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4.수요예배.청년부 헌신예배.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8 views
Notes
Transcript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자료조사

모라비안 성도들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경외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생명을 걸고 온전히 순종한 것입니다. 원래 모라비안 교도(성도)들은 체코에서 종교개혁운동을 하다가 1415년에 화형당한 ‘종교개혁의 샛별’인 존 후스(John Huss, 1369-1415)의 후예들이었습니다. ‘모라비아’(Moravia)는 체코 동부에 위치해 있는 지방으로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모라비안’(Moravian)이라고 부릅니다. 존 후스가 화형당한 후 모라비안 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국경을 넘어 독일로 옵니다. 그들은 독일 경건주의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진젠돌프 백작((Zinzendorf, 1700~1760)의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폴란드, 체코 국경 부근의 독일 동부 끝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 헤른후트(Herrnhut)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헤른후트는 ‘주님이 보호하시는 곳’을 의미하는데 진젠돌프는 1727년경 200여명의 모라비아 이주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신앙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모라비안 공동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727년 8월 모라비안 교회 가운데 거룩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부흥집회를 하고 있을 때 성령님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들 위에 강하고 급한 바람처럼 임하셨습니다. 얼마나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는지 가시적(可視的)으로 성령을 체험할 정도로 집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그들의 삶을 주님을 위해 드리기로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말씀하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말씀처럼 성령이 실제로 자신들에게 임하셨고, 그래서 권능을 받았기에 자신들이 땅 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행1:8의 말씀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말씀은 그들 자신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모라비안 성도들은 선교를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라비안 교회에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선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믿게 되면 선교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수적인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라비안 교회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교회로, 모라비안 성도들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성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모라비안 교회가 거룩한 부흥을 경험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732년에 선교가 시작됩니다. 모라비안 교회의 영적 지도자 진젠돌프 백작이 덴마크 코펜하겐 왕실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했을 때 그곳에 온 노예들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노예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던 진젠돌프는 노예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들으면서 어떻게 한 인생이 태어나서 저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지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을 자신의 교회로 초청하여 서인도제도에서 고통당하는 노예들의 생활을 성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 당시 서인도제도에는 10만 명의 노예들이 해마다 아프리카에서 팔려 와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진젠돌프가 성도들에게 노예들을 위한 선교사로 삶을 바치기 원하는 사람들을 초청하자 26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노예들을 위한 선교로 드리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며 손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8월, 지원한 26명 가운데 우선적으로 한 사람은 목수이고 한사람은 옹기장이인 데이빗 니츠만과 레오날드 도버를 선교사로 서인도제도(현재 미국령美國嶺 버진아일랜드)에 최초로 파송했습니다. 선교지로 가기 위해 두 사람은 배를 타게 되고, 이제 떠나가면 다시 오지 못할 두 사람을 보내면서 성도들은 부둣가에 나와 그들을 배웅합니다. 뱃삯만 가지고 떠나는 두 사람을 태운 배가 출항하는 순간 두 선교사 중 한 사람이 배웅하는 성도들을 향해 소리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의 고통이 우리가 드리는 생명과 희생을 통해서 보상을 받아 주소서!” 두 선교사는 노예들이 있는 곳에 자유인의 입국이 허용될 수가 없었기에 그 당시 덴마크령인 세인트 토마스((Saint Thomas) 섬에 들어가기 위해 덴마크 여왕에게 자신들이 노예가 될 것을 요청했고, 그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크리스마스 두 주 전 1732년 12월 13일 그 섬에 도착했습니다.
