나가있는 운항지원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아무리 강한 동물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보다 약한 동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한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사야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 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 되기를 거부했다. 종이 아니면 주인이 되어야 하 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의 노예가 되었는가? 이 땅에 주인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협하던 열방의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되돌리기 위해 들어 쓰신 진노의 막대기에 불과했다. 그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나라의 이야기에 동원된 보조출연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인생의 주인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종은 부정적인 단어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청년들에게 물었다. 대부분 답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한 친구는 종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구속하고 자유를 뺏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또 한 친구는 그것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종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상황에 따라서 혹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힘의 논리에 따라서 혹은 내 감정에 따라서 하겠다는 것 아닌가?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을 한 청년들은 대학생 선교단체의 리더이거나 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네이버에 ‘종’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오늘 말씀에서 말하는 주인을 아는 종의 개념이 담긴 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시대에 '종'이라는 단어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감사한 것은 '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찬양 인도자인 혜민자매다. 혜민이는 세대가 지나도 진리는 진리니까 그냥 '종'이라고 말하셔도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이 내가 큰 용기를 가져다줬다. 그렇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진리,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의 종이라는 것이다. 마이클 고먼은 그의 책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종은 주인의 뜻을 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안다.
믿음은 해방시켜 종으로 만든다(liberates and enslaves). 믿음은 하나로 통합하며 시작하게 한다(incorporates and inaugurates). 믿음은 인간을 노예로 삼고 있는 원수의 권세들로부터 이 인간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종으로 만든다.
이것이 진리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나는 오늘 여러분이 이 정체성을 분명히 갖기 원한다.
종은 주인을 믿는다.
종은 주인을 믿는다.
이렇게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종은 주인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믿을만한 분이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부르시면서 “너희가 나를 알고”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쓰인 안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라는 단어는 알다 외에도 동침하다, 허락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로써 상대를 아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주인을 아는 종은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 그것이 믿는 것이다.
믿음에는 세 가지가 요구된다. 믿음의 내용이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동의가 필요하다. 아무리 성경의 내용이 진리라도 내가 마음으로 동의되지 않으면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는 믿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 자신을 믿음의 대상에게 내어주는 신뢰까지 나아가야 진짜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 2:19 “귀신도 하나님이 한분이신 줄 믿고 떤다.”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믿음은 내 존재를 믿음의 대상에게 완전히 내어주는 것이다. 종은 자신의 삶을 주인에게 드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부르실 때, 그들은 영적인 상태는 종으로 부름 받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다. 눈멀고 귀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상을 말한다. 우리 주변에 눈멀고 귀먹은 우상이 가까이 있다. 교회 뒤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봉은 사라는 절이 있다. 거기에 가면 불상이 있다. 불상은 우리처럼 눈도 있고 귀도 있다. 그러나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절을 한다. 왜 그런가? 주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상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신이다. 스스로, 스스로,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멀고 귀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이사야 5:20–24 (DKV)
20아! 너희들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다. 나쁜 것을 좋다고 하고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하는 사람들아!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는 사람들아!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것을 쓰다고 하는 사람들아!
21아! 너희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보고 스스로 많이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아!
22아! 너희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다. 포도주 마시는 데 장수이고 술을 섞는 데 유능한 사람들아!
23 뇌물을 받고 죄인에게는 무죄를 선고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은 변호도 하지 않는 사람들아!
24 그러므로 날름거리는 불길이 지푸라기를 삼키듯, 마른 풀이 불꽃에 스러지듯, 그들의 뿌리가 썩고 꽃잎은 티끌처럼 흩날려 올라가 버릴 것이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자기 주도'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우리나라에서 자기 주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10여 년 전부터 사용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미 70년대부터 Self directed 말을 쓰 기 시작했다. 자기가 주도하는 인생을 말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뉴욕 대학교 교수인 앙켈로비치가 New Rules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더 이상 과거의 규칙에 메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과거의 규칙은 개인의 삶보다 공동체와 사회의 가치가 우선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개인의 자아실현보다는 공공의 가치가 우선되었다. 그래서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가족이나 내가 속한 공동체에 해가 된다면 결정을 보류하거나 내려놓았다. 그러나 앙켈로비치는 그것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 결국 자아실현을 막 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공동체를 배려하기 위 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저하게 자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아실현이 우선되면 결론적으로 공동체와 사회에도 유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종은 주인을 믿는다.
종은 주인을 믿는다.
앙켈로비치 교수는 3,000명의 실험자를 대상으로 자아실현을 우선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더 나아지는지를 추적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의 기대와는 달랐다. 사람들은 전보다 더 불안해했고 혼란이 가중됐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실현된 자아는 허탈함을 가져오고 그 허탈함은 더 나은 자아실현을 위해 전보다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끝없는 자아실현의 욕구는 불가능한 자아를 만들고 만다. 이 시대의 바벨탑 쌓기다.
그때부터 미국 사회에서는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요즘 우리가 실제로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있는 상대주의가 번지기 시작했다. 상대주의가 무엇인가?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것이다. 네가 하는 말이 뭔지는 알겠는 데 나랑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아실현이 우선되기 시작하자 사회의 윤리도덕적 기준과 가치는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훨씬 탁월한 기독교적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과거에는 개인의 자아실현보다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우선되었다. 그랬을 때 자아실현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정말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처음부터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냥 하다 보니까, 오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자아실현이 도덕적, 윤리적 가치보다 우선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배우자도, 직장도, 교회도 쇼핑하듯이 내 필요에 따라서 쉽게 바꾸는 것이다. 자아를 우선하는 자아실현은 결국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Searching for Self-Fulfillment in a World Turned Upside Down.”인데 직역하자면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아실현 추구하기”라고 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자아실현에 더 헌신적이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자아실현의 헛된 믿음을 버려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자아실현의 우상을 버리고 참된 주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계신 분,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는 분, 능력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맡기는 것이다. 종은 주인을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종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종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한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한다.
