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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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설교 날짜-2023.05.21.
설교 본문-고린도전서 1장 18~25절
설교문
최근 4년간, 전 세계가 엄청난 처참함을 바라보았습니다. 2019년 말부터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Coronavirus Disease 2019)가 점차 확산하더니 불과 몇 개월 만에 전 세계를 휩쓸었었습니다. 수십만 명이 확진자가 되고 수만 명이 사망하거나 사경을 헤매었었습니다. 수다한 이들이 격리되고 지역과 도시가 봉쇄되며 국경은 폐쇄되었었습니다. 학교도 개학이 연기되거나 온라인수업으로 대체되었었으며, 확진자의 발길이 닿은 가게, 식당, 쇼핑몰, 백화점, 직장은 일시 폐쇄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세계의 산업과 경제와 금융이 휘청거리고 있고 수많은 이들이 생업과 생존조차 어려워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너무나 힘겨운 일이 되고 있습니다.
I.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이러한 질문은 단지 지적 호기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으로 휩싸인 오늘날과 같은 실제 위기의 상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갑자기 휘몰아친 코로나로 원치 않게 감염되어 가족과 떨어져 홀로 음압 병상에 들어가는 순간에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양성판정을 받았으나 병실이 없어 아무런 의료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집에 누워있는 순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입원이 가능한 병실을 찾아 헤매며 달려가는 구급차 안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다급한 순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평생 주일성수를 하였는데, 갈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는 성도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텅 빈 예배당을 보며 울컥해지는 마음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나름대로 예방하며 조심스레 모인 예배와 수련회이지만 의도치 않게 확진자들이 나오면서 언론과 사회가 교회를 이단 신천지와 동일시하고 반사회적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며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은 극심한 실존적 고통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 고민하게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허다한 생각들로 혼란과 갈등을 겪습니다. 즉, 지금까지 내가 믿어왔던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 것인가? 계신다면 어디에 계시는 것인가? 과연 진짜 하나님이신가? 내 믿음이 과연 맞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등등의 생각들로 이어집니다.
또한,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왜 나한테만 이러시는 것인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이런 일을 그냥 바라보고만 계시는가? 등등의 생각들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조금 더 찾아보니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에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현대의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의 자전적 소설 『나이트(Night)』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에 의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무고하게 죽어가는 처참함을 10대의 나이에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린아이가 무고하게 교수대에 매달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 이들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수군거립니다.
둘째, 1755년 11월 1일 아침, 많은 사람이 만성절 축일을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고 뒤따라 거대한 해일이 덮치면서 포르투갈의 중심도시 리스본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도시는 철저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이들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외쳤습니다.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자신의 철학적 소설 『캉디드(Candide)』에서 리스본 대지진을 다루면서 세계는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에 있다고 주창하는 당대의 낙관주의적 철학과 종교적 신념을 신랄하게 풍자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질문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에덴동산 밖에서의 인류의 역사와 함께 줄곧 제기된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질문입니다. 이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 속에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님을 아는 것 자체로 나름의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모든 해결책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이러한 질문은 신학과 철학에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고 명명되는 주제로 수렴됩니다. 이 주제는 신(神, theos)의 정당성/의로움(正, dike)과 관련이 있는데, 특히 이 세상에 끔찍한 악과 고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신(神)이 과연 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신지를 다룹니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다니엘 밀리오리의 책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기독교 조직신학 개론(Faith Seeking Understanding: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에 따르면, 일곱 가지 입장의 신정론들이 있습니다.
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불가해성의 입장,
②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과 징계로 여기는 입장,
③ 고통을 통한 인간의 영적 성장을 뜻하시는 하나님의 교육 및 연단이라고 여기는 입장,
④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문시하는 항의의 신정론의 입장,
⑤ 하나님의 전능성을 제한하는 과정신학의 신정론의 입장,
⑥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도록 돕는다고 보는 인격 형성의 신정론의 입장,
⑦ 고통의 구조에 맞서서 사회개혁을 주창하는 해방신학의 신정론의 입장.
각각의 입장에는 나름의 장단점이 모두 있기에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너무 성급하게 하나의 입장으로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모든 재난과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욥의 고난을 듣고 그를 위로하고자 찾아온 친구들은 그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단정하지만 욥기 전체를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욥 1-42). 신약성경에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의 고통에 대해 사람들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또는 본인의 죄 때문인지 왈가왈부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9:1-41). 어느 입장일 것인지를 선명하게 파악하려면 오랜 시간의 분별과 진단이 필요합니다. 캄캄한 터널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터널을 빠져나와야만 전체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II. 하나님은 진정 누구이신가?
