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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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간 이스라엘의 아들들(출애굽기 1:1-7)
이 본문 귀절에서는 다음 사실을 살필 수 있다.
1. 사도행전 7장 8절에 열거된 12족장들의 이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의 이름은 성서에서 자주
반복되곤 한다. 이것은 그들의 이름이 번번히 반복되어 우리로 하여금 익숙하게 하기 위함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인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하며 하니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2. 애굽으로 내려 갔을 때의 야곱의 식구들의 수효를 기록한 기사가 있다. 창세기 46장 27절에서
계수된 바에 따르면, 그 전체 수효는 "70인" 이었다. 이 숫자는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기사에
따르면, 이 땅 위에 살던 민족들의 숫자와 똑 같다. 모세가 신명기 32장 8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표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다. 후일에 크게 번창한 자들이라도 당초의 자기들의 시작이 그
얼마나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었나 하는 것을 때때로 상기해 봄이 좋다는 것을 명심하자(욥 8:7).
3. 요셉이 죽음(6절).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은" 점차로 죽어갔다. 아마도 야곱의 아들들은 대개가
거의 동년대에 죽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냐민 이외에는 그들 가운데서 가장 연소한 사람과 가장
나이많은 사람 사이의 연령 차이가 7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죽음이 어느 가정에 임하면
때로는 온 식구가 삽시간에 죽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 가정의 지주되는 요셉이 죽게 되자,
그 나머지 사람들도 곧 죽게 되고 말았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은 우리들 자신이나 형제들,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친교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불원간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앞서 간 세계가 그러했듯이 이 세대도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4. 애굽에서 이스라엘인들의 기이한 증가(7절). 그러한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4가지 어휘가 사용되고
있다. 즉 그들은 생육이 "증다" (fruitful)하고, 물고기나 벌레와 같이 "크게 번식하여"
(increased abundantly), "창성하며" (multiplied), 전반적으로 건강하고 강하여 그힘이
강대하여" (erceedingly mighty)졌다는 것이다. 거의 그 곳 원주민들을 압도하게 되었으니, 이는
온 땅에 적어도 그들이 살고 있는 이 고센 지방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그들이 가득 차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들이 이전에도 상당히 그 수효가 증가하였겠지만 요셉의 죽음 후에 그 수효가 특별히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그들이 요셉의 보호와 은전을 잃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효를 증가케 하여 그들 자신이 그들의 방패가 되게 하셨으니, 저들이
자신의 힘으로 변통하여 오던 때보다도 그들의 능력이 더 크게 되었다. 우리에게 가장
긴요하다고 여겨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친구들과 친척들을 우리에게 남겨 두시며, 또
그들이 없이 지내는 편이 더 좋게 될 때에는 그들을 떠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불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라고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요셉인 그리스도께서 죽은 후에 그의 복음적 이스라엘인들이 가장 현저하게 증가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는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과 같다(요 2:24).
(2) 이러한 놀라운 창성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큰 민족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부르신 그때로부터 그의 자손들과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신 그때까지 그 기간이 430년이었다. 전기에 속하는 215년 간의 그
증가는 불과 7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후반에 속하는 기간에는 이들 70명이 60만 장정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다음을 명심해 두자.
[1]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가 오랫동안 그의 약속을 그르치고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2] 하나님의 약속 이행이 때로는 더디다 하더라도 그 약속은 언제나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
종말이 속히 오리니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합 2:3).
핍박받는 이스라엘인들(출애굽기 1:8-14)
애굽 땅이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인들에게 행복한 안식처요 정착지였지만 드디어는 그들에게 속박의 집이
되고 말았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던 처소가 급기야는 우리에게 재난의 처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위로를 주리라" 하고 말하던 바로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가장 큰 십자가가 되기도 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 부모들은 진실한 친구였었으나 그들의 자녀들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도 한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던 바로 그 사람이 능히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서나 천국 이편에 있는 이 세상의 여하한 처소에서도 이것이 나의 영원한
안식이라 말하여서는 아니된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기로 하자.
Ⅰ. 요셉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야 할 책임을 애굽인들은 잊어버렸다. 요셉 시대에
몇몇 계승자들이 거쳐간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났다" (8절). 그들이 아는 모든 사람은
오셉을 사랑했고 그를 보아서 그의 친척들에게도 친절히 대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는 곧
잊혀지게 되고, 그가 행한 선한 업적에 대한 기억마저도 사라졌거나 중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요셉의 업적은 그들의 행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하였다. 여러 사람을 위해서
행한 가장 선하고 유익하며 칭찬받을 만한 업적이란 그것을 행한 이가 죽은 후에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후손들을 길이 기억하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전 9:5, 15). 그러므로 우리들의 하나님께 봉사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최대의
관심을 다해야 한다. 사람들이야 어떠하든, 하나님께서는 불의치 아니하사 우리들의 사랑의 행위와
수고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히 6:10). 우리가 만일 사람을 위해서만 일을 행한다면 우리의
업적은 고작해야 우리가 죽을 때에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행한 일이라면
우리의 업적은 우리를 영원히 뒤따를 것이다(계 14:13). 여기에 기록된 이 애굽의 왕은 요셉을
알지 못했으며, 그 뒤를 이어 뻔뻔스럽게도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노라" (5:2)고 말하는 왕이
일어났다.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은인에게 무심한 자들은 우리의 높으신 은인 하나님의
은혜마저도 망각하고 만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다(요일 4:20).
Ⅱ. 이스라엘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국가적인 이유가 암시되어 있다(9,10절).
1. 그들이 애굽인들보다 훨씬 많고 강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사실상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애굽
왕이 그들을 억압하기로 결심했을때에 그는 그들이 그러하리라고 생각하고 만만치 않은 존재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이스라엘 백성을 억제하기 위한 어떤 배려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애굽 정부에 불리한 위험을 줄 것이며 전시에는 적군의 편이 되어 애굽의 시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나서 애굽의 왕권을 찬탈하게 되리라는 추론을 내렸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위험한 민족이며, "방백들과 영토에 해로운" 민족이며, 신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관대히 처분하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말하는 것이 이스라엘인들을 야만적인 태도로 핍박한 구실을
찾는 핍박자들의 정책이었다는 점을 주목하자(스 4:12 이하; 에 3:8).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던
문제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리라고 조상에게 주었던
약속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그 땅에서 떠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주시하라.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술책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폐기시키고자 하나 이것은 그
모두가 허사이다.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이루어진다.
3. 그러므로 그들의 증가를 막기 위한 한 가지 계책이 취해진다.
"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여 번식치 못하게 하자" 하였다.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이스라엘인의 번창이 애굽인들에게는 근심거리였으며, 그 때문에 큰 타격이었으며, 이것을
막기 위하여 애굽인들은 재간과 가장 악질적인 힘과 책략을 동원했다.
(2) 사람들이 사악하게 처신하면서도 흔히 자기들은 지혜롭게 처신한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죄의 우매함이란 결국 만인 앞에 공개되는 법이다.
Ⅲ. 이스라엘인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번창을 저지하기 위하여 택한 방법(11,13,14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평화적이고 비대항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이 애굽인들을 대항하여
전쟁을 하거나 그것 때문에 애굽인들이 위약해질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1. 그러므로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을 택한 셈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인들보다 훨씬 더 근면한 백성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바로는 그들에게 노동시킬
일거리를 찾게 되었으니, 그것이 건축 사업(그들은 바로에게 "국고성들" 을 지어 주었다)곧
농사의 여러 가지 일" 이었다.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가장 무섭고 혹심하게 강요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사정에 대한 여러 가지 감동적인 많은 표현이 나타나 있다. 그들을
감시하는 "감독관" 을 두어 그들을 괴롭히는 방법을 강구하게 하였다. 감독관들은 저들을
혹사시켜 바로의 이익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그들을 고역으로 "역사를 엄하게" 하여 그들의
생활이 괴로움이 되게 하였다. 그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의 정신력을 파괴시키고, 그들이 타고난 많은 자질을 그들에게서 빼앗고자 함이었다.
(2) 그들의 건강을 파괴시켜 그들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그리하여 그들의 수효를 줄이려고했다.
(3) 그들의 자녀들을 나면서부터 노예로 만들어 이스라엘인들의 결혼 의욕을 저하시키고자 했다.
(4) 그들을 히브리 민족에서 이탈시켜 애굽인에게로 병합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더 이상 기억에도
남지 않도록 바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조차도 도말시키고자 했다. 그들이 당한 이러한 압제가
그들에게 나쁜 영향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또한 그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애굽인들과 야합되어 우상 숭배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
(수 24:14). 비록 그 사실이 위의 이야기 속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애굽 땅에 있는 동안 그들의 우상 수배 때문에 그들을 진멸하시려고 위협했던 사실을
읽을 수 있다(겔 20:8).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분명한 체통을 지켰고, 애굽인들과
섞이지 않았으며, 그들과는 다른 관습으로 인하여 그들과는 구별되어 있었다. 이것이 여호와의
역사 하심이며 기적인 것이다.
Ⅳ. 그러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놀랍게 증가하는 이스라엘 백성(12절). "그들을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그들의 수는 더욱 증가되었다" 는 점이 애굽인들에게는 괴롭고 심히 근심스러운 일이 되었다.
다음을 명심하자.
1. 고통의 시기가 종종 교회 상징의 시기가 되었다. Sub pondere crescit-억압을 받으면 성장한다.
그리스도교는 박해 시대에 가장 힘차게 확장되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2. 여호와를 반역하고 그의 이스라엘을 거역하는 자들은 오직 허사를 경영할 뿐이며(시 2:1),
그들에게 더욱 큰 번민을 가져올 뿐이다. 하늘이 번창케 하는 자들은 아무도 감쇠시킬 수 없는
것이다.
유아학살(출애굽기 1:15-22)
그들이 이스라엘인들에 부과한 수많은 고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번성해감을 보고 분개한
애굽인들은 드디어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야만적이고 몰인정한 방법, 즉 이스라엘인들의 어린 아이들을
살해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기회가 와 자기들을 대적할지도 모를 이스라엘 성인들은 오히려 문제
삼지않았다는 사실과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을 피흘리게 함은 숨길 수 없는 그들의 죄악이다. 다음을
명심해 두자.
1. 인간의 타락된 마음 속에는 생각보다는 잔인성이 더욱 가득하다(롬 3:15, 16). 여인의 후손에
대항하는 뱀의 후손들 속에 있는 적개심은 인간성 자체를 말살시키고, 인간들이 모든 긍휼을
완전히 잊어버리도록 꾀한다. 이 백성을 박해했던 자들 만큼 포악하고 피에 굶주린 자들은 없을
것이다(계 17:6).
2. 자타공인할 만한 순진성마저도 숙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새로 태어난 어린이의
피처럼 순결한 피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제 그 피가 하수같이 낭자하게 흘러져서, 우유나
꿀같이 즐겁게 빨아 먹히게 된 것이다. 바로와 헤롯 왕은 사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사내 아이를
삼키려고 서 있는 나쁜 붉은 용(계 12:3, 4)의 대리자임을 스스로 충분히 입증하였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에게서 아무런 흠을 찾을 수 없다고 공언한 후에도 그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었다.
인간이 몸을 죽일 수는 있겠지마는, 인간이 죽일 수 있는 것은 몸 뿐이라는 사실이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히브리인들이 낳는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기 위한 두 가지 잔학한 법령이 계획되었다.
Ⅰ. 산파들에게는 그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15,16절). "산파들" 이 사형 집행인으로 임명되어졌다는 것은 이미 계획된
살인에 그 잔학성을 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어떤 생명의 피를 흘려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구해야 하고 도와야 할 바로 그런 자들을 죽여야 하고 신뢰에 대한 배신을
강요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바로는 어떻게 그녀들이 그와 같은 잔인한 일들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여 그러한 비열한 행위를 스스로 생각했을까? 자신이 포악한 자들은 남도
포악하리라고 생각하게 되고, 또 그렇게 만든다는 것을 명심하자. 바로의 계획은 은밀히 산파들을
기용하여 이스라엘인들이 낳은 사내아이들을 질식시켜 죽이고, 또한 출산의 어려움을 더하게 하고
출산 때에 흔히 있는 어떤 불행을 그들에게 초래케 하는 일이었다(욥 3:11). 바로가 강권했던 두
산파의 이름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기 약 80년 전이었던 그 당시에는 이 두
산파들이 능히 모든 히브리 여인들을 보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2장 5,6절에 명시된
바와 같이 그 궁전 부근에서 적어도 꽤 많은 히브리 여인들이 아이를 낳았으며, 그들 중에 대부분
사람들은 바로가 가장 염려하고 있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히브리 산파들" 이라고
불리워졌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왜냐하면 실로 산파들이 자기
동족에게 그렇게 잔혹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로도 결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사람들이 주로 그 산파들을 이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애굽인들이었기에 바로가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을 것이다.
2. 이 같은 불신앙적 명령에 대한 그들의 경건한 불복종(17절).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중히 여겼다. 또 바로보다도 하나님의
진노를 더 무서워하였으므로 그들은 남아를 살려 주었던 것이다. 만약 인간의 명령이 어느 모로나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 된다면, 우리는 인간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행 4:19; 5:29).
