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4. 주일3부예배. ID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
Notes
Transcript

요 21:15-22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2)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서론

인터넷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ID라는 말이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이제는 누구나 다 ID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아직도 우리 중에 ID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저마다가 수십개의 ID를 가지고 살아간다.
ID가 무슨 뜻인가? ID는 Identifier의 줄임말이다. 어떤 대상이 누구인지 구별할 수 있는 이름을 뜻한다. 단어 자체와 그 뜻을 보면 알 수 있듯 ID는 Identity에서 유래하였고, Identity는 곧 자기 정체성을 뜻한다. 이 말은 ID가 “당신은 누구입니까?”에 대한 대답이라는 말인데, 미국에서 신분증을 ID Card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오프라인 세계에서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할 때 우리는 신분증을 내민다. 온라인 세계에서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할 때 우리는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한다. 우리는 늘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대답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웃이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하며 물으며 살아간다. 여기서 자기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개념이 한가지 등장하게 되는데, 우리의 자기정체성은 주체적인 자아와 객체적인 자아가 통합되어 발달하고 확립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정체성은 내가 나 자신을 볼 때의 나와 다른 사람의 눈에 비쳐지는 나, 이 두 가지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에는 나에 대한 타인의 기대가 담겨 있고, 내가 나 자신을 볼 때의 내 모습에는 스스로의 삶의 목표가 담겨 있다. 이 두가지는 서로 영향을 끼치며 내가 나 자신을 이루어가도록 이끌어간다.
건강한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그의 삶 또한 건강할 수 있다. 자아정체성에 문제가 생기면 삶에 각종 문제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가볍게는 부정적인 성격과 우울적인 기질, 심하게는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잃은 채 살아가거나 다중인격,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 계속해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곱씹으며 자아정체성을 확립해가는 청년의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건강한 자아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 오늘 주시는 말씀 속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주제를 한 번 나누어보고자 한다.

