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맘다해

민수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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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맘다해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미디안 족속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난 후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겨우 1만 2천명의 군사로 어마어마한 수의 미디안 연합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심지어 단 한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으로인해 이스라엘은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얻었고, 모든 백성들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나누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군사들만 나눠가진게 아니라 전쟁에 나가지 않은 백성들과 제사장 레위인들도 모두 풍성하게 나눠가질수 있었습니다.
이런 공동체 의식을 통해 이스라엘은 서로서로 하나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 곧바로 치룰 전쟁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큰 문제 하나가 발생합니다.
1-5절입니다.
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는 가축 떼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들이 야스엘 땅과 길르앗 땅을 둘러보니, 가축 떼를 놓아 먹이기에는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2   그리하여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대표들을 찾아가 요청하였다.
3   "아다롯과 디본과 야스엘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은,
4   주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 앞에서 정복하신 땅으로서, 가축 떼가 많은 우리에게는 목축하기에 알맞은 곳입니다.
5   우리를 좋게 여기신다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차지가 되게 하시고, 우리는 요단 강을 건너가지 않도록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르우벤 지파, 갓 지파가 요단강 동편에 머물고, 요단 서편으로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정복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똘똘 뭉쳐도 쉽지 않은 전쟁인데 빠지겠다니 전력에 굉장히 큰 차질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빠지겠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많아진 가축떼를 기르기에 지금 머물고 있는 요단 동편땅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과 바산 왕에게서 얻은 땅인데 그곳이 굉장히 기름진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많은 가축떼를 어디서 얻었을까요?
바로 앞에 나온 미디안 족속들과의 전쟁에서 얻은 엄청난 양의 전리품들 때문입니다.
많은 가축들을 기르기에 적합한 땅이니 이곳에 눌러 앉겠다는 것입니다.
4절에 나온 그들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 땅을 주님께서 정복하신 땅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앞으로 이룰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들의 현실적인 이익을 선택한 것입니다.
미래의 얻을 큰 이익보다 지금 확실히 누릴 수 있는 이익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먼저 지도 하나를 볼까요?
그들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수많은 양과 소를 얻어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 수많은 가축들을 다 먹이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요단 동편 땅을 보니 짐승들이 먹을 풀이 너무 잘자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짐승들 키우며 먹고 살기에는 지장이 없을듯 보였던 것입니다.
어차피 이 땅도 하나님이 주신 땅이니 자신들이 지금 차지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들은 모세의 반응은 어떨까요?
6절입니다.
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동족 이스라엘은 전쟁하러 나가는데, 당신들만은 여기에 머물러 살겠다는 말이오?
모세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다른 지파들은 전쟁을 치룰 준비를 하는데, 어떻게 그냥 여기 머물러 살겠다고 말할수 있냐며 화를 낸 것입니다.
7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할 경우 다른 지파들의 사기가 꺾이고 말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제가 모세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모세는 그들의 이기적인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다른 지파들이 알게 되면 본격적인 전쟁에 나서기도 전에 이스라엘 전체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다른 지파들도 모험을 감수하기보다 여기 머물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또한 그들도 얼마나 많은 소와 양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다른 지파들 모두 가나안 땅에 대한 기대감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는게 사실입니다.
두렵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똘똘 뭉쳐 싸워야할 동족들 일부가 먼저 빠지겠다고 하니 힘이 쭉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기 충천해서 싸워도 이길까 말까하는데 이런 사기로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좀더 자세히 지적합니다.
8절입니다.
8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당신들의 아버지들더러 그 땅을 살펴보고 오라고 하였을 때에, 당신들의 아버지들도 그렇게 하였소.
충격적이게도 모세는 그들의 선택이 40년 전 그들 아버지 때의 불신앙과 같다고 말합니다.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보고 왔지만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단지 갈렙과 여호수아만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10명의 부정적인 보고때문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동안 광야에서 뺑뺑이 돌리셨고, 결국 그 1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너희들도 그들과 똑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과거의 죄를 똑같이 반복하려느냐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두 지파의 선택이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강조한 말을 보십시오.
