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믿음의 가정
Notes
Transcript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의 모습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의 모습
요즘의 한국은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는데, 오래 전에는 인구 억제 정책을 폈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 계획은 시대가 바뀌면서 상황이 바뀜에 따라 구호도 바뀌고 원하는 방향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의 모습은 상황이 바뀌든 시대가 바뀌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라고 경험한 가정이 어떠했든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가정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룰 수 있기 바랍니다.
1. 로마 시대의 자녀들
사도 바울 당시, 즉 1세기 로마제국에서는 아이들의 삶을 특히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소위 아버지의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그 파워가 막강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감옥에 가두고, 때리고, 결박하고, 노예로 팔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벌을 줄 때는 어떤 방법이든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죽일 수 있는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런 권리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자녀가 장성하여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살리고 죽일 권리도 아버지에게 있었는데, 약하거나 기형으로 태어나면 아이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들을 원하는데 원하지 않는 딸이 태어났을 경우 버리거나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살던 로마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의 권한에 완전히 옭아매어 있는, 아주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인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물건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받아들일 것인지, 버릴 것인지도 아버지가 결정하던 억압적인 상황이 바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놀랍습니다.
2. 그리스도인 자녀와 부모의 책임과 역할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1절)
여기 보면, 자녀는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이것이 옳다’라고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2-3절)
여기서 다시 한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라고 하면서,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제5계명입니다. 거기에 자세히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 (출 20:12)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수뿐 아니라 그 땅에서 계속 형통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오래도록 살 것이다. 형통하게 살 것이다.’라는 차원에서 약속이 주어진 첫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로마 사회에서 특이한 내용이 아니라 아주 흔한 교훈이었습니다. 폭압적인 로마 사회였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흔한 교훈이었습니다. 그 당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신들에 대한 공경과 더불어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에 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신들을 공경하는 것과 함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부모 공경은 십계명의 제5계명이었을뿐 아니라, 많은 지혜 문서들이 강조하는 윤리였습니다. 한국도 대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은 사회의 전통과 미덕입니까, 아니면 성경의 가르침입니까?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늘 본문의 명령이 사회에서 가르치는 윤리 도덕과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1절을 다시 잘 보시겠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한 부모 공경의 미덕에서 한 차원 더 올라가서, 모든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교훈이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자녀는 당연히 부모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했지만, ‘주 안에서’ 즉 ‘주님을 경외하는 내에서, 주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순종하라는 것이고, 주님의 본을 따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저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드니까 너는 가서 칼로 찔러 죽이고 와라.’라고 하면, 로마 사회에서는 해야 하지만, 주 안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모를 주님과 구분시키는 동시에 주님 다음의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주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공경하라. 그런 다음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악용한 것이 예수님과의 대화에도 나옵니다. ‘고르반’이라고 해서 부모에게 드려야 할 선물을 이미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면서 부모에게 드리지 않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갖다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미 하나님께 바쳐져서 성전에 가져다가 드렸기 때문에 부모님께 드리고 싶지만 못 드립니다.’라고 핑계 대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마가복음 7장에서 지적하십니다. 신앙을 핑계로 부모를 공경하기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일 우선적으로 섬기고, 그다음에 반드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부모가, 특히 아버지가 자녀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녀가 비신자인 아버지에게 핍박을 받고 폭력을 당할 때 ‘그래도 순종하라. 그런데 주 안에서 하라. 주 안에서 사랑과 존경으로 순종하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부모님 앞에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4절)
왜 ‘아비들’만 지적합니까? ‘어미들’은 안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당시 로마 사회에서 자녀교육의 책임이 주로 아버지에게 있었기 때문이고, 또 사회 통념처럼 아버지들이 자녀들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아비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4)라고 가르친 것이니, 이것은 정말 혁명적인 것입니다. 아비들은 자신이 가진 권리를 남용하지 말고, 자녀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라고 해서 자기가 권리를 행사할 대상이나 자기 재산처럼 보지 말고, 자녀를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인격으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녀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고 말씀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부모도 자녀를 “주의 교훈(훈련)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가정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닙니다. 부모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 중심의 가정생활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뒤집어보면, 그 당시 아버지들의 권한 남용 때문에 수많은 자녀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또 마음속에 ‘노여움’으로 가득했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말 중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그토록 무자비하게 폭력적으로 하니까 아이들이 당하면서도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는 겁니다. 그래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여움’ 즉 분노가 바로 상처입니다.
