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미쳐라(단3:13-18)

다니엘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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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5월 17일 수요일
제목 : 제대로 미쳐라
본문 : 다니엘 3장 13-18절 *구1236
결단찬양 : 그리스도의 계절
[도입 : 청년, 가정을 말하다]
오늘부터 수요예배가 ‘가정을 말하다’라는 시리즈로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말씀의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물론 제가 가정사역에 특출나서 이 자리에 서 있거나, 너무 탁월한 지식이 있어서 이 자리에 있는다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너무나 부족하고 또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남편이자 아빠이지만, 그저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에 순종하여 함께 성장하고자 이 자리에 서게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제대로 미쳐라’ 라는 제목을 가지고, 또 다니엘서의 말씀을 가지고, 그리고 가정 내의 청년들에게 조금 더 포커스를 두고 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도입 : 포기를 선택한 미치지 못한 청년들]
먼저, 성도님들께 질문을 하나 드리며 문을 열어보려 합니다. ‘미치다’ 라는 이 표현이 주는 어감과 분위기를 어떻게 느끼고 계십니까?
조금 더, 이 질문에 생동감 있게 고민해보자면, 내 가족에게 또는 지인들에게 ‘당신 미쳤어?(소리를 지르며)’ 라고 대뜸 듣는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일단, 어안이 벙벙하겠죠. 그리고 이런 말투나 어조로 보아 우리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듣고 보니, 나만 당할 수 없습니다. 같이 소리 지르고 화를 내고 싸우게 됩니다.
사전적 의미도 썩 좋지 않습니다. 1.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 2. 낮잡는 뜻으로,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다 3.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매우 괴로워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확실한건 ‘미치다’ 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나 의미는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치다’ 라는 표현이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자주 보입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커피에 미치라’ 말하고, 운동을 좋아하면 ‘운동에 미치라’ 말하고, 여행을 좋아하면 ‘여행에 미치라’ 말합니다. 이 세상이 온통 ‘미치라, 미쳐라’ 말하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쳐야 하나? 미친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나?’ 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물론 ‘미치다’ 라는 표현이 긍정적으로 쓰이는 사례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 분야에 최선을 다해, 정말 그 분야에 미쳐, 뛰어난 성과를 이루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그렇게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케이스가 존재합니다.
그런, 소위 ‘미친 사람’을 보며 청년들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이, ‘그래! 나도 저 사람처럼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겠어!’ 라고 다짐하고 또 동경하고 선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한들 모두가 ‘미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동경하고 선망만 한다고 우리의 인생이 급격히 달라지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아는 이치 아니겠습니까?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로 많은 청년들이 아주 잠시 잠깐의 시도만 하지, 그 분야에 열정적으로 미쳐 수고와 노력 없이 ‘나는 멍청해.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야. 나는 이 세상에서 쓸모가 없어.’ 라 생각하며 자책과 실망으로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서울에서 청년 복지사업을 주관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만 붙잡아 주고, 방향성을 조금만 잡아주면 다들 잘 할 수 있는데, 건강한 멘토가 없어 삶을 포기하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다.’ 고 합니다.
연애와 결혼, 출산과 집 마련과 인간관계와 꿈과 희망을 포기한 ‘7포세대’, 에라 모르겠다 내 인생 즐길란다 ‘욜로족’, 요즘은 애 안 낳고 사는게 부성애라더라 ‘딩크족’ 등 어딘가 이상한 세상 속에서, 그 이상한 것이 진리라 여기며 잘못된 것에 미쳐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청년들.
어제 한 포털 사이트에 ‘자살’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보았는데, 단 하루만에 올라온 기사가 어찌되는지 아십니까? 더 있을 수 있지만, 기사화 된 사건만 3건(50대 남공무원/원주시/봉화)이 됩니다.
이 세상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고, 또는 잘못된 것에 미쳐 끝내 헛됨에 자책과 포기 위에 서 있는 자들이 오늘 날의 젊은이들이고, 또 우리의 청년들입니다.
늘 그런 사건을 접하고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청년들은 아닐 것이라 확신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염려와 불안 속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잘못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하다 말하고, 거짓을 진리로 속이며 부당을 정의라 말하는 시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향해, 그래도 주를 믿는다 고백하는 이들을 향해 우리는 어떤 메세지를 줄 수 있겠습니까?