지상의 어떤 권세도 우리를 우리 주 하나님께 범죄하도록 강요하거나 그 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때는 그 두려움이 인간을
두려워 하는 부질없는 공포의 함정에서 우리를 보호해 준다.
3. 산파들이 이 불순종 때문에 왕 앞에서 질책을 당하게 될 때 그들이 자기들을 변명할 내용(18절).
그들은 자기들이 가기 전에 어린 애들이 이미 태어나 왕명을 이행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하였다(19절). 이것을 보면 히브리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특별한 축복을 받았음이 명백한
사실이다. 아마도 히브리 여인들의 해산의 고통는 쉽고 빨리 끝나며, 산모와 어린 아이 둘 다
건강하여 산파의 도움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산파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자기들에게 같애 하심을 알았고, 하늘의 은총을 받아서 왕에게 불복종할 용기를 가졌으며,
또 바로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몇몇 고대 유대인들은 이것을 "산파가 오기
전에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또 하나님은 이를 응답하셔서 그들이 무사히 출산케
하셨다" 고 설명한다. 다른 어떤 조력자보다도 하나님은 비참한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성에게 더
신속한 도움을 주시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산파들이 베풀어 준 친절을 하나님은 보답하셨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20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진 친절을 자신에게 베푼 친절로
여기시어 즉시 보답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또한 특별히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셨다
(21절)고 했다. 그들의 자녀들을 축복하셔서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번성케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봉사는 같은 방법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산파들이 이스라엘의 가계가 이어지도록 하였으므로 그에 따른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 것이다. 보상은 그들이 행한 근본 자세와 관련성을 갖는다는 것을 주목하자. 즉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셨다." 신앙심과 경건은 외적
번성에 대한 좋은 벗이 됨을 기억하자. 즉 집안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있을 때 그 집은 그 때문에
세워지고 왕성하게 되는 있다. 라이트루트(Lightfoot) 박사는 산파들은 그들의 경건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혼하게 된 것이며 히브리인들은 그들에 의해 그 가계가 번성하게 되어졌다고
주석했다.
Ⅱ. 이 계획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바로는 그의 모든 백성에게 히브리인의 모든 남자
어린애들을 호수에 던지우라는 공식과 명령을 내렸다(22절). 이스라엘 남자 어린 아이의 출생을
알면서도 그를 강에 던지도록 지명된 자들에게 그 정보를 제공치 않는 자들은 큰 벌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의 적들은 "지극히 높이신 자의 성도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 쉴 틈도 없이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단 7:25). 그러나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을 비웃으실
것이다" (시 2:4 참조).
모세의 출생(출애굽기 2:1-4)
모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분 다 레위인이었다. 야곱은 레위가 치욕의 상황에 처할 것을
예언했었다(창 49:5). 그러나 그 후 곧 모세는 레위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이것은 허물 많은 육신의
모양을 입으시고, 우리로 인하여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파는
모세의 출생으로 다른 지파와 구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괄목할 만큼
뛰어나게 되었다. 이 갓난 아기에 대하여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Ⅰ. 모세는 어떻게 숨기워 있었는가? 히브리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잔인한 법이 제정된
것은 바로 모세가 출생할 당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어린 사내 아이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의 양친에게는 모세보다 나이가 많은 미리암과 아론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살생의
법이 있기 전에 태어나서 별 위험 없이 키워졌던 것 같다. 그러나 평화스럽게 세상에 태어난
자들은 그들이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그들이 부딪칠 역경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아마도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출생을 예상하고서 근심에 싸여 있었을 것이니, 살생의 법이 발효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태하지 못한 자가 복이 있도다" 하는 말과 같은 형편이 되어 버렸다(눅
23:29).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 내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을 것이다(호 9:13).
그러나 이 아기는 후일 그 아비의 집에 영광이 되었다. 이와 같이 때때로 우리의 가장 큰 근심이
결국엔 우리의 가장 큰 기쁨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하심을 보라. 바로왕의
포악함이 그 절정에 있을 바로 그 때에 비로소 구원자가 태어난 것이다. 인간이 교회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고 할 그 때에 하나님은 교회의 구원을 예비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명심하자.
후일에 이스라엘을 이 속박의 소굴에서 이끌어내게 될 모세는 압제자의 광포의 희생 제물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그 살인자들의 손에서 그의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해 거룩한 열심으로 더욱 힘을 얻도록 한 것일 뿐이다.
1. 그의 부모들은 그가 귀여운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 "훌륭한 아이임을 알았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아이었다(행 7:20). 그들은 이 아이가 보통 아이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 광채가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후 그는 그의 얼굴에 과연 빛이 있었다(34:29).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위대한 역사를 대행하도록 계획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사의 보증과
자신을 미리 나타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은 삼손을 강하게 하셨으며(삿
13:24, 25), 사무엘에게 가까이 하셨고(삼상 2:18), 다윗을 구원하셨으며(삼상 17:37),
디모데에게는 어려서부터 같이 하셨던 것이다(딤후 3:15).
2. 그러므로 부모들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더 큰 염려를 기울였다. 그들은 이것이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경륜과 어떤 위대한 일에 대한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고
활동적인 신앙을 하나님에 대한 은총의 가장 적은 징후로부터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두자. 즉 섭리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비스런 암시는 그것을 부지런히 찾고 찾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발각된다면 부모들의 생명까지도 위험했지만, 그들을 "석 달 동안" 모세를
자기들의 집 어떤 은밀한 방에 숨겨 두었다. 여기에서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다(마
12:13). 즉 그리스도께서도 수많은 아이들이 학살당했을 때에 기적적으로 보호되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는 모세의 부모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는 그들의 부모는 구원자가 그들의 자손 가운데서 출생할 것이라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들은 이스라엘의 보존에 대한 일반적인 약속을 믿었으며, 그 약속이
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행동하게 되었고,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움이
없이 거역해 가며 그들의 아기를 숨긴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은 자비를 획득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더욱 촉진하게 하는 것이다. 의무는 우리들의
몫이요, 그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사람을 사로잡는
두려움이 우리를 해방에 줄 것이다.
Ⅱ. 그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석 달이 다 될 무렵 숨겨진 어린애를 찾는 자들이 두루 돌아다니자
그들은 더 이상 그를 숨길 수가 없었으므로(아마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 같다) 그들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가에 놓아두고" (3절) 그의 누이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게
하여 그가 어떻게 되는가, 누구의 손에 넘겨지는가를 살피도록 하였다(4절).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 일을 하게 하셨다. 즉 모세가 바로의 딸의
들어가게 하고 나아가 이 절박한 위험에서 그를 구하심으로써 지금처럼 버려진 하나님의 교회를
구원하리라는 실례를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버림받은 자들을 특별히 보살피셨다(시 147:2). 이들은 그의 버림받은
자들이었다(사 16:4). 모세는 그의 친구들에게서 완전히 버림받게 된 듯이 보였다. 그의 어머니도
감히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 그를 붙드셨고 지켜주신 것이다(시 27:10).
2. 지극히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섭리를 감히 의지하는 모험을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들이
그들의 아이를 감추어야 했던 그때에 그를 내버렸다면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능력으로 보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는 섭리에 따르는
일이었다고 할 수 없다. "모험이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 내가 망하리라 하면 망하고 말 것이다.
모세의 구출(출애굽기 2:5-10)
Ⅰ. 멸망의 위험에서 모세는 구원을 받았다. 이 위대한 인물이 어렸을 적에 처해 있었던 곳을 와 보라.
그는 갈대 상자에 담겨 강가에 버려졌으니, 만일 그가 그 곳에 놓인 채로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곧 굶주려 죽었을 것이다. 그가 만일 물 속에 가라앉지 않았다면 악어에게 삼켜지고 말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어떤 다른 이의 손에 넘겨졌더라도 그들은 그를 곧 바로 강 속에 처박아 버렸을
것이리라. 그러나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의 공주를 이 불쌍하게 버려진
아기가 있는 곳에 인도하여 그를 불쌍히 여기게 하셨다. 이것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아기의 울음 소리가" 공주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5,6절).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하여져 절망에 처한 어린이에게조차 연민의 정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우한 처지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일이 보살피시니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큰가!(겔 16:5, 6)
2. 비천한 자의 고통을 알아 주고 그들을 돌보고, 도와 준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할 일인
것이다.
3. 우리는 모세처럼 버림받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어린 시절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위험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 것이다(시 22:9, 10).
4. 하나님은 가끔 그 대적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할 동역자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잔혹하게 멸망시키려 했는가 하면, 그의 딸 공주는 히브리인의 아이를 다정하게
동정했다. 그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양육해 주게 된 것이다. 오!
주여, 당신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도소이다!
Ⅱ. 모세는 사랑하는 친어머니를 훌륭한 유모로 제공받았다(7-9절). 바로의 딸은 그가 히브리인을
유모로 두는 것이 편리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모세의 누이는 훌륭한 기지를 써서 모세의 어머니를
그의 유모로 소개하였다. 이것은 그 아기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어머니야말로 아기에게는 최상의 유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만족이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게 되었고, 이제 두려움 없이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너무 기쁨에 도취되고 행복에 겨워하였더라면 그녀가 그의 친
어머니임이 탄로났으리라고 짐작된다(왕상 3:27).
Ⅲ.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로 발탁되었다(10절). 그리하여 그의 부모는 공주를 위하여 그를 양육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아들이 됨으로써 받는 그 영광에 대해 퍽 기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미소들은 성난 얼굴보다도 우리에게는 더 강한 유혹이어서 거스르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로의 딸은 자기의 친 자식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녀 또한 그
아비의 외동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세가 그녀의 아들로 책정되었을 때에 그는 의젓이 왕관을
쓰고 궁정의 고위층들 앞에 서 있게 되었으며, 궁정에서 최상의 교육과 지도를 받았고, 수재들의
도움으로 애굽의 모든 학문에 능통하게 되었다고 한다(행 7:22). 다음을 기억해 두자.
1. 하나님의 섭리는 때때로 가난한 자를 그 진토에서 일으키시어 방백들 중에 세우신다(시 113:7, 8).
날 때에는 미련하고 가난해 보이던 수많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결과로 세상의
마지막에 가서는 상좌에 앉게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이(세상을) 통치하심을 알게 만든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위대하신 역사를 이루도록 계획하신 이들을 찾아내어, 미리 자격을 구비케
하시어서 준비시킨다. 모세는 그가 궁정에서 받은 교육으로 왕자와 여수룬의 왕이 되기에
적합하였다. 궁정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음으로써(당시의 애굽은 그러했다)역사가(성서 기록)가
되기에도 적합하게 되었다. 그가 애굽 왕국의 교육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왕궁에
파견된 전권 대사로서의 자격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Ⅳ. 그의 이름은 모세라고 지어졌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할례를 받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요아김이라고 이름 지었으나 바로의 딸이 그를 모세 곧 "물에서 건져진 자" (모세라는 애굽말의
뜻이다)라고 불렀다. 유대의 율법 수여자를 그리하여 애굽인이 명명했다는 사실은 이방세계에 대한
좋은 징후인 것이다. "나의 애굽에 복이 있으라" (사 19:25)고 말해질 그 날에 대한 희망을 주는
사건이다. 또한 그가 궁정에서 교육받았음은 이사야 49장 23절 말씀인 "열왕이 너의 양부가 될
것이며 왕비들이 네 유모가 되리라" 는 약속 이행의 보증이 된 것이었다.
모세의 살인 사건(출애굽기 2:11-15)
모세는 이제 자신의 사명를 감당키 위한 준비를 하면서 바로의 궁전에서 그 생애의 첫 40년을 보내었다.
바야흐로 이제는 그가 행동으로 옮길 시기가 온 것이다.
Ⅰ. 그는 대담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망을 지지, 옹호하고 나섰다. 본문 11절에 보면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 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아가 그 고역함을 보았다" 고 하였는데, 이 뜻은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다. 곧 다음과 같은 설명이다.
1. 모세는 애굽 왕궁의 영화와 쾌락을 감히 멸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그 곳을 떠났다. 그 유혹은 실로 강한 것이었다. 그는 소위 출세의 좋은 기회를 쥘 수
있었으며, 또한 왕궁에 있다는 이점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인에게 대해 봉사할 수도 있었다. 그는
바로의 딸에게 호의와 감사로 순종을 해야 했으나, 마침내 거센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영예로운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영예롭고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2. 모세는 속박당하고 수없는 불쌍한 동포에게 자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뜻이다. 그는 그들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고난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들의 멍에를 보고
동정을 그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같이할 것을 결연히 결심하였던 것이다.
Ⅱ. 모세는 앞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위해 해야 할 위대한 일에 대한 모범을 두 가지 작은 실례로
보였다. 이것은 그의 열조들이 "항상 성령을 거슬렸다" 는 것을(행 7:51) 보여 주었던 스데반의
말에서 자세히 나타나 있다(행 7:23 이하). 또한 모세가 처음으로 그들의 구원자로 나타났를
때에도,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할 사역자이었던 모세에게 고의적으로 반감을 품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행하는 일 가운데서 분명히 하나님의 지도와 충동을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으며, 게다가
그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모세는 그 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악을 행했던 애굽인들을 괴롭혔다. 그 한 예로써 모세는
히브리인을 때린 애굽인을 죽였는데, 아마도 그는 (혹자가 생각하는 대로) 모세의 친척이요 그와
같은 레위 지파에 속하는 히브리인 노예를 학대하였던 애굽의 감독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고 억압받던 그의 형제를 구하였던 것은 일상적인 사례에서는 있을 수
없었지만 하늘의 뜻이 있었던 일이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어떤 무기로써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인 베드로처럼 그 입의 말씀으로 죽였다고 한다.
