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4과. 옛것과 새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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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Handout
고백 : 예수 안에 우리는 완전하다!
헌금 :
예배를 위하여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따르지 않고, 주의 말씀을 따르는 주의 자녀들이, 오늘 함께 예배드리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의 말씀으로 우리를 일으키시고, 주의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봉헌을 위하여
이 시간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진 물질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봉헌하여 드립니다. 이 물질을 받으시고 주의 역사에 크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의 예배의 시종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본문 : 골 1:13-2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완벽주의 특성 3가지가 있는데
첫째, 높은 기준입니다.
이들은 항상 스스로와 타인에게 채찍질을 가합니다.
더 잘 할 수 있잖아?
더 열심히 해야지?
항상 스스로와 타인에게 채찍질을 가합니다.
둘째, 정돈.
항상 정리 정돈, 깔끔한 것을 선호하는 경향입니다.
정리가 안 되면 불편해요.
셋째, 불일치입니다.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현실적인 자신의 모습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흠이 없고 못나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자기입니다.
이상적인 모습대로 못 살면, 항상 자신을 정죄합니다.
이게 완벽주의 특성 3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이한데,
이렇게 흠 많고 문제 많은 우리를 향해
우리가 이미 완벽하다고 가르칩니다.
21-22절을 한번 보세요.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아멘.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완벽하다고 말씀합니다.
‘말미암아’는 ‘디아’라는 전치사입니다.
~ 때문에, ~을 통하여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사’는 관계가 다시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아포카탈랏소’라고 읽는데,
예수 때문에
다시 관계가 좋아졌다는 것이죠.
본래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관계가 좋아졌고
본래 거룩하지도 않고,
흠도 많고,
야단 맞을 일도 많은 존재였는데,
예수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하고 야단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자가 되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아멘.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다시 관계가 좋아졌고,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존재,
거룩하고 흠도 없고, 야단칠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로, 세워졌다는 것이죠.
세워질 것이다.
세워질 수도 있다 가 아닙니다.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을 보니까,
22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몸을 희생시키시어 여러분과 화해하시고,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고 탓할 데 없는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서게 하여주셨습니다.”
여기서도 ‘부정과거’로 번역했는데,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거룩하고 흠 없고 탓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더 할 필요도 없고,
더 잘 할 필요도 없고,
더 이룰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완벽하다는 것이죠.
*완벽주의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일이 끝낼 때까지 쉬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늘 일 생각이죠.
일이 끝나지 않으면, 마음에 편치를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이미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완벽주의자의 특징이 뭡니까?
다른 사람에게 화가 많다는 것입니다.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왜 저걸 못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텐데.
여러분, 물론 노력 안 하는 사람들은 노력해야 합니다.
옆 사람을 답답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아니라,
늘 화가 나는 마음으로,
답답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불충분하게 보거나,
타인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저 사람도, 이미 완벽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완벽하죠.
나도 완벽하지만,
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완전하고 흠 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 의식이 강하고,
용서가 안되고,
실수를 덮어주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 채찍질하거나,
화가 나서 상대방을 자주 바꾸려고 하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행동인 것이죠.
또 완벽주의자의 특징이 뭡니까?
다른 사람의 칭찬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부탁이나 요구를 잘 거절하지 못하는 것.
이런 것도 완벽주의자의 특징입니다.
인간 관계 속에서 완벽해지려고,
인간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죄된 습관인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사는 이유가,
내 노력으로 완벽해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내 노력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데에 도움이 되어서이지.
내가 완벽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완벽한 사람들이죠.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어때요?
세상 사람들은 쉬지를 못합니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쉬지를 못합니다.
왜요?
자기 노력으로, 완벽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사는 이유가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그러니 쉬지를 못하죠.
또 세상 사람들은 화가 많습니다.
왜요?
아니, 좀만 더 노력하면 될텐데. 왜 노력을 안해?
스스로 노력해서 완벽해지려고 해야지. 왜 노력할 줄을 모르는 거야?
라고 하면서
타인의 실수를 용납할 줄 모르기 때문에, 화가 많습니다.
