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0 양청] 소요리문답 13-16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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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문. 우리의 첫 조상은 그들이 창조된 원래 상태에 그대로 있었나요?
답. 그들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대로 있던 우리의 첫 조상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범죄함으로써 창조된 원래 상태로부터 타락했습니다.
14문. 죄란 무엇입니까?
답. 죄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15문. 우리의 첫 조상이 창조된 원래 상태로부터 타락하게 된 그 죄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첫 조상이 창조된 원래 상태로부터 타락하게 된 그 죄는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16문. 모든 인류는 아담의 첫 범죄에서 타락했습니까?
답. 아담과 맺어진 그 언약은 아담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과도 맺어진 것이므로, 보통의 출생에 의하여 그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인류는 그의 첫 범죄에 있어서 그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했습니다.
타락했다는 사실을 13문에서 말하고, 14문에서는 죄가 무엇이냐, 15문은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냐, 16문은 죄의 결과는 어떠하느냐를 다룬다. 교재 2번을 보라. “왜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게 되었는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 13-16문까지 나와있는 내용들은 여러분들이 아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재 3번을 보라. “자유의지"와 “노예의지"라고 했다. 자유의지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의지는 익숙한 말은 아니다. 이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하면서 나온 표현이다. 에라스무스는 “범죄한 인간에게 여전히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한 반면, 마르틴 루터는 “천만의 말씀! 우리가 가진 의지는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의 자손으로 태어난,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엄밀하게 노예의지를 가질 뿐이다!” 라고 말했다. 노예의지. 그런데 13문의 대답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그들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대로 있었다고 말한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자유의지였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나서 그 죄인의 후손들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노예의지이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 어두움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진짜 자유의지이다. 그런데 타락한 후손들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의지는 더이상 없다. 이미 죄로 완전히 기울어진 우리가 가진 의지는 어떠한 어두움 가운데 행할 것인가 하는 다양한 선택은 있지만, 빛이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진정한 자유로운 의지는 더이상 없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의지를 가졌던 아담의 경우는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던, 하나님께로만 향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오늘날 밥먹듯 죄를 짓는 우리들의 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초대교회 교부였던 어거스틴이 사람과 죄의 관계에 대해 잘 정리했다. 여러분들의 교재 4번을 보라. 역사적으로 인간이 처한 4가지 상태를 설명한다. 타락하기 전의 상태, 타락 후의 상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난, 구원을 받은 이후의 상태, 그리고 구원이 완성된 후 영화로워진 상태이다. 타락 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어떤 상태였을까? 진정한 자유의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이다. 자유 뿐만 아니라 능력이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죄를 안 짓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를 좀 전에 교재 3번에서 노예의지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죄를 지을 것이냐에 대한 자유이다. 타락 후의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길이 없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서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타락 후에 태어나는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거듭난다. 거듭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아담은 새로운 피조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거듭난 자 역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안 짓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타락 후의 상태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타락 후에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거듭난 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정리해보자. 아담과 하와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거듭난 자들도 죄를 안 짓는 것이 가능한 상태이다. 거듭난 자들이 첫 사람 아담과 하와와 같은 같은 상태라는 것을 말씀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른게 하나 있다. 분명 첫 사람 아담과 하와와 우리가 같은 상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임은 동일하지만, 그들과 우리가 본성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죄의 본성이 없었지만, 거듭난 우리에게는 영화가 이루어지기까지 죄의 본성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는 날,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는 죄의 본성이 우리 몸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몸을 벗는 날, 우리의 생명이 다하여 눈을 감는 날,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그 날, 그래서 영화로운 구원을 얻게 된 후에는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영원한 천국에서 죄를 짓는 일이 안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던 에덴에서. 이 상태로 영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테스트의 기간을 주셨다. 그 테스트가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아담이 안먹는 완전한 순종으로 그 테스트의 기간을 끝냈더라면,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우리가 바라보는 천국의 은혜로 그들을 데려가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가능성이 하나 있었지만, 또 하나는 무엇이었는가? 죄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 2-3 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죄를 선택하였을 때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에덴에서 쫓겨나며, 결국 육체가 죽게 되는 것이었다. 첫 사람 아담에게는 이 두가지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로 에덴에 돌아가게 하시고자 함이 아니다. 에덴에서 아담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셨던 궁극적인 영화로운 자리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데려가실 것이다.
