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시리즈 (5) 화평케 하는 자 - Peace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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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팔복 시리즈를 resume 하려고 합니다. 이제 두 가지 복이 더 남았습니다.
잠깐 2달전에 다루었던 내용들을 짧게 말씀드리고 오늘 내용을 나누겠습니다.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수훈, 산상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보석과 같은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5장 첫부분에서는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십니다.
복이 있다. 마카리오이,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
이 복들은 우리가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제가 5장 8절까지의 내용을 설교했는데요, 3절부터 8절가지 함께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5:3–8 KRV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심령이 겸손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팔복의 첫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이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심령이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이 겸손한 자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미친다는 것" 입니다.
두번째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신자는 무엇에 대하여 애통하나요?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애통합니다.
선을 행하고 싶은데, 자꾸만 죄를 짓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애통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같은 믿음의 동역자가 죄로 인해 넘어지고 죄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위해서 함께 애통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애통입니다.
이런 자들이 받는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가슴을 치고 한탄하고, 동역자들의 연약함을 내 연약함이라고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울면, 하나님께 위로해주십니다.
불신자들의 울음은 자신의 신세한탄으로 끝나지만, 우리 신자들의 울음이 복이 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는 억울할 일을 당해도,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남이 나를 괴롭혀도, 또한 남에게 책망을 받을 때도 부드럽게 참고 견디는 성품입니다.
온유한 자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부드럽고,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는 성품을 말합니다. 온유는 사자 같은 분노와 이리 같은 분노를 어린양처럼 양순하게 길들이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런 자가 받는 복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땅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죠,
성경에서 땅은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을 의미하고, 신약에서는 천국을 의미하는데,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네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요.
배가고프고, 목까지 마르면 이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죠. 참기 힘든 갈망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이런 갈망이 있는 자는, 배부를 것임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채울 수 없는 것으로 계속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를 자꾸 채워서 헛배를 채우게 하지만, 신자 된 우리를 진정 fill 하고 satisfy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 입니다.
그래서 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채우심이 있습니다.
다섯번째는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여기서 긍휼을 남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 동정하며,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한 긍휼을 죄를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섯번째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신앙생활은 마음이 핵심입니다. 이 마음에서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이냐
두 마음으로 갈라진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 (undivided heart) 를 의미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에 간사한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이 오직 하나님 나라, 하나님 중심으로 가득 메워져 있는 일편단심의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누리는 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교제를 하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 7번째 복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본문 말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9 KRV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영어로도 한번 읽어 볼까요?
마태복음 5:9 NRSV
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7번째 복은 화평케 하는 자 입니다.
주전 4세기에 텔레마쿠스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수도사였는데, 수도원에 있던 어느날, 하나님이 텔레마쿠스에게 로마로 가야 한다는 감동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텔레마쿠스는 그 감동에서 순종해서 로마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당시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를 받아드려서 기독교 국가가 되어 이었죠.
로마에 도착을 했는데, 로마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붐비나 했더니 원형극장에서 검투 게임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검투 게임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하는 잔인한 칼싸움입니다. 주말이 되면 로마 원형극장 안에서는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의 게임이 있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이 게임을 너무나 즐거워 하였고, 수 많은 군중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텔레마쿠스는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지 4세기가 지났는데 지금도 서로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게임을 한단 말인가?’ 그는 원형 극장안으로 달려 들어갔다고 합니다.
로마의 원형 극장은 8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인데, 관중들이 꽉 들어차서 이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죠.
검투사들은 “시저 만세! 우리는 시저를 위해 죽습니다! 라고 소리치며, 또 서로 싸우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사는 경기장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두 명의 검투사 사이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싸우지 마십시요"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때 모인 군중들은 “뭉개 버려, 뭉개 버려" 소리를 쳤습니다. 한 검투사가 칼 뒤로 수도사의 배를 쳤고, 수도사는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수도사는 경기장으로 빠져 나가지 않고 또 일어나서 소리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싸우지 마십시요" 군중들은 더 흥분하여 “뭉개 버려, 뭉개 버려!” 소리를 질렀고, 한 검투사가 수도사에게 다녀와서 그의 배를 깊숙히 찔렀습니다. 수도사는 쓰려졌습니다. 땅이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사는 간신히 다시 일어서서 마지막으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싸우지 마십시요.” 그리고 쓰러졌습니다.
그때 8만명이 모인 원형극장에서 쑥덕거리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황제 호노리우스도 그 경기장에서 게임을 관람하고 있었는데 는, 그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서,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했습니다. 뒤이어 다른 한사람이 일어나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고, 불과 몇 분만에 8만명이 모두 경기장을 떠났습니다. 싸우려던 검투사 두 명도 고개를 숙이고 퇴장했습니다.