" 모세가 그를 모래에 감추었다" 함은 후일 바로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이 모세의 권능으로 인하여
홍해 바다의 모래 속에 장사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혼자서
이 정의 (正義)를 실행하려던 것은 긴요한 신중성과 조심성을 동반한 하나의 시험적 행동이었을
뿐이다. 아마 아직은 그의 신앙이 약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가 한 일에 대하여 그는 약간의
주저함을 가졌을 것이다. 깊은 신앙에로 성장하는 사람들도 지극히 적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처음에는 무서워 떨면서 말도 제대로 못했던 것이다.
2. 모세는 그 후 이스라엘인들을 다스리는 일을 하였다. 그 예로써 두 히브리인 사이의 다툼을
말리려 했고, 그 때문에 그는 고난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모세와 두 히브리인 사이의 불미스러운 다툼(13절).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히브리인들 모두가 애굽인들의 혹심한 억압과 지배를 받고 그런 때에 그들이
서로 싸웠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애굽인들의 매가 부족하여
그들이 서로 때려야만 했었다는 말인가? 다음을 명심하자.
[1] 다 함께 받는 공통적 고통마저도 우리가 흔히 기대할 수 있는 만큼 그렇게 하나님을 보았는
백성들을 서로 연합시키지는 못한다.
[2]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를 일으키실 때에는, 압제자 애굽인들을 견제하고
다투는 이스라엘인들을 화해시키는 일이 생김을 우리는 충분히 볼 것이다.
(2) 모세가 그들을 처리한 방법. 모세는 잘못을 저지른 자를 따로 세워놓고 "네가 어찌하여 너의
동료를 치느냐?" 고 유순하게 따져 물었다. 남을 헤치던 애굽인은 죽임을 당했으나, 해치던
히브리인은 단지 질책을 받았을 뿐이었다. 전자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악한데서 우러난
범죄였으며, 후자는 일시적 격분으로 그리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하신 하나님은 모든
현명한 통치자들처럼 하나님 자신의 본보기에 따라서, 또 동일한 범죄라도 범죄의 성질에
따라서 범죄자를 서로 구별하실 수 있다. 모세는 그들을 친구로 삼으려 했다. 그것은 선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이 다툴 때에 그들을 나무라셨던 것을 알
수 있다(눅 9:46 이하;22:24 이하). 이는 그 병든 자를 치유하는 여언자로, 화평케 하시는
자로, 또한 모든 원수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그의 동포들을 찾아간 모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있었던 "어찌하여 너의 동포를 해치느냐?" 고 하는 모세의 책망은 오늘날까지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동포를 해치는 것은 어떤 경우이든 나쁜 일이며, 특히 어떤 종류의 박해를
통해서는 어떤 다툼이나 싸움에서든 간에 말이나 손으로 동포를 서로 해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더욱 악한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가 해친 자들을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의 동포요, 형제요, 동료인 그리스도교인이며, 우리의 종 곧 고난받는 동포인 것이다.
어찌하여 해쳤는가?" 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전혀 정당한 이유와 원인이 없을 것이며, 말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3) 모세의 계획의 불행한 결과(14절). "누가 너를 우리의 법관으로 삼았느냐?" 고 했다. 그리하여
악행을 행한 사람이 모세에게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피해를 입은 쪽은 분명히 화해하려
했으나 가해자 쪽은 오히려 이렇게 성을 냈던 것이다. 책망을 참지 못하는 것은 죄책의
표징이며, 흔히 가해자에게 그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 보다는 피해자로 하여금 그 잘못을
참으라고 설복시키는 일이 차리리 더 쉬운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고전 6:7, 8). 모세가
말썽을 부린 그 히브리인에게 준 책망은 매우 사려깊고 온화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쓸데없는 저항을 하여 상처를 입었고(행 9:5) 자기를 책망하는 자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1] 그는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다. 즉 "누가 너로 우리인데 법관을 삼았느냐?" 고 했다. 사람이
우정어린 충고를 하는 데에도 어떤 큰 권위가 필요한 것을 아니다. 그것은 친절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우정의 충고를 지배 행위와, 건방지고도 주제넘은 일로 여겨서 권위가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이 좋은 충고나 적당한 훈계를 싫어할 때에, 그들은 그 충고나
훈계를 설교라고 부르려 한다. 그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지지하거나 죄악을 반대하는 어떤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양, 모세를 몹시 비난했다. 그러나 모세는 사실상 그들의 왕자와
심판자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히브리인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를 도와
협조할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였으며, 그를 "밀쳐
내버린" 것이다(행 7:25-27).
[2] 그는 모세가 애굽인을 죽였던 일로 그를 비난하며 또 "나도 죽이려느냐?" 고 대들였다.
최선의 말과 행위가 얼마나 악한 악의로 해석되고 있는가를 보라! 모세가 그를 꾸짖었다 하여
모세가 즉시 자기를 살해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죄악을 비난하는
공격을 그의 생명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였다. 모세는 애굽인을 살해했으므로 그런 혐의를
충분히 받을 수도 있었다. 마치 모세는 애굽인과 히브리인을 구별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만약 모세가 피해를 입은 히브리인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인을 살해 했다면, 히브리인은
마땅히 히브리인의 친구이다. 또한 비범한 권력과 열성을 가진 친구인 모세에게 복종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행한 일이요 약속된 전조이었던 모세의 행위에
욕설을 퍼부었다. 만약 히브리인들이 그 암시를 깨닫고 모세를 그들의 우두머리 곧 지도자로
맞이했다면, 아마 그들은 그 당시에 해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해방자를 저들이
멸시했으므로 저들의 해방은 마땅히 지연되고 저들의 속박은 40년이 더 연장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후에 가나안인들을 멸시하여 가나안인들이 40여년 동안이나 그 땅에서 쫓겨났던 것과
마찬가지다. "나(여호와)는 원하나 너희는 (해방을) 원치 않는도다." 신실한 책망과 충고자를
거역하고 멸시하려는 인간은 자기들이 행하는 바를 바로 알지 못하며, 무엇이 그들 자신의
유익에 적이 되는가를 바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다투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내어 보내시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후 40년 동안 모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평화의 날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눈에는 숨겨져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축복의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아마 커다란 실망으로 낙심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택하였고 그리스도께서 당한 치욕을 감수할 것이다. 이제 그가 첫 출발에서
이러한 고통을 당했고, 동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결심에 대한 매우 괴로운
시련이었다. 아마도 그는 "이것이 히브리인들의 생각이라면 나는 다시 궁정으로 돌아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겠다" 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첫째, 우리는 몇몇 특정 종교인들의 어리석음과 까다로움으로 하나님의 방법과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좋지 않은 편견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교회의 가장 훌륭한 친구들도 그들의 목회와 구원 사업에서 많은 반대와 실망에
부딪치며, 심지어는 그의 형제들에게서도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건축자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돌이 되셨으며, 지금도 그가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자들에게서 여전히 배척받고 있다.
(4) 그 결과로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간다. 결국 지금까지 모세를 향하여 한 모욕과 언사는
그에게 실로 친절을 베푼 말이 되고 말았다. 즉 모세는 자기가 애굽인을 죽였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진 것을 깨닫자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바로의 진노가 불현
듯 그를 처치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다툼까지도 그의 백성에게 유익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세가 애굽인을 죽였다는 정보(이것은 모세의 책망을 받은 그
히브리인의 소행이 아니었음은 다행이다)가 바로에게 전해졌다. 모세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안전을 위해 미디안으로 도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5절).
[1] 모세는 그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신중한 생각에서 이 일을 행하였다. 만약 그가 애굽을
버린 것이 사도들의 기록과 같이 믿음으로 된 일이라면(히 11:27),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위무를 다하려다가 어려움과 위험에 처하게 될 경우 신앙의 은혜는 우리 자신에게 합당한
보존책을 적절히 강구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7절에는 "그가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였고, 본문 14절에는 "그는 두려워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모세는 그를 약하게 하고 괴롭히는 망설임과 놀람에 대해서는 두려워 하지 않았으나,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앞에 열려 있는 섭리의 길을 따르기를 재촉하는 근면성에서 오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2] 하나님은 현명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것을 마련하셨다. 사물은 아직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성숙되지 않았다(때가 되지 않았다). 애굽의 죄악의 분량이 아직 차지 못했으며,
히브리인들도 충분히 욕을 당하지는 않았고 그 인구도 하나님이 정한 수에는 달하지 못했었다.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을 해방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은총의 때가 곧
정해진 때가 오기까지는 당분간은 물러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그 미디안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그들 중에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거기서 안전을 찾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편안히 정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후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 나라를 지나가도록 인도하였으니,
모세는 이미 지금 통과하여 거기에 익숙해질 기회를 찾은 것이다(아마 그래서 더 잘 인도했을
것이다). 그는 애굽을 떠나 그 곳에 이르러 한 우물 곁에 피곤과 깊은 생각에 빠져 막연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그를 인도하시는가를 알아보려고 기다리면서
앉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바로의 궁전에서 안락하게 지냈던 날들에 비하면 크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의 신앙을 이토록 연단시키시니,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마땅한 것이다.
모세의 결혼(출애굽기 2:16-22)
그의 조상 야곱이 수리아에서 정착지를 얻었듯이(29:2 이하) 모세는 미디안에서 정착지를 얻고 살았다.
이 두 사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위지하고 거기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아주 우연한 일로 보이는 사건일지라도 후일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혜로써 그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마련된 것이고 그의 백성에게 중대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우연적이고 사소한 일이 때로는 인간 생활에 가장 큰 행복의 전환점이 되는 수가 있다.
Ⅰ. 미디안의 제사장이거나 방백이었을 르우엘의 일곱 딸들에 관하여 살펴 보자.
1. 그들은 시골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겸손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양들을
위해 물을 긷고 있었다" (16절). 그들의 아버지가 방백이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비록 영예로운
가문의 자녀로 태어났고 그나라에서 특권과 대우를 받는 신분에 있었지만 그들은 직접 어떤
유용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그들이 해야할 일은 전력을 다하여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무위(無爲)는 결코 사람의 명예일 수 없다.
그들의 아버지가 제사장이었다면, 그것은 목사의 자녀들은 여로모로 겸손과 근면에 있어서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다.
2. 그들은 정숙한 여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아비가 불러오게 하기까지에는 이 낯선
애굽인(비록 잘 생기고 훌륭한 모습의 남지이긴 했지만)을 자기들과 함께 집으로 가자고 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숙은 여인이 갖추어야 할 장신구이다.
Ⅱ. 모세에 관하여 살펴보자. 그는 애굽인으로 간주되었다(19절). 낯선 자는 오해를 기꺼이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는 얼마나 기꺼이 르우엘의 딸들의 양들에게 물먹이는 일을 도와 주었던가! 학식이 많았고
궁중에서 성장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와 같은 경우에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인들에게서 목자들을 경멸하는 것은 배우지 않았다. 자유스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노예적인 천박한 일에 문외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필연성을 주어 그들이 자신을 위해 일을 하게 할 지 모르며, 또한 어떤
기회에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역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젊은 여인들은 그들이나 그들의
종들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에 처한 것 같이 보인다. 혹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웃 방백의
목자들이거나 아니면 자칭 목자라고 하는 어떤 게으른 건달들이 "그들의 양떼를 몰아 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우울했고 피곤했지만 "일어나 그들을 도와 주었으니", 곧 그 목자들을
쫓아 버렸을 뿐 아니라 그리고 나서 양떼에게 물도 먹여 주었다. 이것은 르우엘의 딸들이
자기에게 친절했으므로 동정심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도 그 때 그가 처한 상황
하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 그는 공의를 행하는 것과 그가 목격한 그와 같은 피해자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워했다.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들의 힘이 자라는 한도까지는 해야만 되는 일인 것이다.
(2) 그는 선을 행하기를 좋아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어떠한 것으로 내몰든지 우리는
거기에서 우익을 구하기를 희구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들의 원하는 바의 선을 행할 수
없을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그 선을 기꺼이 실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작은 일에 신실한 자가
큰 일을 위탁받게 되는 법이다.
2. 그의 봉사 행위는 얼마나 훌륭한 댓가를 지불 받았던가! 그 젊은 여자들이 그들의 부친에게 이
낯선 이가 자기들에게 베푼 친절을 알렸을 때, 그 부친은 모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정중히
대접하였다(20절).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진 친절에는 언제나 거기에 보상하실
것이다. 결코 저들이 상급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모세는 즉시 그 미디안 방백의 친절과 호의로
보상을 받았다. 그 방백은 그를 자기 집에 유하게 하고, 얼마 안 가서 자기 딸 중의 한 여자와
결혼하게 했다(27절).