5번을 보라. 본성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이라 했다. 14문에 죄는 무엇이냐 묻는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 한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아닌 여부스 족이나 가나안 족, 블레셋 족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이런 사람들은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법이다. 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이 안된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교통법규를 어겨서 경찰에 걸렸다고 생각해보라. 경찰이 찾아와서 당신은 이러이러한 교통법규를 어겨서 벌금 얼마를 내셔야 한다고 고지한다. 법이 있으니까 죄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질 않았는데 어떻게 심판을 받을 수 있으랴. 하나님의 법을 인간에게 새겨넣으셨다는 것이다.
롬2:14-15 을 찾아보자. 예수를 믿지 않고, 복음 전도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이런 근거를 가진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하나님께서 율법, 하나님의 법을 인간 마음에 새겨놓으셨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처럼 정확하고 구체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새겨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문화권에서 자라났느냐, 어떤 부모 밑에서 자라났느냐,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자랐느냐, 그 사회를 지배하는 윤리적인 기준이 무엇이냐 이런 것들과 아무 상관없이 고대 사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어느 지역과 상관없이, 인간에게는 “양심" 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다.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그 사회의 관습과 기준에 의해 영향을 받기는 하나, 작은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양심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가? 롬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유대인에게는 주었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으로 심판하고,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는 마음에 새겨진 법으로, 양심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있어서 유대인들이 유익했던 부분은 무엇일까?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안다고 해도 이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피 못 지킨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방금 읽은 로마서 말씀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죄의 두 가지 차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보통 죄를 법을 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교통법규를 위반했다고 말하는데, 위반이라는 것은 법을 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위반 만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다. 넘어가지 말라는 것을 넘어선 것, 들어가지 말라는 것을 들어선 것, 이것만을 죄라고 말하는게 아니라, 어느 영역까지 미치지 못한 것도 죄이다. 법이라는 것이 하지 말라는 명령만 있는게 아니다. 하라는 것도 있지 않나.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국민의 4대의무가 무엇인가?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종현이는 군대에 가라! 건강한 남자는 군대에 가라!” 라는 것이다. 이처럼 의무라는 것이 “-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 무리들은 “-하라!” 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하라"는 명령에 못 미친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도 부정적인 명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주님께서 율법을 요약한 말씀에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다. 우리는 얼추 하나님을 사랑 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수준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결코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게 죄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그냥 안하는 것, 그게 아니고 하라는 것을 안하는 것과, 하지말라는 것을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14문에 죄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 부족하거나 어기는 것 둘 다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7번을 보라. 행위냐 불순종이냐. 중요한 것은 행위 자체의 비중이 아니라, “내가 했다 안했다" 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에게 순종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격적인 관계, 관계적이다. 교통법규를 또 예로 들어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시속 30km 이상 달리지 말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것이 인격적인 관계로 성립되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이런 차원의 것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도 관계적이라면, 죄 역시 관계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를 지은 후 회개하는 것이다.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어서 8번을 보라. 여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다. 범죄와 타락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 잘 들어야 한다. 범죄와 타락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아니다, 죄를 짓고 타락하길 원하시지도 않았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줄 알면서도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이 질문은 누구나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이 딱 떨어지게 대답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잘 만드셨는데 인간이 이 모든 것들을 망쳐버렸어" 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다 아셨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 그 손을 딱 때려서 범죄를 못하도록 막지는 않으셨다. 그대로 내버려두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들을 통해 보게 된다.
9번을 보라. 첫 사람 아담, 자유의지를 가졌던 첫 사람이 타락하게 된 죄는 무엇인가?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이다. 이를 좀 살펴보자. 아담과 하와는 왜 금하신 열매를 먹었는가? 그들이 죄를 선택한 동기가 무엇인가? 결국 핵심은 마귀가 뱀을 통하여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줄을 아시고 하나님이 이를 금하셨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이게 정말 바보같은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기꾼들에게 속는 것은 그들이 진짜 잘 짜놓은 함정에 속아 넘어가는 경우들도 물론 있겠지만, 거의 많은 경우 그 순간 내가 어리석게도 깊게 생각을 안했기 때문에 속는 경우들이 있다. 왜? 그 순간 내 안에 욕심이 발생했기 때문에. 뭔가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하고, 뭔가 고생 안하고 편하게 할 수 있단 편법을 듣고 내 안에 욕심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하나님처럼 될 줄 알고 저거 못먹게 하나님이 금하셨다면, 그걸 하나님이 구태여 왜 그 위험한 열매를 만드셨고, 그걸 구태여 왜 동산 한 가운데 두셨겠는가? 그리고 인간을 이성과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를 제거한 AI처럼 만드시면 되었을 것을 왜 이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주셨겠는가? 아담과 하와가 생각했을 때 하나님처럼 되길 바라는 욕심에서 그 열매에 손을 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앞서 로마서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께로 가며,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엄청난 선언이다. 우리 인간 뿐만 아니라 우주 존재 전체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관계적 고백이다. 모든 것이 주께로 돌아간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자신을 견주는 자리로 간 것이다.
