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6 금요기도회 : 시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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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 자리로 불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기도회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기도하면서 저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위로와 소망을 얻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기 전에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저희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셔서 말씀을 잘 듣고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말씀은 시편 4 편의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말씀은 시편 4 편의 말씀입니다. 시편에는 다양한 시들이 등장하는데요. 시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공감도 되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참 소중한 성경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은 표제를 봐서도 알 수 있지만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다윗이 지은 이 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고 호소하는 애가입니다. 또한 이 시는 저녁에 드린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8절에서의 모습이 저녁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시편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시인은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무고하게 의인을 공격하는 대적들로부터 자신의 무고함을 변호해 주실 하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며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시인은 도대체 어떤 고통을 받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요?
2절에서 시인은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라고 말합니다. 시인이 고통 당하는 이유는 바로 대적들이 자신의 명성을 훼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의 부당한 명예 훼손을 시인은 “어느 때까지”라고 물으면서 이 고난이 오래되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말은 “하나님, 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습니다.”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아무리 자신이 무죄하다고 대적들에게 변호를 해도 대적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생각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직 하나님만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수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시인은 대적들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3절부터 경고합니다. 3절에서 시인은 자신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경건한 자임을 나타냅니다. 바로 대적들이 괴롭히는 상대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이며 경건한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건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경건의 의미도 있겠지만 더 정확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건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어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대적들이 괴롭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자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다윗이 3절 하반절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 들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절과 연관이 있는데요. 1절에서 다윗은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라는 말로 시작하고 3절 끝에서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라며 끝을 맺고 있기 때문에 시인인 다윗은 확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1절과 3절의 사이인 2절에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명예 훼손을 하는 대적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자신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대적들을 대조시키면서 “명예를 훼손하는 너희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기에 나를 훼손하지 않고 보호하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 속에서 시인은 4절에서 대적들을 향해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범죄하지 말라. 너희가 밤에 침대에 누워 심중에 말하여 스스로 돌아보고, 잠잠하라”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해라”라고 이어서 충고를 하는데, 여기서 의의 제사는 1절에서 말한 ‘의의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의미합니다. 즉 맥락상 대적들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무고한 자의 명예를 그만 훼손시키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당하게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어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냥 불의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기도만 하고 그들을 가만히 냅둬도 이상하지 않음에도 시인은 그들이 불의한 행동을 그만두고 의의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이상 2-5절에서는 대적들을 향한 다윗의 경고와 충고였다면, 6-8절은 1절에서 말한 것처럼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시작하는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6절에서 시인은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 누구뇨”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누가 우리를 다시 회복시킬 것이가?”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대적들의 명예 훼손이라는 재앙 앞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재앙은 다윗이 속한 공동체에 닥친 재앙이기도 합니다. 대적들로 인한 재앙이 어찌됐든지 다윗 왕 때문에 왔기 때문에 공동체원들은 다윗을 왕에서 끌어내리고 새로운 왕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왕’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세우신 분이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은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끌어내리고 공동체까지 흔들려고 하는 불신앙적인 공격에 맞서서 다윗은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며 제사장적 축복에 근거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가 매주 주일 오전예배 강복선언 때마다 듣는 제사장 축복에는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비추시는 것이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신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지금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재앙을 거두시고 복을 베풀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베푸실 때 대적자들의 불신앙에서 신뢰로 바뀔 것이며, 다윗에 대한 오해도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윗은 6절에서 올린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하나님을 7절에서 신뢰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이 고백은 바로 6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선’, 즉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한 수확이 주는 기쁨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기쁨이 더 큰 기쁨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 그분보다 더 나은 ‘선’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 그 자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시인인 다윗은 마지막으로 8절에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현재 곤경에서 건지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것은 4-5절에서 대적자들에게 범죄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한 충고와도 연결 됩니다. 4절의 ‘잠 자리’는 8절의 ‘누워 잔다’와 연결되고 5절의 ‘의지하다’는 어근이 같은 8절의 ‘안전히’와 연결이 됩니다. 다윗은 현재 자신의 상황이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지만 평안히 누워 잔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은 안전하며, 안식을 누리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4편에서 드러난 다윗의 고백입니다. 대적자들에 의해 자신이 고통받고 있지만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분은 하나님이라는 확신 안에서 그분을 신뢰하며 안식을 누리는 것. 이것이 시편 4편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이라며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것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런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사탄은 마태복음 4장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십자가에 달리신 ‘이스라엘의 왕’을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의 명예를 훼손시키면서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범한 오늘 본문의 대적자들처럼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다윗의 왕위 회복,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의 의로움을 지켜주셨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도 사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수행하는 중요한 곳임을 알기에 교회 안과 밖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모함하고 공격합니다. 사탄은 여전히 왕이신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고자 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며 선언해주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를 의롭다고 변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모함과 공격의 상황에 처할지라도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고난 속에 계십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로움을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지금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호해주신다는 그분의 의로우심을 의지하여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동시에 다윗이 대적자들이 회개하길 바랐듯이 우리도 그들을 향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라면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며 살면서 우리와 우리 교회를 대적자들로부터 지켜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억울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지 않아도 대적자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다윗의 기도처럼 의로우신 하나님의 변호를 신뢰하며 기도합시다. 그분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을 신뢰하며 다른 그 어떤 기쁨보다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기쁨이 가장 크다는 것으로 안식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달라고 이 시간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