그러면 우리는 재난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느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에 더욱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현대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현재)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이 하나의 좋은 안내가 됩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엘리 위젤의 질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에 대해 많은 현대인이 "세상이 이렇게 처참하고 끔찍한데, 하나님이 어디 있어? 없어!"라고 말하며 무신론적 답변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몰트만의 책은 "그래도 하나님은 계셔! 어디에 계시냐고? 십자가에 계시잖아"라고 말하며 하나의 신학적 답변을 제시하였습니다.
몰트만의 책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해 성부 하나님은 그저 냉담하게 보고 계시지만 않고 그 고통을 함께 느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러한 고통에 함께 참여하십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사건은 성자의 고통, 성부의 공감, 성령의 동참이 있는 삼위일체적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모습은 바로 세상을 위한 고통을 느끼시고 공감하시고 동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고통의 상황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통하여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인류와 함께, 온 세상과 함께 고통을 느끼시고 공감하시고 동참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북간도 명동촌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던 윤동주(1917-1945)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을 일찍이 시적 감수성으로 포착하였습니다. 그의 현존하는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처음 것으로 알려진 시가 '초 한 대'입니다. 17세가 되는 1934년 성탄절을 하루 앞둔 12월 24일에 쓴 것입니다.
초 한 대 -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이 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불살라 버리"시는 분이시며, 그럼으로써 암흑을 내쫓고 세상을 밝게 비추며 위대한 향내를 풍기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윤동주가 포착하여 노래하는 하나님은 바로, 이 세상을 위하여 눈물로 슬퍼하시고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느끼신다고 해서 그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은 분이라고, 즉 아무런 힘이 없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단코 아닙니다. 다니엘 밀리오리는 『하나님의 권세, 세상의 권세(The Power of God and the gods of Power)』에서 고린도전서 1장 18-25절에 근거하여 결단코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the Power of God)이라 ......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개역개정)
그러니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이 세상에서 힘과 권력으로 지배하고 군림하는 방식의 전능하심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공감하시며 동참하시는 가장 연약한 자가 되심으로써 발휘되는 전능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십니다.
III.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에서 하나님에 대한 앎과 인간에 대한 앎 사이에 상관관계(correlation)가 있음을 명쾌하게 서술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갈수록 인간 자신을 더 제대로 알아가며, 또한 역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코로나19(COVID-19)와 관련한 이번 논의에서는 어떤 점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전능하심을 중심으로 인간적인 차원과 교회 차원으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십자가에서 가장 연약한 자가 되심을 통해 발휘됨을 우리는 새롭게 발견하고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만능성으로 오해한 것은 아닌지요? 마치 도깨비 방망인 것처럼, 또는 superman과 같은 초능력자의 힘인 것처럼 오해한 것은 아닌지요? 이러한 오해들은 힘, 능력, 권력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왜곡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이러한 오해들은 인간 자신이 힘, 능력, 권력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점을, 그러기에 인간이 창조 세계 안에서 다른 피조물과의 공존과 공생을 추구하기보다는 인간 중심적인 문명을 쌓아왔다는 점을, 그리고 사회 안에서 다른 동료 인간과의 협력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부와 권력과 명예를 쌓아왔다는 점을 드러내어 줍니다.
근래에 들어와 세계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우주 정복, 포스트 휴머니즘, 트랜스 휴머니즘 등등 인간의 능력을 한껏 자랑하고 뽐내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현 상황에서는 인간이 아주 작고 미세한 바이러스 앞에서조차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이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가장 연약한 자가 되심을 통하여 발휘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같이 피조 세계 안에서 및 사회 안에서 약한 자와 작은 자와 함께 하는 공감과 동참과 연대의 삶을 추구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 본래 의도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십자가에서 가장 연약한 자가 되심을 통해 발휘되는데 이를 통하여 교회(에클레시아)가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불러주신 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거룩한 무리(성도)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토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교회에 관하여 생각하고 말할 때, 건물의 크기와 규모, 설립 역사와 전통, 매주 헌금액과 연간 예산, 교인 등록 수와 십일조 교인 수 등등을 기준으로 합니다.
이렇게 되면 분명히 교회론의 본질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의 관점에서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재난과 고통의 상황에서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자들을 돌아보아 위로하고 이들의 회복을 위해 애쓰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IV. 나오는 말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으로 휩싸인 오늘날과 같은 실존적 위기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질문을 제기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에 더욱 주목하여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재난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하여 눈물로 슬퍼하시고 고통을 함께 느끼시는 분이심을 발견하고, 또한 하나님의 전능성은 십자가에서 가장 연약한 자가 되심을 통해 발휘된다는 점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이러한 발견과 깨달음을 통해 인간이 자신을 성찰하여 인간 중심주의적 또는 개인 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공존과 공생과 협력과 연대의 삶을 회복하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자 성도로서의 교회가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닮아감으로써 그 정체성과 본질을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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