본론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수많은 제자들을 만나셨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성경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행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보낸 40일간의 이야기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고 그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요약되어 기록되어 있다. 고전 15:4-7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그저 성경에 기록된 아주 조금의 이야기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 중 몇명의 이야기만 추려서 기록을 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이야기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전하려 하신 진리가 가득히 담겨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또 그 이야기를 통해 후대에 믿게 될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알았던 무엇인가를 전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와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눈 감동적인 대화는 우리가 읽은 장에 요한복음 21장에 등장한다.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른 둘 이렇게 제자 일곱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물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했다. 아직 그들이 물 위에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나타나셨다.
요한복음 21:4–9 NKRV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눅5장에는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던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번 경우와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두 경우 다 제자들이 배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두 경우 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물을 한 번 더 내리라고 명하시자 기적처럼 고기를 가득 잡아올렸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의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반응했던 반면에, 요한복음에서의 베드로는 최대한 빨리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려고 물로 뛰어내려서 예수님께서 계신 호숫가까지 헤엄쳐 나아갔다.
이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중립적인 반응을 보이기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온 우주의 주님이신 자기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생명을 주신 이유는 생명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전폭정인 충성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만나면 분노와 두려움 가운데 외치며 달아나든지, 아니면 기쁨과 사랑으로 그분께 달려가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기 전의 베드로는 두려움 가운데 외치며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은혜의 복음을 충분히 깨달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려워할 게 전혀 없음을 알았기에 기쁨과 사랑으로 예수님께 달려나아갔다. 은혜와 사랑 중에 놀라운 변화를 갖게 된 베드로였지만 아직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하신 후에 베드로를 데리고 호숫가를 걸으셨다.
요한복음 21:15–17 NKRV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지금 베드로에게 행하고 계시는 일을 이해하려면 베드로가 겪은 처참한 실패를 기억해야 한다. 이전에 베드로는 모두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결코 버리지 않고 감옥이나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요 13: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마 26:33-35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다른 제자들이 달아난 후에 그는 세 차례나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다. 한 번이었더라면 순간적인 실수나 연약함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세 번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할 때는 저주까지 퍼부었다. 함께 체포될까 두려워하던 베드로에게 상황을 무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그의 스승을 저주하는 것이었다. 누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는 장면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눅 22:60-61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이 일을 통해 진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예수님의 진짜 제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 끝없이 헌신하였던 스승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제 한 몸을 지키려고 스승을 버린 자를 생각해 보라. 베드로가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또 베드로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로 회복될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지금 베드로에게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신다. 용서와 회복 말이다.
우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이 벌인 일을 고통스럽지만 되짚어 보게 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불 앞으로 이끄셨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곳이 바로 불 주변이었다. 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횟수가 바로 세 번이었다. 이는 베드로에게 굴욕감을 주고 벌을 내리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깨닫기를 알기 원하셨던 것이다.
요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여기에 용서와 회복이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 있다.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되짚어 가시는 지점은 단지 베드로의 행동이 아니라 베드로의 마음에 있었던 근본적인 결핍이었다. 단순히 겉에 있는 생채기만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문제의 원인까지 다루고 계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미로슬라브 볼프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거짓된 자아정체성”. 그는 배제와 포용이라는 책에서 성경 속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해 자아정체성에 관한 진리를 이끌어낸다. 가인은 왜 동생을 죽였을까? 이 물음에 그는 가인의 자아정체성이 아벨을 기준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가인은 아벨과 비교해서만 대단하게 여겨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가인은 동생에 대한 우월 의식에서 자존감을 얻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아벨이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지자 가인은 끔찍한 고통 가운데 갈등해야만 했다. 그의 자존감이 자기가 아벨보다 낫다는 확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볼프는 이렇게 말한다. “가인은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완전히 뜯어고치든지 아니면 아벨을 제거하든지 해야 했다.”
가인이 살인을 저지른 원인은 억제하기 힘든 폭력적인 충동이 아니라 거짓된 자아정체성을 고수하려는 비뚤어진 자아가 내놓은 냉정한 원리였다. 아벨의 확연한 성품과 삶이 자신의 자아정체성에 위협이 되었으므로,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 엉뚱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가인처럼 베드로의 자아정체성도 동료 제자들을 기준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자신이 동료 제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으로부터 자존감을 얻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보다도 가장 열성이 있고 충성스럽다고 예수님께 어필하곤 했다. 자아정체성의 근거를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알량한 사랑에 둔 것이다.
이렇듯 자아정체성의 기초를 남보다 뛰어난 행위에 두면 두 가지 좋지 않은 결과가 따른다. 나약함 혹은 적대감이 그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할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경고하셨는데도 전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존감의 기초를 자신의 우월한 용기와 열정에 두었다 보니 자신의 비겁함과 냉정함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의 자아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타인의 인정이든 개인의 성취든 자아정체성의 근거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두지 않으면 모두가 다 나약함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실체를 부인하고 외면하며 살아가게 된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의 귀를 잘랐다. 자칭 예수님을 가장 훌륭하고 충성스럽게 따른다는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행동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고문하고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며 죽으시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구원하시려는 바로 그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가인처럼 자아정체성의 기초를 자신의 행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거짓된 자아정체성이 위태로워지면 결국 적대감을 낳게 되고 폭력을 불사하게 된다.
베드로는 자기정체성의 기초를 예수님께 다른 누구보다도 더 충성하는 자신의 행위에 두었다. 그런데 이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주님, 제 말이 다 거짓처럼 들리시겠지만, 염치없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전의 자아정체성을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가 무엇을 하지 않는지에 더 주목해보자. 베드로는 변명하지 않는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주님 그런 상황이라면 주님도 이해하셔야 하지 않나요? 주님께도 책임이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입증하려고 이전에 보인 자신의 훌륭한 행적들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제가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님을 섬겼던 것을 좀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베드로는 자기를 비하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죄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보려고 자신이 한없이 못났다며 자학하지 않았다. 다만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아뢸 뿐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이런 의미이다. “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잘 압니다. 저는 분명히 실패했습니다. 변명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과 사랑하는 관계로 남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것은 바울이 고후7자장10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서 나온 진정한 회개지 세상 근심이 아니다. 전자는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영구적인 변화를 낳지만, 후자는 격한 감정이 수반될 뿐 덧없이 지나간다. 세상 근심은 일종의 자기연민이다. 슬프고 속상한 이유도 죄가 자신의 삶에 불러온 괴로운 결과, 남들 앞에서 당하는 수치, 특히 자신의 자아상에 입은 손상 때문이다. 그의 자아정체성의 기초는 여전히 착하고 점잖은 사람이 되려는데 있다.
세상 근심을 통해서는 자신을 생각해서 죄의 결과를 슬퍼하지만, 참된 회개를 통해서는 죄가 나의 창조자와 구원자를 욕되게 하고 슬프시게 했기에 죄 자체를 슬퍼한다. 자기중심적으로 근심할 때는 결코 죄 자체를 미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죄에 따른 결과가 잦아들면 다시 죄가 우리 안에 이전처럼 사납게 날뛴다. 참된 회개는 사랑하는 그분을 아프시게 했다는 슬픔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그렇게 더 애틋해지니 죄가 미워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죄는 당신을 지배하던 힘을 점차 잃는다.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회개의 깊이는 흘린 눈물에 있지 않고 변화된 삶에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참으로 회개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랑으로 겸손히 회개할 때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을 먹이고 치라고 대답하신다. 베드로는 근신에 처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도자로 부름받은 것이다. 베드로는 실패와 연약함을 통해 리더로 세워졌다.
어떻게 실패와 연약함이 리더가 되는 길일 수 있을까? 베드로가 가졌던 이전의 자아정체성의 논리로는 불가능하다. 세상의 논리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리더란 유능하고 성공을 거듭하여 자신만만한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자신의 성취에 비례하여 올라간다. 일을 잘할수록 그만큼 자신이 더 훌륭하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전혀 다른 자아정체성을 세워가게 하신다. 바울처럼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의 근거는 성취가 아니라 값없는 은혜다. 베드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예수님을 저주했는데, 그분은 베드로를 구하시려고 베드로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를 친히 감당하셨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 “그동안은 너의 자아정체성이 워낙 네 자신의 용기와 지혜와 선함에 기초해 있어서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네가 벌어들인 품삯에 불과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너는 네 죄를 보았고 또 내게 돌아왔으니, 내 은혜와 용서에 푹 적셔진 너의 실패가 너를 지도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실상을 깨달은 사람보다 더 타인의 삶에 잘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은혜로 낮추어졌으면서도 동시에 나의 값없고 후한 사랑으로 인정받은 사람보다 더 사람들을 잘 이끌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자아정체성의 기초는 우리를 향한 무한하고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깨닫는데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을 나를 더욱 세워가는 통로와 도구로 사용하신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