내가 완벽해야 하듯이,
타인도 완벽하기를 강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화가 많고, 답답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칭찬에 의존하는 것도, 세상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칭찬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타인의 시선에 지배당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죠.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주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해서이지,
상대방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했을 때,
상대방이 할 비난이 두려워서가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지배를 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의 인정을 받고, 칭찬받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무가 되면 안 됩니다.
사람의 칭찬이 없어도 괜찮아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 백성이죠.
*어떤가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서 완벽한 존재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완벽한 존재라는 것을 믿습니까?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고, 칭찬해주지 않아도,
나는 괜찮다!
나는하나님 앞에서 완벽하다는 자존감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노예가 되어서,
세상의 말,
사람들의 말,
사탄의 말에 질질 끌려다니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더 이상 사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13절을 읽어 볼텐데요.
우리의 신분의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여기서 ‘건져내사’, ‘옮기셨으니’ 이런 동사들도,
부정과거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데, 동시에 사탄의 노예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건져냄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미 옮겨졌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이고,
이미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본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황량한 사막에 심겨진 풀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영양가도 없고,
황량한 사막에 심겨진,
언제 말라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풀과 같은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우리를 물이 풍성한 초원으로 옮겨심은 것입니다.
은혜죠.
이제는 물이 넘칩니다.
마실 것도 많고,
영양분도 많고,
옥토라서, 토양도 너무 좋습니다.
이미 옮겨심겨졌어요.
이제 우리는 사막에 심긴 풀이 아닙니다.
우리는 푸른 초원에 풍성한 물과 영양분이 넘치는 옥토에 심긴 인생들인 것입니다.
이미 옮겨 심겨진 사람들이죠.
우리의 자격이나 노력이나 외모가 아니라
은혜로 심겨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은혜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심으신 것입니다.
그가 하신 것이죠.
예수가 하신 것이죠.
예수께서 우리를, 사탄의 나라에서 건져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은혜를 찬양하고 즐거워할 일만 남은 것입니다.
*완벽주의자는 항상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제시합니다.
쉬지를 못합니다.
자주자주 자신을
자책하고,
정죄합니다.
이미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집안을 정리하고 정돈하고,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내면을 살피고,
점검합니다.
자신을 바꾸어야 완벽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마음이 쉬지를 못합니다.
늘 마음이 편치 않죠.
이미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책망할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마음에 안들고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왜 이렇게 밖에 못할까?
불일치.
이상적인 자기와 현실의 자기가 맞지 않아서,
늘 자신에 대해 불만족하고,
자기 인생에 대해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것.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하게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흠 없고 완벽한 존재로 바라보시는데,
이미 주신 완벽한 은혜를 믿지 못하기에 생기는 감정.
불일치.
늘 마음이 불편하죠.
이게 세상 사람들이 시달리는 질병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영적인 질병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된것입니다.
세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구나.
자기 자신에게 시달리고,
타인의 시선에 시달리고,
완벽주의에 시달리고,
이렇게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기셨는데,
아직도 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완벽해지려고 하고,
타인을 채찍질 하며,
죄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라고 생각하며,
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복음을 위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일하는 이유는,
바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완벽해지려고 일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만큼 전도했지.
내가 이 만큼 복음을 위해 수고했지.
내가 유명한 전도자가 되어야지.
내가 위대한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지.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일한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고통 당하는 세상을 불쌍히 여겼기에,
그 은혜를 전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고
목숨을 던진 것입니다.
교회가,
이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죄에 빠져,
예수로 완벽하다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똑같이
열등감에 빠져서,
인간적인 생각이나 철학, 학문들에 몰두하게 된 것이죠.
이미 하나님 안에서 완벽한데,
뭔가를 더 해야 하는 것처럼,
속임수에 빠졌던 것이죠.
골로새서 2장 10절을 보니까,
“너희는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다!”
너희는 충만하다, 너희는 완벽하다.
이렇게 도어 있습니다.
2장 10절입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이미 너희는 예수님 안에서 충만하다.
완벽하다.
충만하다!
가득 채워졌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완성 되었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완벽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교회는 이 복음 때문에 자신감이 넘쳐야 합니다.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구나!
흠이 없구나!
야단 맞을 것이, 책망받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이런 기쁨으로 가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실이 때문이 아닙니다.
1장 21절을 보시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행동으로도 악하고,
마음으로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행실이 아닙니다.
