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교만을 행하고 있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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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교만을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설교 날짜-2023.04.30.
설교 본문-로마서 1장 18~23절
설교문
오늘 설교 제목을 보고 적지 않은 당황을 하신 분들도 계시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제목을 자극적으로 지은 이유는, 오늘 설교의 주제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주제는 유신론과 무신론, 무종교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12월, 인터넷에 우리나라 국민이 종교에 대하여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조사 결과는 4년 전보다 더욱 좋아지지 않은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당시 결과에 관한 분석을 담은 뉴스 기사를 제가 가져왔습니다. 같이 보시죠! 19일 매일경제 취재에 따르면 최근 종교를 갖지 않는 무교 인구가 점차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리서치가 전국의 만 18세 이상 남녀 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2022 종교 인식 조사'에 따르면 '종교 없음'이라고 응답한 이들이 51%인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관이 4년 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무교 비율이 48%인 것과 비교했을 때 3%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한국 갤럽이 2021년 전국의 만 19세 이상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현재 믿는 종교가 있다"라고 응답한 이들은 40%로, 2014년 50%와 비교했을 때 약 10%포인트 감소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재영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기성 종교가 서로 우월하다고 경쟁을 하는 것도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더 약하게 만들 뿐"이라며 종교 기피 현상에 대한 이유를 종교 내부의 분란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최근 개인이 삶의 주체라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무교 인구가 증가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의 '무종교의 종교 개념과 새로운 종교성(2017)' 논문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삶의 근본적 의미와 위안의 원천이던 종교적 가르침을 제도적 종교와 분리하기 시작했다'라고 설명한다. 개인들의 경제적 지위와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종교가 아닌 개인이 직접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라고 알려진 미국도 1년 전 통계조사에서 비슷한 결과를 보였습니다.
미국 공동의회선거연구소(CCES)의 2021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Z세대 백인 여성의 경우, ‘종교적 소속이 없다(무종교인)’라고 응답한 확률이 51%였다. 백인 남성(42%)보다 9%포인트 높았다. 흑인의 경우도 여성(53%)이 남성(51%)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 수준에 따른 분석 결과, 저학력 여성일수록 무종교인 비율이 높았다. 고등학교나 전문대학 졸업자의 경우, 여성 무종교인 비율이 각각 5%포인트, 7%포인트 높았다. 반면 4년제 대학 이상인 경우 남성이 6%포인트 높았다. 무종교인과 별도로 여성의 무신론자 비율에서도 연령대별 증가세가 뚜렷했다. 1950년에 출생한 남성 가운데 무신론자(또는 불가지론자)는 25%였고, 여성은 20%였다. 5%포인트 격차는 1960년생과 70년생 사이에서도 유지됐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인 1980년생의 경우, 남녀 간 격차가 2%포인트 정도로 좁혀진 데 이어 Z세대에 이르러서는 여성이 49%, 남성이 46%로 3%포인트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성별에 따른 차이는 있으나 이제 미국도 더 이상 예전과 같이 기독교 국가라고 불릴 만큼의 정도는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무신론자와 무종교자들에 관한 것은 우리가 이제는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인 것도 분명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전파해야 할까요? 아니, 하나님께서 분명히 계신 것이 맞는 것일까요? 오늘 이 부분에 대해 로마서 말씀을 통해 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로마서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 바울이 로마에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왜 이 로마서를 썼을까요? 이유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서버나, 우리말로 스페인에 대한 선교를 계획하고 선교의 전진기지를 세우려는 희망을 품고 로마를 방문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선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해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지 않은 로마의 교인들을 향하여 복음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복음이 이런 것이야! 라고 말하기 위함이죠. 이러한 측면으로 인해 로마서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서 가운데 하나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교회 역사 속에서 로마서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이제 바울의 메시지에 함께 귀 기울여 보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 18~20절, 21~23절이 그것입니다. 먼저 18~20절을 보겠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우리에게 전적인 잘못이 있음을 말합니다. 사실 오늘 단락을 읽고 세상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집니다. “하나님은 없어.”
