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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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 views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 용서에 대한 기도 시험에 대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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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서론
서론
오늘 본문은 기도자를 위한 내용이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한 내용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는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양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1. 양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요즘 TV 뉴스와 신문에서 계속 거론되고 있는 말입니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민심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 좀더 다양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라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정말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지요? 회사를 다니는 분들은 정년 때까지 직장을 다니는 것이, 사업이나 자영업을 하는 분들은 중간에 문을 닫는 일 없이 계속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이렇게 중요한 것에 반해서 오늘 본문 11절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의 내용은 먹고 사는 문제를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저 일용할 양식,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안정적인 양식이 공급받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양식, 더 풍성한 양식을 공급받고 싶어 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 고 가르쳐주고 계시는데, 도대체 왜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을까요?
오히려 ‘충분한 양식을, 풍성한 양식을 주시옵소서, 충분하고 풍성한 양식을 주셔서 저장하고 쌓아둘 수 있게 하소서’ 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셨으면 너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는지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면 주기도문 중에서 특별히 이 부분은 그저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가 버리는 기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제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매일 먹거리가 보장된 삶이 아니었습니다.
박해를 받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던 예수님이 무슨 수로 매일 매일의 양식을 충분하게~ 넉넉하게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당시의 환경과 조건을 생각해보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것이야말로 은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할 때 먹거리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평을 쏟아냅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비록 노예생활로 힘들기는 했지만 하루 하루 무얼 먹을까 걱정은 없었습니다. 고기도 먹을 수 있었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나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만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양식을 내려주시는 것!
매일 매일 새로운 양식을 내려주시는 것!
그런데 사람은 참 이상하게도 더 많이 가져가서 쌓아 놓으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필요 이상을 가져갑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을 가져간 만나는 어떻게 되었나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다만 여섯째날에는 만나를 갑절로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이 휴일기도 한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까지 간수해도 냄새도 나지 않았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신기하다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은혜의 원리가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한편으로는 온전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이를 때까지 이스라엘 자손에게 사십 년 동안 매일 매일 새로운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 부분이 또 중요합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만나를 내려주시는데, 계속 계속 내려주시는 것
이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계십니까?
매일 매일 계속 계속 내려주시는 그 은혜로 살고 계십니까?
그런데 참 사람이 매일 매일 공급되는 양식이 은혜라는 것을 들어도 마음에 만족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모아야, 조금 더 쌓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마치 강박관념처럼 사람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를 넘어선 심각한 상황이긴 한데, 건물을 사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인 남편을 둔 아내의 고민이 소개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편은 건물을 사기 위해서 밤낮 돈 버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부모와 형제들, 아내도 잘 챙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기를 가지는 것도 건물을 사고 난 뒤로 미루고서 말이지요.
돈을 버는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인데 지금 불행하면 무슨 소용이냐... 아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하지 않느냐 라고 충고해도 전혀 듣지를 않습니다. 건물 산 다음에... 건물 산 다음에...
조금 더 모으는 것, 조금 더 쌓는 것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이 점점 더 커져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분명히 은혜였던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마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염려와 불평이 가득한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한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그만큼 재물과 욕심의 영향력은 큽니다. 하나님이 아닌 재물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야 나는 그렇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럼 한번 자신을 테스트 해보십시오.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걱정과 염려를 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네 그렇습니다’ 가 아니라 ‘글쎄요, 아닌 것 같아요’ 라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다’ 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정말 귀한 감사의 제목임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매일 새로운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은혜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결론
결론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는 결코 작은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큰 믿음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을 버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며, 주님 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기도이며, 더 나아가 내일 염려를 하지 않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이 기도에는 아주 귀하고 소중한 신앙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2. 용서에 대한 기도가 나옵니다.
2. 용서에 대한 기도가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내용으로 읽혀집니다. 우리의 용서함이 하나님의 용서받음을 위한 전제 조건인 것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14절과 15절 말씀에서도 똑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의 이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기도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비유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할까요?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 라고 여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왕에게 만달란트 빚진 자
왕에게 만달란트 빚진 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비유입니다. 왕에게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2절에 나오는 ‘죄를 사한다는 것’은 ‘빚을 탕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볼 때 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이 기도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딱 맞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은 만달란트를 빚진 종에게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빚을 갚으라 고 명령했습니다. 다급해진 종은 엎드려 절하면서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왕이 ‘불쌍히 여겨서’ 만달란트 라는 큰 빚을 그 자리에서 탕감해주었습니다. 어떤 조건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빚을 제로로, 0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매일 매일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평생을 일해도, 가족을 모두 다 팔아도 못갚을 빚을 탕감받았을 때 얼마나 좋았을까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종이 나가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고 붙들어서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동료는 방금 전에 자신이 왕 앞에서 엎드렸던 것처럼 똑같이 엎드려서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갚겠습니다.” 라고 애원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에게 큰 불행의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이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왕은 그를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겨 버립니다.