3.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상처들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실수하고 상처를 줍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은 다 깨어진 아버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고,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로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것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부모처럼 보이고, 완벽한 가정처럼 보여도 거기에서도 다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자라고, 또 부모가 되고서는 다시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상처를 주었느냐 안 주었느냐가 아닙니다. 다 주었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느냐가 문제이지, 안 준 사람도 없고 안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상처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분노
분노도 상처입니다. 맞설 수 없는 약한 자녀에게 부모가 분노를 퍼부으면, 자녀는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분노하는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이, 자녀도 분노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상하게 그것을 닮습니다.
분노의 상처의 증상은 반항으로 나타나고, 적개심으로도 나타납니다. 또 자만심으로도 나타납니다. 궤변으로도 나타납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의기양양하고, 망상하고, 분개하고, 쓴 뿌리가 있고, 비판적 성향이 있고,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지배욕이 있고, 소유욕이 있고, 조작하거나 조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대부분 분노의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그렇습니다.
특히 조종하는 것이 심한데, 자녀의 감정과 마음을 조종하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때로는 자녀를 위해 자기가 엄청나게 희생을 합니다. 그러면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합니다.
2) 굶주린 마음
주로 편애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 굶주린 마음, 굶주림의 상처입니다. 성경의 인물로는 야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굶주린 마음의 사람은 항상 뭔가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렇게 여인에게 집착하고 자녀에게 집착했습니다. 특히 라헬에게 집착했고 요셉에게 집착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해도 조건적인 신앙의 모습이 많습니다. ‘OO해주시면 XX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존재 자체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성취와 업적을 이루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피곤해집니다. 할 일이 계속 쌓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더 할 일이 많아집니다. 굶주린 마음이 있으면 결혼생활도 힘들어집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배우자에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과잉보호는 거절감 뿐만 아니라 굶주린 마음도 줍니다. 사랑을 퍼부어주는 것 같은데, 부모가 다 해주는 과잉보호를 하면 오히려 마음에 굶주림이 생긴다는 겁니다. 철저히 자녀의 인격을 무시하고 부모가 다 알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기 방식대로 주는 사랑은 받는 입장의 자녀에게는 전혀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의 표현일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3) 열등감
결손 가정일 경우 자녀에게 열등감이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또 부모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 즉 부모 중 하나라도 사회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든지, 인격적 장애가 있든지, 부부 싸움이 아주 심한 부모는 자녀에게 열등감을 심어주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심하게 학대하고 비하할 때 자녀는 엄청난 열등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말을 참 조심해야 합니다. 언어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끔 화가 나면 아이에게 “야, 이 바보야! 넌 이것도 못하니?”라는 말을 할 때, 특히 어릴수록 굉장한 열등감을 심어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잉보호가 정말 안 좋은 것은, 그것이 또 열등감의 원인도 된다는 겁니다. 편애와 비교가 심한 부모도 자녀에게 열등감을 심어줍니다. 나는 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잘해준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인격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자꾸 몰아가면 그것이 과잉보호가 되고, 그렇게 되면 온갖 상처의 원인이 되며 열등감도 그렇습니다.
열등감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놀랍게도 완벽주의가 생깁니다. 그리고 지나친 희생을 하려고 합니다. 또 자신감이 약하고 부담감은 큽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한 모습도 나타나는 것이 열등감의 상처입니다.
4.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길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러한 상처들을 갖고 살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분노, 굶주린 마음, 열등감등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그런 상처들을 받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분들은, 그렇게 된 것 때문에 내 자녀에게도 그런 상처를 주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치유를 받고 회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1)라고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4)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결국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해결책이 없습니다. 아무리 무슨 심리치료를 받고, 요법을 받고, 상담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시면 됩니다. 주님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의 왕으로서 다스리시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육신의 부모님이 살아 계시든지 돌아가셨든지 상관이 없이,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의 중심이 되실 때 더 이상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뭡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적인 예배이고, 개인 예배, 즉 말씀을 스스로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공적인 예배와 개인적인 예배가 모두 중요합니다.
성전에는 성전 뜰이 있고 건물인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의 앞에 휘장이 쳐져 있는데, 그 앞에 지성소입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전 뜰만 밟고 가는 정도가 아니라, 깊숙이 들어가 정말 그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뵙는 예배, 우리 자신이 제사장이 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죄 용서의 체험, 은혜의 체험, 결단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거기에 진정한 치유가 있습니다. 따로 내적 치유나 상담 요법을 안 해도, 정말 예배를 제대로 드리면 우리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아이의 미래가 달려 있다.’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는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가정, 다시 말해 주님이 중심에 계신 가정, 주님이 다스리시는 가정, 그런 가정이야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며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실 때 이것이 가능합니다. 가족 모두가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치유와 회복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이렇게 주님 중심의 가정이 되어 주님께 기쁨을 드리며, 놀라운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 교회 모든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