모세는 그녀에게서 아들을 낳게 되어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으니, 그 뜻은 "타국에서 나그네" 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의 가정을 일으켜 주셨을지라도, 그는 자기가
나그네로 지내던 땅을 기억했을 것이다. 모세가 이제 이렇게 미디안에서 정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1) 하나님께서 모세를 잠시 동안 피신시킨 것은 그의 백성들의 고통의 날에 그들이 숨을 곳을
마련에서 주시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친히 그들의
지성소가 되시어 그들은 보호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2) 또한 하나님은 장차 하실 위대한 역사를 위해 그를 준비시키려고 계획하셨던 것이다. 장인의
양을 치던 미디안의 생활이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때 그에게는 자기 양은 한 마리도
없었다.)
[1] 즉 역경과 가난을 익힘으로써 모세는 부활 때와 마찬가지로 가난에도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존귀케 할 자를 먼저 낮추신다.
[2] 또한 그에게 명상과 신앙심을 길러 준 것이다. 애굽은 그를 학자로, 신사로, 정치가로, 또한
군인으로서 성장시켜 후일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유익하게 하였지만, 아직 애굽 왕궁이 할 수
없었던 한 가지가 그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자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미디안
목자 생활의 고독과 은둔을 통해 그는 더욱 성장하였을 것이다. 그는 전자(명상의 수련)를
통해서는 여수룬에서 통치할 준비가 되었고, 후자 (신앙심)로 인하여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룩된 셈이었다. 그 산 근처에서 그는 그 생애의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경건의 수련속에서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은 모세가
바로의 궁정에서 맛보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린다.
압제받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출애굽기 2:23-25)
1.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박이 계속된다(23절). 아마도 유아 살해는 계속되지 않은 것
같다. 유아 학살의 고통은 모세의 출생 직후에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시대는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 후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의 팽창에 대해 만족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부유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삼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치 않았다. 이리하여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모두 빠짐 없이 일시켰고 그들의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계획했다.
한 바로 왕(바로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칭호임)이 죽고 다른 바로가 왕위에 올라와 전 왕과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으며, 그의 선왕들처럼 역시 이스라엘인에게 가혹하였다. 때때로 조금 속박을
늦추기는 했지만, 즉시 전보다 더한 강포를 휘두르곤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번성했듯이, 또한 그들이 번성하면 할수록 더욱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어깨 위에 악한 자들의 채찍을 매우 오랫동안, 그리고 매우
고통스럽게 허락해 두시는 때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세가 미디안에서 사는 동안 어느 한 때에, 그가 만약 애굽 궁정에 계속 있었더라면 자기의
형편이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었다면, 또한 그가 그의 형제들과 운명을 같이
했었더라면 지금의 형편은 얼마나 비참해졌을까도 스스로 생각했어야만 했다. 미디안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큰 퇴보였으나, 그래도 애굽에서 벽돌 찍는 것보다는 더 나은 형편이다.
우리는 우리 동포들의 고통을 신중히 생각해 본다면 서로 화해될 수 있을 것이다.
2. 마침내 이스라엘 해방의 서막이 시작된다.
(1) "히브리인들이 부르짖음이 있었다" (23절). 드디어 그들은 그들의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우상에서 돌아서기 시작했다(겔 20:8). 지금까지
그들은 그들의 고통의 희생물이 된 나머지 그들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박할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한다" (욥 36:13).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속박을 풀기 전에, 먼저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게 하시는 것이다(민 20:16). 하나님이 우리를 그에게로 향하게 하고 해방을
간구는 데에 하신다는 것은 멀지 않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해방으로 임하시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확실한 표적임을 명심하자.
(2) "하나님께서 들르셨다" (24,25절)고 했다.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뜻을 표현하는 말의 접미사처럼 강조되어 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을 알고 계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압박받는 자의 신음소리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귀에 분명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니, 특히 그의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복수해 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신음하게 하는 그들의 멍에, 그리고
그들의 신음하듯이 갈급해 찾는 축복, 더욱이 그들 속에서 그들을 위하여 대신 중재의 신음을
하고 있는 성령의 탄식을 아신다.
[2]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기억하였다." 그의 계약을 잊고 있는 것 같이 보이나,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계약을 마음에 두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이 계약을
유념하시나니 그 계약 속에서 그들을 위해 친히 행동하신다(레 26:42 참조).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녀들을 살펴 보셨다." 모세는 그 동포를 돌아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겼다(11절).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굽어살피시사 도와 주시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당신 자신의 백성인 그들에게 은혜스러운 관심을
가지셨다.
여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자주 반복되는 것은 이제 우리는 어떤 위대한 일 곧 opus Deo
dignum-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상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인들 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강하심과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불타는 수풀(출애굽기 3:1-6)
모세의 생애는 크게 40년씩 셋으로 뚜렷이 대별될 수 있다. 그 첫 40년은 그가 바로 왕궁의 왕자로
지내던 시기요, 둘째 시기는 미디안에서 목자 생활을 하던 때이며 마지막 40년은 여수룬에서 지도자로
있던 시기다.
인간의 생애는 다 그렇지만, 특히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는 변화가 많은 것이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라는 사명을 받음으로써, 제 2차 40년 기간을 끝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위하여 그의 종들을 오래전에 부르시고 은총을 베풀어서 그들을 준비시킨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모세는 이스라엘의 해방자라는 사명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그가 80세가 되기까지는
이에 대해서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이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Ⅰ.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어떻게 그를 사용하셨는가? 모세는 호렙산 근처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1절). 양치는 일은 그의 신분이나 교육 정도로 봐서는 비천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만족하여 쉼을 얻으며 거기서 지극한 온유와 만족하는 것을 배웠다. 성서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이것은 그가 배운 어떤 다른 학식보다도 그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 다음 사실에 주의하자.
1. 우리는 우리가 부름받은 천직에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고, 거기서 이탈해서는 안 된다.
2. 위대한 일을 할 자격을 갖춘 자들이 때로 이름 없는 곳에서 유폐되어 지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는 말아야 한다. 이미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지만 이제 초라하고 비천한 한
목자로서 자기의 생을 마쳐야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위대한 일에 들어서기 전의
모세의 운명이었다. 자기를 생매장된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등불처럼 자기가
파붇혀 있는 그 곳에서 빛을 밝히는 데에 만족하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을 큰 촛대에 꽂아
세우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자.
모세는 이 환상을 보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큰 일에 들어 써진 것이다.
(1) 하나님은 부지런한 자에게 용기를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목자들이 자기 양떼를 치고 있던
그 때에, 아기 예수 탄생의 통고를 받았던 것이다(눅 2:8). 사탄은 우리가 게을러지기를
좋아하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2) 은둔은 우리가 하니님과 교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에도 성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Ⅱ.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광경은 어떠했는가? 그는 놀란 표정으로 덤불이 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 크게 놀랐다. 그 불이 땅에서 나왔는지 하늘에서 내려왔는지는 몰랐으나, 불이 붙었는데도
수풀이 타 없어지지 아니함을 더욱 이상히 여겼다(2절). 그 때 그에게 나타난 것은 여호와의
천사였다. 혹자는 그에게 보내진 그 피조된 천사는 모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그가 계약의 천사이며 여호와 자신의 대행인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는 특별한 현현이었다. 모세의 문에 보인 현상은 천사의 작용으로
된 것이지만, 그는 그 현상 속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들었다.
1. 그는 불꽃을 보았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신 까닭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시겠다는 약속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었고, 아브라함은 불타는 횃불을 보았다. 그것은
해방이 주는 기쁨의 빛을 사징하는 것이었다(창 15:17). 그러나 이제는 그 불이 불꽃으로 더욱
밝게 빛나고 있으니, 하나님은 그 해방 사건에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 공포와 파멸을 안겨 주고
그의 백성들에게는 빛과 의를 주시며,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려 하시기 때문이
(사 10:17 참조).
2. 이 불은 키가 크고 울창한 나무에서 나지 아니하고, 덤불 곧 "가시 덤불" 에서 났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자와 멸시받는 자들을 택해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모세도 이 때는 일개 목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자들을 훌륭하게
하고 면류관을 씌우시기를 기뻐하신다.
3. "덤불에 불이 붙었으나 소멸되지 않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지금 애굽의 압박 밑에, 곧
벽돌 가마 가운데서 불타고 있으나 불에 타 없어지지는 않음을 의미한다. 교회는 혼란에 빠지나
절망에 처하지 아니하고, 버림을 받으나 멸망하지는 않는다.
Ⅲ. 이 이상한 광경에 대해 모세는 호기심을 기울였다.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3절).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담대히 물음을 제기했다. 모세는 무엇이든간에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의 뜻을
알고자 했다. 우리에게도 무엇인가가 제시되면, 우리는 열심히 그 뜻을 탐구해 봐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Ⅳ. 모세는 그 광경에 접근하라는 초대를 받았으나, 무모하거나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1.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그를 부르셨고, 그는 즉시 응답했다(4절). 모세가 가시 덤불이 타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을 살펴 보려고 돌이켰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그가 해야 할 일을
맡기셨다. 만일 그가 그것을 일시적 거짓 현상-iginis fatuus-으로 여기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소홀히 했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를 떠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돌이켰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에게 나아와야
하며, 그가 그 자신과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즐거워하시는 예식에, 곧 그것이 비록 덤불
속에 있을지라도 거기에 가까이 가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비록 그것이 질그릇 속에 있다
할지라도 보물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하나님을 찾을 것이요,
그들에게 풍성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하나님께 나오라, 그가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가 들은 이 음성은 그가 보았던 광경보다 그를 더욱 놀라게 했다. 주의 말씀은
언제나 주의 영광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모든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욥 4:16 이하;33:14-16).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큰 효력을 가진다.
(1) 하나님의 영이 그 부르심을 구체화하시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이다. 말씀은 "오라, 모든
자여!" 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성령은 그 부름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오라, 아무개여!" 라고
하신다.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아느니라" (출 33:12).
(2) 모세가 여기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의 주여, 당신의 종에게 말씀하소서! 내가 여기 있어
주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나에게 명하신 것을 행하겠나이다" 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대답이 있을 때이다.
2. 하나님은 무모하거나 불경건한 태도로 다가오지 말라고 필요한 주의를 모세에게 주셨다.
(1) 모세는 하나님과의 거리를 지켜야 했다. 가까이 가되, 지나치게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말을
들을 만큼 가까이 갈 수는 있었으나, 하나님의 동정을 살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그의 양심은 만족될 수 있으나, 호기심은 만족될 수 없었다. 하나님과의 친밀성이 경멸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언제나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전 5:2).
어쩌면 이것은 구약의 율법에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약의 율법은 암흑과 속박과 공포의
울법이나, 다행히도 복음은 우리를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배우고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며 우리를 더 가까이 초대한다.
(2) 그는 그 부르심에 존경을 표하고 즉각적인 복종을 드려야 한다. 종과 같이 "너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고 했다. 신을 벗는 다는 것은 오늘날 존경과 복종을 나타내는 뜻으로 모자를
벗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가 지금 서 있는 그 땅은 거룩한 땅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계속되는 동안 언제나 존경과 복종의 태도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흙 묻은 신으로
그 땅을 밟지 말라고 한 것이다. "네 발을 삼갈지라" (전 5:1).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엄숙한 여유와 준비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예식만으로는 별로 유익이 못되지만,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지하고도 경건한 행동으로 마음 속의 존경심을 표현하면서, 경박하고
조급하게 보이는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예배의 엄숙성을 그릇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Ⅴ. 모세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의 엄숙한 선포가 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라" (6절).
1. 모세에게 존경심과 주의, 그리고 그의 신앙과 복종을 불러 일으키시고 말씀하고 계시는 그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나타내셨다. "나는 여호와니라" 는 이 사실으로 모든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기에 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들리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살전 2:13).
2. 하나님은 그의 조상 곧 그의 경건한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와 모든 이스라엘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그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
(1) 하나님은 모세에게 또 하나의 다른 세계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 주시고, 미래의 상태에 대한
그의 신앙을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것을 계획하셨다. 그래서 성서의 가장 훌륭한 해석자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 이 사건을,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으로 인용하셨다.
예수님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부활의 사실을) 보였다" (눅 20:37)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은 그것을 예수님으로서 보여 주셨고,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도 보여
주신다(마 22:31 이하). 아브라함은 죽었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영혼은 살아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영혼과 교제하고 계신다. 그의 영혼을 온전히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때가 되면 그의 몸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이 약속이 그 조상들에게 주어졌으니, 그것은 미래의
행복도 내포함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 약속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 될 만할 어떤
확실한 일도 이 세상에서는 하지 않으셨으나, 그 위대한 약속을 간직하고 계시며 그들을 위해
한 도성을 마련하셨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히 11:6; 행 26:6, 7; 24:15 참조).
(2) 그 조상들에게 하신 특별한 모든 약속의 성취를 모세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이것을
계획하셨다. 그는 이것을 신념 있게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계약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 이로써 나타났기 때문이다(2:24). 다음 사실을 명심하라.
[1] 하나님과 우리의 계약 관계는 우리가 최악의 곤경에 빠졌을 때 가장 좋은 도움이 되며,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믿는 우리 신앙에 큰 용기를 준다.