[본문 : To. 청년아, 제대로 미쳐라! 1.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라]
먼저, 청년들에게 ‘하나님을 제대로 믿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며 하나에 미쳐야 한다면 그것은 명예도 아니고 부도 아니고 세상의 지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지혜고 부고 명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가운데 던져지기 직전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아십니까? 풀무불에 대한 온도가 어떤 금속을 제련하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적게는 납을 제련할 때 327도, 높게는 철을 제련할 때 1539도의 온도까지 치솟는다는 겁니다.
이 둘의 편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몸은 70도의 물체만 닿아도 1초만에 화상을 입게 된다고 하니, 1539도는 고사하고 327도 또한 상당히 괴로울 것이란 겁니다. 아니 괴롭다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는 생사도 아닌, 그저 죽음은 확정이고 얼마나 빨리 시체가 타서 전부 소멸되냐의 문제입니다.
그런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이 세 친구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만약 제가 그런 상황 앞에 있다면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무릎꿇고 손발이 다 닳도록 싹싹 빌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의 고백이 다음과 같습니다. 다니엘 3장 16-17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현실적으로 풀무불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 of 불가능일텐데, 또 이들은 분명 충분히 지혜로운 자들이라 풀무불이 무엇인지 모를만한 사람들도 아니었을텐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능히 건져내실거다.’ 라며 담대히 선포합니다.
세 친구에게 있어, 인생 최고의 목적과 목표는 바벨론의 우상도 아니었고, 이들의 요구 앞에 굴복하여 이방신을 따름으로 세상이 주는 부와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인생 최고의 가치와 목표는 여전히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 이었습니다.
[본문 : 오늘 날의 현실, 느부갓네살도 주를 고백했지만..]
그런데, 다니엘서를 읽다보면 참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벌리는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겁니다. 다니엘서 2장 4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분명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이 꿈을 해석해주는 것을 경험하며, 다니엘을 칭찬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모든 신들의 신이요, 모든 왕의 주재시라’ 고백합니다. 그런 고백을 했던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을 만들고 절을 하게 만들며, 이를 어긴 이들을 향해 풀무불에 던지겠다 협박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느부갓네살은 왜 그러는가?’ 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합니다.
우리는 이런 느부갓네살의 모습을 보며 악하다 말하지만, 사실 이런 느부갓네살의 모습이 오늘 날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주일 예배를 통해 은혜를 입고 말씀 위에 세워진 삶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하지만, 막상 현실로 돌이켜 보니 여전히 세상의 유익함을 쫓고 따르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고백했지만, 그 고백이, 또 그 믿음이 제대로된 고백이고 믿음이 아니었기에, 세상으로 돌이켜보니 여전히 자기 과시에 눈이 멀었고, 자신을 높여 사람들로부터 명예로움을 입는 것이 중요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도 이런 어려움 속에 빠져 힘들어할 때, 세상은 더 어려움 가운데로 내몰지 않겠습니까? 그런 곳에 지금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청년들이 놓여 있으니, 이들에게 우리가 해줘야 하는 메세지, ‘제발, 하나님 제대로 믿어라.’ 말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본문 : To. 청년아, 제대로 미쳐라! 2.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 우리는 청년들에게 신앙을 포기하지 말라 전해야 합니다. 오늘 날 분위기가 ‘포기’를 너무 쉽게 가르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도록 가르칩니다. 조금만 어려워져도 포기를 선택하게끔 합니다. 그렇게 포기는 선택에 있어 하나의 가능성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가 결혼 전 서울에서 응급실에서 일할 때, 자살로 들어온 ‘청소년들’을 보며, ‘청년들'을 보며 ‘자살 전에 자기를 한 번만 만났더라면, 복음을 한 번이라도 전했을텐데..’ 라는 아쉬움 속에 비전을 품어왔습니다. 물론 이들을 향한 비전이 제 비전이기도 합니다.
어느 한 예능 프로그램에 예일대 정신과 교수님이 나오셔 이런 말씀을 한 것이 기억에 납니다.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말하며, 자살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처럼 보이게 두어서는 안된다.’ 라 말한 것이 기억에 납니다.
오늘 날이 그렇습니다. 포기를 인생의 여유를 위한 선택인 것처럼, 자살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인 것처럼, 잘못을 개성이라는 허울 속에 가두어 우리를 속여오는 것이 오늘 날입니다.