악하고 원수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하고,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디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격 없는 데도,
우리를 완벽한 자로 봐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완벽해야 합니다.
그러나, 완벽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비난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채찍질하고,
쉬지 않고 무언가를 정리하고,
정돈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족하고
자신이 흠이 많고, 못난이 같아
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타인을 섬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한, 완벽주의적 열심을 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죠.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거룩하고 흠 없이 책망할 것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이미 완벽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 복음의 은혜를 충만히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감격을 누리는 사람의 특징이 뭔가요?
바로, 바울처럼, 이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아, 세상에 흑암과 사탄의 노예가 되어 시달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벽한 복음을,
값없이 전하는 일꾼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모이고
예배를 드리고,
순모임을 하고,
교제를 하고,
이 모든 행위를 하는 이유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의 감격을 누릴 뿐만 아니라,
순모임과 교제를 통해 이 감격을 전하고 누리고,
또한, 사역자와 선교사를 세워서,
계속해서 이 복음을 천하 만민에게 전하기 위해,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완벽한 자라는
이 믿음 가지고,
세상에서 흑암 가운데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같이 찬양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구출되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행위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주의 보혈,
주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주의 보혈이 날 정결케 합니다.
찬양합시다.
(기도합시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 할 것 없는 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 달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내 옆에 형제 자매들 역시,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믿고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교회를 위해서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국내외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청년부 지도목사인 저와 리더 순장들을 위해서. 교회 안에 병약한 지체들을 위해서. 주의 긍휼과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게 해달라고. 우리가 복음의 일꾼이 되어서 바울처럼 천하만민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귀한 통로로 쓰임 받게 해달라고. 군 지체들을 위해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주님, 우리는 믿음이 없어서,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한 존재인 줄로 모르고, 내 노력과 내 열심으로 내 인생을 완성시키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님,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성령으로 깨우치시고,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은혜를 누리도록 인도/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교회 안에 병약한 지체들을 돌아보시고, 주의 보혈의 은혜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관찰
13 그가 우리를 구원하였다(부정과거), 어둠의 권세로부터. 그리고 그가 옮겼다(부정과거).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14 우리가 가지고 있다(에코, 현재 능동태). 속량을. 죄 용서를.(죄의 탕감을).
15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볼 수 없는(호라오의 부정). 모든 피조물의 장자이다.
피조물?
16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크티조 / 부정과거 수동태). 하늘과 땅에서 볼 수 있는(호라토스) 것들과 볼 수 없는 것들(아오라토스)과, 왕좌들나 통치권(권위)들이나 통치자들(아르케)이나 권세들이나 모든 것들이, 그를 통하여(디아 / 때문에), 그리고 그를 위하여(에이스 / 안으로, 위하여) 창조되었다(크티조 / 완료 수동태).
이어서 그가 ‘창조주’임을 말하고 있다.
창조되었다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17 그가 모든 것들보다 앞에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안에 함께 서 있다(완료).
18 그리고 그는 머리(케팔레)이다. 몸의, 교회(에클레시아)의. 그는 아르케(처음)이고 프로토토코스(장자)이다. 죽은 자들로부터, 그 이유는 모든 것들 안에 그가 첫째가 되기 위함이다(프로튜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다.
그는 처음이다.
그는 죽은자들로부터 처음 태어난 장자이다.
그 이유는 모든 것들의 으뜸이 되기 위함이다.
19 그 안에 모든 완성(플레로마 / 충만)으로, 카토이케오(살다, 거하다, 머물다 / 부정과거)하게 하셨다.
20 그가 기뻐하셨다(부정과거), 또한 그를 통하여, 화합하는 것을(아포카탈랏소 / 부정과거 / 화목하게 되다, 화합하다), 모든 것들, 그 안에서, 평화를 이루어(에이레노포이에오 / 부정과거/ 화목하게 하다), 그 피를 통하여, 그의 십자가의, 그를 통하여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21 그리고 예전에 소원해졌던(아팔로트리오 / 완료 수동태 / 멀어지다, 소원해지다) 너희를. 원수들이었던, 사고방식(생각)으로, 악한 행동으로.
생각으로
악한 행동으로
원수들이었다.