11절에서 ‘그들이 나를 철저히 따르지 아니하니’, 12절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나 주를 철저히 따랐으므로’
열명의 정탐꾼과 갈렙과 여호수아 두 부류의 차이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철저히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40여년 전 10명의 정탐꾼들은 요새와 같은 가나안 성읍들과 거인같은 가나안 민족들을 보고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자식 세대가 요단 동편의 풍요로운 모습을 보고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하나는 두려움때문이고, 하나는 욕심때문이지만 결국 본질은 불신앙입니다.
물론 그들의 선택은 나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택은 아닙니다.
그런 선택은 누구나 할수 있는 선택입니다.
눈에 보이는대로 판단한 것일 뿐입니다.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바로 손에 잡을수 있는 이익을 선택한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이 주신 복인데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장애물로 전락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첫번째 신앙의 원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일지라도 그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면 문제가 될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 지파는 하나님이 주신 수많은 가축들과 풍요로운 땅때문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 자체가 나쁜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너무 쉽게 변질되고 부패하는게 문제입니다.
우리라고 다를게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너무 원하지만 그 복의 위험성은 잘 경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언 30장 9절에 나온 아굴의 기도가 참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너무 부유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봐 두려워하고, 너무 가난하면 남에게 신세만 져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봐 두려워하는 기도입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겸손한 기도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그래야하지 않을까요?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고민이 있습니다.
성도가 잘되기를 너무나 바라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잘되기만 하면 신앙이 위기에 빠질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심대로 구하는 기도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면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날마다 묵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예배를 통해 갈래갈래 흩어졌던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주님을 온 맘다해 찾아야 합니다.
또한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불신앙이 공동체에도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들 이익에만 몰두하느라 다른 지파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빠져도 나머지 지파들이 충분히 그 땅을 차지할수 있을거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1만2천명 가지고도 단 한명도 죽지 않고 미디안을 박살냈는데 우리가 빠져도 되지않을까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안일하고 이기적 행동이 공동체의 연합을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독이 될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기심은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공동체 속으로 퍼져 나갑니다.
‘그럼 나도 그렇게할래’, 이런식으로 자기 욕심만 찾다보면 공동체는 와해되고 맙니다.
전쟁에 나가기도 전에 공동체는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가나안땅을 정복하려는 하나님의 뜻도 성취할수 없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이기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판치니 신앙도 개인주의화, 이기주의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남이야, 내 공동체야 어떻게 되든지말든지 내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볼품없고, 무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립니다.
제가 전에 신학교를 다닐때의 일입니다.
함께 방쓰는 젊은 목사님인데 같이 방쓴지 얼마 안돼 방에 1인용 텐트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더니 방에 들어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그냥 텐트에 쏙 들어가 버립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자기한테 말걸지말고,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방을 함께 쓰게하는 신학교의 의도와 목적을 무시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워주신 이유는 공동체가 그 자체로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사랑과 연합을 통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신앙생활하면 편할거 같지만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십니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모세 한 사람으로 100가지 재앙을 내려 가나안 민족들을 다 쫓아냈을지 모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12지파의 연합입니다.
가나안 땅을 12지파가 온 맘으로 함께 정복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모세는 그들의 이런 이기적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와 결국 아버지 세대처럼 또다시 모든 백성들을 광야에서 죽게 만들고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오징어게임 대사처럼 ‘진짜 이러다 다 죽어’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16절이후에 보면 그들은 이렇게 절충안을 내놓습니다.
