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합당한 삶02_복음 중심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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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이라는 전문용어가 있습니다.
술의 힘을 빌어 속엣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술은 우리의 이성을 억제하고 감성을 끌어올립니다.
마음의 문 빗장을 해제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풀어 놓으니 민낯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두려움과 교만한 마음을 품기 쉽습니다.
두려움은 진실한 관계가 되지 못하게 하고 교만은 이기적인 관계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다른 사람 앞에서 진실하게 만들고 서로 섬길 수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성령 하나님의 힘으로 속엣 이야기, 곧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적이지 않고 복음 중심적이기에 서로 섬기는 사랑의 관계가 됩니다.
이것이 복음 중심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원리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복음 중심 공동체를 경험하시는 분들은 놀랍니다.
저 이야기는 술에 취해야만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맨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지?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해치게 되는 것 아냐?
어떤 분들은 꼭 교회라는 것을 다니고 거기에 속해야 하는가? 관계라는 것은 불편하다. 거추장스럽다. 예수님은 좋아도 교회는 위선적이기 때문에 함께 하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추웠던 감정을 드러내곤 합니다. 그래도 더불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동호회처럼 교회를 생각하곤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갈등없이 만족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져내어 담대하게 하고 교만함에서 낮추시어 겸손하게 함으로 선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복음은 “선한 삶을 창조하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복음이 중심이 되는 교회 공동체를 알아 보려고 합니다.
복음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고 알 것도 같은데 막상 말하려면 어렵습니다.
먼저 복음을 이야기 형식을 빌어 들려 드리겠습니다.
본론
본론
창조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타자지향적 사랑의 관계를 맺고 계시며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는 넘쳐나는 사랑과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창조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말하는 신들의 필요나 다툼의 결과가 아닌 사랑이 넘쳐 흘러서 만들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부부-자녀).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관계성과 의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존엄과 가치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창조된 피조물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의존이라는 말은 인간 자신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관계성과 의존성은 공동체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는 개인의 창조가 아닌 공동체의 창조를 말합니다.
타락
인간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사랑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탄의 유혹을 선택하여 하나님 중심적이기 보다 자기 중심성이라는 죄가 생겨났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마음은 두려움이 생겨나고 교만에 사로잡혔습니다.
두려움과 교만함은 대안적인 신들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시간, 에너지, 충성, 돈 등을 나의 생명과 정체성과 의미와 행복을 만족 시키는 우상에게 가져다 줍니다.
이는 공동체를 통하여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 만족을 위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관계는 망가지고 맙니다.
이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 곧 의로운 분노를 발하십니다.
구속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의로운 분노로부터 구원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부분을 내어 놓으며 아들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성자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위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자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가 없으신 의로운 분이시기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받기에 충분한 예수님의 의를 주심으로 예수님과 연합되어 공동체의 참된 기쁨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무죄를 주장하십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놀라운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용서를 받아들이며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도록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지요.
회복
이제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할수록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의 책임과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자유롭게 죄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우리 자신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목적에 대해 살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세상의 공의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던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교만함은 겸손함과 담대함으로 바뀌며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고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다짐과 체념이 아닌 그리스도를 사랑하듯 그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며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은혜를 믿음으로써 자유로운 섬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공동체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와 은혜를 경험하고 교만과 두려움을 그복할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자기 편을 만들려하지 않고,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며, 서로를 통제하거나 정죄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배하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웃을 향해 진심 어린 우정으로 다가갈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1.형제를 향한 거짓없는 사랑
첫째,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할 것(9절)
롬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가면을 쓴 배우가 연기하듯이 사랑하는 것은 거짓 사랑이다.
사람들은 진짜인지 거짓인지 다 안다.
거짓 없는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다.
참 사랑은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참사랑은 진리를 깨달음을 통해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행동을 한다.
어떻게?
악을 강하게 증오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알 때만 가능하다.
악을 강하게 증오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서로 우애하고 존경할 것(10절)
롬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 가족이다.
교회 안에서 서로 마치 육신의 가족처럼 우애해야 한다.
더 나아가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한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서로 존경하려면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한다.
바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나의 나 된 것,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교만할 수 있겠는가?
셋째, 부지런하고 열심으로 주를 섬길 것(11절)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게으름은 중요한 죄성 가운데 하나이다.
열심을 품는다는 것은 ‘영으로 불붙는다’는 것이다.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열심이다.
성령 충만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를 섬기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을 주신다.
불이 활활 타오르기 위해서는 나무와 산소가 모두 필요하듯이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유지하고 주를 섬기기 위해서는 성경 읽기와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복음을 계속 들어야 한다.
넷째, 소망을 갖고 인내하며 기도할 것(12절)
롬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소망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다.
삶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다. 그러나 갈수록 더 좋은 날이 될 것이다.
이것은 막연하게 근거없이 긍정을 말하지 않는다.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한 약속에 근거한다.
미래에 반드시 주어질 영광, 영화에 대한 확신 때문에 현재 환난이 있다 해도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
또한 환난 중에는 인내할 수 있다.
소망 중 즐거워하고 환난 중 인내하는 것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
환난에 대하여 우리는 적극적인 자세로 인내해야 한다.
가.환난은 우리에게 필수이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환난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환난을 당하셨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모든 믿음의 선배들도 이 고난을 겪었다.
다.환난은 자신이 누구인지 더욱 잘 배운다.
얼마나 교만하고 악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또한 세상과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게 된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듯이 환난을 겪어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환난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이해한다.
라.세상에 대한 소망이 끊어진다.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갖지 않고 하늘의 영광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기도에 항상 힘쓰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증거이다.
다윗과 베드로가 시험에 넘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듣고 보았다.
하물며 우리이겠는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병이 들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면 필사적으로 기도한다.
그러나 영적인 필요에 대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낙심하기 쉬운 존재이다.
기도 응답에 대해 자신이 정해 놓는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기도하다가 낙심하고 만다. 기도는 현재의 환난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준다.
다섯째, 손 대접하기를 힘쓸 것(13절)
롬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먼저 믿음의 가족인 신자나(갈6:10), 육신의 가족에게(딤전5:4,8)해야 한다.
또 손님 접대는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한 방법이다.
바울 당시의 교회에 손님 접대는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오늘날처럼 숙박 시설이 풍부하지 않았던 당시의 여행에 있어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했다.
우리가 받은 것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물질적인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청지기직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는 것이다.
여섯째, 동고동락할 것(14절)
롬12:14-16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 잘 되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교만한 마음과 시기심과 경쟁심 같은 죄성 때문에 우리는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없다.
다음에는
2.원수를 향한 거짓없는 사랑을 다룹니다.
결론
결론
오늘 복음을 들으시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만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겸손과 담대함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시겠습니까?
홀로 신앙생활이 아닌 복음 중심 공동체를 이루며 사시겠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만이 오늘의 공동체적 삶의 명령을 자유롭고 기쁘게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인정과 안정과 권력을 위해 공동체를 이용하려고 하고 통제하려고만 든다면 우리는 상처받고 정죄하고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복음 중심 공동체는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기 위한 은혜의 도구입니다.
나 중심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선교적인 공동체를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