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9 금요기도회 : 욥기 19: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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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 자리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조건도 전혀 없는 저희를 불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한 주도 저희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진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이런 저희를 용서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저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앎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저희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저희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기도회를 통해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더 가까워지는 저희가 되게 인도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 함께 들을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9:21-27 의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금요기도회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욥기의 말씀인데요. 욥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쉽지 않고 때론 우리의 상식선에서 이해도 되지 않는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에게 고통이 찾아오는지의 의문에 대한 이야기가 욥기의 전체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이유 모를 고통이 찾아와 재산과 자녀들, 그리고 건강까지 빼앗깁니다.
이렇게 욥이 비참한 상황 속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찾아와 일주일 동안 욥의 곁에 있어줍니다. 그러나 욥이 자신의 고통이 점점 심해지자 자신이 태어난 것을 저주하는 욥의 말을 들은 세 친구들은 욥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며 욥의 잘못을 지적하는 고발자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욥이 잘못을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벌을 내리셨다. 그러니 욥은 하나님께 회개를 해야 한다는 말, 바로 보응원리, 권선징악 원리에 따른 말이었습니다. 이에 욥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너희는 지금 나의 상황과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며 친구들의 말을 반박합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이러한 논쟁이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세 친구 중 한 명인 빌닷의 두 번째 연설에 대한 욥의 반박 연설입니다.
먼저 2절에서 욥은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라며 당당하지만 비통한 사람으로서의 투덜거림을 하고 있습니다. 욥의 이 말은 친구들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괴롭힘을 당하고 꺾여지고 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지금 자신을 괴롭히고 꺾으려고 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여전히 친구들 앞에서 당당했고 친구들이 그를 꺾으려고 하지만 그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욥은 “너희가 최대로 할 수 있는만큼 나를 부당하게 학대했으면서도 왜 수치스러워하지 않느냐”라며 말합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짓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껏 하고 있는 이의 제기를 그만하고 욥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4절에서 욥은 ‘허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 허물은 부주의한 상태에서 지은 죄 또는 부지 중에 지은 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어쩌면 지었을 수 있는 죄가 나에게만 있느냐, 그 죄로 내가 이렇게 고통당하고 있는거라면 너희도 똑같이 받아야하는거 아니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5, 6절에서 “너희는 나를 이기려고 했지만 너희의 말들은 틀렸다. 나의 고통은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욥의 박해자가 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욥이 잘못했으니 벌을 받는다는 윤리적인 문제였지만 욥에게 이 고통은 하나님에 관한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부터 12절까지 욥은 자신의 고통을 그림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자신이 당한 공격을 묘사하며 13절부터 20절까지는 현재 자신의 처지가 어떤 상항인지에 대해서 묘사합니다. 특히 17, 18절에서 욥은 자신의 가족들에게조차 혐오를 받으며 어린 아이들에게조차 조롱당한다며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잔인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20절에서 그 결과를 이야기합니다. 이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나의 뼈가 내 살과 내 피부에 붙는다”입니다. 원래 뼈에 살과 피부가 붙어있는 것이 사람의 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신체를 지탱해주는 뼈가 이제는 힘이 없어져서 살과 피부에 붙어있는 정도로 욥이 얼마나 무기력해졌는지를 욥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의 부재 그리고 어린 아이마저 조롱하는 조금의 인간의 동정심마저 없어진 그의 상황이 그의 정신을 약화시키고 그의 기력을 고갈시켰습니다. 정신적인 고립감이 그의 뼈가 살과 피부가 붙는 골격 자체가 손상되는 것으로 경험되었습니다.
욥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살아있는 송장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이미 산 채로 가죽이 벗겨졌고, 그의 몸의 피부가 제거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곤 잇몸 뿐이라고 20절에서 욥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라며 이야기합니다. 욥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친구들이 인정해달라는 것이 이 말의 목적이긴 하지만, 여기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친구들이 2절에서 말한 것처럼 계속 말로 자신을 괴롭히고 꺾으려고 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용히 해달라는 뜻입니다. 욥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친구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이고, 그들이 마치 하나님처럼 이게 맞다면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22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 행세를 하며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박해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욥은 23절부터 27절까지 자신의 결백함을 다시 한번 논증합니다. 눈여겨 볼 것은 25절인데, 25절에서 ‘대속자’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대속자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죄를 대신하여 해결해줄 사람을 떠올리거나, 더 나아가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지만 여기서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속자’의 히브리어는 ‘고엘’인데 보통은 대속자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지지자’, ‘대변인’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해줄 대변인이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대변인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재 욥은 자신을 변호해줄 수 있는 가족들도 없는 상황이며, 욥기 전체 이야기에서 욥이 묘사하는 하나님은 ‘증인’이나 ‘대변인’으로 활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욥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의 근원이셨습니다. 욥의 대변인은 욥 자신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변인’이 살아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말은 욥 자신이 그만큼 결백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결백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여전히 욥은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친구들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욥의 결백은 결국 욥기 후반부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심으로 욥의 친구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증명해주십니다. 그리고 욥이 의문을 품었던 문제인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나에게 고통이 찾아왔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시지 않고 오히려 내가 말해준다한들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며 오로지 선한 길로 인도하는 자신을 신뢰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 말씀에 욥은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며 자신이 무지했음을 회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론 우리에게 욥처럼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 보응적인 측면의 고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때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고 까닭없는 고통을 받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욥처럼 “저에게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십니까?”라며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찾아왔는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은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르게 세우고 단단하게 만드시려는 선한 의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거나 가족을 잃고, 그릇 파편으로 몸을 긁어도 종기 때문에 생긴 가려움이 더 큰 고통을 겪고 이 모든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인 친구들이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거나 가족마저 사라진 정신적인 고립감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그 고난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욥의 생명을 보호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제가 모교회의 청년부 회장 임기가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한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제가 정말 아끼고 저랑 많이 친한 두 사람의 범죄로 인해 제가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좌절에 빠졌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갖가지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우울증 초기 증세까지 겪어 지옥과 같은 시간들을 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한 친구의 도움으로 나아졌지만 그때 저는 이유 모를 고통이 찾아온 것에 대해 마치 욥처럼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그들 때문에 제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라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질문하고 또 질문을 매순간마다 했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나보니 이 고통을 통해 저는 더 단단해졌고 고통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저에게 고통을 선사한 그들의 범죄를 미화하거나 미화할 수도 없지만 이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과거의 저와 같이 현재 이유 모를 고통 속에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붙잡아라. 기도해라.’라며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기 때문에 제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가 그 길이 선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길이 여러분에게 좋기 때문에 허락하셨다는 신뢰 안에 계시는 것이 정말 좋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신뢰 안에 있을 때 참 평안과 위로가 생긴다는 것을 제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인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하나 뿐인 아들인 우리의 구주께서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을 인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고통 가운데서 인내해야 하는 상황 속에 있지 않으셔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인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인내하셨습니다. 그분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참 평안과 위로입니다. 이유 모를 고통,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잘되길 바라시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옆에 우리의 고통을 위해 기도하고 같이 울고 슬퍼해줄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이유 모를 고통이 찾아와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그 고통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두고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유 모를 고통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의 연약함보다는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고통 받고 있는 지체가 있다면 욥의 세 친구들처럼 “니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 아니냐”며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 지체를 위하여 함께 울며 기도하는 우리 새순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