22 이제는 너희가 화목하게 되어졌다(부정과거 수동태 / 아포카탈랏소). 그 몸, 그 육체의, 죽음 때문에, 너희를 세웠다(파리스테미 / 부정과거). 거룩한 자들로(하기오스), 그리고 흠 없는 자들로(아모모스), 그리고 아넹클레토스(책망할 것 없는, 결백한, 비난할 것 없는) 자들로, 그의 앞에.
부정과거
부정과거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 때문에 너희들이 그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거룩한 자들로
흠 없는 자들로
책망할 것 없는 자들로
23 만일 너희가 머문다면(에피메노), 믿음에, 기초를 세워서, 그리고 굳건해져서, 그리고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 좋은 소식의 기대(소망 / 엘피소)으로부터, 너희가 들었던. 그것은 선포되어진 것이다. 모든 크티시스(피조물)들에게, 하늘 아래. 나 바울은 봉사자(디아코노스)이다.
바울은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봉사자(하인, 사역자)이다.
너희가 믿음에 계속해서 머문다면,
너희가 기초를 세운다면
너희가 굳건해진다면
너희가 그 복음의 소망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면.
연구
그분의 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영원한 행복에 참여하게 하신 분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십니다. 영광스러운 능력의 주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고 모든 악에 대항하여 그분의 은혜로 우리를 강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소망의 근거는 말씀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지만, 우리 소망의 증거는 그분의 성령으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마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만드실 때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지만, 이 형상은 죄로 인해 손상되었습니다(창세기 1:26-27).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우주 이전에 존재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늘이나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큰 권세는 없습니다. 천사들과 다른 영적 힘들은 그분이 만드셨고 그분의 통제하에 있습니다.
골로새인들이 땅과 하늘의 분열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의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모두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그것들을 하나로 묶으시고 함께 붙들어 주십니다. 우주는 '분할'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분의 우주입니다. 무한히 다양한 창조물은 한 창조주에게서 비롯됩니다. 창조세계의 균형과 조화는 한 분 주님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분은 지혜와 진리로 교회를 인도하고 조정하십니다. 그분은 교회를 세우셨고 부활하심으로 영생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셨습니다. 그분은 땅과 하늘, 하나님과 인간, 시간과 영원, 삶과 죽음 등 모든 분열을 연결합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자 조정자, 화해자이시며 가장 위대하신 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부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모든 측면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완벽한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갚기 위해 희생 제물을 바칩니다. 동물의 피를 제단 위에 부어 사람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음을 표시합니다. 때로는 동물의 고기를 식사로 나누기도 합니다.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은 교제 안에서 하나가 되고, 원수였던 사람들은 친구가 됩니다.
이제 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모든 시대를 위한 완벽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죄의 비난과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고문과 죽음에 복종함으로써 정말로 고통 받고 정말로 죽었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그는 모두를 위한 용서와 무죄와 평화를 얻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편지의 전체 논증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에서 궁극적인 권위와 능력이시라는 것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설득하는 바울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하며, 그 사실로부터 어떤 실제적인 결과가 뒤따릅니다.
골로새서 1:13-23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1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을 개괄적으로 설명합니다. 15-20절, "그리스도 찬송"에서는 하나님께서 구속과 용서를 이루신 수단을 소개하고, 그 행위자를 묘사합니다. 마지막으로 21-23절은 골로새 교인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며 그 효과를 묘사합니다. 13절과 14절은 하나님("그분")과 "그분"이 행동하신 "우리"의 관점에서 말합니다. 15-20절은 오직 "그",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그리고 20-23절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인 "당신"에게 말합니다. 13-14절과 21-23절에는 필자와 수신자가 등장하지만 15-20절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본문의 세 부분으로 나뉜 구성을 뒷받침하며 15-20절이 일종의 삽입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전체 섹션의 문맥은 구속(13-14절)이며, 이는 우주론적 작용(15-20절)의 관점에서 설명되고 골로새서의 구체적인 상황(20-23절)에 적용된다.