앞에 있는 질문에 대해 반박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없다.”라는 문장에 대한 반박입니다. 사실 이에 대한 반박은 오늘 본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직접 찾아보시겠습니까? 찾는 분께는 제가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선물로 하나 드립니다. 바로 20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한목소리로 2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우리가 자연환경을 보죠? 바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방금까지 읽었던 성경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입니다. 자연이 왜 하나님을 알게 하는 도구인지가 이해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예시를 가져왔습니다.
잠시 사진을 보시겠습니다. (사진을 보여준다) 여러분! 혹시 피오르드 가보셨나요? 전도사님은 중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중학교 때 사회 공부를 열심히 하셨거나, 고등학교 때 세계 지리를 배웠다면 아실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것은 그것이고, 이 사진을 보시고 드시는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부모님께 “한국 귀국하기 싫다. 여기 살고 싶다.”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가셨던 분들도 감탄하면서 “무조건 사진으로 남겨야 해. 이런 멋진 풍경은.” 이 말만 계속하셨습니다. 이렇게 걸작품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 있는데 과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설령 피오르드의 형성 과정(빙하가 중력으로 인해 이동하면서 침식->빙하가 기온 상승으로 모두 녹아 없어지고 빙하가 깎은 u자형 골짜기가 나타남->해수면 상승으로 U자형의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와 좁고 긴 피오르가 발달)을 운운하면서 애써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 한다고 해봅시다. 제가 질문 하나 해보겠습니다. 중력은 누가 만드는 거죠? 빙하가 어떻게 골짜기를 U자형으로 깎죠? 빙하가 마치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깎는 것인가요? 결코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20절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1)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는 그들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이는 그들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심이니라
여러분!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능력과 신성을 보이셨고,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고 하여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하여 보이실 수도 있고, 오늘처럼 자연을 통해 보여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졸리실 것 같아 질문 하나 드립니다. OX 문제입니다. 문제 나갑니다!
하와이에는 눈이 온다.
0일까요? X일까요? 바로 O입니다. 우리의 이성적 상식으로는 X입니다. 그런데 하와이에는 진짜로 눈이 옵니다. 인터넷에 하와이 눈이라고 검색하면 바로 뉴스 기사가 몇 개 뜹니다. 얼마나 놀랍지 않습니까? 그 더운 지역에도 눈이 온다는 것이! 하와이의 겨울도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그냥 일시적으로 그러한 것 같다고요? 아닙니다. 뉴스 기사들의 연도를 보면 다양함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으니, 바로 이성적 판단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21~23절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사실 21~23절 말씀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뿐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 다시 21~23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약간 우리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지 않나요? 23절은 제외한다고 할지라도 21~22절은 그런 것 같다는 건 저만의 생각인가요....!! 하여튼 21~22절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감사하지 않는 것을 오늘 본문은 꼬집고 있습니다. 지행합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왕양명이 주장한 것인데요. 앎이 곧 실천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지행합일은 성경에서도 종종 보이는 주제입니다.
야고보서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죠.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냥 믿는다고 하고, 행함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이죠.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죠.
그리고 이 경외가 지혜로워지는 것의 비결입니다. 잠언 9장 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말씀은 짧으니 우리 같이 2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우리는 모두 지혜로워지기를 원합니다. 특히 이번 주, 다음 주와 같이 중간고사가 있으면 우리의 기도 제목은 기-승-전-중간고사입니다. ‘중간고사를 잘 봐야 하니 하나님! 지혜를 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여태까지 제대로 경외하지 않다가 갑자기 지혜를 달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를 불쌍하게 여기셔서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를 향하여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경외할 수 있는 우리 귀한 중고등부 한 사람 한 사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지혜가 있어 보여 교만하게 된다면, 패망하게 됩니다. 잠언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쉽게 말하자면 교만하면 망한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꿔서 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상은 능력이 없습니다. 또한 우상숭배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지 않나요? 사울, 다윗, 솔로몬까지는 어떻게 잘 가다가 왕국이 분열된 이후부터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끔찍한 패망을 맞이하게 되죠. 남유다 왕국의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로 포로로 끌려갔죠. 구약부터 오늘 본문까지 분명히 성경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저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의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연이 분명히 하나님에 대해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진정한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며, 경외함이 전제되어야 지혜로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부로 우상으로 바꿔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김으로 야기된 결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혹합니다. 이것들을 기억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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