BC 391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것이 로마의 마지막 검투 경기가 되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자기 혼자 당함으로 사람들을 칼로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검투 경기를 종식 시켰습니다.
이 수도사는 진정, 화평케 하는 자, peacemaker였습니다.
신자가 peacemaker가 되는 방법은 이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때도 이와 같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20 KRV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화평은 우리의 모든 삶 영역 가운데 역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영어로 보여주시면
골로새서 1:20 NRSV
20 and through him God was pleased to reconcile to himself all things, whether on earth or in heaven, by making peace through the blood of his cross.
땅에 있는 모든 것들,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십자가의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화평케 된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피로 원수로 지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화해케 하십니다.
에베소서 2:13–14 KRV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가 지금 누리는 화평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결코 값싼 평화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 여러분이 공동체에서 지체들과 누리는 화평이 예수님의 피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화평을 누리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샬롬을 주시기 위해서, 그 분 아들이 직접 peacemaker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왜냐햐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려면 죄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평화가 오기전에 해결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죄입니다. 그래서 그 죄 값은 그 만한 값을 주고 치뤄야 합니다.
진리가 이뤄져야 하고, 정의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를 통해 정의를 이루시고,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요한1서 2:2 KRV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그럼 우리가 예수님처럼 peacemaker로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9 KRV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에 대해서 초반에 설명 드렸던 것처럼, 이 복들은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우리안에 일어나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우리의 새로운 characteristic 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믿는 우리의 삶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연약해서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이 팔복의 천국 시민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평케하는 자는… 우리 경두 간사님처럼 친화력이 좋아서, 사람들 간에 잘 지낼 수 있도록 평화를 이루도록 중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공동체에서 그런 역할도 필요합니다. 이런 역할이 얼마나 또 중요합니까. 그런데 경두 간사님만 그런 직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평화를 맛본 신자들이 평화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남들도 그런 평화를 맛보게 하는 직책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풀타임 일을 할 때 이야기입니다.
제가 교회에 풀타임을 시작하기 전까지 얼바인에 있는 회사를 다녔는데, 그 회사는 크리스챤 회사였습니다.
제가 10번째 직원으로 들어갔는데, 회사가 참 화목하고 좋았습니다.
회사는 매년 성장을 했고, 매년 새로운 직원분이 들어왔고 번창을 해갔습니다.
CPA 회사여서 세금 시즌이 되면 정말 늘 바빴는데, 사람이 많아지고, 일이 많아지지 회사에 점점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바쁘니깐, 서로에게 불평이 쌓인 것이죠. 파가 나뉘어졌습니다. 저는 그런걸 잘 눈치채지 못하는 스탈이고, 또 사무실 가장 앞 쪽에 앉아 있어서 잘 몰랐는데.. 누군가 저에게 와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제가 영어이름이 쌤인데, 누가누가 쌤씨 일을 못한다고 험담을 했어요.
와 저는 너무나 충격이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제가 어디가서 일을 못한다고 들어본적이 없는데, 근데 사실 제가 숫자에 좀 약해요. 그리고 그 때 간사였는데 거의 준전도사급 사역을 하고 있어서 일하는 시간에 사실 교회일을 했던 적도 많아요. 그래서 일을 그만두면서 가장 찝찝한 마음이 들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내가 일을 좀 느리게 하고, 실수도 하는 건 알겠는데..
그걸 차라리 저에게 와서 이야기하지 않고, 누가누가 험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리고 그 분들은 제가 정말 같은팀으로 생각하고,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 부터 그분들을 오피스에서 마주치시가 너무 어색한거에요.
하루에 적어도 8시간 때로는 12시간도 같이 일해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원래 남자들끼리는 점심시간에 다트게임도 하고, 커피도 마시러 나가고, 같이 잘 어울렸는데,
그렇게 되지도 않고, 불편한 시간이 오래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마다 회사에 도착하면 늘 기도를 하고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내가 저들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어색하게 대하지 않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하고 들어가면 하루를 겨우 무사히 마치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밉고 화가 났지만 peacemaker 가 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더라고요.
저 뿐만 아니라 이 갈등의 관계들이 골이 깊어지면서 사무실 분위기는 점점 냉냉해졌습니다.
사장님과 그의 아내분과 또한 다른 파트너가 이끌어 가는 사업체인데, 이 분들은 그 어느 파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컴플레인을 들어주셨어요. 저는 그것이 그분들이 참 지혜롭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다른 분 모두 크리스챤이였기 때문에 그분들도 기도하고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점점 회사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그렇게 바쁜 시즌이 끝이 났습니다.
