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1_주일예배_마1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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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 한마리
잃은 양 한마리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없음)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잃은 양 한 마리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18장 첫 부분 "어린 아이들이야말로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라는 말씀에서 시작하여 특별히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의 한 대목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 논쟁하는 상황에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태도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오고 있으며, 그 말씀을 전하는 누가복음 15장 전체가 아예 잃어버린 것들, 잃어버린 자들을 주제로 하고 있어 어떤 점에서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훨씬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은, 한편으로 누가복음의 말씀과 유사한 취지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 하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부여받은 생명, 아울러 이 땅의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은 그 정곡을 찔러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소자)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어느 누가 되었든지 보잘것없는 사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늘 곁에서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너희들 보기에 보잘것없는 이들이 우스워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의 빽이 얼마나 든든한지 아느냐?' 하는 식의 이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사실 굉장히 강도 높은 이야기입니다. 그저 단순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고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보살펴야 하는 데는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천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성경에 종종 나오기는 하지만, 이 말씀에서처럼 특별하게 나온 경우는 없습니다.
백성 전체를 위한 천사, 전 민족을 위한 천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도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이 예수님 당시에 천사에 관한 믿음었는데, 이 말씀에서는 천사가 개별적인 사람들을 위한 천사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수호 천사가 하나님 곁에서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만큼 이들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 만큼 이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그 다음 "잃은 양 한 마리 비유"에서 더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비유를 하시면서, 당신께서 가진 관심의 문제를 곧바로 우리의 문제로 돌려 우리의 태도를 환기시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말머리를 던지십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아흔아홉 마리는 그대로 있는데, 한 마리가 길을 일었을 때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당연히 그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곧잘 이 말씀을 곡해해서 이해하기도 합니다. 아흔 아홉 마리에 백 마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꼭 한 마리를 찾아 보태야 한다고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백 마리를 채워야 한다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길 잃은 한 마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또 다른 오해도 생깁니다.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가 더 소중하다', 다시 말해 비리비리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가 더 살지고 튼튼한데 그 놈이 잘못되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아흔아홉 마리를 제치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이해도 그럴 듯하지만,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 어떤 존재이든, 그 어떤 생명이든 하나 하나가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이 잘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극적으로,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의 통념 - 곧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시해 보이는 것은 무시해도 좋다는 - 을 빌어, 그 통념을 뒤집어엎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통념을 생각해보면 이 말씀의 의미는 금방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소위 '구조조정'이 이 사회의 병폐를 해결하는 만능 열쇠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체가 무엇입니까? 효율성을 위해, 경쟁력 강화를 위해 '불필요한' 인력을 과감히 감축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예 한 발자욱 더 나아가 소위 '불필요하고' '무능력한' 인력만이 아니라 단지 비용절감이라는 이유로 유능한 한창 일해야 할 인력까지도 과감히 감축해버리는 것이 오늘 구조조정의 실체입니다. 물론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효율성을 높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렇게 소위 구조조정에 성공한 기업은 살아 남을 수 있고, 건실한 기업들이 잘 성장하면 전반적인 경제사정도 좋아질 것입니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구조조정'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아주 무책임하게 사람들을 길거리에 내팽개치고 있는 꼴입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는 '구조조정'이라면, 먼저 기업 내의 의사소통 구조를 바꾸고 작업장의 민주화를 이룸으로써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기업도 살고 사람도 사는, 적극적인 의미의 구조조정입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그 길이 진짜로 '효율' 면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무책임하게 사람들을 길바닥에 내쫓았다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불안을 치유하는 데 드는 비용은 훨씬 더 비쌀 수 있습니다. 이른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생활보장 기금을 투여하는 것은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오늘 우리 사회에서 사람을 살리고 경제를 살리는 발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통념을 문제시합니다. '아니, 세상에 불필요한 인력이 어디 있으며 쓸모없는 인간이 어디 있느냐?, 사람은 누구나 잘났든 못났든 저마다 부여받은 목숨, 부여받은 생명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바로 이 사실입니다. '인간'에 앞서 '생명'에 앞서, '효율', 그것도 정확하게 말해 자본의 효율을 먼저 생각하는 모든 발상은 그 근본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세태를 두고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권'은 사라지고 '돈권' '금권'만이 남았다고 개탄합니다. 그러니 암만 '개혁'을 부르짖는다 한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동의를 얻을 수 없고, 갈 데까지 간 도덕적 해이가 바로 잡힐 리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 어린 자녀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여러분, 이 문제를 스스로의 문제로 생각해 보셨습니까? 물론 늘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들보고 바라보라는 지향점이 실제로 어디에 있습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되어라!' / '실력을 배양해서 남들보다 앞서 나가야 한다!', 이 말보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생명은 그 어떤 형편에 있든 다 소중한 것이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하는 말이 과연 먼저 앞서 나올 수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우리 스스로가 불안해서 '사람의 소중함' '생명의 소중함'을 '실력'보다 앞세우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사람만 좋아 봤자 별 볼 일 없다. 그렇게 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말 그대로 험한 세상에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효율도 추구해야 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실력도 강조해야 하지만, 그 보다 앞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사람 자체에 대한 경외감, 생명 자체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비록 더디고 갑갑해 보이더라도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지혜를 짜내야 하고, 또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그 지혜와 그에 대한 믿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생명이 잘못되면 이 우주의 축이 뒤흔들린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태도는 비단 인간의 생명에 국한된 것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미물조차도 창조의 질서, 생명의 질서 가운데서는 다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익충'이다 '해충'이다 하는 식으로 순전히 인간의 편의에 따라 구분하지만, 하찮은 미물들마저도 다 그 존재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존재 이유를 알 수 없을 뿐, 해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자연의 질서, 생명의 질서에서는 그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익충'이다 '해충'이다"를 가르는 생각은, '능력있는 사람'과 '무능한 사람'을 가르고,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가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가르는 것은, 단순히 차이를 인식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한편의 대상을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하는 데 이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일체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리도록 우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어떠한 생각에도 양보해서는 안 되며, 생명 자체, 인간의 삶 자체에 어떤 유보조건을 다는 그 어떤 생각도 다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본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의 삶은 실제로 타협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근본을 생각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유보하고 보류하며, 잘해봐야 겨우 최소한의 진실만을 붙잡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편의적으로 선택하고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해주기 시작하면 결국 우리는 근본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이들을 소중히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말하자면 능력에 따라 사람을 선택하고 배제하고, 효율에 따라 선택하고 배제하면 말 그대로 '보잘것없는 이들'은 도대체 삶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이 사회에 폐만 끼치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멀쩡한 사람까지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판에 그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어디에 발을 붙이게 되겠습니까?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그들을 소중히 하는 것은 단순히 있는 사람의 자선이거나, 그들에 대한 동정의 차원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의 질서를 지키는 근본입니다.
이 시간, 지극히 작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짐으로 우리의 생명 또한 소중한 것임을 깨닫고, 나아가 우리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우리가 사는 동안 감당해야 할 사명이 막중함을 깨달아,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로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