[2]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식하게 될 때에는 우리 조상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대하 22:6).
Ⅵ. 이것이 모세에게 위엄에 찬 감명을 주었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수치스럽고도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얼굴을 가리었다." 게다가 그의 눈을 부시게 하는 그 빛은
하나님의 빛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불타고 있는 덤불 속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 전에는 그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비록 당신을 "조상의 하나님" 이라고 칭하시고
그와 계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시지만, 역시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다.
1.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히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존경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를 경배해야 할
이유를 보다 분명히 알게 된다.
2. 하나님의 은혜와 계약의 사랑이 나타남은 우리의 겸손을 더하게 하사 하나님을 존경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인들을 동정하심(출애굽기 3:7-10)
모세는 말씀에 따라 그의 신을 벗고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그 명령을 이행하였다;5절). 그리고
얼굴을 가리니 이제 하나님께서 앞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해야 하리라는 특별한 임무를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인의 고역과 모세의 망명이 40년이나 더 계속되었으므로 모세와 그들을 해방하여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그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오래 찾게 한
후에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는가?" (눅 18:8).
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셨다(7,9절). "내가" 보았으되, "확실히 보았을" 뿐
아니라 엄밀히 살폈으며, 그 일을 숙고하여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목하신 일은 세가지다.
1. "그들의 우고" 이다(7절). 그들은 바로에게 저들의 억울할 일을 항거할 권리가 허락되어 있지
못했고, 그의 법정 어디에서나 감독관들의 부당할 행동에 대하여 보호를 호소할 수도 없었고
서로서로 불평할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물을 감찰하셨다. 은밀할
중에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들의 부르짖음이다. "내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왔고(7절) 그 부르짖음이 내게 이르렀다"
9절). 하나님은 고통받는 그의 백성의 부르짖음에 대해 귀머거리가 아님을 명심하자.
3. 박해자들의 학대이다.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9절). 하나님이 모르시는 피압박자의 슬픔이 없고,
하나님이 버려 두시는 압박자들의 포악성이 없다.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친히 살피실 것이다.
Ⅱ. 이스라엘 백성의 조속한 해방과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 있다. "내가 그들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구하라리" (8절).
1. 그것은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결의와 하나님이 그일을 마음이 두고 계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조속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실 때는 그 일을 하시기 위해 "내려 오신다" 고 기록되어 있
(사 64:1).
2. 이 해방은 영원한 말씀이 우리를 구하고자 육신이 되어 하늘보좌로부터 내려오신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상징한다. 모세가 세상에 보내진 사명은 그들의 해방이었다.
하나님은 또한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셨으니, 그들의 속박은
자유로, 빈곤은 풍요로, 노동은 휴식으로, 남의 일을 해 주는 소작인의 상태는 자기의 일을 하는
쉽고 영예로운 지주의 상태로 변경되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은총을 베풀어서 영적
애굽에서 구하시는 자들을 그는 하늘의 가나안까지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Ⅲ.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사명(10절)이 나타나 있다. 모세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조속히 구원받을
것을 확신시켜야 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자로 보내졌을 뿐 아니라 (물론 그것은 큰
은혜였겠지만) 바로와 협상하는 하나님의 대사로 애굽으로 보내졌다. 또한 그들의 해방을 요구하여
거절되면 선전포고라도 해야 되는 무장한 전령으로 바로에게 보내졌다. 또한 모세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졌으니 그들을 지휘하고 명령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시
78:71) "양의 우리에서 취하여 내어" 보다 훨씬 더 고귀한 목자의 직분을 맡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힘의 근본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 그 힘을 부여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막에서 한 목자를 부르시어 유대교의 창시자로 만드신 그 손길이 후일에는 어부들을 부르시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창시는 데에 하셨다. 그러므로 뛰어난 권능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모세에게 주어진 지시(1)(출애굽기 3:11-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 하실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언론의 자유를 주셨다. 모세는 그것을 잘
이용하였다.
Ⅰ. 모세는 자기가 부름받은 사명에 "내가 누구입니까?" 라고 자신의 부족을 내세워 이의를 제기했
(11절). 모세는 자기가 그런 명예의 일을 할 가치가 없으며 par negotio-그 일에 적합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용기가 부족하므로, 그가 죽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요구를 바로 왕
앞에 나가서 할 수 없노라고 생각했다. 자기에게는 기술이 부족하므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녀들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무기도 없으며, 훈련도 받지 않았고, 실의에 빠져
있어 자신조차 가눌 수 없는 상태이니 도저히 그들을 이끌어 나간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1. 모세는 사실상 그 누구보다도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으며, 학식과 지혜, 경험, 용기,
신앙이 모두 탁월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누구입니까?" 라고 말했던 것이다. 어떤 일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면 인물일수록 그는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을 명심하자(사 9:8
이하).
2. 이 일은 정말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모세의 용기를 꺾고 신앙을 흔들리게 하기에 족한 일이었다.
슬기롭고 신앙 있는 하나님의 일군일지라도, 교회를 구원하는 과정 속에 있는 어려움 때문에 매우
실망될 때가 있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3. 모세가 처음에 애굽인을 죽였을 때는 매우 용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자신을 잃고 있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을 한결같이 용감하고 열심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4. 그렇지만 모세가 결국에는 그 일을 해내고 만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겸손한 출발은 대단히 좋은 전조이다.
Ⅱ. 하나님은 이 이의에 대해 응수하신다(12절).
1. 하나님은 친히 모세와 같이 하겠노라고 그의 임재를 약속하셨다.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면 충분하다. 그 자신으로서는 연약한 지경에 처한 자들도 주 안에서는 강건하여지고, 그의
능력 안에서 힘을 얻을 때는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유의하자. 자신에게는 지극히
자신이 없어 주저하는 자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뚜렷한 신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보잘 것 없는 자에게 영예를 안겨 주며, 연악하고 우둔한 자에게는 지혜와 힘을
주며, 아무리 큰 어려움조차도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이의에 대하여
충분한 해답이 된다.
2. 하나님은 모세가 그 일을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자유의 문을 열어 주는 그러한 해방이 가장 가치있는
해방이다.
(2)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에게 그를 경배할 수 있는 기회와 마음을 주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마련하신 더 큰 은총에 대한 복되고 고무적인 증거이다.
Ⅲ. 모세는 자기의 사명 수행에 필요한 지시의 말씀을 간구하여, 그것을 받아 철저히 자기를
준비하였다. 하나님께서 지금 어떤 이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지 그 이름을 알기 원하였다(13절).
1.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고 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묻는 이유는 다음 중의 어느 한 가지리라.
(1) 모세를 당황하게 하기 위하여서이다. 그는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 줄 것을 종용시키는
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거기를 떠나도록 설득하는 일에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예상했다. 그들은 떠나기를 주저할 것이고 틀림없이 트집을 잡을 것이며,
모세로 하여금 그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아마도 그것은 한 시련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는 하나님의 뜻을 푸는 암호를 가지고
있는가?" 라고 조롱했을 것이다. 한 때 그는 "누가 너를 법관으로 삼았느냐?" 고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또다시 당황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의 이름으로 왔는지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2) 아니면, 그들이 알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고된 노동을 했고 교사들도
없었고, 안식일도 잊어버렸으므로 매우 무지하게 자라났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신탁의 첫 원리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고 하는 이
질문은 그들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그 사건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알려질 것인가?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 고 하는 물음이다.
2. 모세는 그들에게 대답해 줄 말을 지시해 주기를 원했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리이까? 무슨
이름으로 그들에게 나의 권위를 입증하오리까? 나는 뭔가 그들에게 말할 위대하고도 특별한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꼭 가야 한다면, 나에게 충분한 지시를 주셔서 나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다음을 주목하자.
(1)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말할 자는 사전에 완벽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극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알고자하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곧 그 은혜의 말씀에로, 그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지시를 받아야 한다(겔 2:7; 3:4, 10, 17).
(3)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교제를 갖게 될 때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려고
해야 하며, 또한 그것을 우리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Ⅳ. 하나님은 즉시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지시를 모세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두 가지 이름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1.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름이다(14절). 이
이름은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을 설명하는 것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그는 자존자(自存者)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존재케 하신다. 다른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았으신다.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하는 가장 선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나 된 것" 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니, 그는
모든 피조믈 곧 인간과 천사 이상이시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I am that I am)라고
말하신다. 그는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자족(自足)하시는 분이시며, 그러므로 또한 모든 것에
넉넉하신 분이시다. 또한 영원히 다함이 없는 존재와 축복의 원천이신 것이다.
(2) 그는 영원하시니,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함없는 분이시다. 그는 지금이나 미래에도
스스로 계신 자이시다(계 1:8 참조).
(3) 그는 우리 인간이 찾는다고 하여 그것 때문에 발견될 수는 없는 분임을 상징한다. 그 이름은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무모하고도 부질없는 모든 물음을 막아버리는 그런 이름이다. "나의
이름에 대해 캐어 묻지 말라. 이는 비밀임을 알라" (삿 13:18; 잠 30:4).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묻고 있는가? 그 분은 지금도 계시며, 과거에도 계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스스로 있는 자임을 아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실로 우리가 그에 관해서 들은 것은
얼마나 작고 부분적인 것인가!
(4) 그는 그의 모든 약속에 신실하시고 진실하시니, 그 본성이 그러하듯이 그의 말씀도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거짓말하는 인간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라. 곧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었느니라."
2. 또한 그 이름은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그의 백성에게 나타내시는 그런 이름이다. "스스로 수없는
자" 란 그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당혹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친숙하고도 알기 쉬운 다른 이름을 말씀해 주셨다. "너희 조상의 주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고 하라고 했다(15절).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 자신을 모세에게 알리셨고(6절),
그들에게도 그렇게 알리셨으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그들의 조상들의 신앙을 그들에게 부활시키기 위하여서이다. 신앙이 이미 심히 부패되어 거의
다 상실되었으니 두려운 일이었다. 신앙의 소생이 그들의 구원에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시
80:19).
(2)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조속한 이행을 그들이 기대하게 하기 위하여서이다.
아브라말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열거되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서 계약이
처음으로 이삭과 야곱에게 여러 번 명확히 재천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세 사람은 계악의
위임자로서 그들의 형제들과는 구별되며 그 계약의 증인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그 계약을 거부했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 그리고 영원히 당신의 이름으로 삼으시어 그의
백성들이 이 이름으로 그를 알고 다른 모든 거짓 신들로부터 하나님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왕상 18:36 참조).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계약 관계는 영원히 그가 우리들
마음에 두시게 하고 영광스럽게 생각는 하게 하며,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함을 잊지말자.
만일 하나님이 이것으로써 모든 세대를 기억하시는 기념으로 삼으신다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 계약 관계가 우리와 함께 계속되도록 한다. 그것은 값진 기억이기 때문이다.
모세에게 주어진 지시(2)(출애굽기 3:16-22)
모세는 여기서 그가 할 일에 대한 지시를 보다 구체적으로 받게 되고, 그의 일이 성공되리라는 것을
미리 충고받는다.
1. 그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협의하여, 그들이 곧 가나안으로 이주하게 되리라는 것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불러 일으켜야 했다(16,17절).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대사로서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 반복해야만 하였다. 목사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해야
하며 그들에게 유익한 것은 조금도 빠짐없이 전해야 함을 알자.
17절에 그것이 강조되어 있다.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가게 하리라. 즉
내가 그것을 말하였노라는 이것만으로 그들을 능히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그가 말씀했다면 그가
그것을 이루시지 않겠는가? 우리에게는 말과 행실이 다르나,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는 한
마음이시니 누가 그를 돌이킬 수 있겠는가? "내가 그것을 말하였으니, 온 세계가 이를 거역지
못할 것이라. 나의 뜻이 서리라."
이스라엘 장로들에 대한 모세의 일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
...." 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18절). 그래서 40년 전처럼 그들이 모세도 추방하지도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을 기울이시고 귀를 여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라고
미리 말씀하실 수 있었다.
2. 그는 미리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 바로에게 나아가 협상해야 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강력한 요구가 아니라, 겸손한 청원의 방법으로 시작해야 했다. 도대체 말을 들어 먹지 아니할
것이 확실한 사람에게 대해서까지도 유순하고 순종적인 태도로 먼저 대하여야 한다. "우리가
당신으로서 청하오니, 우리를 가게 해 주시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시내산까지만 가게 해 달라고 했으며, 가나안으로 아주 가 버리겠다고 말하여서는 아니되었다.
만약 후자를 택한다면 바로가 즉각적으로 거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방법이 매우
유순하고 타당성 있는 요구였으나, 그가 이를 거절하였으니 그것은 아주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이스라엘인들이 바로 왕국을 완전히 떠나도록 하는 길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만약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으로 가서 제사 드리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면,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 그의 허락도 없이 떠난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시는 그
부르심과 명령은 그들에게 매우 합당할 것이며, 또 그처럼 유순하고 설득력있게 전달되므로,
불순종하는 자의 입은 필경 영원히 말문이 막히고 말 것이다. 모세는 바로와의 협상에서 성공을
거두리라는 말을 여기서 들었다.