1948년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이래, 건국의 원칙은 유대인이 그 영토에서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2년 후 '귀환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주로 유대인의 다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조부모가 한 명이라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성공적인 정책이었으며 수백만 명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필연적으로 유대인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1950년대에 이스라엘 정부를 뒤흔든 위기가 닥치면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대법원은 유대인을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으로 정의했습니다. 충분히 공정한 결정이었지만, 의제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무신론자라도 유대인 자격을 얻을 수 있지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면 신의 존재와 구약성서의 권위를 믿더라도 그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유대인임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은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스탠 텔친, 버려진, 100페이지)
1장에서 '보편적'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을 찾아보세요: 모든 것, 모든 것, 전체, 가득함. 꽤 인상적인 목록이 나옵니다.
6절: "... 복음이 온 세상에 열매를 맺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9절: "우리는 모든 지혜와 총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여러분을 채우시기를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합니다..."
10절: "... 이는 너희가 ...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여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11절: "... 모든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고."
골로새서 1:15: "아들은 ...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맏아들이십니다."
■ 16절: "만물이 그 안에서 창조되었고 ... 만물이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절: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서 함께 있느니라."
18절: "... 모든 것에서 그가 우위를 차지하게 하려 하심이라."
19절: "하나님은 그의 모든 충만함이 그 안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
20절: "... 그리고 그를 통하여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그의 요점을 놓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모든 시대의 모든 민족의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관련성이 있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초상화처럼 아버지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하나님의 모습 그 이상입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입니다. 그는 단순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표자가 아닙니다(외국의 대사가 본국의 대표자인 것처럼). 그는 이 땅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다음에 누군가 하나님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아니요,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2000년 전에 유대에서 살았다면 만났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시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 생물학적 것과 지질학적 것, 심지어 인간과 악마까지도 포함됩니다. 북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로마 제국 전체가 창조주로서 그의 영향력 아래있었습니다. 사탄의 속임수와 악의 영역은 창조주로서 그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별과 별자리로 이루어진 우주 전체가 창조주로서 그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이 진실은 문제를 일으킬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의 것이라면 왜 그렇게 심하게 잘못 된 모든 것에 대해 무언가를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우주의 창조주가 왜 피조물이 되기를 원했는지에 대한 핵심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세상에 끼친 파괴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피조물인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동시에 보여주셨습니다.
어둠
구속받지 못한 인간은 어둠의 영역에 거합니다(마 4:16)
어둠에는 그 권세의 영역이 있습니다(골 1:13). 회심은 다시 빛입니다(엡 5:8ff.; 벧전 2:9 참조). 신자들은 현재의 어둠의 통치자들과 전쟁을 벌입니다(엡 6:12).
바울은 때때로 유대인의 유산에 따라 빛과 어둠의 보편적인 상징을 사용합니다. 빛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며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고, 어둠은 원수인 사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빛이 들어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둠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로 변화되어 "밤"이 아닌 "낮"에 살기 전까지는 세상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성경 필자들은 밤과 어둠을 참된 경건한 삶을 나타내지 않는 행위가 일어나는 상황으로 간주합니다. 바울은 술 취함과 영적 졸음 또는 무감각을 밤과 어둠과 연관시킵니다(살전 5:7)
GBS
우리는 이미, 성경의 진리에 기초하여 우리가 ‘범죄할 수 있는 성도’이지, ‘죄인’은 아니라는 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완전히 받으신 존재이다.
Romans 7:19–24 NKRV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두 마리의 개 이야기
우리 안에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싸우고 있는 두 가지 본성이 있다.
불순종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본성은 ‘검은 개’와 같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물려받은 새로운 본성은 ‘흰 개’와 같다.
당신이 세상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는, 당신은 검은 개를 먹이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나 행동이 영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흰 개를 먹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극단적인 이야기가 성경적으로 건전한 것일까?
Colossians 1:13 NKRV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만일 당신이 일부는 빛이요 일부는 어두움이며, 일부는 성도요 일부는 죄인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비기독교인과 거의 다를 것이 없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상태에서 살아갈 것이다.
죄인을 ‘성도’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최대의 사역’이다.
내적 변화, 칭의는 구원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매일 성도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외적 변화, 성화는 전 생애를 통해서 계속된다.
그러나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은 칭의의 내적 변화를 분명하게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안토니 후크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지금 새로운 피조물이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확신하건대 당신은 순수하게 새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이렇게 보아야 한다. 곧 우리는 더 이상 부패하거나 절망적인 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들이다.”
