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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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설교 본문: 고전 15:12~20절
설교 날짜: 2023년 5월 7일
설교문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만약 사람이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복음서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 선포된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부정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체인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글을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동시에 훨씬 더 많은 것을 부정해야 한다…
한편,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중략)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몸이 부활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세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몸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죠. 그래서 여러 가설들을 만들어 냅니다. 대표적인 가설들과 그에 대한 반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잠깐 기절했다는 기절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이미 심한 채찍질로 저혈성 쇼크 상태, 곧 과다 출혈로 고통을 겪는 상태에 빠져 거의 탈진 상태였고, 십자가에 두 손과 발이 못 박힐 때 모든 뼈가 어그러질 만큼 회생 불능 상태였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서는 장시간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질식하기 때문에, 죽은 시늉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은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나왔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상태에서 심장마비로 죽으면 심장 주위 막 조직과 폐 주위에 액체가 고이는 현상이 생깁니다. 무엇보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게 직업이었고 사형 집행의 전문가들이었기에 사람이 실제로 죽었는지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로마 군대 규율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은 죄수가 죽지 않거나 중도에 도망가면 그 군인이 대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지 않고 무덤에서 다시 소생했다면, 깨어난 예수님은 땀에 젖고 상처가 터져 흉한 모습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가는 곳마다 핏방울이 떨어져 흔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결코 그가 부활했다는 결론을 내리진 못했을 겁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요 생명의 주라고 고백하기보다,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고 그를 간호하려 애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자신도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전도에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를 실제로 무덤에 장사 지냈다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현장에는 예수가 죽기를 바라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고, 당시 로마 군인들의 임무는 그 결과를 확인하고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시체를 매장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마태는 유대인 목격자들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을 것이라 말하면서 무덤이 실제로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기록했습니다(마 27:57-65, 28:11-15).
세 번째는, 무덤에 있는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쳤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서 훔쳐 도망간 후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꾸며낸 것이라면 그 가짜 신념 때문에, 목숨을 걸고 순교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었고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시신이 없어졌다고 해도 믿지 않았는데, 무슨 담대한 용기와 믿음으로 경비병들이 지키던 무덤에 찾아가 시체를 훔치는 무리한 시도를 했겠습니까!
네 번째는, 제자들이 단순히 예수의 환영을 본 것이란 주장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같은 환영을 보는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예수를 직접 보기 전에, 비신자였기에, 환영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환영은 경험자들의 삶을 바꿔놓지 못합니다. 정말 환상이었다면, 유대인들이 무덤에 그대로 놓인 예수의 시체를 꺼내 공개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나, 그들은 대신 시체를 훔쳐서 도망갔다는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다섯 번째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건 비과학적이란 주장입니다. 사실 이 주장은 무신론적 자연주의(실제의 사물과 현상을 자연 세계의 범위 안에 있다고 보고, 초자연적인 존재나 힘을 신뢰할 수 없는 가설이라고 생각) 철학에 근거한 것입니다. 과학은 자연현상의 원인을 검증할 유일한 도구이지만, 검증된 원인 외에 다른 요인들이 일체 존재할 수 없다는 것까지 입증한 건 아닙니다. 초자연적 원인에 따른 자연현상은 애초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실험모델이 없기에, 과학적 소견이 아닌 철학적 가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뉴스를 보면 종종 기적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번째는,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성경 기록이 일치하지 않으니 거짓이란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는 빈 무덤 이야기에 관한 여러 개의 독립적 증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뿐, 그 증거들 자체의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들로 존재하기에, 어떤 역사가도 단지 부수적인 불일치나 모순된 표현을 근거로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무시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사건에 관한 설명은, 설명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지막 7번째, 예수의 부활 사건은 꾸며낸 신화나 전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신화나 전설로 발전되기 전에 기록된 문서들입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신화로 발전되려면 최소한 두세 대(60여 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더불어 복음서는 길게 잡아도 십자가 이후 30~60년 사이 완성됐고, 그 사이, 구전이나 메모로 전승돼 오던 것들입니다.
하여튼 부활을 가지고 이제 크게 시비를 걸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부활이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와,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5장 12~20절을 통해 알아가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소위 부활 장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장의 첫 구절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모두 부활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오늘 단락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 없다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합니다. 우리 같이 12절 말씀 읽겠습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런데 왜 바울은 고린도 지역의 사람들을 꾸짖는 표현으로 논의를 시작하고 있을까요? 교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도 분분합니다. 그중 하나의 의견은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참여할 수 있는 영적 부활, 다시 말하면 이미 현실이 된, 좀 더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으로 해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하늘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옷 입혀질 것을 갈망하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 탄식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10절에서 바울이 이를 말하고 있죠. 제가 고린도후서 5장 1~10절을 읽겠습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옷 입혀질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그렇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새롭고 변화된 몸으로 다시 일으키심을 받은 것 같이, 주님 안에 있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도 영광스럽고, 능력이 있고, 영적이고, 죽지 않은 새로운 몸으로 일으켜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뤄질 것입니다. 이를 성경대로 순전히 믿는 모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뤄집니다.
이제 14절 말씀 보겠습니다. 14절 말씀을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못하셨다면 왜 우리가 전파하는 것과 믿음이 거짓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의 특성에 있습니다. 복음은 구원하는 믿음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핵심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진술에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의 진리를 부인하면 그 메시지의 수행효력도 완전히 없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헛된 두 번째 귀결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실이 아닌 것을 믿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없는 신앙은 개인의 삶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복음은 가짜입니다. 만약에 믿음이 없으십니까? 그러면 주님! 저를 만나주십시오, 이 불쌍한 저를 만나주십시오! 라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간절히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말씀을 들으세요! 성경은 로마서 10장을 통해 이같이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에서 말미암는다.” 말씀을 들으면,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이 임하십니다.
15~18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여기서도 바울은 동일한 논지를 계속 펼치고 있습니다. 혹시 맞춰보시겠습니까? 답은 ‘만일 죽은 자가(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신) 일이 없으면, -이 없다.’입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이 용법을 사용해서 부활이 실재임을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세부 주장을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 세부 주장은 바로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거짓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실 일도 없고(이건 앞에서 나왔죠?), 믿음도 헛되고(이것도 반복이죠?), 죄 가운데 있고 주를 믿고 죽은 신자도 망합니다. 왜냐고요? 부활이 죄 사함을 가져오고 어둠 권세를 이기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영원히 사탄의 종노릇해야 합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의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 율법에 매인 상태로 영원히 고통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이 모든 것을 해방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생명을 기억하고, 부활 생명의 근원이 되신 우리 주님을 굳게 믿고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19~20절을 보겠습니다. 19~20절은 우리 같이 읽기를 원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갑자기 부활을 열심히 설명하다가 더욱 불쌍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에 대해 의아함을 품으신 분도 계실 듯합니다. 이는 내세의 삶을 소망하면서 이생에서 치른 희생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만약에 앞으로 우리가 받을 새로운 생명이 없다면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즐기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하지만, 20절은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죽은 성도들도 부활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소망이 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은 성도가 될 것인데, 부활한다고 말하니까요. 여러분!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삶을 포기하시고 싶으신 분 계십니까?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같이 끝까지 가자!”
지금까지 부활에 대한 바울의 글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부활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보고 매주 지켰습니다. 더불어 종교개혁자들도 부활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신앙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에 관해 확신하는 마음으로 한 주를 살아갈 수 있는 귀한 중고등부 한 사람 한 사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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