여기에 가축 우리를 만들고 자녀들을 안전하게 머물수 있게 성을 쌓은 다음에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최전방에서 앞장서서 싸우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또한 전쟁후에도 요단강 서쪽 땅은 요구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모세를 통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마음의 방향, 즉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아버지 세대는 불평, 불만으로 일관된 태도를 보였지만 새로운 세대는 다릅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 회개를 행동으로 직접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신앙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은 공동체를 향한 온전한 마음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맨 앞에 서면 제일 죽기 쉬운데 어느 지파가 맨 앞에서 전쟁을 치루고 싶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최전방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원래 그냥 결정을 철회할께요라고 말해도 됩니다.
그냥 요단서편땅으로 따라갈께요 이렇게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큰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지파들보다 먼저 땅을 차지하는 특권을 얻는다면 그것에 대한 충분한 대가도 치루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책임지는 자세입니다.
다른 지파들이 듣기에도 수긍할수 있는 수준의 책임을 진 것입니다.
이처럼 내 이익을 먼저 챙기기보다 내가 먼저 희생하겠다는 태도가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잘되는 공동체는 내가 먼저 내가 더 많이 희생하려는 태도를 가진 곳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 마음은 공동체를 향한 온 마음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축구감독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팀 분위기를 잘 만드는 감독들이라는 것입니다.
축구는 철저히 팀플레이가 중요한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스타 플레이어들을 얼마나 팀 분위기에 동참하게 만드느냐가 그들의 능력입니다.
유능한 감독들은 선수들 각자가 동료 선수들보다 먼저 더 뛰고, 한발 더 뛰는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최근 호날두가 자신의 고향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팀 분위기를 망치기 때문입니다.
슈퍼스타다 보니까 패스 안하고 자꾸 혼자 골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이기적인 플레이를 하니까 팀 분위기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럼 결코 이길수 없기에 감독이 쫓아낸 것입니다.
그럼 좋은 팀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수 있을까요?
너부터가 아니라 나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내가 먼저 그렇게 해야 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질수 있습니다.
잘되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먼저 나는 어떤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제 모세는 이런 그들의 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받아냅니다.
20-32절까지 모세와 두 지파의 약속 선언이 등장합니다.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주님 앞에서’입니다.
새번역에서 7번이나 등장합니다.
약속을 확인하는 모세에게서 4번, 약속을 하는 두 지파에게서 3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들의 약속이 바꿀수 없는 하나님과 한 약속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한 약속을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지키면 요단 동편땅은 그들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주님께 범죄한 것이 되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28절에 보면 모세는 그들의 약속을 제사장 엘르아살, 차기 지도자 여호수아 그리고 각 지파 가문의 우두머리들을 증인으로 세워 맹세하게 합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맹세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약속공동체입니다.
약속으로 한몸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 마음과 공동체를 향한 온 마음은 약속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중 하나만 소홀해도 약속은 끊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번째 영적 원리를 얻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을 향한 온 마음과 공동체를 향한 온 마음이 약속으로 묶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약속을 우리는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알게모르게 실제로 우리는 매주 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배를 통해서 입니다.
우리는 찬양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온 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몸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성찬식을 통해 고백합니다.
내가 온맘다해 하나님을 섬기듯, 내 공동체를 온맘다해 섬겨야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분명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또다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 위기를 최고의 기회가 되게 하십니다.
서로를 향한 헌신과 약속이 이뤄졌고, 땅은 더 넓어졌습니다.
33절부터 42절까지 그들이 차지한 성읍들이 등장합니다.
므낫세 반지파는 자신들이 땅을 적극적으로 더 점령하여 성읍 이름까지 바꿔버립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고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차지할 하나님 나라는 나홀로 세워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귀한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 교회 공동체는 약속 공동체입니다.
온 맘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온 맘다해 교회를 섬기겠다는 약속의 끈으로 묶인 공동체입니다.
그것을 매주 확인하고 고백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이자 성찬식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개인주의, 이기주의화 되어 갑니다.
인터넷이나 sns가 서로를 연결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욱 우리를 외롭게 만듭니다.
이러한 삭막하고 외로운 세상에 교회가 소망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고 온 맘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온 맘다해 교회공동체를 섬기기를 약속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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