Ephesians 5:8 NKRV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당신이 ‘어두움 안’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어두움의 당신의 본질이었고, 불신자로서의 그 본질이었다.
이 말씀은 또한 당신이 지금 ‘빛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게서 당신의 본질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변화시켰다.
문제는 새로운 본질에 알맞은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서, 당신의 옛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Romans 6:6 NKRV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당신은 더이상 지에게 종속되거나, 죄에 순종하거나 또 죄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이미 죽었습니다.
‘사악한 옛주인’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주인이 떠나고 ‘새 주인’이 왔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옛주인’에게 길들여졌던 습관대로 산다.
옛주인이 떠났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새주인이 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새롭게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육체 안에 있는 것과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더이상 육체 안에 있지 않다.
Romans 8:8 NKRV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당신은 육체에 거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당신은 육체 안에 거하지 않을지라도, 육체를 따라 행할 수 있다.
Romans 8:12–13 NKRV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옛사람을 제거하는 일은 ‘하나님의 책임’이고,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육신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롬8:12)
육신을 이길 수 있는 2가지 중대한 요소가 있다.
당신은 당신의 새 선장(새 사람)을 따라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워야 하고,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받은 새로운 자아에 잘 적응하기를 배워야 한다. (갈 5:16)
죄로 물든 옛습관이나 생각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야 한다.
로마서 7장 15-25절에서 이 ‘착한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성화는 당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 가는 과정이다.
묵상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 시민이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 나라 시민이다.
이 신분을 알고 있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은 공로가 아니다.
순종은 “내 신분”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어디에 순종하고 있는가?
하나님 말씀인가
세상인가?
미국 시민이 되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다.
귀화: 합법적인 영주권자로서 일정 기간 동안 미국에 거주하고, 영어와 공민학 시험을 통과하고, 충성 선서를 하면 귀화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혼인: 미국 시민과 결혼한 경우, 영주권을 취득하고 3년 동안 미국에 거주한 후 귀화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가족: 미국 시민인 부모나 배우자를 통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미국 시민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자동으로 시민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출생: 미국에서 태어난 경우, 제 14차 개정 헌법에 따라 자동으로 미국 시민이 됩니다
시민이 되었기에, 미국인 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시민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의 ‘신분’에 대한 믿음이 흐려지게 된다.
우리는 이미 옮겨졌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
우리는 이미 예수로 죄 사함을 얻었다.
예수가 누구인가? 15절부터.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 -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권세들.
그는 또한 교회의 머리시다. 그가 시작이다. 그는 죽음에서 부활한 첫 아들이다.
모든 완성된 은혜가 예수 안에 거한다.
예수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다.
또한 예수의 죽음으로, 골로새 교회 성도들도 거룩하고 흠 없고 비난할 것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복음을 누릴 수 있는가? 23절
그것은 믿음에 거하는 것이다.
또한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는 것이다.
너희가 들은 기쁜 소식의 소망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서론 / 적용
완벽주의
초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공부면 공부, 노래면 노래, 운동과 미술까지 그야말로 다재다능했습니다. 멋진 외모에 성격도 좋아서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물론 선생님들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친구는 늘 ‘자신이 부족하다.’, ‘더 잘해야 한다.’며 스스로가 한참이나 모자란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뚱맞게 항상 붙어 다니던 저를 치켜세우곤 했지요. 저는 묵묵히 할 일을 하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그 친구처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 있는 아이는 아니었던 터라 그 친구가 왜 자꾸만 자신은 낮추면서 저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은 치켜세우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어린 마음에 공부도 잘하고 재능도 뛰어난 그 친구를 지켜보며 어떻게 겸손까지 겸비할 수 있느냐며 감탄하곤 했습니다. 신이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제 친구와 같은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부러운 구석이 많은 아이였으니까요.
그 친구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부모님의 인사 발령과 맞물려 더 좋은 교육 환경을 찾아 이사했고, 입시를 치른 후에 서울 소재의 한 명문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첫 여름방학, 여행을 떠난다며 돌아오면 연락하겠다던 친구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아쉽게도 연락이 끊겼지만 이따금씩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지곤 합니다.