(1) 탄원과 설득 및 겸손한 원망으로 협상했으나 모세는 듣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기적으로
권능의 손이 그를 치지 아니하고는 결코 그가 듣지 않으리라 했다. "내가 아노니, 그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 (19절). 하나님께서 마음이 곧 완악한 자들을 미리 그리고 확실히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그의 사자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키게 하여 살게
되기를 원하심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재앙이 그를 강권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애굽을 치리니, 그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고 했다(20절).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순종치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의 능력으로
분명히 멸망당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그가 (모든 이의를)
물리치신다."
(3) 애굽의 백성들은 이스라엘인들이 떠날 때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많은 금, 은 그릇과 보석을
주어 그들을 부유하게 하리라고 했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21,22절). 다음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은 때로 자기 백성의 대적들로 그들과 평화스럽게 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게도 하신다.
[2]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 주신다. 즉
피압박자들에게 보상해 주시고 범죄한 자들로 하여금 강압적으로 보상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의의 심판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시다.
기각된 모세의 이의(1)(출애굽기 4:1-9)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하여 모세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그에게는
매우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사명을 수락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마침내는 몹시
망설이면서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겸양의 태도와 자족적인 태도의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그의 일군에게는 겸손으로 옷입히신다는 것을 주목하라. 봉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격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음이라.
Ⅰ. 모세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마 자기 백성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 때문임이
분명하다. 즉 그들은 그가 어떤 기적을 보이지 않는 한, 그의 말만은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그가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지시는 받지 않았던 터이다. 그러나 이런 이의는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3:18)라고 하신 말씀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들을 것이다" 라고 말하셨는데도 모세의 말이
이뤄지겠는가! 모세가 의미하고 있는 말은 "아마 그들이 처음에는 듣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들 중
얼마는 듣지 않을 것이다" 라는 뜻이 분명하다. 만약 그들 가운데 모세의 사명에 이의룰 제기하고
논박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어떻게 그들을 대하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여 모세가 그들에게
확신을 주어야 하는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현재의 낙담은 종종 이전의 실망에서 기인되는 수가 있다.
2.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도 때로는 그들이 응당 받을 평보다는 나쁜 평판을 받게 된다. 모세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1절)라고 말했지만, 다행히도 그의 예상은 틀렸다. 31절에 보면
그들이 모세의 말을 믿었다" 고 했다. 그러나 그 때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의에 답하여 보여
주셨던 그 기적들이 그들의 눈앞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때이다.
Ⅱ. 하나님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모세에게 주셨는데, 특별히 세 가지를 지시했고 그 중 두
가지는 모세를 확신시키기 위해 그 즉석에서 시험해 보이셨다. 진정한 기적은 하나님의 사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확신시켜 줄 수 있는 외적인 증가가 된다는 것을 주시하라. 그러므로 우리
구주께서는 종종 당신이 하신 일을 보고 믿으라고 호소하셨다(요 5:36 에서 말한 것과 같이). 또
니고데모도 예수께서 행한 일을 보고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요 3:2).
모세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법관으로 또한 율법 수여자로서 그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명이 있었고,
그의 사명에 이 표증을 더 함으로써 그의 사명에 대한 신임장으로 삼았다.
1.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가 기적의 도구가 되었으니, 그것을 땅에 던지매 뱀이 되었고, 다시
잡으면 곧 지팡이가 되었다(2-4절).
(1) 메마른 막대기가 살아 있는 뱀으로 변하니, 그는 사막에서 흔히 뱀을 볼 수 있었지만 무서워
그 앞에서 도망할" 정도로 생생는 하게 살아 있는 뱀으로 변했다. 그 변화 자체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무릇 기적으로 이루어진 산물은 언제나 최상의 품질과 종류가
되나니, 포도주로 변한 그 물과 같다. 그리고 이 살아 있는 뱀이 다시 다른 막대기로 변했다면,
그것은 분명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었다.
(2) 어떤 주술이나 마법 요술과 같은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세가 그 지팡이를 던지고 다시
잡음으로써 이러한 변화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영예를 부여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와 같은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연의
일반적인 과정이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은혜의 나라의 새 계명을 세우기
위하여 일하는 모세의 권위의 증거이다. 진리의 하나님이 이와 같은 능력을 어떤 사기군에게
주신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3) 그 기적 자체 속에는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바로는 그위험을 주었고(1:10), 배로
티끌을 헤치고 다니게 하였으며, 그들의 파멸을 도모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지팡이를 뱀이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뱀이 다시 지팡이로 되었다. 또 바로는 권력의 지팡이를 가지고 모세를
미디안으로 도망하게 만든 압제의 뱀이 되게 했었다. 그러나 모세의 역사로 그 장면은 다시
뒤바뀌었다.
(4) 거기에는 모세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하시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하는 직접적인 의도가 있었다(5절). 기적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보이시는 표적이다(고전 14:22).
2. 그 다음에는 그의 손 자체가 기적을 행하는 손이 되었다. 그는 손을 일단 그의 품속에 놓으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였고, 다시 품속에 넣으니 깨끗하여졌다(6-7). 이것은 다음을 상징한다.
(1)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세는 애굽인들에게 무서운 질병을 주게 될 것이며, 더욱이 그의 기도가
있으면 그 질병이 물러가게 된다는 것이다.
(2) 반면에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문둥병자가 되었으니 곧 죄로 오염되었고,
압제로 인하여 그들의 힘이 거의 완전히 소진케 되었다(문둥병자는 "죽은 자" 와 같다. 민
12:12). 그러나 모세의 품속으로 들어옴으로써 그들은 깨끗게 되고 그들의 모든 고통은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3) 모세는 이 기적을 자신의 능력으로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의 영광을 위해서만 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문등병에 결린 모세의 손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된다. 앞에서의 있었던 뱀의 표적은 믿지 않을지라도, 후자의 기적은 믿으리라고
생각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의 진실하심을 여러 가지로 보이시기 원하여, 그 증거를
아낌 없이 보이신다. 기적의 다량성과 다양성은 그 증거를 확신시키는 것이다.
3. 모세는 애굽에 가서 강물의 일부를 피로 변하게 하라고 지시받았다(9절). 이것이 처음에는 하나의
표적으로 행하여졌다. 그러나 바로의 신뢰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 후 온 강물이 피로 변하였고
그 후 다시 큰 온역이 되었던 것이다. 모세는 다른 두 가지 기적으로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경우에
이 기적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불신앙은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언제나 자기 고집만을
확신한다는 것을 주시하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들을 것이라" 고
말씀하셨다(3:18).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확신을 위해서 이 표적들을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목적을 정하신 그가 수단도 정하시기 때문이었다.
기각된 모세의 이의(2)(출애굽기 4:10-17)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에 계속하여 뒷걸음질만 쳤고, 마침내 실수까지 한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더 이상 그의 겸손이나 조심성으로 돌릴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지나친 비겁과 나태와 그 일에 대한
불신앙이 있는 까닭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Ⅰ. 모세는 어떻게 그 사명에서 발뺌하려 했는가?
1. 그는 자신이 말에 능술치 못함을 호소하였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니이다" (10절).
그는 위대한 철학자요, 정치가요, 종교가였다. 그러나 웅변가는 아니었다. 명석한 두뇌와 위대한
사상, 그리고 분명한 판단력을 가진 자라도 말을 더듬거리며 잘못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모세는 권세가들 앞에서 그렇게 큰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자기로서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또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우리는 말 솜씨로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모세는 "말에 권능이" 있었으나(행 7:22)
능변가는 아니었다. 모세는 비록 어떤 사람들처럼 쉽고 우아하며 임기웅변적인 말은
못하였더라고 그의 말은 강하고 날카로왔으며, 목적에 부합했으며, 이슬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신 32:2).
사도 바울의 말 솜씨도 시원치 않았다(고후 10:10). 많은 지혜와 참된 가치가 눌변으로
가리워져 있다.
(2) 하나님은 때로 기교와 천성이 별로 뛰어나지 않은 자들을 그의 사자로 선택하시기를 즐기시니,
이는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영화롭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그들을
웅변가로 만드시기까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웅변가는 아니었다.
2. 이 간청이 기각되고 그의 모든 변명이 막히게 되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시키고 자기는
미디안에 남아 양을 치게 해 달라고 졸랐다(13절). "나 이외 다른 자를 보내소서! 당신은 나보다
더 적합한 자를 마땅히 찾으실 수 있나이다" 라고 한 것이다. 달가와 하지 하는 마음은 아무
말없이 있기 보다 오히려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게 되며, 난관이나 위험이 있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떠 맡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주시하라.
Ⅱ. 하나님은 모세의 모든 변명에 얼마나 친절하게 해답해 주셨던가!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지만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그가 수락할 때까지 계속하여 차근히 설명하였다. 자기 사양도
극에 달하면, 우리의 의무 수행에 방해나 장애가 되며 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를
악화시키게 되어 하나님이 매우 노여워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섬기는 일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당히 분개하시며, 그것을 악하게
여기신다. 그것은 우리가 일하기 전에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런 은인이시요, 뒤늦게서야
보상해 주시기를 원하는 그러한 보상자는 아니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당신이 아직
배척해 버리지 않은 자들에게도 의당히 본노하신다는 것을 알아 보자. 여기에서 모세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당신의 고집스런 자녀들과도 의논을 펴시며, 마침내는 은혜와 친절을 베풀어 그들을
설득시키신다는 것을 유의하자.
1. 모세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권능을 그에게 상기시켜 주신다(11절).
(1) 모세가 이의를 제기한 것에 관련돼 있는 하나님의 능력.
"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으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모세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이제 다시금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을 지으신 것을 상기했다.
창조주 하나님의 눈동자는 우리들이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중에 당하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도와 주시고자 하신다(시 124:8). 자연의 조물주 하나님은 말의 능력과
재능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은사와 모든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을 잘할 수
있는 재능이 나온다. 곧 "구재(口才)와 지혜" 를 주시고(눅 21:15) "학자의 혀" 를 주신다(사
50:4). "그는 입술 위에 은혜를" 베푸신다(시 4:2).
(2) 다른 재능들을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 외에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1] 우리의 지체의 기능이 완전함은 그의 솜씨다. 그가 눈을 만들어 "보게 하신다" (시 94:9).
그는 명철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신다(눅 24:45).
[2] 우리의 기능의 불완전함도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벙어리" 와 "귀머거리" 와
"장님" 이 되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 무슨 악이 있는가? 여호와가 그것을 행한 것이 아닌가? 분명히 그가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지혜와 외로움 가운데서 행하신다(요 9:3).
바로와 애굽인들은 이사야 6장 9,10절에서와 같이, 영적으로 귀가 먹고 눈이 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고 계셨고, 그들에게서 당신의 영광을
취하시는 그 방법을 알고 계셨다.
2. 이 위대한 역사를 착수함에 있어서 모세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3:12)는 자신의 임재를 반복하여 약속했을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내가
너의 입에 함께 있으리라" 고 약속하여, "네 말의 부족함이 네 말의 내용을 그릇치지 못하게
하리라" 고 약속하셨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점을 즉시 제거해 주시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대신에 말할 것을 가르쳐 주셔서 문제를 그대로 이용하게 하셨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더 그럴 듯하게 말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보다 더 능력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의 대변자로 일하는 자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내가 그들에게
할말을 주리라" 고 했다(마 10:19).
3. 하나님은 아론을 모세와 함께 일하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이 적시에 그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셨고, 더욱이 그들은 (아마) 서로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아론이 그를 보면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4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을 그의 대변자로 삼으라고 지시했다(16절).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사용되기를 망설이었으므로, 그를 완전히 탈락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조직을 고려하여 한 조력자를 명하여 주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으니라(전 4:9). 하나님은 그에게 두 증인을 세울 것이니(계 11:3),
그들의 입에서 모든 말씀이 나오게 하실 것이다.
(2)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의 지혜가 그를 명하시니, 그들의 타고난 우애가
서로간에 그들의 사명을 공동 수행함에 있어서 더욱 그 결합을 튼튼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형제끼리
였었다.
(3)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지만, 그는 이 일에 있어서는 기꺼이 모세의 밑에서 일하고자 했다.
이러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4) 아론은 말은 잘할 수 있었지만, 지혜에 있어서는 모세보다 훨씬 못했다. 하나님은인간의
자녀들에게 그의 은사를 다양하게 베풀어 주셨으니, 우리가 서로서로 남의 필요에 응하도록
주셨다. 그것은 우리 몸의 각 지체가 서로 유익되게 하기 위함이다(고전 12:21).
모세의 머리와 가슴과 더불어 아론의 혀는 이 사명을 위해 아주 적합하고 온전한 하나를
이루었을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하리라" 고 약속하셨다. 아무리 아론이 말을
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입에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그의 말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끊임없는 도움이 없었었다면, 제 아무리 훌륭한 천부의 은사를 받은
자라도 실패할 것이다.
4.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손에 잡으라고 명하셨다(17절).
이것은 그가 말로써보다는 행동으로 그의 과업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
모세가 이 지팡이로 행하는 표적은 말의 부족을 넉넉히 충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의 기적은
이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말씨보다도 그에게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지팡이를 들어라!"
