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근심과 다윗의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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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가운데 나아와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드리며 나아갑니다. 이 시간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고 오늘 올려드린 찬양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간구함으로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 하나님 함께하셔서 위로하여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셔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감사하오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민수기 14:39–45 NKRV
39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 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42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 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속담 중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라는 속담을 아십니까? 저희가 흔히 쓰는 속담이죠. 소가 있는 외양간을 안고치고 가만히 있다가 소를 잃고 나니까 외양간을 고친다는 것인데, 속담의 속뜻은 어떤 일에 대해서 준비를 제때제때 안하다가 다 지나간 후에서야 이제 준비를 한다던가 뒷북을 치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죠. 영어권에서의 비슷한 속담으로는 close the stable door after the horse has bolted.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말이 도망가고 나서야 마굿간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소이고 영어로는 말이지만 비슷한게 신기하긴합니다. 어찌됐든 제때제때 안하고 다 지나가고 나서야 뒷북치고, 걱정하고, 해결도 안되는 해결책을 내놓거나 하고 있고 하는 것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하는 말이 이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소 한마리가 아니라 소떼를 다 잃어버리고 나서 아주 열심히 조치하려고 하는 우리 눈에도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 39-40절입니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민수기 14:39–40 NKRV
39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모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나서 주님 여기에 저희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범죄하였다면서 회개까지 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딱 잘라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바른 신앙인들의 자세가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 앞의 상황을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희가 오늘 읽은 본문은 설교에서 자주 들어보지 못한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앞의 본문은 우리가 자주 들었던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냐 하면 가데스바네아에서 각 지파마다 정탐꾼 12명을 선발하여 이스라엘의 온 구석구석을 정탐하게 합니다. 신 광야에서 하맛 어귀 르홉이라고 했는데 하맛 어귀가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 지도로 볼때 저어 위에 북쪽까지 다 돌아보고 온 것입니다. 네게브길 그러니까 이스라엘 남방길로 올라가서 높은 헤브론 산지까지 무려 사십일 동안 탐방을 하고 돌아옵니다. 가서 이곳저곳 세세하게 탐방하면서 포도, 석류, 무화과 등 풍성한 과일도 따옵니다. 그렇게 세세하게 둘러보고 와서 이런 말을 해요. 거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런데 거긴 성읍이 견고하고 크고 네피림 후손인 거인 아낙 자손도 있고, 아말렉인도 있고 헷과 여부스 사람 아모리 사람 가나안 사람 등등이 거주한다. 우리는 그들이 보기엔 아주 보잘것 없는 메뚜기 같고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 우리가 가서 치지 못한다라며 아주 초를 치는 말을 합니다. 그것도 10명이나 같은 말을 합니다. 보다못한 갈렙 지지난주에 이종찬 목사님께서 설교 때 말씀하신 그 갈렙, 그 갈렙이 우리가 올라가자 가면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씨알도 안먹혀요.
이미 공포에 질려서 소리를 지르면서 통곡합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뭐라고 원망하냐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거나 광야길에 죽는게 나았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괜히 끌고나와서 칼 맞아 죽게 하시냐?라면서 말도 안되는 원망을 늘어놓고 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론이랑 모세말고 다른 지휘하는 사람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진짜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공황에 빠져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말도 안되는 판단과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런 상황이 오자 모세와 아론은 그 이스라엘 회중들 앞에서 엎드립니다. 누구 앞에 엎드리는 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존경이나 복종의 표시로 절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이스라엘 회중들이 무서워서 엎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민수기의 문맥에서 볼 때 모세와 아론이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개입하실 것을 예상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전에 먼저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기들의 옷을 찢으면서 다른 열 정탐꾼의 말에 반박을 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합니다. 우리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거기에 있는 다른 족속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설득합니다. 그러나 그런 설득은 먹히지 않고 결국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모세에게 내가 그들을 전염병으로 쳐서 다 죽이고 모세 너로 하여금 크고 강한 나를 이루겠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이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진멸하시진 않습니다. 그 대신 출애굽의 1세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20세이하인 결정권이 없었던 2세대 이후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선거권이 있었냐 없었냐의 차이겠죠.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길고 긴 40년 광야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고나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앞선 이야기를 먼저 알고나서 오늘 본문의 백성이 크게 슬퍼하며라고 하는 본문을 읽는다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있을 때 잘하지 왜 뒷북치냐 그런 생각밖에 드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크게 슬퍼하며 근심하고 회개도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41-43절입니다.