처음에 왕의 탕감은 만달란트를 갚지 않아도 된다는 큰 탕감이었고, 완전한 탕감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탕감을 받은 사람이 작은 탕감을 해주지 않자 큰 탕감이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달란트의 빚의 탕감을 무효화시킨 원인은 왕에게 있지 않았고 바로 빚진 자에게 있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용서함이 하나님의 용서받음을 위한 전제조건과 같은 효력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이 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같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왕에게 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백데나리온을 마땅히 탕감해주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데 있어서 우리의 용서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무엇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더불어서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깨닫게 해줍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 정말 어렵습니다. 큰 잘못일수록 그렇습니다. 그래서 보통 드라마나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은 복수나 보복입니다. 복수나 보복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복수의 대상이 망가졌을 때 복수와 보복이 의미없다 고 생각이 들어서 복수와 보복을 멈출 때는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끝까지 복수합니다.
그래서 막장 드라마도 나오고 그렇지요.
반면에 용서는 드라마나 영화의 마지막에가서야 이루어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용서는 힘들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큰 죄악을 용서하시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힘든 일이었습니다.
쉬운 일이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시며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값을 치르라고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희생시켜서 대신 죄값을 치르게 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용서가 정말 큰 용서임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있었는지 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를 요구하면 될까요 안될까요?
보복 심리, 복수 심리가 있으면 될까요 안될까요?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처럼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곁길로 나가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에 대한 이치를 조금 더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뉘우칠 것이 없다 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가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과 독일의 차이
일본과 독일의 차이
이 말은 일본과 독일의 이야기로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는 아직 일본을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용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독일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용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잘못했다’ 라고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유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미미했고 역사 교과서에 2차 세계대전 때 저질렀던 부끄러운 내용들을 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독일은 철저하게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역사 박물관을 만들어서 독일이 저질렀던 만행을 그대로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이상으로 보상하고 각종 지원을 계속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보상액은 일본이 주변국들에 지급한 보상액의 60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또 독일 중고등학생들에게 프랑스 학자가 쓴 독일 역사책을 교과서로 채택하여 읽도록 했습니다. 독일 학자가 쓴 독일 역사책은 자칫하면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을 미화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일본과 독일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뉘우칠 것이 없다 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가 없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용서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돌아설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용서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기다려야 하겠지요.
용서받음과 용서함은 짝입니다. 용서받았다면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용서는 진정한 뉘우침과 진정한 사랑이 만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용서인지를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피를 흘리면서 우리를 향한 용서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이 기도가 얼마나 온전한 용서에 대한 신앙관을 담고 있는 것인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3. 시험에 관한 기도가 나옵니다.
3. 시험에 관한 기도가 나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 구하시옵소서”
성경에서 소개하는 시험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사단이 주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이 주는 시험은 하나님의 자녀를 훈련시키기 위한, 연단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고, 사단이 주는 시험은 유혹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험은 사단의 시험인데,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사단의 유혹은 영적인 세력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모든 종류의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유혹에 빠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부부관계와 부모와 자녀 라는 가족의 문제로, 명예와 권력으로, 건강으로, 심지어 교회 일로도 사단은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사단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기도 외에 다른 방법으로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이 순간에 ‘말씀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대답을 하시면 안됩니다. ‘기도로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말자’ 라는 말에는 다른 신앙적인 방법도 포함하고 있는 거니까요.
하나님의 전신갑주 : 영적 전쟁
하나님의 전신갑주 : 영적 전쟁
그래서 에베소서 6:11 절에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말씀을 가지고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사단을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오. 사단은 예수님도 넘어뜨리려고 했던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단의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단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사단은 달콤하게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오늘 무엇이 나에게 시험이고 유혹이 됩니까? 내가 유독 잘 흔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사단의 목적대로 되지 않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를...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이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하물며 영생은 어떻겠습니까? 영생이야말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영생은 지금 당장의 문제가 아니니 괜찮다고, 지금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착각을 심어줍니다. 부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 주리게 되는 양식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주리지 않게 하는 생명의 떡을 위하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기를,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 깨어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4. 주기도문의 마침
4. 주기도문의 마침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괄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기도를 마무리하는 송영인데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에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주기도문의 전체의 의미와 통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나라는 하늘에 속한 나라로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나라요 정의로 가득찬 나라입니다.(롬14:17)
권세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롬1:16)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게 합니다.
영광은 빛의 광채를 말하며(눅2:9;행22:11, 고전15:40) 나아가 존엄이나 탁월을 뜻하며 통치자로서의 왕의 위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광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위엄, 마지막 때에는 세상을 심판하실 위엄을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없다면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심각한 결함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참으로 귀하고 은혜롭게 주기도문을 마치고 있습니다.
결론
결론
이렇게 마태복음 6장 9~13절까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좀 띄엄 띄엄하기 했지만 3번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을 가끔씩 곱씹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못한 더 깊은 의미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깊은 신앙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비밀을 깨닫고 기도다운 기도를 하시기를,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용서인지를 깨닫고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사단의 시험과 유혹에 결코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오니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니만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축도
이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함께 하여 주심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기도하며 그 뜻대로 살기를 결단하는 모든 주의 성도들 위에 영원히 함께 하옵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