이것은 그가 양을 치던 지팡이니, 하나님께서 그를 비천한 상태에서 불러내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이 지팡이는 권능의 막대기요, 그에게는 검과 홀은 모두 대신할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애굽으로 돌아간 모세(출애굽기 4:18-23)
Ⅰ.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허락을 받는다(18절). 모세의 장인은 그가
나그네였을 때도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가족과 그의 일을 버리지 아니하도록
크게 관심을 기울여 예모있고 정당하게 대해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허락받은 영광이나
그의 일군이 되는 영광이 우리의 친척에 대한 의무나 이 세상에서의 직업에 대한 위무에서 우리를
면제해 주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자.
모세는 영광스럽게도 하나님이 그 자신에게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사실에 대해서는 그의
장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은총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감사드려야 하는 것이지 사람 앞에 자랑할 것은 아니다.
Ⅱ.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용기와 지시를 다시금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덤불 속에 나타나셔서 그와
대화를 나누신 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종종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을 것이나, 그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웠을 것이다.
1. 하나님은 모세의 앞 길에 아무런 방해가 없으리라고 확신시키셨다. 그가 그의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적이 나타날지는 모르나, "그의 생명을 찾아 다니다니" 옛 대적들은
다 죽었다고" 알려주셨다(19절). 아마도 모세가 애굽으로 가기를 주저하는 밑바탕에는 이
대적들의 손에 잡힐 것을 두려워하는 은밀한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는 보잘 것 없고 자격도 없으며, 말도 못하는 자라는 따위의 핑계를 대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처한 모든 유혹들을 샅샅이 아시고 그들의 은밀한 두려움에 대비하여
그들을 무장시키시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시 142:3).
2.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 장로들 앞에서 뿐 아니라 바로의 앞에서도 기적을 행하라고 명하셨
(21절). 아마 바로의 왕궁에는 바로 왕의 딸의 아들로 있었을 때의 모세를 기억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그 영광의 자리를 차버리고 떠나 버린 것을
보고 모세를 심히 어리석다고 여러 번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지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주었던 것보다도 더 큰 능력의 옷을 입고 그 왕궁에 돌아왔으니, 그것은 그의 선택이 그에게
조금도 손해를 주지 않았음을 능히 입증했을 것이다. 이 기적의 지팡이야 말로 애굽 왕이 가지고
있는 홀보다도 모세의 손을 더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명예를 천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예를 보상으로 받으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 영예가 참된 영예이다.
3. 바로의 고집이 모세를 놀라게 하거나 낙담시키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는 데에
하겠다" 고 미리 말씀하셨다. 바로는 피압박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와 울부짖음에 대하여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먹었으며, 털끝 만큼의 동정도 베풀지 아니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정의의 심판으로써 그의 마음을 곧게 하사 기적과 재앙의 공포를 믿지 않게 하였다. 목회자들은
만나봐야 헛수고 밖에 할게 없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자.
우리는 가장 강력한 논법과 가장 공정한 추론으로도 조금도 마음의 변화가 없는 자들을 만난다
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심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모세가 바로에게 전할 말씀을 그의 입에 두셨다(22,23절). "할 말을 가르치리라" 고
모세에게 약속하셨었는데(12절), 하나님은 이제 여기에서 모세에게 그것을 가르치신다.
(1) 모세는 자기의 메시지를 위대하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해야만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
" 하고 말해야 했다. 후일 모든 선지자들이 매우 자주 쓰던 이 말은 이제 모세에게서
사람으로서는 제일 처음으로 서문으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바로가 듣든지 안 듣든지 참든지 못 참든지 모세는 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고
말해야만 했다.
(2)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일러
주어야 했다. "이스라엘이 종이냐? 그가 씨종이냐?" (렘 2:14). "아니다. 이스라엘은 나의
아들이요, 내 눈에 귀하고 소중한 첫 아들이니라. 내 아들을 사랑하고 학대하지 말지니라."
(3) 모세는 이스라엘인들의 석방을 요구해야 했다. "나의 아들로 하여금 가게 하라. 네가 억류해
놓을 권리가 없는 나의 종들일뿐이 아니라, 내가 매우 아끼는 자유와 명예를 걸머진 내
아들들을 가게 하라. 그들은 나의 아들이니, 나를 섬기는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가 아껴
주고 돌보아 주어야만 하느니라" (말 3:17).
(4) 모세는 바로가 자기의 청을 거절할 경우, 애굽인들의 첫 소생이 죽을 것이라는 위협을 가해야
했다. "내가 너의 아들 곧 처음 태어난 것을 죽이리라" 고 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상대할 때에는, 그들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주께서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 싸울 것이다.
Ⅲ. 모세는 이제 원정길에 들어선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알려주신(19절) 그 직후에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20절). 비록 우리를 부리시어 맡기신 하나님의 역사에 죄악은 많은 이의를 제기하게
하지만, 결국 은혜가 승리하여 하늘의 뜻에 순종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모세의 아들의 할례(출애굽기 4:24-31)
모세는 여기서 애굽으로 가고자 하는데 우리는 다음이 같은 사실을 보게 된다.
Ⅰ. 하나님이 왜 진노하시어 모세를 만났던가?(24-26절). 이 구절은 모세의 이야기 중에서 매우 난해한
부분이다.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고, 잘 납득시키려고 애를 써 왔던 구절이다. 이제 그 뜻을
밝혀 보도록 하자.
1. 아들의 할례를 소홀히 한 것이 모세의 죄였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미디안 여자로 인하여
불공평한 멍에를 지고 있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여자는 그녀의 아들을 너무 사랑했고,
모세 또한 그녀를 너무 사랑했었다. 다음 사실에 유의하자.
(1)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의 어떤 것을 더 사랑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임무를
태만히 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사장 엘리는 "하나님보다
그의 아들들을 더 귀하게 여겼다" 는 것이 잘못이었다(삼상 2:29; 마 10:37 참조).
(2) 아무리 착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신앙 공동체에서 너무 오래 떠나 있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의무에 대하여 냉담해지기 쉽다. 고독한 은둔 생활로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상실하는
것과는 별로 상대될 수 없다.
2.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불쾌히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검을 쥔 천사를 대표하여 그를
죽이려고 찾았던 것 같다. 이것은 실로 큰 변화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함께
대화하셨고 친구처럼 그를 신뢰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적으로 생각하시게 되었다. 다음
사실에 유의하자.
(1) 하나님의 계명을 생락하여 제하여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
특히 계약의 표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계약의 약속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으며, 그 계약의 조건에 대하여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매매 계약을 하고서 거기에 날인과 비준하기를 꺼리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이행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의심을 받아도 당연하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감찰하시며 그것을 대단히 노여워하신다. 그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태만히 한다면 그들의 양심이 그것을 깨우치도록 하자. 아마 그들은 어쩌면 불길한
섭리로 인하여 그것을 깨닫게 되리라. 혹자가 여기서의 모세에 관해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3. 모세가 의무 이행을 게을리하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그와 논쟁을 벌이시자, 모세는 즉시 의무를
이행한다. 모세의 아들은 할례를 받아야 했지만 모세는 할례를 베풀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절박한 지경에 처하여 십보라가 모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이 때 그녀가 한 말은 어떤
뜻인지 분명히 결정하기 어렵다. 즉 분격해서 한 말인지(그녀가 예식 자체를 싫어하거나 그
아들이 너무 어리고 여행 중에 있으므로 할례를 행할 수 없다는 뜻의 표현으로)-내 생각에는
이것이 옳은 것 같다-또는 합당한 말이었는지 할례의 계약(혹자는 그렇게 읽는다)은 어린이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식이라는 것을 격식 있게 표현한 것, 또는 그녀의 아들에게 할례를 줌으로
(혹자는 이렇게 읽는다) 그녀의 남편을 구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어 그녀에게 다시 돌려 주니
말하자면 그녀에게는 새로운 결혼이 되었으니,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녀의 감사 표현의 말
나는 그것을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교훈이 있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 가운데 있는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실 때에는, 우리는 신속히
그것을 고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며 특별히 우리가 소홀히 했던 의무를 다 해야만 하는 것이다.
(2) 우리에게서 죄가 제거되지 않고는 심판을 기필코 면할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채찍의 소리이니,
그 채찍은 우리를 그에게로 돌아가도록 부르시는 소리이다.
4. 그리하여 모세가 거기에서 용서받는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모세를 가게 하셨다." 혼란이
사라지고, 멸망의 천사는 물러 갔으며,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단지 십보라만이 그녀가 당했던
놀라움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모세를 "피 남편" 이라 불렀다. 이는 모세가 그녀로
하여금 그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였던 까닭이다. 이 일로 인하여 (아마도) 모세는 그 이상의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장인의 집으로 돌려 보낸 것 같다.
(1) 우리가 의무를 행하려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자비를 가지고 돌아오신다는
것을 유의하자. 원인이 없어지면 결과도 그치게 되리라.
(2) 다윗의 열심이 미갈로 말리암아 오해된 것과 같다. 만약 하나님과 그의 법에 대한 우리의
열심이 그들 자신들과 우리들과 그들의 의무를 이해해야 할 사람들에 의하여 오해되고 실망을
주는 경우에도 우리는 인내로써 그것을 참고 나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자.
그리고 그것이 수치스런 일이고 피흘려야 하는 일이라도 우리는 더욱 인내해야 한다.
(3)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특별한 일을 할 때는 가능한 한 우리에게 방해가 될 만한 모든
것에서 완전히 떠나야 한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고 너희는 나를
좇으라."
Ⅱ. 아론이 모세를 얼마나 기쁨으로 맞이했던가! (27, 28절).
1. 하나님은 아론을 미디안 쪽에 있는 광야로 보내시어 모세를 만나라고 지시하셨다. 친척들이나
친구들을 즐거이 만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함임을 기억하자.
2. 아론은 그의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복종하여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급히 나아가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시던 곳, 즉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났다.
3. 그들은 사랑으로 서로 얼싸안았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로 서로 만나게 되었음을 그들이
깨닫게 되자 그들의 대면은 그만큼 더욱 더 기쁨에 넘쳤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입을 맞추었다'"
고 했다. 그것은 형제애와 옛정을 기억하는 표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앞으로 함께 할 일에
대해서도 서로의 마음을 같이하리라는 다짐의 뜻에서인 것이다.
4. 모세는 그의 형에게 자기가 받은 사명과 거기에 따른 지시와 신임장에 대하여 고하였다(28절).
우리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존중하고 올바르게,
그리고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Ⅲ. 신앙의 복종으로 이스라엘 장로들은 어떻게 모세를 만났던가?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서 그들의
임무를 처음으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시하신 말씀을 전하고, 그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지시된 기적을 행하였을 때 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영접을 받게 되었다(29-31절).
1.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신임하였다. 하나님께서 예고하셨던바 대로 "그들이 믿었다" (3:18).
그것은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라고 한 말씀과 같았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이 행한 것과 같은 일들을 할 자가 아무도 없음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들은 그들의 머리를 숙여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그것은 모세와 아론을
세우셔서 해방자로 보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감사의 심정을 표현한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의 명령에 즐거이 따르고 그들의 인도에 복종하겠다는 저들의 각오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바로에게 간 모세와 아론(출애굽기 5:1-2)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그들의 메시지를 전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던 모세와 아론은 이제 바로와
담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생명을 건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40년 전에 애굽인을 죽인
범법자 모세로서는 만약 늙은 대신들 중의 누구 하나라도 그 사실을 알고 문제 삼는 자가 있다면, 그의
목은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전할 메시지 그 자체가 분명히 바로를 불쾌하게 하고
성나게 했으니, 그것은 그의 명예와 그의 이익이라는 두 가지 점에 있어서 다 같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신실한 사자들은 바로가 듣든지 안 듣든지 담대하게 그것을 전하였던 것이다.
Ⅰ. 그들은 신앙으로 담대하게 요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하셨다" (1절)고 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담론할 때에는 하나님을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이라고 칭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바로와 담론할 때는 그들의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 하였다. 하나님을 이렇게 칭하는 것이 성경 중에서는 이 곳이 처음이다. 창세기 33잘
20절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로 불리워졌으나, 거기서의 이스라엘은 한 개인 즉 야곱을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려질 때에, 그 때에 그들은 이미 한 백성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세는 아마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라는 지시를 받은 것 같다. 적어도 그것은
이스라엘은 나의 아들" 이라고 하신 출애굽기 4장 22절의 말씀에서 추론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위대한 이름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메시지를 보냈다. "나의 백성을 가게 하라."
1.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들을 계속 속박으로 억류시킬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비록 가난하고 천한 백성이라도 그들의 탄식을 들이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의 종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백성이다. 나는 그들이 항상 고통 당하게
버려 두지만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사 53:4, 5 참조).
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와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굽인들의
간섭없이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곳으로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대적의 손에서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되 기쁜 마음으로 섬기게 하신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 항연을 베풀게 하신다. 이로써 그들은 광야에서나 빈들에서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으나,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 두자.
