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빔에서 채워짐으로

다시보는 룻기 시리즈➂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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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Ruth 1:18–22 NKRV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인 톨스토이의 작품 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미하일이라는 천사가 등장하는데, 이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람들의 영혼을 데려오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영혼을 데려와야 할 사람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제 막 쌍둥이를 낳은 여인이 있는 거예요. 여인은 천사를 보고 자신이 지금 죽으면, 이제 낳은 아이들도 죽을 것이라며 살려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천사 미하일은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고 하늘로 돌아가고 말죠. 이에 하나님은 불순종한 천사에게 사람이 되어 그들 속에서 살며 세 가지 의문을 해결하면 다시 천사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천사 미하일이 해결해야 할 마지막 질문이 바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어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돈이나 명예, 권력으로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냥 ‘정’으로 사는 걸까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톨스토이는 이 질문에 대해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대답했습니다. 천사 미하일이 사람이 되어 땅으로 떨어진 지 6년이 되던 어느 날, 6년 전 자신에게 살려 달라고 했던 여인이 낳은 쌍둥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자라 미하일이 일하는 신발 가게에 왔습니다. 미하일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듣고 환하게 웃으며 다시 천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아무도 지켜 줄 수 없을 것 같던 이 아이들을 이웃에 살던 여인이 돌보게 되었고 결국 두 아이를 입양해서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톨스토이가 말한 답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땅을 사는 우리 또한 주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사랑으로 사는 것이며,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산 것 같지만 실상은 살아있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무것도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헤세드의 사랑으로 끌어안은 룻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룻은 얼마든지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결혼해 모압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기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버리고, 텅 빈 시어머니 나오미를 끌어안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헤세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헤세드의 사랑이 만들어 내는 기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면 하나의 단어가 눈에 들어오실 겁니다.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19절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22절 후반부에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로 1장이 마무리됩니다. 1장의 시작이 “그 땅(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드니라”였음을 기억하신다면, 1장은 온통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으로 채워져 있는 셈이죠.
저는 이 베들레헴이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된 ‘빵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가 빵집에 빵이 없는 상태, 즉 베들레헴에 임한 기근 때문이라고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빵이 없는 빵집을 사람들이 떠난 것이 당연하듯 베들레헴을 떠난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빵이 사라진 빵집’이 바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이 아닌지, 혹시 우리 교회는 어떤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베들레헴과 오늘날 교회를 하나로 묶어서 계속 보려고 하는데요. 나오미와 베들레헴의 상황을 오늘 우리 시대로 끌어오도록 해보겠습니다.
이제 드디어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나오미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돌아온 이유에 대해 6절이 이렇게 밝혀 주고 있죠. 6절
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나오미가 “빵집에 빵이 돌아왔다”라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돌아왔다”라는 말을 듣고 교회로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날 선 검처럼 살아있고, 성령의 충만함이 온 회중을 뒤덮는 그런 교회,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져 있는 그런 교회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의 임재가 회복된 베들레헴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본문을 통해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을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오미를 처음 만났을 때 하는 말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19절 합독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들어갔을 때, 온 베들레헴 성읍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기 때문에 생김새부터 옷차림까지 베들레헴 사람들로서는 거부감이 들었을 정도로 낯설었겠지만, 사람들이 나오미는 알아보는 거예요. 10년이라는 세월은 생각해 보면 다 큰 어른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긴 시간은 아니잖아요?
그들이 나오미에게 묻습니다. “이이가 나오미냐?” 원문에 가까운 번역으로는 “이게 누구야? 나오미 아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나오미를 몰라봐서 묻는 게 아니죠. “네가 정말 10년 전에 이곳을 떠났던 그 나오미가 맞느냐! 도대체 넌 왜 이렇게 심하게 망가졌느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 꼴이 이리도 처량하냐! 네 남편은 어디에 있고, 데려갔던 두 아들은 어디 있느냐! 기쁨이라고 불렸던 너는 도대체 어디 가고, 왜 이렇게 망가지고 부서져서 돌아왔느냐!”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는 말입니다. 결국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오미에게 하는 말은 “너는 나오미이기는 하지만 나오미(즉 기쁨)가 아니구나!”라는 것이죠. 왜 이런 말을 할까요? 10년 만에 다시 고향을 찾아온 이에게 너무 가혹한 말 아닙니까?