완벽주의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지금보다 더 완벽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신념과도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도 지금보다 좀 더 노력해서 보다 나은 성취, 좋은 결과를 얻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고 건강한 동기로 작용해 실제로 성장을 위한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이고, 그 결과에 만족하면서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과 달리,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의 노력과 성취에 만족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을 향해서 채찍질을 가합니다. 이러한 완벽주의는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무척이나 피곤하게 할뿐더러 인생의 만족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완벽주의 성향은 사람에 따라 우리의 일상에서 몇 가지 유형으로 발현됩니다. 첫 번째는 ‘회피형 완벽주의자’입니다. 이들은 무언가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까 봐 아예 시작하는 것조차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룹니다. 주변에서는 종종 ‘게으른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지만, 이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압도되어 모든 시작과 선택을 망설입니다. 뒤늦게 무언가를 하려고 시도하지만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부족한 확신으로 시도 자체를 회피합니다. 그러나 막상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기도 하죠.
두 번째는 ‘감독형 완벽주의자’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실현 불가능한 목표는 없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높은 기준을 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유형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인들이 감독형 완벽주의자의 가족이나 친구, 연인처럼 중요하고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서 문제와 갈등이 생겨납니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한다는 데 있죠. 때문에 스스로 병원을 찾는 경우는 별로 없고, 이들로 인해 힘들어진 주변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병원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 번째는 ‘자책형 완벽주의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기준보다 세상이나 타인의 기준을 중요시하며 어떤 일의 과정보다 결과나 성과에 집착합니다. 항상 타인의 기준에 신경 쓰며 만족시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다 보니 불안감과 긴장 수준이 높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커서 자책과 우울감으로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지고, 다른 이들의 인정과 애정을 갈구하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완벽주의라고 해서 모두 다 불안한 심리 상태를 보인다거나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걸까요? 완벽주의와 관련해 주로 부정적인 측면만을 연구하던 1990년대 이전과 달리 그 이후로는 긍정성도 함께 연구되면서 완벽주의를 ‘순기능적 완벽주의’와 ‘역기능적 완벽주의’로 구별해야 한다는 의견이 등장했습니다. 순기능적 완벽주의자들은 완벽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잘 활용할 뿐만 아니라, 실수나 실패, 부정적인 평가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성장을 위한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완벽주의자들을 일컬어 ‘안정형 완벽주의자’라고도 하는데요, 이들의 이런 성향도 반드시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역기능적 완벽주의자들도 자신의 완벽주의적 성향을 객관적으로 살펴본 뒤에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안정형 완벽주의자’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도 시작하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라는 책에서 역기능적 완벽주의를 극복하고 안정형 완벽주의자로 거듭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 이를 독자분들에게 소개합니다. 역기능적 완벽주의 성향으로 고민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방법을 한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인정하기: 비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분이라면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높은 분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완벽주의자임을 인정함으로써 완벽주의적 경향이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완벽주의적 성향을 없애지 않고도, 인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건강하게 조절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이란 어떤 것인지, 생활 속에서 완벽주의가 어떻게 발현되는지 기록해 보세요.
2. 기준 바꾸기: 자신이 완벽주의자임을 인정한 뒤에는 평소 습관처럼 적용했던 비현실적인 기준을 현실적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사에 엄격한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해 스스로를 과도하게 압박하며 살아왔다면, 삶의 전반적인 영역을 세부적으로 나눠서 지금껏 적용했던 기준에 대해 적어 봅니다. 예를 들면, 학업이나 업무, 외모, 경제력 수준, 대인관계, 성공이나 건강, 행복과 같은 분야별로 나눠 지금까지의 비현실적 기준과 현실을 고려한 새로운 기준을 각각 기록해 보면 됩니다.
3. 두려움의 뿌리 찾기: 완벽주의자들은 감정까지도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부정적인 감정도 억압하거나 외면해 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감정은 대부분 부정적인 생각이나 생각의 오류로 인해 더욱 극대화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주로 생각의 오류를 범하는 측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숙고해 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과 생각이 떠올랐는지, 어떤 자동적 사고가 작동했는지 등을 살펴봄으로써 부정적 감정을 수용하고, 비현실적 사고를 적응적이고 현실적 사고로 대체해 나가도록 합니다.