저는 이 회사의 운영팀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그분들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함께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였습니다. 감사하게 대부분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 모두 크리스챤이였지만, 사실 크리스챤이라고 해도, 사회생활할 때는 믿음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고, 목사님이 회사생활에 대해서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그 예배 이후에 냉랭했던 회사 분위기는 다시 화목해지고, 모두가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통해서… 와… 신자들의 해결 방법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지금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예화를 정리하며… 그 예배를 통해 다시 회사가 화평케 되기를 그 분들도 얼마나 기도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대학청년부 여러분, 우리는 화평케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직책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친화력이 없어도 괜찮아요. 분열된 자리에 화평에 임하도록 기도는 할 수 있잖아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파를 나누고, 싸우는 사람들이 되면 안됩니다.

둘째, 내가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 수업, 아 작년에 강사로 오셨던 자슈아 박 목사님이 제 신학교 교수님이신대요, 강의 내용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나눠주는 사람이라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눠주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나눠주고,
하나님께 받은 복음을 나눠주고,
하나님께 받은 예수님을 나눠주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화평을 받고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 말씀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습니다. 믿으시죠?
그런데 이 화평을 방해하는 사단의 공격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는 하나님과 화평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직장 동료, 또는 가족, 주위 사람 모두와 화평하셨습니까?
그런 분이 계시고 그런 분이 계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니님과 화평하신 분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화평하게 누리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 분들은 마음이 요동치고, 화평을 커녕, 우리 마음에 화만 가득할 수 도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게 우리를 계속 공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면 결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화평케하는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공격하면 되갚아주고 싶고,
누군가 나를 험담하면 가서 따지고 싸우고 싶고,
peacemaker는 커녕 troublemaker 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 받는 사람이 됩니다.
사단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요.
한 11년쯤에 일입니다. 제가 공동체 몇몇 지체에게 오해를 받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청년부에서 친하게 지내신 형과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전에 있었던 일인데,
결혼하기전에 자매님들 bridal shower를 해주잖아요.
그래서 그 누나를 위해 교회의 여러 자매님들이 멋진 곳을 빌려서 축하해주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런데 그 빌린 장소가 아주 멋진 바닷가 근처에 있는 호텔이였는데, 보통 호텔은 1박 2일은 빌려야 하니깐, 곧 결혼을 하는 누나가 신랑될 형에게 같이 축하해주러 온 자매들과 같이 하룻밤 자고 놀다 갈테니 음식이랑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가져다 달라고 했던거에요.
그런데 그 때 그 형님이 자매들만 있는 곳에 혼자만 가기 민망하니깐 저에게 같이 다녀올 수 없냐고 물어본 것이죠. 그래서 저도 알겠다고 하고 같이 갔습니다.
누나가 시킨 음식이랑, 형이 누나집에 들려서 가방이랑 챙겨서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이제 음식과 가방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몇 몇 자매들은 일찍 가야했는데,저희가 들어가면서 인사를 하고 떠났어요.
저랑 형도 거기에 오래 있지 않고, 전해줄 것을 전달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에 그 때 담당하신 목사님께 전화가 온거에요.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현준이 너 어제 저녁에 어디갔었어? 너 혹시 그 호텔에서 자고 왔어?”
이 질문을 들으면서, 제가 호텔을 들어갈 때 가지고 있던 누나 가방이 생각이 나고, 저희가 들어가면서 집으로 돌아갔던 자매 몇 명이 생각이 났어요… “아 그 자매들은 내가 가방을 가지고 와서, 호텔에서 자고 가려고 왔다고 생각을 했나보다 하면서 그 자매 얼굴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했죠. 저는 형이 혼자가기 민망하고 쑥스럽다고 해서, 같이 간거고, 음식이랑 가방 전달해주고 금방 돌아왔다고, 그리고 그 가방 제것이 아니라고..
목사님은 알았다라고 끊으셨고.. 그 때부터 제 마음에 막 분노가 가득차는 거에요. 화평? 그 딴거 없습니다.
또 그 자매들이 저랑 가까웠던 자매들이에요. 차라리 저를 잘 모르는 사람이 그랬으면 화가 덜 나죠. 내가 오해를 샀구나.. 내 행동을 조심했어야 하는구나. 그런 곳에는 가지도 말아야 했구나…
그런데 저랑 친한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오해해서, 목사님 사모님한테 말을 해서 내가 이런 말을 듣게 하다니...
친한 사람들이 그러면 더 아프고 더 힘이 듭니다.
정말 그 분노의 소용돌이가 가라 앉지가 않더라고요.
