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그 위에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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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본문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19:28
“목 마르다”
“목 마르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목 마르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인성을 취하신 낮아지신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참 신이심과 동시에 참 인간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목마르다’라는 말은 주님 역시도 우리와 같이 고통 속에서 아파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우시나요? 요즘 저랑 와이프가 그렇게 눈물이 많아졌는데 여튼 아니면 가난한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 흘립니다. 왜요? 그 아픔과 고통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을 보면서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죄인인 우리를 위해 이 멸시와 수모, 고통과 고난을 감당하셨는데, 우리는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낮은 종의 모습으로 오신 우리 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여러분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을 밝히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참 신이셨으며,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십자가 위해 참 인간으로서 처절한 이 몸부림을 좀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바라보는 이 말씀이 옛날 옛적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우리의 참 주인이시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세상의 아픔도 동감하고, 동정할 수 있는 양심이 있지 않습니까? 그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에는 반응하시면서 주님께 반응하지 않는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이런 악한 우리를 위해 또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신 예수님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신 예수님
우리 주님의 삶은 모든 것이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에게 주어지는 세례를 죄가 전혀 없으신 우리 주님이 성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세례를 주지 않으려는 세례 요한을 설득까지 해서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고자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 성취하고자 하신 말씀은
시69:19-21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자신에 죽음 가운데 있는 이 고통 속에서도 목마름을 통해 간절히 이루고자 하신 목표는 바로 말씀의 순종을 통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에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목표가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닮고자 하심인가요?
아니면 신앙생활을 통해 주님꼐 보상을 받고자 하시는가?
우리 주님은 죽는 순간에도 본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성경을 응하게 하시고자 하심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목표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의 뜻안에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떠한 목표를 가지시나요!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이 질문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포도주를 거절하신 예수님
포도주를 거절하신 예수님
주님이 본문에서는 주님이 목이 마르다 말씀하십니다. 이후에 제자들이 쓸개 탄 포주를 주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건낸 포도주를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27:33-34에서는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마27:33-34
역시 막15:22-23에서도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막15:22-23
막15:22-23
이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이 다른 성경구절의 의미
내용이 다른 성경구절의 의미
첫 번째는 주님이 포도주를 마시기는 했지만 입에 살짝 대기만 하셨다.
두 번째는 앞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처음 모습이며, 요한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 대속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절하시고, 마지막 시점에서 포도주를 드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견해가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에게 임하는 육적인, 그리고 영적인 모든 고통을 피할 목적이 없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죄인에게 쓸개 탄 포도주를 주는 이유는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에 마취제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 1
주님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 1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감당하셔야 했던 고통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셔야 했던 고통은 다른 어떠한 것으로 회피하거나 경감시킬 수 없는 고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고통은 죄인이 회피할 수 도 없으며, 피해서도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 오로시 그 아픔을 감당하신 이유는 바로 죄인인 우리 때문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한 고통도 피하려 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주의 제자로서 임하는 고통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포도주를 거절한 그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고통에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회피하거나 위로받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종교입니다. 거룩한 우리 주님의 뜻이라면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주님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실현하고자 하는데 수반되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 고통을 다른 것을 대체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묵묵히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님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 2
님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 2
다음으로는 주님께서 포도주를 거절하심은 우리 주님의 말씀 속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26:28-29에 드러납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6:28~29
우리가 이미 성찬을 통해 너무나 많이 들어온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제자들과 마시는 날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민수기의 말씀 때문입니다.
나실인의 규례
나실인의 규례
민6:1-4에서는 나실인 서원에 대한 규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민6:1-4
여러분들 나실인을 알고 계시나요?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특별히 더욱 자신을 선별하여 드리고자 할 때는 나실인으로 구별하여 더욱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왜 나실인에 대한 규례에서 이토록 포도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고대 사회에서 포도주의 의미
고대 사회에서 포도주의 의미
당시 고대 사회에서 포도가 의미하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는 풍요와 기쁨, 희락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노아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그 당시 사회에서 믿음을 보자면 노아의 가정은 믿음의 1티어 가정입니다. 믿음의 순서로 따지자면 믿음의 1등에서 8등까지만 남기고 모든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1티어인 노아의 행동을 보십시오! 포도주에 취해 옷을 벗고 잠들지 않습니까? 더욱이 믿음의 4티어가 들어와서 1티어의 실수를 보고 가서 놀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실을 안 1티어가 4티어를 저주하죠. 그리고 1티어와 4티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입니다.
포도주에 취함의 의미
포도주에 취함의 의미
여기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술은 취하면 분별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시 돌아와서 살펴보면 포도는 당시에 주로 술을 만드는 곳에 사용됩니다. 그러니 세상이 주는 기쁨을 쫓아 살아가면 세상에 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기쁨을 완전히 거절하며 살아가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세상이 주는 풍요와 기쁨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도록 허락하셨으나 완전히 구별된 나실인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완전히 단절되어 오직 주님만으로 기뻐할 것이 요구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니다.