두 선교사가 그곳에서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불어 일으키자 백인지주들이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두 사람은 낮에는 노예들과 함께 사탕수수 밭에서 고생하며 일을 하고 밤에는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노예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수수밭에 앉아 희망 없는 노예들을 위해 기도할 때 노예들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고 가슴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수고와 헌신과 기도로 말미암아 노예들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노예해방의 기틀까지 쌓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들어가지 않은 지역이 없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나라, 특히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꺼려했던 지역에 들어갔습니다. 모라비안 선교회는 1732년부터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1760년까지 28년간 보낸 선교사 수는 226명이 넘었습니다. 1930년까지는 모라비안 교회를 통해서 3천명이라는 엄청난 교인들이 전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12명의 교인이 모이면 1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입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최초의 선교사를 서인도 제도에 파송한 후 그 다음해인 1733년 얼음으로 뒤덮인 그린란드( Greenland)에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배우지 못했던 사람들이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얼음으로 뒤덮인 곳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때로는 굶어죽기도 하고, 때로는 핍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그들이 전했던 복음으로 인하여 때문에 에스키모 인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도 수많은 모라비안 교도들이 초창기에 들어갔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조지아(Georgia),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등입니다. 미국의 많은 지역에 모라비아 교도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했다습니. 미국 초창기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흔적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복음의 바람이 미국에 불기 시작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특별한 선교사들이 아니라 평범한 자비량 평신도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선교지로 들어가면서 가지고 갔던 것은 들어가는 배 삯이 전부였고, 돌아오는 배 삯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교지에 들어가면 그들 스스로 경제적인 부담을 안고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모라바인 교회가 시작되어 교인들이 6백 명 정도였을 때 이미 2백 명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라비안 교회가 파송 받은 모두를 후원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돈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의 현지인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삶속에서 선교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극심한 고통을 당했고 굶어죽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하마를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모라비안 선교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선교지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 죽었지만 했지만 선교지로 들어가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죽었습니다. 아프리카 기니(Guinea)에는 160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들어가다가 76명이 들어가기도 전에 풍토병으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신학교육을 못 받고 특별한 지위에 있지도 않았던 평신도였습니다. 이처럼 모라비안 교도들은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가슴속에는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었고, 세계를 복음으로 변화시켜야겠다는 거룩한 열망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 자신들을 불태우고, 세상을 불태웠던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대부분 사회적인 신분이 낮은 사람들로서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배운 것도 없었으며, 특별히 훈련받은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들이 믿고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진젠돌프 백작(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도 늘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그 복음만을 증거하라.” 종교개혁 후 2백 년 동안 복음을 전해왔지만 딱딱한 복음, 조직신학적인 복음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조직적인 신학을 아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배움도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을 뿐이지만 그 복음에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늘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 충만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들어가면 현지인들처럼 살았습니다. 현지인들처럼 먹고 입고 생각하고, 또 평생 선교지에 살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 없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성육신적인 선교적인 삶이 있었기에 현지인들의 마음이 열려지게 되고, 쉽게 선교사들과 동화되어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마음을 활짝 열게 된 것입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들어가면 반드시 현지인들의 언어를 부지런히 학습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특별한 배움이 없는 사람들이었음에도 성경을 현지어로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라비안 교도들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능력 있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철저히 성령님을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령님께 철저히 의존하게 되었던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데, 1727년 부흥회 중에 성령님이 그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부흥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위에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하셨습니다. 그때 일어났던 특별한 한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임하자 기도하기 시작했고 너무나 가슴이 뜨거워져서 기도의 불씨를 끄지 말자며 기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727년 8월 13일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후 13일 동안 24명의 남자 성도와 24명의 여자 성도가 하루 한 시간씩 기도하여 24시간 연속기도하기로 작정했고, 얼마 못되어 그 수는 점점 많아져 77명이 되었으며, 이것이 저 유명한 ‘24시간 중보기도’(The Hourly Intercession)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중보 기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각자의 담당 시간을 정해서 릴레이 기도를 하는 엄청난 기도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때 그들의 가슴이 타올랐고, 성령님은 더욱 그들에게 임하셨으며, 성령님이 임했을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열방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라비안 교도들은 전교회적으로 함께 열방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나를 향한 주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들은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내(堪耐)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말씀에 온전히, 기쁨으로 순종하는 그들을 축복하셨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놀라운 동역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특별히 훈련받은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그렇게 축복하시고 아름답게 사용하셨다면 그들보다 외적으로 훨씬 더 나은 오늘 우리들을 얼마나 축복하시면서 아름답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내게 주시는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온전히, 기쁨으로 순종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모라비안 교도들을 우리의 좋은 모델로 삼고 그들을 본받아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온전히, 기쁨으로 응답하며 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