결국 이런 선택이, ‘나를 위한 최고의 선택’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상 그들의 결말이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끝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현 상황에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이런 스토리들이 먼 이야기고, 허구고 소설이길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주변,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며, 또 우리 청년들의 이야기며, 이들이 놓여진 현실입니다.
어쩌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본문 속에 놓여진 상황이 오늘 날 같았습니다. 잘못된 진리를 주장하는 이방 교리에 순응하는 것이, 금 신상에 절하여 지금껏 내가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이, 풀무불 앞에 차라리 세상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최고의 선택지’ 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의 선택이 무엇입니까?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 그들의 법을 따르고, 하나님을 포기하고 금 신상에 절했더라면 살면서 삶은 유했을지도 모르지만, 헛된 것으로 삶을 채워가는 이들에게 행복보다는 허망함이 훨씬 크게 찾아왔을 것입니다.
세 친구는 그렇게 사는 것이 느부갓네살이 사는 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알았고, 그렇기에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반드시 선한 곳으로 이끄신다.’는 확신을 담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을 선한 곳으로 인도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지 않습니까?
[본문 : To. 가정, 이렇게 도우라 1.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라]
그런데 우리가 청년들을 향해 ‘얘들아,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렴,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의 삶을 선한 곳으로 인도하실거야. 포기하지 말자!’ 라고 말하고 방치하기엔 너무 무책임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가정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무엇을 제대로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청년들의 삶을 선한 곳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 청년부는 성년의 날 예식으로 부모님들과 함께 예배를 만들었습니다. 왜 ‘예식’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부모님’이 함께 만들어가는 예배여야 하는지를 나누었습니다.
성년의 날은 고려시대때부터 이어져 온 4대 절기 중 하나지만, 오늘 날 인식이 너무 잘못되었습니다. 오류를 진리의 명제처럼 인식하여 따른다는 겁니다. 또 성년의 날을 마치 ‘극적인 진화’의 날처럼 본다는 것입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어린이가 어른으로 탈바꿈 하는 날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성년의 날로 이들이 한순간에 어른이 됩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회적 책임을 홀로 질 수 있는 능력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함께 예배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이 자리에 계심을 언급했습니다. 왜요? 이들이 성년의 날을 기점으로 인생이 뒤바뀌는 것이 아닌, 그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여전히 있기에, 부모님들께서 기대해주시고, 소망해주시고 도와주셔야 하기 때문에 함께 예배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정은 청년이 어른이 되었기에, ‘너 스스로 책임지고, 알아서 해라.’ 고 방치하는 곳이 아닌, 이들이 하나님 말씀 위에 거룩히 세워져 점차 어른이 되어져 가길 소망하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선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임에 그 누구보다 확신으로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본문 : To. 가정, 이렇게 도우라 2.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 가정은 이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이 정말 제대로 하나님을 믿어 살아갈 수 있도록 믿어 의심치 말며, 또 이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자녀가 바뀌지 않는 모습에 조급해 합니다. 모르는게 약이라고, 차라리 하나님의 때에 관심도 없었더라면 마음이 편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의 조급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요즘 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며 반대로 공동체성이 사라져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왕래가 줄다보니 그 관계 속에서의 연결고리마저 희미해져 갑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교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고 어려워 소그룹을 회피합니다. 공동체에 속하기보다 그저 다같이 드리는 예배 속에 묻혀 지내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그런데, 공동체 없이 나홀로 신앙생활하는 것을 결코 ‘건강하다’ 말하기는, 너무나 죄송한 이야기지만 ‘어려운 일’ 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체를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역시 공동체를 강조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죽음 위에서도 어머니 마리아에게 요한을,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새로운 가족을 공동체로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을 위로하는 모습으로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지금 말씀드린, 가정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과 이들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청년들이 속한 가정 뿐 아니라 우리 교회가 취해야 하는 자세라는 겁니다.
[결론]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청년들이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리고 가정과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선배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 이어진교회 되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그리스도의 계절
[기도제목]
1) 청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안에 거하는 자 되게 하소서
2) 청년들이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신앙과 삶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 되게 하소서
3) 교회와 가정이 먼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4) 하나님 한 분으로 하나되기에 힘쓰는 교회 공동체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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