여러분, 세계 교회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신앙적인 열정과 부흥을 누렸던 이 땅의 교회들이 그 능력과 힘을 잃어버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고 각자의 판단이 있겠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교회가 더 이상 이 세상을 향해 죄인이라고 선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조차도 세상에서 얻은 신분을 그대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이면, 교회에서도 유력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믿는 것은, 일단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분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나오미가 아닌 마라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를 나오미(기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구원이 필요한 죄인 즉 마라라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들레헴이요. 지금. 나오미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나오미의 비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을 해 주잖아요? 이 땅에서 움직이는 교회공동체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또한 이 땅과 삶의 비참한 상태를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이런 질문을 가지고 나오미가 베들레헴 공동체에 보인 믿음의 반응을 두 가지로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베들레헴 사람들의 진심 어린 탄식을 들은 나오미가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스스로를 의인이 아닌, 죄인으로 인정하기입니다. 20절 합독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가 베들레헴 공동체에 보인 첫 번째 믿음의 반응은 나오미 스스로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 즉 쓴물, 고통이라고 불러라”라고 고백했다는 것을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물론 이 부분은 학자들마다 두 가지로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나오미의 고백을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보는 것과 자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보는 관점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부정적으로 후자는 긍정적으로 이 부분을 해석하고 적용한 것이죠.
나오미의 고백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부정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지금 그녀는 심각한 자기 비하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상황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서 마음에 담아두었던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분들은 이 부분에 대해 “아직 룻이 옆에 있는데 인생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면 안 된다”라며 어떤 상황에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극복할 수 있다고 적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오미의 고백은, 그 자체가 자기 성찰이 강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고백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요. 나오미는 이제야 비로소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타지에서 고된 이민 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한 헤세드의 사랑으로 “내가 죽는 일 외에는”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 룻이 옆에 있지 않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회복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빵으로 풍성해진 베들레헴의 이웃들이 나오미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둘러싸고 있잖아요? 아직은 뭔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 텅 빈 인생을 채워 줄 무언가가 준비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베들레헴 공동체는 나오미에게 “너는 나오미가 아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너는 너의 힘과 능력과 돈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베들레헴 여인들이 하는 자신에 대한 이런 평가를 수용한 것 아닙니까? “맞아요, 저는 나오미 즉 의인이 아닙니다. 저는 제힘과 능력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마라 죄인입니다. 제게는 아무런 의로움이 없으니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듯 진정한 회복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한다고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며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나오미와 같은 사람들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병자라는 것을 아는 환자만이 의사에게 나오고, 치료가 가능한 것처럼, 나오미 역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함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이렇게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은 구원의 공동체임을 알고 당신도 역시 우리와 같이 용서함을 받고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그런 진실한 회심이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공동체의 탄식에 나오미가 보인 두 번째 믿음의 반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라는 신앙고백하기입니다. 21절 합독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변화는, 나오미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전능자 즉 ‘엘샤다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샤다이’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원문에 가깝게 해석을 하면 “전능자께서 나를 쓰게 만드셨다”라고 하며 자기가 겪은 고통의 출처를 하나님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죠. “내 이름이 기쁨이고 즐거움이라고요? 내 형편을 보세요.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어디 있나요?”
흔히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젊어서 하는 고생으로 인생의 중요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리 인생의 고생도 지나고 나면 다 유익한 일이 된다는 것이죠. 어떤 부분에서는 이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요. “젊어 고생하면 골병 든다”라고 비꼬며 말을 합니다. 세속적 가치가 팽배해지고 거룩이 상실해져 가는 이 시대에 청년들은 전혀 기를 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똑같은 고생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지만, 어떤 사람은 그냥 망가지기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쳐올 때, 단순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고난을 통해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마귀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역시 아무런 성숙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런 분들은 대부분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의 지금 상황은 모두 운이 나쁘거나 팔자가 사나워서입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재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분들은 비슷한 문제들이 반복될 때, ‘역시 나는 기구한 운명이야’ 하면서 영적인 패배감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마귀는 오히려 그런 내면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고난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는 분들은 고난의 이유를 자신의 죄에서 찾거나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즉 섭리에서 찾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내게 고난이 있는 것은 혹시 나의 어떤 죄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성찰해서 자신이 짓고 있는 죄의 문제들을 제거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는 면을 봅니다.