당장 전화해서 따지고 싶었습니다. 네가 뭘 아는데 그 따구 소리를 하냐고,
내가 거기서 자고 가는거 봤냐고,
저에게는 따질 모든 증거와 결백과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거기서 싸워서 모해요, 그 지체들과 앞으로 안 볼 것도 아닌데..
그래서 제가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그 다음날 하루 종일 금식하면서 주님 앞에 가서 화평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화평을 저에게 주세요.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요. 그 하루 종일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화평을 구했더니…
하나님이 저에게 화평을 주셨어요. 더 이상 저를 오해해서 이간질한 자매들이 밉지가 않았어요..용서가 되었어요
더 나아가 오히려 저를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어요.
그래 내가 잘못했어.. 오해살만한 짓을 했지, 그런 곳에는 가지도 말았어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에게 오해 살 짓은 자제해야겠다..
그리고 깨달았어요.. 남들과 화목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을 내가 누려야겠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과 지금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관계에만 집중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 먼저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관계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혜과 능력을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기고 나서도 아무런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내가 뭘 한거지? 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내가 저 영혼을 놓쳐 버렸네..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화평이 내게 임하는 순간, 시선이 바뀝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더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먼저 점검하게 됩니다. 관계가 깨어지지 않고 회복이 됩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생겼나요? 뒤...이렇게 생겼잖아요. 신자의 관계는 먼저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을 때 수평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자기 희생과 십자가 정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십자가 정신을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1. 내가 죽고 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칼라디아서 5장 2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4 KRV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형제간에 분쟁이 생길 때 차라리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7 KRV
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예전에, 김홍권 목사님과 대화를 나눌 때 목회자는 때로는 병신같이 보일 정도로 미련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머리 굴리고, 이익을 챙기려고 하고 그러면.. 교인들이 더 빨리 알아 차린다고.. 오해를 받고, 손해를 보고, 손가락질 받아도, 미련하게 병신처럼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저는 그게 기억에 참 남습니다.
아직도 제 안에는 억울함과 답답함과 분이 남아 있어서 표정관리도 안되고, 억울함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화평케 되는 길은 내가 죽고 지는 것이라고 성경을 말합니다.

2.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9 KRV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를 칭찬하는 말보다 험담하는 말이 더 쉽게 나옵니다. 상황에 감사하다는 말보다 불평하는 말이 더 쉽게 나옵니다. 너무나 그렇죠?
그렇게 하다보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는 커녕 troublemaker가 됩니다. 나쁜 영향을 줍니다.
말은 한번 내 뱉으면 주워담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예전보다는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말수가 적어졌다고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러고보니깐 제가 정말 예전보다 말을 좀 적게 하더라고요.
적게 하는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하나는 아직 제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친한 사람들과 있으면 쉽게 험담과 불평이 나와서 그렇습니다.
공동체에 오래 있다보니 제 주장과 제 방법을 자꾸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샷 더 마우스하려고 하려고 하는데..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늘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러면 화평케하는자가 되기 보다는 사단처럼 갈라놓는 사람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화평케하는 자가 되는 길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잠언 20:19 KRV
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찌니라
마지막으로 십자가 정신을 실천한다는 것은

3. 평화의 복음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평화가 없는 것은 평화의 원천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만 모시면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33 KRV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 아멘
고린도후서 13:11 KRV
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찌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빌립보서 4:9 KRV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강을 다른 사람도 누릴 수 있도록, 그 평화의 복음을 전함으로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태어날 때 부터 친화력이 있는 사람이 사람들 간에 평화를 이루도록 중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평화를 맛본 신자들이 평화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남들도 그런 평화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이 하나님과의 평화, 인간 관계에서의 평화, 이것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우리가 인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복이 아닐까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마지막으로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5:9 KRV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이런 peacemaker 가 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하엘이와 저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뭐 생긴 것도 비슷한데.. 다른 것도 많이 비슷합니다.
제가 집에서 방구를 뿡뿡 자주 뀌어서 아내가 아주 싫어합니다.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질색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요동치 않습니다. 아주 친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하엘이가 사람처럼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요새 밥도 잘 먹고, 이것저것 다 먹습니다. 그러더니 하엘이도 자주 집에서 방구를 뀝니다. 쉬도때도 없이 뀝니다. 그럼 저는 이야기 합니다. “내 딸이네?, 내 딸이 분명하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분이 peacemaker 입니다. 죄인된 우리들과 화평케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peacemaker 로 살 때, 하나님 아들이네, 하나님 딸이네 일컬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분이 화평케 하는 peacemaker 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 시민의 기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기준이 우리의 삶에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peacemaker로 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화목케 하는 직분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죽고 지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더디하고 듣기는 속히 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딸이라 일컬음 받는 여러분과 저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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