민수기 14:41–43 NKRV
41 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42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너희들이 왜 또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러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다. 잘못되었다.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하시지 않으니까 올라가도 너희는 질것이다. 아말렉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한테 다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올라가지 마라. 라고 모세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기어코 고집을 부리고 그 땅으로 올라갑니다. 결과는 네 뻔합니다. 대패를 당해서 죽고 남은 사람들은 호르마라는 곳까지 쫓겨옵니다. 정말 청개구리 같지 않나요? 그렇게 하라고 할때는 안하다가 하지말라니까 기어코 하고 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순종의 죄에 대해서 크게 애통해하였고 근심했습니다. 회개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지만 모든 종류의 애통과 근심이 하나님 앞에서 복되고 귀한 것은 아닙니다. 봤듯이 모든 종류의 애통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애통하고 근심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0–11 NKRV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근심’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은 이러한 종류의 애통, 이런 종류의 근심을 갖지 못했어요. 그들이 한것은 세상 근심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고 했을 때는 그것을 강력하게 거부하다가 하나님이 약속에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니까 고집을 피우고 결국 고집대로 했다가 전멸했어요.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하시겠다는 엄중한 말씀 때문에 애통하고 근심하고 회개했지만 그 결과로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조 되는 것이 삼하 12:15-23 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 앞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다윗과 밧세바의 스캔들사건이 나옵니다. 다들 잘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다윗이 전쟁중에 자기는 전쟁에 안나가고 성을 거닐고 있다가 어떤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여인이 아름다워 누군지 알아보니까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의 손녀이자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거 무시하고 자신의 부하한테 시켜서 데려오게 한다음 사랑을 나누었죠. 그러고 나서 다윗은 이 여인이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임신을 한 것을 안 다윗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갖은 수는 다씁니다. 전장에 있던 우리아를 불러서 아내와 자게 하고 그것도 안되니까 술먹이고 그것도 안되니까 위험한 전쟁터에 나가게 해서 죽게합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에게로 데리고 옵니다. 이 일 한번으로 다윗은 다양한 죄를 한번에 짓고 있습니다. 살인죄, 살인교사죄, 간통죄, 절도죄를 짓고 있죠. 이것은 십계명의 6계명부터 10계명을 모두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이 은폐 되는 줄 알았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한 부자와 한 가난한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다윗의 죄를 알게하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즉각적으로 회개합니다. 그 회개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배경이 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길지만 성경을 한번 같이 읽기 원합니다. 사무엘하 12:15-23 입니다. 교독하시면서 읽겠습니다.
사무엘하 12:15–23 NKRV
15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 아이가 태어나자 하나님께서 치셔서 심하게 앓습니다. 다윗이 여기에서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합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늙은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켜서 말리려고 한것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처절하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기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이레만에 죽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기도하고 있으니까 신하들이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아이가 죽지 않았을 때에도 저렇게 기도했는데 아이가 죽은 것을 알면 어떻게 할까 걱정되서 그런 거죠. 그런데 다윗이 누구에요? 구약성경에서 눈치 백단인 사람 두 사람 꼽으면 야곱하고 다윗이잖아요? 다윗이 분위기가 술렁이는 것을 듣고 아 아이가 죽었구나 알아챕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아이가 죽기 전에는 그렇게 애통하고 근심하던 다윗이 일어나서 씻고 치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나님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음식을 가지고 오라해서 음식을 먹습니다. 그냥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다윗은 하고 있어요. 이것을 오늘날로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아이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는 죽을 듯이 슬퍼하고 기도하고 그러다가 아이가 죽으니까 장례식에서 슬퍼하긴 커녕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 밥을 엄청 잘 먹고 있는 그런 상황인겁니다. 이걸 보니까 신하들이 놀라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니까 다윗에게 물어봅니다. 왕이시여 그렇게 하심이 어찌 됨입니까?
여기에서 다윗의 대답이 아주 놀랍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 내가 금식하고 운것은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살려 주실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그리했다. 그런데 이제는 죽었으니까 내가 금식할 이유가 사라졌다. 아이는 돌아올 수 없다. 그러니 이렇게 하였다. 라고 말입니다.
다윗이 금식을 하면서 슬퍼하며 절절하게 기도한 것은 그 역시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집을 피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가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그렇게 행동했으니까요.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의 말은 이런 것입니다. 그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 관용을 바랄 수 있는 기회와 여지가 있을 때에는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애통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포하신 심판에 대해서 단호함을 보이시자 그는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끝나버린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정리하고 다음의 삶을 새로 시작합니다. 자식의 죽음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하나님의 드러난 뜻에 자신을 맞추는 거에요. 이런 그의 결심을 겉으로 보여주는 행동이 바로 씻고, 치장하고,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다윗의 신앙적 태도를 의미하는 거에요. 자신을 하나님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죠.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영적 통찰이 부족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박자를 맞추지 못하고 계속 엇박자를 보여요.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을때에는 그렇게 난리를 치고 못간다고 땡깡을 부리더니 하나님이 그럼 올라 가지마라라고 하시니까 이번에는 청개구리 처럼 올라간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런 행동에 대해서 모세가 옳지 못하다고 엄중하게 경고하는데도 무시하고 갑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자신의 죄의 열매로 태어난 아들의 생명에 대해 아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위해 애통해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얻어내기 위해 힘을 씁니다. 그러나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단호함을 보이시니까 그 일은 바로 잊고 털고 일어나서 새로운 출발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에 대해서 분노하지도 않았고 토를 달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따랐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선물을 주십니다. 죽은 아이 대신에 밧세바와의 사이에 새로운 아들을 주십니다. 그 아이가 나중에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이 되는 솔로몬입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나단 선지자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보내십니다. 나단 선지자는 와서 아이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지어요. 여디디야의 뜻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읍'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고 이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10 에서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고 회개에 이르게 하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두 사건을 관찰한다면 이스라엘보다 다윗이 훨씬 더 심한 죄를 짓고 있어요. 그러나 두 사건의 결과는오히려 반대가 됩니다. 그것은 다윗은 즉각적인 순종으로,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그들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근심과 애통으로 사망을 이루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초에 우리가 하나님께 언제나 항상 순종함으로써 근심하고 애통할 일을 안 만드는 것이, 그럴 원인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지만 넘어질때도 있고 실수할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근심하고 애통할 일이 생겼다면 우리의 그 근심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과 타이밍을 맞추는 근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태도, 신앙의 지혜입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근심이 있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다윗이 보여준 영적 통찰을 묵상하시면서 신앙의 지혜를 얻으시길 소망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즉각적으로 순종했던 다윗처럼 순종하게 하여 주옵소서.
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 통찰력을 주옵소서.
3. 세상 근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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