‘내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의 이유를 알게 하시는 날이 있을 것이다.’ ‘왜 나에게?’ 가 아닌 ‘이를 통해 무엇을 알게 하시는가?’에 ‘이러한 힘든 과정이 나에게 인생 훈련이 되고, 장차 내게 주어질 영광의 면류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의 삶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시간표에 내 삶을 맡기고 인내하게 되는’ 놀라운 의지를 발휘하게 되더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복인지 아십니까? 내가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지금 나의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 안에서 찾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6년 전에 약 9개월가량 목회를 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부교역자로 시무하던 목회지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병으로 이어졌고 그 후로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쉬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사실 저와 제 아내가 모든 상황을 감수하고 목회를 잠시 쉬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제 안에 있는 일 중심의 성향과 교만함과 죄성이 제가 목사로 살기는커녕,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도사 시절부터 늘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교인들께서 설교 잘한다니까 진짜인 줄 알았고,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하늘을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들이 성숙하지 못한 저에게는 쓴 물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도저히 그냥 두면 큰 사고 칠 것 같으니까 저를 강제적으로 쉬게 하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제가 그 9개월 동안 뭐 했는지 아십니까? 진짜 목사가 되는 훈련을 했습니다. 수술과 입원을 통해 병상에서 고생하시는 환우들의 심정을 알게 하셨어요. 사택도 지원금도 없이 살다 보니 교인들의 어려운 점을 알겠더라고요. 일 중심의 사고방식을 사람을 더 알게 하시고, 기도가 부족한 저에게 골방 기도를 통해 하늘 문을 여는 기도의 역사를 알게 하시고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저에게 두 아이의 등하교를 담당하면서 애들과 친밀해지는 시간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기간에 배운 것은, 톨스토이의 말처럼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이 사람을 향한 진정성 있는 사랑의 행위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저는 저 스스로를 보아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함께 동역하는 동료 교역자들보다 자신 있었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고 정말 잘 될 줄 알았어요. 제가 성공해야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제가 누구보다 의롭지 못하고, 교만하고, 영성과 인격에 균열이 간 마라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 저야말로 텅 빔에서 채워짐으로 옮겨온 나오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강남의 큰 교회에서 전임 사역을 시작할 때는 제가 풍족했는데, 주님께서 전능자께서 저를 텅 비게 만드신 후에 다시 채워주셨습니다. 저는 제게 그런 채움의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예전에 저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오직 하나님께만 붙들린 인생이 되겠노라고 다짐 또 다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혹시라도 교만한 모습을 보이려거든 “아니, 목사님, 얼마 전까지 마라임을 잊으셨습니까?” 꼭 알려주세요.
이제 교우님들께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하계동의 베들레헴 공동체인 우리 하름교회 처음 오셨을 때, 마라이셨잖아요? 지금은 나오미가 되셨습니까? 호6:1 합독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금의 고난과 문제가 마귀의 장난이 아니라, 팔자가 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나오미는 단 한 번도 마귀가 나를 심히 괴롭힌다고 말 한 적이 없습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라고 두 번이 말했고,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며 솔직하게 자신의 슬픈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을 마라라고 했던 그 하나님과의 동행을 포기하지 않고 베들레헴 공동체로 빵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왜냐하면, 이 슬픔과 괴로움, 고통을 주신 분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의 회복도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그 결과를 텅빔에서 채워지므로 옮겨오는 역사를 맛보게 된 것 아닙니까? 그 엄청난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을 미리 암시해 주는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22절입니다. 22절 합독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하필이면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가 ‘보리 추수 시작할 때’라고 밝히고 있잖아요? 여러분, 나오미가 이것을 계산하고 왔을까요? 그럴 리가 없죠. 도착했더니 바로 그때였던 거예요. 보리를 추수하는 그때, 베들레헴에 빵이 넘치는 바로 그때 두 여인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온 때가 은혜의 때, 축복의 때였고, 이제 앞으로 ‘빵집으로 돌아온 빵 없는 이들’이 이제 어떻게 풍성해질지 정말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치실 때도 있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대로 반드시 그분은 우리를 다시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어리석고 교만하기만 했던 저처럼 우리를 텅 비게 하실 때도 있지만, 반드시 다시 나오미(기쁨)로 가득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그 ‘보리 추수가 시작할 은혜의 때’를 위해 우리 모두 함께 매일 매일 조금씩 전능하신 주님 앞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때에 텅 비었던 우리 인생을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어제 첫새벽기도회에 함께 부른 이 찬양.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소망’ 이 찬양 부르시면서 한 걸음 더 주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찬양 : 목마른 사슴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나오미와 같이 공허하고 텅 빈 고목 같은 우리의 삶에 헤세드의 인애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찾아와 우리 생명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아 있는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나님 우리는 나오미가 되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죄성에 눌려 단 하루도 주님의 선하신 손길과 긍휼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마라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저희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을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오, 주님!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우리 각 가정에 아직도 마라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아직도 주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가족들이 있습니까? 자식들의 입시도 중요하고, 결혼도 중요하고, 남편의 일도 잘 되어야 하겠지만, 주여, 우리가 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룻에게 주셨던 헤세드의 사랑으로 내 불신 가족들을, 이웃들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몸이 약해지고 정신이 흐릿해진다는 약한 생각이 아닌,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저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이 시대의 룻이 되고, 베들레헴 공동체가 되어서 혼탁한 이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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