나실인이 되신 예수님
나실인이 되신 예수님
그러기에 우리 주님이 지금 성찬을 진행하며 말씀하시는 것은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완전히 드려질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나실인의 서원하신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포도주를 입에 대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이 이제 끝이 나고 주님의 나라가 주의 제자들에게 임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몸을 통해 자신이 구별된 제물이시고, 제사장이시며, 왕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역시나 그의 행위로 그의 나라 즉, 그의 통치가 시작 되었음을 보이십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 안에 주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입헌 군주제가 있는 나라와 같이 아무 힘이 없는 그저 명목상에 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자신의 뜻에 따라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조국 교회의 현실
조국 교회의 현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의미가 조국 교회 안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가난했던 자가 부자가 되는 것, 어느 신자의 자녀가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믿음이 좋은 가정이라 생각합니다.
그 안에 주님의 뜻을 자신을 통해 이루려는 간절함이 없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없는데, 이것이 믿으며, 간증이 되는 미친 시대를 살아갑니다.
여러분 진정한 믿음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사랑과 은혜를 알아 미친 사람처럼 눈물흘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기꺼이 부정하며, 세상이 주는 위로도 과감히 거절하는 이들이 바로 주님의 자녀 바로 주님을 따르는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회원권 즉, 세례를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또한 주의 자녀로 주님의 나라 안에 있음을 외적으로 확증 받는 성찬은 우리에게 한없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한 가상오언의 의미입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우리가 살펴볼 말씀에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종착역과 같은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즉, 구약의 말씀이 메시아가 오셔서 인류를 구원이라는 주제가 창세기로 시작된 말씀의 성취가 바로 오늘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 안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과 함께 성경 정체의 핵심 구절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공생애 가운데 오직 이 부분에서만 유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
이처럼 성경의 주제를 관통하는 이 말씀을 왜 지금 가장 고통스러우며, 수치스러운 이 자리에서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은 것일까요?
조금 더 멋있게 말씀하실 수 있지는 않았을까요?
우리 모두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그 시점에서 말씀하실 수는 없었을까요?
가령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시점에서라면, 아니면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던 때에 말씀하시면 좋지 않았을까요?
십자가에서 말씀하시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말씀하시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말씀하시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죄인인 우리에게는 그 어느 것보다 귀한 복음의 음성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전에 말한 바 있듯이 조국 교회가 복음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의 소식을 다른 것으로 대체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 우리가 나누는 가상육언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은 성경의 핵심을 관통하는 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당시에 가장 혐오스러운 십자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바로 죽음을 앞둔 그 순간에 말입니다.
그래서 일전에 나눈 것과 같이 이사야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1-2)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18-21)
라고 말한 것입니다.
조국 교회가 부끄러워 하는 복음
조국 교회가 부끄러워 하는 복음
그런데 조국 교회는 이런 우리 주님을 가리우고 세상이 흠모할 만한 다른 요소들로 주님의 복음을 가렸습니다. 분명 바울은 이런 주님의 복음에 대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게 조국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의 복음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보이십니까?
여러분들에게도 부끄러운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의 복음에 다른 무엇을 더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이 은혜가 되지 못하는 이유
복음이 은혜가 되지 못하는 이유
만약 아직도 여러분들에게 십자가에서 선포된 오늘의 말씀 “다 이루었다”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직 우리에게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인식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여러분 도무지 주님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우리를 주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찔림과 그의 피흘림으로 우리는 성부께 나아갈 담대함을 얻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거룩 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은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실인이 세상과의 구별된 자를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 이유는 사단도 아니며, 세상도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 입니다. 이 죄성은 우리로 영적으로 무감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묵상해도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보여주는 율법
우리의 죄를 보여주는 율법
여러분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길 원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바로 주님이 주신 율법입니다. 주님이 주신 율법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멀리하며,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한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경에 기록되 주님의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도무지 주님의 뜻에 부합한 삶을 살 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형벌은 주님이 달리신 이 십자가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게 철저히 버림받아 주님의 일반 은총도 없는 끔찍한 곳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프리카에 정부가 없어서 주먹이 법이 되는 그 세상보다 끔찍한 세상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율법에 순종하시고, 다 이루심으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주님께 버려질까 두려워 함으로 율법을 대하지 않습니다.
죄의 종에서 주의 종으로
죄의 종에서 주의 종으로
우리는 여전히 종입니다.
전에는 죄에 대한 종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은혜로 은혜 안에 거하는 종입니다.
전에는 슬픔과 아픔의 종이었다면, 이제는 은혜 안에 거함으로 기쁨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율법을 통해 주님의 아름다움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사랑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 감격적인 주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주님을 사랑해 율법을 기쁨으로 따르는 자들 이것이 주님의 백성입니다. 주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입니다.
‘다 이루었다’의 두 가지 의미
‘다 이루었다’의 두 가지 의미
오늘 복음에서 “다 이루심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로 큰 의미를 갖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께서 조금도 틀림이 없이 율법을 성취하셨음을 보여주십니다.
두 번째는 죄인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한 우리를 담대함으로 성부께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이제 가상칠언이 막바지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 지금까지 가상칠언을 통해 바라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참으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의 신실함과 사랑 앞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십니까?
우리는 주님께 미친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미친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미친 사람과 같습니다.
이따금 주님의 은혜의 감격으로 우리는 수시로 우는 자들입니다.
죽어야 마땅한 우리를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은혜로 구원하시는 그 신실함에 우리는 한없이 낮아집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이루신 이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고, 오직 주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럼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을 사시겠습니까?
“다 이루셨다”라는 주님의 이 말씀에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다 이루었으니 이제 막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이런 죄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나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