Ⅱ. 바로의 답변은 불신앙 때문에 담대하였다.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2절)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명령이 바로에게 떨어졌을 때, 그는 도전의 깃발을 내걸고
모세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하여 허세를 부리고, 거만한 태도를 가지고 이스라엘이 떠란 것을
거절하였다. 그는 그 말을 염두에 두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중하게 생각지도 않았다.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얼마나 모욕적인 말을 했던가! "여호와가 누구냐? 나는 그를 알지도
못하고 그에게 관심도 없으니, 존경하지도 않을뿐더러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고 했다. 그 이름은
바로가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아마 그는 그것이 도깨비와 같은 존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금 천대받는 피압박민들이었고
민족들의 말단으로 보였다. 이러한 처지 때문에 바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야 보잘 것 없는 존재일
것이며, 아마 다른 나라의 신들보다 더 낫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마음이 강퍅한 박해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해서 보다도 하나님 자신에게 더 악의를 품는다는
사실을 주목하자(사 37:23 참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해 무지하고 그를 멸시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악의 바탕이 된다. 사람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매우 저급하고
천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음성에 순종치 않을뿐더러 그를 위해서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2. 그는 자신에게 대해서는 얼마나 거만에게 말했던가! "내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다니! 위대한 민족
애굽의 왕인 내가 비천한 노예 민족인 이스라엘의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인가? 안 된다. 그것은
나를 격하하는 일이다. 나는 그의 요구를 비웃으리라" 고했다. "불 순종의 아들들" 은 교만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기억에서 두자(욥 41:34; 엡 5:6). 교만한 자들은 자기들은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까지도 복종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렘 43:2).
이것이 논쟁의 핵심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지배하셔야 하지만 인간은 지배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뜻을 행하리라" 고 하시나, "그러나 나는 내 고집대로
하리이다" 라고 죄인들이 말한다.
3. 그는 얼마나 단호하게 그 요구를 거절하였던가! "내가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으리라" 고 했다.
모든 죄인들 중에서도 성도들을 박해하는 자들처럼 완악하고 좀처럼 죄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런
죄인들은 없다는 것을 알아 두자.
가중된 이스라엘의 고난(1)(출애굽기 5:3-9)
바로가 하나님을 전혀 존경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자, 모세와 아론은 바로가 이스라엘에 대해 어떤
동정을 베풀어 줄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리러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겸손하게 간청하는
2의 시도를 벌였으나 그것도 허사였다.
Ⅰ. 그들의 요구는 매우 겸손하였고 정중하였다(3절).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이 받는 가혹한 학대에
대해서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여행은 자신들이 세운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 그들에게 명하신 일이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은 복종의 태도로써
구했다. "우리가 당신께 간구하나이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억압하는 제왕들에게 항복을
요구하시지만, 가엾은 자들은 간청할 뿐이다. 힘 없는 자들은 간청의 방법을 택한다. 하나님은
압제하는 군왕들에게 항복을 요구하실지 모르나 우리들은 그들에게 간청하고 탄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매우 합리적인 일이었다. 광야를 다녀오는 겨우 3일 간의 짧은 휴가를 원했다.
더구나 거기에는 선하고 일반적인 목적이 있는 요구였다. 다른 백성들이 그들의 신을 숭배하듯
우리도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겠다" 는 것이었다.
끝으로, 그들은 대단히 좋은 이유를 내걸었다. 즉 "만약 우리가 우리 하나니께 희생을 드리지
않으면 그가 우리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니, 그렇게 되면 바로왕도 당신의 종들을 잃게 될까"
한다고 했다.
Ⅱ. 바로는 그들의 요구를 매우 난폭하고도 부당하게 거절하였다(4-9).
1. 그의 생각은 매우 부당하였다.
(1) 히브리 백성은 일하기를 싫어하여 제사드리러 가겠다고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바로를
위해 지은 도성들과 그들이 일하여 이루어 놓은 업적들은 그들이 게으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는 그들의 부담을 가중시킬 구실을 찾기 위해 근본적으로 그들을 잘못
평가하는 것이었다.
(2) 그는 모세와 아론이 공연한 말로 히브리인들을 게으르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였다(9절).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는 공연한 말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더욱이 그들을 가장 요긴한
최선의 일을 하도록 불렀던 모세와 아론은 그들을 게으르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사탄의 궤계는 종종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은 할 일 없는 자들에게나 적합한 일이요
게으른 자들만의 일거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배인 봉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불가결의 의무인 것이다.
2. 이리하여 그의 결심은 매우 야만적인 것이 되었다.
(1) 모세와 아론은 "그들의 역사" 를 하라고 했다(14절).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이스라엘인들에게서 구별해 세우셨으나 바로는 구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은 그 민족이 공통으로 당하는 종살이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해자들은 교회의 사역자들을 멸시하고 곤경에 몰아 넣는 것으로 특별한 쾌락을 삼는다.
(2) 그는 진흙에 섞을 짚과 벽돌을 구을 짚을 주지 않으면서도 벽돌의 평소 생산량을 산출하도록
엄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제 그 일을 감당하려면 몇 배의 고역을 더 해야 했다. 만약
그렇게 산다면 그들은 그 고역으로 인하여 쇠약해졌을 것이고 만일 그 일을 수행치 못한다면
무서운 처벌이 내려질 것이었다.
가중된 이스라엘인의 고난(2)(출애굽기 5:10-14)
바로의 명령은 즉시 시행되었다. 짚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그 생산량은 조금도 감해질 수 없었다.
1. 애굽의 현장 감독들은 매우 잔혹하였다. 바로는 불의한 법령을 포고하였고, 감독들은 그가 명령한
그 무거운 부담을 죽시 기록하였다(사 10:1). 이 감독들은 짚이 공급될 때와 같은 업무 성과를
매일 강요했다(13절). 잔인한 왕들에게는 언제나 그가 부려먹을 잔악한 도구들이 있다. 그리하여
그의 도구된 자들은 자기들의 잔학 행위가 가장합당한 것이라고 정당화시키려 한다. "우리를
무리하고 사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음을 알라(살후 3:2).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적대심은 이성(理性)과 명예와 인간성과 공의의 모든 법을 짓밟는 그런
것이다.
2.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곡식 그루터기를 모으기 위해 애굽의 전역에 흩어졌다(12절). 이 때문에
바로가 그들을 불의하고 포악하게 이용한다는 사실이 그 나라 전체에 알려졌으며, 아마 그 이웃
민족들은 이 불쌍한 백성들을 동정하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바로의 정권은 그의 신하들로부터
별로 신임을 못 얻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선의는 결코 박해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3. 애굽인이 뽑아놓은 이스라엘인 노동 간부들은 특히 더 심한 곤욕을 당했다(14절). 이스라엘인들의
가장들이었던 그들은 자기들의 명예 때문에 막대한 희생을 지불했다. 애굽인들은 직접적으로는
그들에게 일을 시켰고,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에는 그 간부들이 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1) 노예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이며, 또한 우리는 압제받지 아니하는 자유민이라는 이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깨닫자. 독재 권력의 수하에서 일하고
재산까지 그에게 바쳐진 자들에 있어서는 자유와 번영이란 진귀한 보석이다.
(2) 우리에게 어떤 큰 기대감을 가진 후에도 얼마나 종종 실망에 부딪치는가를 깨닫자.
이스라엘인들이 이제 한창 해방의 꿈에 부풀어 있을 때 더 큰 실망이 안겨진 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언제나 떨리는 마음으로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3) 하나님은 때로 매우 이상한 절차를 밟아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깨닫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막 나타나실 준비를 갖추고서도, 바로 그 때에 그의 백성들을 가장 어려운 길로
인도하신다. 큰 만조가 되기 전에 간조가 온다. 안개가 많이 낀 아침이 온 후 청명한 날이
된다(신 32:36).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그 때는 만사가 최악의 상태에 놓일 그때이다.
하나님의 섭리는(외적 사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더욱 좋다는 역리적 사실을 입증하신다.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고난(출애굽기 5:15-23)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을 학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자기 윗사람으로부터 학대를 받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노동자 간부들이 당하는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대개 남을 학대하기보다는 자신이
학대를 받으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도 그렇게 했다. 이 상황에 처했던 이스라엘인들에게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19절).
Ⅰ. 그들이 바로를 원망한 것은 얼마나 정당했던가! 그들은 "바로에게 와서 호소하였다" (15절).
피해자들은 임명된 이 최고의 권력자이외에 어디로 가서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있었겠는가?
바로는 비록 사악한 자였지만, 그들의 압제받는 신민들은 그에게 나아가 호소할 자유가 있었다.
탄원의 길을 막는 법률이 그 나라에는 없었다. 그들의 탄원은 매우 정중했고 강제적이었던 그들의
사정을 밝혀 주는 것이었다(16절).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나이다(만사가 매우 소란한 그 때에
틀림없이 매우 잔인하게 맞았을 것이다). 그 잘못은 당신 자신에게 있나이다. 즉 우리가 일하는 데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 그 감독들에게 있나이다" 라고 했다. 가장 비난받아야 마땅한 자들이 항상
남을 비난하는 일에 가장 맹렬한 법이라는 것을 알아두자. 그러나 그들이 이 불평을 함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그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다.
1. 바로는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17절). 그들이 일에 시달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바로는 그들이
게으르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일로 인하여 피로하여 있었으나 게으르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우리로 하여금 가서 제사를 드리게 해 달라" 는 단지 그 말 외에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었다.
가장 훌륭한 행동도 때로는 가장추한 이름으로 더럽혀지는 것이 일쑤임을 기억하자. 가장 훌륭한
일에 대한 경건한 근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 일에 무관심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심판관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판자 되심은 실로 다행한
일이다.
여호와께 제물 드리는 일에 힘쓰는 자는 그들을 나태한 종이 될 운명에서 하나님과 함께 탈출할
것이나, 사람과 더불어 탈출하는 것은 아니다.
2. 바로는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했다. "가라! 그리고 어서 일하라" (18절)고 했다. 악한
자에게서는 악한 것이 나온다는 것을 알자. 불의한 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불의 이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Ⅱ.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얼마나 부당한가! "주 여호와가 너희를 감찰하시고
심판하시기를 원하노라" (21절)고 했다. 이것은 정당하지 않았다. 모세와 아론은 참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증거를 충분히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랐던 대로 일이 즉석에서 진행되지 않자,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자기들을 노예로 만든
공모자라는 식으로 비난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기들에게서 축복을
앗아갔던 그 죄악을 부끄러워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그들의 가장 훌륭한
친구들에게 정면으로 반항하며, 그들을 해방시킬 일군들과 다투었다. 저들의 해방을 이룩하는 데에
약간의 보잘 것 없는 어려움이나 장애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자기 동포들을 위한 공적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자들은 시련을 겪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즉 교만한 원수들의 사악한 궤계 뿐만 아니라 외모만 보고 판단하며 자기의
바로 앞일만 생각하는 무사려한 친구들의 터무니 없는 불친절한 비난으로 당하는 시련이다.
그러면 모세는 이 시련 속에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이 기대한 사건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그의 마음은 슬퍼졌다. 그보다는 마음의 갈등이 생겼다. 게다가 그들의 비난은 뼈를 깎듯이
괴로움을 주었다.
1. 모세는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와 만나 이 사정을 고하였다. 모세는 자기가 말한 것과 행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지시대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때문에 자기가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히스기야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그에게 호소했다. 이것을 예레미야 20장 7-9절과 비교해 보라.
우리가 만일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곤란과 좌절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 모든 사정을 아뢰어 충심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물러나야
될 경우에는 하나님께로만 물러나자. 결코 다른 길로 가지 말자.
2. 그는 하나님께 간하였다(22,23절). 모세는 하나님의 현재의 섭리와 그가 받은 사명과 약속 사이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림이란
말인가? 그들에게 축복이 임하기를 희구해 왔던 내가 오히려 그들을 더 괴롭게 만들어야 하는가?
그들을 함정에서 구하고자 한 그 계획 때문에 그들은 더 함정 깊숙히 빠져 버리게 되었도다."
이제 그는 질문한다.
(1) "어찌하여 당신의 백성을 이처럼 학대받게 하셨나이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이제 막 자비의
길로 인도하시려 할 그때에도 그 백성은 자기들의 사태가 더 악화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방법을 쓰실 때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들이 도움을 구할 때 구원의 방편은 뒤로
숨겨지고, 그들의 안녕을 가져오리라고 믿었던 것은 올가미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끊는 것을 배우고 제2의 원인들에
대한 의존을 중단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불친절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 시련이
하나님의 자비를 만나게 되는 더 좋은 관문이 되기를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자.
(2)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보내셨나이까?"
[1] 이와 같이 그는 일의 실패에 대해 하나님께 탄원했다.
" 바로는 이 백성에게 악을 여전히 행하고 있으며, 백성의 구원의 징조는 조금도 보이지
않나이다" 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본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해가 되었음을 알게 될 때는 그들의 심정은 심히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자.
훌륭한 사역자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이 더
타락할뿐더러 고집이 세어지고 완악해져 그들을 불신앙 속에 봉인하고 마는 것을 깨닫게 될
때는 마음이 괴로워진다. 이 때문에 에스겔 선지자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영혼의
고통 속에서 행하게 된다(겔 3:14).
[2] 또는 그는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에 대하여 질문했다.
" 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하는 것은 "나의 사명을 수행하려면 어떤 다른 방법을 해야
합니까" 한 것이다. 우리의 수고에 대한 실망이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무엇을 위해 보내졌는가에 대해서 숙고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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