우리가 살폈던 제1문항, 인간의 주된 목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의 행복이 어디에 걸려 있느냐, 하나님 아래에서 사는 것이다.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주께로부터 왔다. 심지어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도 주께로부터 왔다. 주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주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불행을 맛보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아래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만족한 것이 아니라 떠난 것이다. 따라서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불신이다.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심을 믿지 않는 것이다. 불만족.
여러분, 자족한다는 것. 나중에 종교개혁자 칼뱅이 이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을 비교하며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정말 놀랍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누리고 사는 것, 그것이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누리더라도 “이것 없어도 괜찮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나는 이것 때문에 살아!” 라는 요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우상으로 바뀌어지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10번을 보라. 대표성의 원리. 16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만 맺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들과도 맺으셨다고 말한다. 대통령이 전쟁을 선포하고 국회가 그 전쟁을 승인해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지금 남자들은 예비군, 민방위로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이를 두고 “전쟁은 내가 결정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내가 안찍은 대통령이 결정했으니까 나는 전쟁 안할거야" 라고 할 수 있는가? 대통령이 우리의 대표성을 띄기 때문에. 아담은 자기 후손인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행위언약을 맺었다. 아담은 혈통적으로 인류의 첫 조상으로 인류의 대표이고,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언약체결자로서 인류의 대표가 된다.
그런데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언약의 차원에서 대표가 된다. 누구의 대표인가? 모든 믿는 자들의 대표가 되신다. 내가 죽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죽으셨다. 내가 순종하지 않앗는데 예수님이 순종하셨다. 순종하신 예수님의 의가 내것이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죄에 대한 율법의 형벌이 되었다. 10번의 B를 보라. 모든 인류는 아담의 첫 범죄에 있어서 그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했다. 롬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대표성의 원리를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표성의 원리에 단 한가지의 예외가 있다. 16문의 답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아담과 맺어진 그 언약은 아담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과도 맺어진 것이므로, 보통의 출생에 의하여 그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인류는 그의 첫 범죄에 있어서 그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했습니다” 여기서 “보통의 출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는 아주 일반적인 출생을 말한다. 생물학적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출생하는 방법, 이것이 일반 인간들의 출생방법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마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것은 우리 말로 정확하게 번역을 잘 했다. 마태복음1장은 족보를 말하는데,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가 낳은 자식으로 표현한다. 전부 다. 마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아브라함이 낳았나? 사라가 낳았지. 이삭이 야곱을 낳았는가? 리브가가 낳았지. 당시 사회가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16절이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 남편 요셉에게서 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정확하게 표현한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또한 “야곱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낳았다" 라고 할 법도 한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왜? 요셉은 예수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생물학적 보통의 출생법을 따르시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동정녀 탄생이라는 기이한 방식으로 나셨나? 이는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죄의 타락과 부패성을 물려받으신 아담의 후손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보통의 출생으로 후손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통의 출생이 아닌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원죄로부터 자유하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배운 교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첫째, 죄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름답게 선하게 만들어주신 세상과 인간이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 왜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는가? 요즘 뉴스들을 보면 인간이 이런가 싶을 정도로 추악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 왜 그러한가? 죄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죄의 파급력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죄를 미워해야 한다. 다윗도 그러했지만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이정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작은 죄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죄가 죄를 낳고 그 죄가 또 죄를 낳고, 결국 그 작은 죄가 우리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마귀가 죄를 통해 하는 일은 망가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14문에서 죄가 뭐라고 했나? 순종함에 있어 부족하거나 어기는 것. 그러니까 죄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는게 합당하다. 미워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를 이토록 망가뜨리고, 우리 인생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우리의 관계를 상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든 것이 죄이다. 죄는 망가뜨리는 것이다.
두번째로, 사람, 세상, 자신을 바라보는 삐뚤어진 관점과 사랑을 바로 잡아야 한다. 고슴도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품에 안아주려고 하는데 오히려 그 사람들의 가시들때문에 나에게 상처를 주는 자들이 있다. 고슴도치와 같은 사람들. 왜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나. 죄가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우리가 죄를 미워할 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삐뚤어진 사람들을 볼 때, 불편한 관계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 고슴도치와 같은 나를 용서하시고 안아주신 것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고슴도치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다. 우리는 죄의 결과를 고스란히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죄인이 죄인을 만나 사랑하고, 죄인이 죄인을 낳고, 죄인이 죄악된 세상을 만들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우리를 새롭게 하고, 그 안에서 영광을 누리도록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