4. 실수에 대한 두려움 버리기: 완벽주의자들은 실수나 실패를 과도하게 두려워하며 시작조차 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실수나 실패는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언제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결코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주의자들은 실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그것이 원하는 것을 이루거나 꾸준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요하고도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실패의 재해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실수를 통해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5. 완벽이 아닌 완성을 향하여:‘완벽하다’는 것은 그 기준이 뚜렷하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목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생각은 그만 멈추십시오. 완벽이 아닌, 완성을 목표로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길 때 건강한 완벽주의자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겁니다.
네 명의 완벽주의자, 이동귀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는 20여 년간 완벽주의를 연구하면서, 주변에 완벽함을 달성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존감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책을 집필했다.
번즈의 설명에 의하면, 완벽주의는 달 성하기 어려운 높은 기준을 세우고 이를 강박적으로 성취하려고 하며 오직 그 결과에 따라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하는 성격특성이다.
'자기지향 완벽주의'
나는 완벽주의자인 것 같아'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완전히 끝낼 때까지 쉬지 않는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타인지향 완벽주의'
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더 나아지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내게 중요한 타인에 대한 기대가 높다.
'사회부과 완벽주의'
일을 잘하면 할수록 "다음번에도 기대할게"라고 말하는 상사의 눈빛이 부담스럽다.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계속 일을 시키는 상사가 얄밉다.
주변 사람들이 계속해서 많은 것을 요구하는데 거절하지 못해 짜증난다.
완벽주의의 구성요소 (3가지)
높은 기준 : 자신의 수행 기준을 높게 설정하는 것이다.
정돈 : 정리 정돈하고 깔끔한 것을 선호하는 경향성이다.
불일치 :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현실적인 자신의 모습 사이의 괴리감을 의미한다.
완벽주의의 부정적 측면 (3가지)
꾸물거림 - 높은 기준과 부정적인 자기 평가의 협주곡
꾸물거림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기한이 임박해서야 일을 시작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실제로 구물거리는 완벽주의자들은 ‘결과물은 좋은데 일 처리가 늦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1 - 실수 혐오와 강박증
완벽주의자들은 늘 업무에 시달린다.
관용이 없는 사회 상황도 통제력 상실의 두려움에 한몫을 한다. 한국에서 직장생활 해본 사람이라면 실수를 시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이다.
완벽주의자는 실수를 많이 한다기보다 실수를 ‘더 오래 기억’하고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많이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2 - 극한의 다이어트
섭식장애 증상.
정교한 식단을 만들고 관리.
끊임없이 자책하는 내면의 목소리, 어떻게 다뤄야 할까?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받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학업 성적이나 입시 결과, 성인이 된 후에는 취업, 직장에서의 인사평가 등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사회적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부족할 때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곤 합니다. 이렇게 평가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어느새 가장 엄격하고 까다로운 평가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시험에서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했을 때, 중요한 경기나 발표에서 긴장하고 실수했을 때, 상사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 등 외부로부터 부정적 반응이 올 때 이런 자책하는 ‘내면의 목소리(inner voices)’가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내면의 목소리는 외부의 평가에 앞서 들려올 때도 많습니다. 내면의 목소리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넌 해낼 수 없을 거야.”, “네가 그러면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얼마나 멍청하고 바보 같은지 봐. 네가 다 망쳐 버렸잖아.”, “넌 너무 못생겼어.” 등 우리가 가장 취약한 부분을 날카롭고 깊숙이 파고들어 상처를 줍니다.
내면의 목소리는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거절,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런 메시지들이 지속적으로 내면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자기비판(self-criticism)은 사실 일종의 생존전략이자 방어기제로도 볼 수 있습니다. 타인이 나를 비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 상황에서 적절하게 대처하고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순기능을 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열등감과 수치심을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기비판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데서 기인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여겨지기보다는 성취나 특정 행동을 통해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던 경험, 조건적인 사랑의 기억이 우리를 더 많은 성취와 완벽주의를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공이나 성취를 통해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실패하지 않았다.’라는 안도감을 느끼며 또 다른 도전 과제가 주어지기 전까지 잠시 숨을 고르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하나의 과제에 성공하고 나면, 또 다른 과제를 찾아 쉼 없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성취와 성공 이후에도 자책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면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우리의 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더 맹목적으로 성취와 완벽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한 편에는 언제나 공허함과 불안함이 공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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