오늘 내 인생이 나답지 않게 자꾸 꼬이는 이유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는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 상태에서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했다. 유대 문화에서는 작은 아들이 했던 요구는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형감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 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자기 몫을 챙긴 아들은 먼 나라로 가서 그때부터 자유롭게 살아간다. 아버지 눈치 안 보고 이제야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된 것처럼 그렇게 흥청망청 자유를 누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자아실현을 쫓아 방탕하게 살던 아 들은 결국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가? 재산을 다 써버리고 누군가를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처절한 형편을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가 찾은 것은 돼지를 키우는 농장 주인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만이 이 아들을 종으로 써줄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는 겨우 잠을 자고 몸을 씻었다. 그러나 여전히 배고팠다. 문제해결을 위해서 찾아간 주인은 돼지 사료로 주는 열매마저도 주지 않았다. 주인을 잘못 찾아간 것이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는 종도 부불리 먹고 남는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종들을 노예처럼 대하지 않았다. 아들처럼 대했다. 식사 때마다 종들을 불러 아들들과 함께 식탁에 앉히고 배불리 먹게 하셨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의 종이 되고자 한다. 이렇게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대했는가? 기꺼이 받아주셨다. 멀리서 오고 있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아들을 위해서 좋은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새신을 신겨주셨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어주셨다.
작은 아들에게 순종이란 내 아버지의 집에서 종으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한 일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권위 아래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뿐이었다. 존 오스왈트라는 구약학자는 “이사야가 보기에 구속받는다는 것은 곧 종의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일을 실패했던 것이다. 그들은 열강 서로 자기가 주인이라고 말하는 틈 속에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임에도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가? 종이라는 말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눈멀고 귀먹은 우리에게 여전히 증인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참된 주인을 거부하고 세상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스스로 자녀 됨을 포기하고 종이 되신 그리스도 때문이다. 말씀을 마치면서 나는 이사야 53장 말씀을 함께 읽기 원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1 우리가 들은 이 소식을 누가 곧이 믿겠느냐? 여호와께서 그분의 팔을 누 구에게 드러내셨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새싹과 같이, 메마른 땅을 뚫고 나온 싹과 같이 자라났다. 그는 수려한 풍채도 없고 화려한 위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볼품이 없었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 림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통을 겪었고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를 당했으니 우리마저도 그를 무 시해 버렸다. 4 그러나 사실 그가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이었고 그가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맞을 짓을 해서 하나 님께서 그를 때리시고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했다. 5 그러나 사실은 우리 의 허물이 그를 찔렀고 우리의 악함이 그를 상하게 했다. 그가 책망을 받아 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아서 우리의 병이 나은 것이다. 6 우 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 버렸지만 여호와 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학대를 받고 괴롭힘 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 치 털을 깎이는 잠잠한 어미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는 강제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처형을 받았지만 땅에서 그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가 당하는 것은 내 백성의 죄악 때문이라고 중얼거리기라도 한 사람이 우리 세대 가운데 누가 있느냐? 9 폭행을 한 적도 없고 거짓말을 입에 담은 적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악인과 함께 두었고 그 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묻어 버렸다. 10 그러나 그가 병들어 으스러진 것은 여호와께서 원하신 일이었다. 그가 그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내놓으 면 그는 자손을 보면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원하신 일 이 그의 손에서 이뤄지고 있다. 11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서 그가 알고 있었던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이뤄 냈음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내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많은 사람들을 몫으로 나눠 주고 강한 사람들을 전리품으로 나눠 주겠다. 그가 자기 목숨을 죽음으로 내던지고 죄지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으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죄지 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도록 중재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하나님께서 불순종했던 우리를 법정에서 당당하게 증인으로 세우실 수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택함 받은 종이라면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나를 위해 종이 되심으로 우리를 떳떳한 증인으 로 세우신 그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라. 그날에 그분이 우리의 증인이심을 보게 될 것이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한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한다.
1 우리가 들은 이 소식을 누가 곧이 믿겠느냐? 여호와께서 그분의 팔을 누구에게 드러내셨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새싹과 같이, 메마른 땅을 뚫고 나온 싹과 같이 자라났다. 그는 수려한 풍채도 없고 화려한 위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볼품이 없었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통을 겪었고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를 당했으니 우리마저도 그를 무시해 버렸다.
4 그러나 사실 그가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이었고 그가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맞을 짓을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때리시고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했다.
5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고 우리의 악함이 그를 상하게 했다. 그가 책망을 받아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아서 우리의 병이 나은 것이다.
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 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학대를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치 털을 깎이는 잠잠한 어미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는 강제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처형을 받았지만 땅에서 그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가 당하는 것은 내 백성의 죄악 때문이라고 중얼거리기라도 한 사람이 우리 세대 가운데 누가 있느냐?
9 폭행을 한 적도 없고 거짓말을 입에 담은 적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악인과 함께 두었고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묻어 버렸다.
10 그러나 그가 병들어 으스러진 것은 여호와께서 원하신 일이었다. 그가 그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자손을 보면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원하신 일이 그의 손에서 이뤄지고 있다.
11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서 그가 알고 있었던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이뤄 냈음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내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많은 사람들을 몫으로 나눠 주고 강한 사람들을 전리품으로 나눠 주겠다. 그가 자기 목숨을 죽음으로 내던지고 죄지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으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죄지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도록 중재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택함받은 종이라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진정한 내 인생을 사는것이 무엇인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 날에 그분이 우리의 증인이 되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